[뉴스 속의 한국사]
화신백화점 ‘에스카레터’ 타려고
1시간에 4000명 몰렸대요
[백화점의 탄생]
< 서울역사박물관 조선 최초 국내 자본으로 세워진 화신백화점 >
< 1920년대 후반 시계를 찬 모던걸들의 모습삽화. 조선일보 >
< 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에 있던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
위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
소설가 이상의 '날개' 마지막에서 주인공이 '날자꾸나'라는
독백을 했던 곳이 바로 이 백화점 옥상이에요.>
서울 종로에 있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는
지난 7월부터 ‘화신백화점: 사라진 종로의 랜드마크’
기획 전시가 열리고 있어요.
화신(和信)백화점은 1931년부터 50년 넘게 보신각
건너편 지금 종로타워 자리에 있었죠.
일제강점기 국내 자본으로 세운 한반도 최대
백화점으로 의미가 남다릅니다.
부도가 나고 건물과 땅이 한보주택으로 넘어간 뒤
1987년 헐려 사라졌지만 아직도 종로 한복판
‘랜드마크’였던 화신백화점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30만 인구 경성에 백화점이 5개
1930년대 경성(서울)은 ‘백화점의 시대’로 통할 만큼
백화점이 많았어요.
당시 경성 인구가 30만명이었는데 백화점이
5곳이나 있었죠.
일본인이 운영하던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
미쓰코시(三越), 조지야(丁子屋), 히라타(平田)와
한국인이 세운 화신백화점이었습니다.
미나카이는 지금의 밀리오레명동,
조지야는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명동점(옛 미도파),
히라타는 고려 대연각센터빌딩,
미쓰코시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백화점들은 주로 일본 포목점(옷감 파는 가게)
들이 돈을 많이 벌어 규모를 키운 것인데
다 명동과 그 주변에 몰려 있어 이 일대는
1920년대 말부터 ‘불야성(밤에도 대낮같이 환한 곳)
을 이루는 별천지’였다고 합니다.
당시 경성은 청계천을 기준으로 종로 일대인
‘북촌’과 충무로·명동 지역 ‘남촌’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원래는 북촌이 중심지였지만 1930년대엔 낙후한
곳으로 전락하면서 일본인들은 관공서나
은행·회사가 많이 있는 남촌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 때문에 일본계 백화점들도 남촌에 터를
잡았던 거죠.
여기에 ‘유일의 조선계 백화점’을 내세운 화신이
북촌(종로)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경쟁 구도가
생겼습니다.
화신은 평안도 용강 출신 기업가 박흥식이
1931년 세운 백화점입니다.
1932년 경쟁자이던 동아백화점까지 인수하면서
본격적인 확장을 시작했죠.
1932년 판촉 행사 1등 경품으로 8칸짜리 기와집을
내걸어 화제를 뿌렸고,
1937년엔 6층 규모 신관을 완성해 조선 최대
백화점이 됐습니다.
높이 65척(21m)에 이르는 대형 전광판에선
조선일보 등과 제휴한 그날 뉴스를 볼 수 있었고,
백화점 안 에레베타(엘리베이터)와
에스카레타(에스컬레이터)를 구경하려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조선 최초로 설치된 에스컬레이터를
타보겠다고 1시간에 4000명이 줄을 잇고,
엘리베이터 탈 때 고무신을 벗고 들어간
시골 할머니 사연까지 이어져 화신은 경성의
명물(名物)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36년 잡지 ‘삼천리’를 보면 백화점 1일 입장자
수가 나오는데 미쓰코시가 12만6000명,
미나카이 11만9000명,
화신 11만7000명이었습니다.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만든 소비문화
근대 문명을 조금씩 접하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백화점은 새로운 충격이었습니다.
만년필에서 축음기, 양산, 넥타이, 시계, 반지,
립스틱까지 온갖 물건이 다 모여있어 사람들을
새로운 소비문화의 세계로 이끌었던 겁니다.
조선일보에는
“경성 시민을 유혹하는 괴물...
근래의 요귀 ‘데파트먼트(department)’가 가지고 있는
분위기”
라고 백화점 상업 전쟁을 묘사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죠.
이 백화점이란 공간을 통해 최신 유행을 좇는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등장합니다.
휘황찬란한 백화점 쇼윈도를 보며
“이 진열장 앞을 오가기만 하면 유행균의 무서운
유혹에 황홀하여 걷기를 잊고 자기 유행 세계를
설계하려 했다”
“고향에 내려가는 학생들의 손에 미쓰코시나
조지야에서 산 화장품이 들려 있다”
“전차 안의 손잡이를 잡은 모던걸의 팔뚝에는
황금 시계와 보석 반지가 번쩍인다”
는 기사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삼천리’에 실린 ‘화신백화점에서 말숙한 신사
숙녀를 만들려면 얼마가 들까’ 글을 보면
‘양장 숙녀 한 분을 만들려면’
핸드백 48원(1원의 현재 가치 약 12만원),
립스틱 3원,
외투 80원 등 516원5전,
신사는 모자 15원,
영국제 양복 70원,
지팡이 18원, 손수건 1원 등 410원55전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화신백화점 옥상 화신식당도 ‘모던 보이와 걸’들의
사교장 등으로 유명했습니다.
양식 28종, 화식(和食·일본 전통 방식) 20여종,
음료 30여종을 제공했는데 메뉴표를 보면
신선로백반이 60전, 전골백반 40전,
비빔밥이 25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던보이’나 ‘모던걸’이 즐기는 백화점
소비문화는 일부의 사치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대부분 서민들은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렸고,
지식인과 지사들은
“나라 잃은 백성이 이렇게 백화점에서 흥청망청
돈을 쓰며 외국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은가”
라면서 이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통치에 저항했던 조선인 중 일부는 정작
일상생활에서는 일본을 통해 들어온 근대식
생활 방식에 적응했던 게 아니냐”
고 보는 견해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이상의 ‘날개’와 백화점 옥상]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1930년대 소설가 겸 시인으로 활동했던
이상(1910~1937)의 단편소설 ‘날개’(1936년)의
끝부분이에요.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내면을 예리하게 그린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은 사람에 따라 갈리는데,
주인공이 마지막 독백 후 투신자살을 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는 해피엔딩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날자꾸나’ 독백은 어디서 이뤄진
것이었을까요?
마지막 독백 조금 앞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몇 시간 후에 내가 미쓰코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지금 신세계 본점 건물인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이었던
것이죠.
실제로 이상이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만약 이런 화려한 곳에서 시대의 고뇌와 좌절을
겪었다면 그야말로 아이러니한 일이었겠죠.
경성 5대 백화점 중 유일하게 당시 건물 모습이
지금 남아 있는 곳입니다.
유석재 기자
[출처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