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면피와 능굴능신 처세의 차이
‘얼굴 면(面)’ 자는 사람의 얼굴과
그 윤곽을 나타내고 있는 상형문자입니다.
특히 사람의 얼굴 가운데에서도 눈을 두드러지게 표현한고 있습니다.
옛사람들 역시 요즘 우리들처럼 사람의 얼굴을 구성하고 있는
이목구비(耳目口鼻) 가운데서 ‘눈’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 가운데 ‘눈’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얼굴 생김새’를 뜻하는 한자어가 다름 아닌
‘면목(面目)’이라는 점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개 눈을 가리켜 ‘마음의 창’이라고 말합니다.
눈빛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면목은 단지 ‘얼굴 생김새’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면목은 체면(體面) 혹은 염치(廉恥)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체면이 깎이는 일을 하게 되면
‘면목이 없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을 때에도
면목이 없다고 하는 것을 보면,
‘면목’이란 한자어는 사람의 외모보다는 내면,
즉 자존심을 표현한다고 하겠습니다.
쇠로 만든 낯가죽이라는 뜻의 ‘철면피(鐵面皮)’ 역시
사람의 외양보다는 마음속에 부끄러움도 없고
염치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철면피’라는 말은 송나라의 손광헌이 지은
《북몽쇄언(北夢瑣言》에 나오는 말입니다.
왕광언이라는 사람은 학문에 재주가 있어 벼슬길에 올랐지만
출세를 위해 권세가를 찾아다니며 아첨하는 짓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는 다른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아첨을 일삼았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권세가가
왕광원을 채찍으로 때리려고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광원은 주변에 여러 사람이 있는데도
수치심과 자존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처럼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운 마음으로 매를 맞겠노라고
아첨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권세가가 왕광원의 등을 사정없이 때리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비위를 맞추며
아첨하는 말을 쉼없이 늘어놓았습니다.
이 때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짓을 당하고 창피하지도 않느냐면서 핀잔을 주자,
왕광원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말이 맞소.
하지만 권세가에게 잘 보여서 내가 손해 볼 것은 없잖소.”
이로 말미암아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왕광원의 얼굴 가죽은 무쇠를 열 장 겹쳐 놓은
철갑(鐵甲)처럼 두껍구나”라고 말했습니다.
<한정주, ‘인간도리 인간됨을 묻다’ 중에서>
철면피란 쇠로 만든 낯가죽이라는 뜻으로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운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고,
뻔뻔스런 사람을 가리켜 철면피(鐵面皮)라고도 하지만
강안(强顔)이라고도 합니다.
강안은 글자그대로 강한 얼굴,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스런 낯이지만
이 말이 생긴 연유가 재미있는데, 전국시대 제나라 무염 땅에
종리춘(鐘離春)이란 여자가 살았는데 천하의 박색이어서 40이 넘도록
시집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제선왕을 찾아가 후궁을 청소하는 일이라도 하면서
왕을 모시고 싶다고 아뢰자 제선왕과 함께 술을 마시던 대신들이
한꺼번에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중 한 대신이 가까스로 웃음을 참고 있다가
"그 여자 천하에 얼굴 두꺼운 사람이로군!(此天下强顔女子也)"
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정잡배 중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치심을 아예 내던진 철면피나 강안이 행세하고 다니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지만, 정상적인 조직과 단체 그리고 사회의 리더들이
철면피나 강안이 되어 유세(有勢)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관이고 허탈해지기 마련입니다.
유비는 당대의 라이벌이던 조조나 손권과 비교해
가진 자원도 적고 출발도 늦었기 때문에 지명도뿐만 아니라
세력이나 특출한 능력이 없었지만
어떻게 삼국의 당당한 주인이 되었을까요?
항상 자신보다 나은 실력자에 기대어 성장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자신을 위협했던 세력과도 타협해
그들의 힘으로 재기의 기반을 마련했던 요인은 바로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굽히고 펼 줄 아는’
능굴능신(能屈能伸)의 능력에 있었습니다.
유비가 처세적 기교만 가졌다면
절대 역사적인 인물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그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부하들의 마음을 얻어낼 줄 아는 지도자였습니다.
언뜻 보면 유비의 삶은 실패의 연속으로 계속 전쟁에 지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조조의 눈치를 보며, 누군가와 연합하는 등등.... 하지만
실제 그는 승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만약 그가 굽히기를 거부하고 계속 맞섰다면
오늘날 유비의 이름이 남아 있을까요?
굽힐 때 굽힌다는 것은
진정으로 미래를 위해 현재의 굴욕을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내가 비록 당신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언젠가 힘을 길러 당신을 무릎 꿇게 하겠다는 강한 마음의 표현이고,
순간의 성질을 이기지 못해 부러지기 보다는
후일을 기약하고 도모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며,
강한 사람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오위핑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유비가
'능굴능신'의 귀재임을 증명하는 사례로
도원결의를 지키기 위해 신의로 상대를 품고,
최고의 지략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를 하는 등
'기꺼이 자신을 낮추어 상대를 품는 유비식 처세'를
능굴능신 처세의 진수로 평가했습니다.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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