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야말로 칙사대접! 중국 사신(칙사)들이 오가던 길목에서, 떠오르는 상념들
2025년 1월 서울학교는 <한양의 사신맞이길>
2025년 1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7강(제7기 제3강)으로 중국을 ‘큰 나라로 모신’ 조선이 중국 사신을 극진히 맞이하며 치러진 의식과 베푼 접대의 내용과 그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갑니다. 비록 역사적 장소의 대부분이 없어지고 표지석과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는데 계묘년 새해를 맞이하여 ‘작은 나라’ 조선의 사신맞이 실상을 살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경복궁 경회루는 태종대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차츰 중국 사신 접대는 물론 왕실 잔치, 군신 간의 회합 등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국가유산청
서울학교 제107강은 2025년 1월 12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홍제역 2번출구 지하 역구내에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현사터-홍제원터-사신당터-무악재-모화관터/영은문/서지터-경기감영터-돈의문터-태평관터-남별궁터-광화문월대-광화문-근정전-경회루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함께 합니다.
▲2025년 1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양의 사신맞이길>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천자의 명령인 조칙을 가져온 칙사의 대접에 소홀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조칙(詔勑)은 천자가 내리는 명령, 또는 그 명령을 적은 문서입니다. 조(詔)는 ‘비춘다’는 뜻으로 우매하여 일의 마땅함을 알지 못하여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밝혀 보여 주기 위해 천하에 반포하는 것이고, 칙(勅)은 ‘관리가 태만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명령’입니다. 제후의 나라에서 조칙의 봉영 의식은 조정에서 문무백관이 도열하여 거행되었습니다. 또한 조칙을 지니고 온 사신은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맞이하고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의 향응을 베풀고 돌아갈 때는 많은 품목의 선물을 챙겨줍니다. 그야말로 ‘칙사대접’입니다.
조선이 사대한 중국은 건국 초기에는 명나라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청나라였는데 재조지은의 명나라와 한낱 오랑캐로만 여겼던 청나라에 대한 사신맞이의 내용은 양과 질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명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첫째 황제나 황태자의 즉위, 책봉, 부고를 전하고, 둘째 중국과의 외교문서인 예부자문(禮部咨文)을 전달하고, 셋째 조선 국왕이나 왕세자에 대한 책봉 의식을 주관하고, 넷째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명의 사신은 유독 환관이 많았는데 이들은 탐욕스럽고 제멋대로 굴었으며 또 갖가지 무리한 요구를 하여 조선 조정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사신단이 한 차례 쓸고 가면 국고는 거덜 났고 특히 사신단이 쓸고 지나가는 평안도 일대는 접대비 확충을 위해 세금을 중앙에 내지 않고 자체적으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청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초기에는 조선이 변심할까 견제하려는 목적에서였고, 청이 중원 대륙을 장악하고 내부의 반청 세력을 제거한 뒤부터는 책봉이나 부고와 같은 의례적인 것과 조선인이 청의 국경을 넘는 월경 문제 해결과 국경선 확정을 위해 파견하였습니다.
청도 빈번하게 사신들이 조선에 왔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과거 명나라 사신들과는 달리 청 사신에게는 접대가 많이 소박해졌기 때문에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접대가 소박했던 이유는 먼저 조선에서 청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오랑캐였고, 이미 망한 명에 대한 일편단심이 여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명의 퇴폐한 황실에 비해 청의 군주들은 상당히 절제할 줄 알았고 이는 관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은 조선 사신으로 반드시 만주인을 임명했는데 과거 명 사신들의 만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립문(오른쪽) 옆에 남아 있는 영은문(迎恩門) 주초석(주춧돌).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인데 청에 대한 사대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철거되고 주초석만 남아 있다.Ⓒ국가유산청
사신 맞이에 원접사, 반송사 그리고 선위사를 임명하였습니다.
원접사(遠接使)는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관직 또는 그 관원으로,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반송사(伴送使)라 개칭하여 다시 의주까지 환송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여 중국에 가는 사신뿐 아니라,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의 접대에도 정성을 들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중국 사신 접대 장소는 한양 밖과 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자는 원접사 또는 접반사가, 후자는 영접도감의 관반이 지휘하였습니다.
원접사는 국경에서 처음으로 칙사를 맞이하는 접대 관원으로서, 체류 기간이나 돌아가는 여정에도 간여하므로 신중하게 선발했습니다. 태종대 이후 조선말까지 정2품 이상으로 임명되었는데, 병자호란 이후의 대청 관계에서는 대명 관계에서보다 덜 중시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태조 대까지는 접반사로 부르다가, 태종 초에 원접사로 바꾸었고, 점차 칙서를 가져오는 칙사는 정2품 이상의 원접사가, 그 밖의 사신은 종2품의 접반사가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중국의 공식문서인 패문(牌文)이나,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또는 풍문에 의해 칙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당일로 원접사가 선발되어 종사관 등 수행원을 거느리고 국경인 의주로 파견되어 칙사를 맞이하였습니다. 이후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에서 각 지역 선위사, 영위사와 지방관들을 지휘하며 사신 일행을 대접하며 호송하였고 사신이 한양에 머무는 동안 각종 연회와 행사에 사신 일행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대부분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까지 반송사로 전송하였습니다. 이때 원접사는 사신에 대한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고, 한편으로 사신과 조선 정부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환관 출신 사신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풍채와 위엄을 갖춘 인물을 임명하였으나, 문관 출신 사신이 주로 왔던 성종 대 이후에는 사신과의 문학적 교류가 중시되어 대제학 등 문장력이 있는 원접사를 파견하였고, 수행원도 시문을 잘 짓는 관원을 스스로 뽑아가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연이은 사신과 그에 대한 접대 행렬로 국고에 부담이 가고 백성들이 곤궁에 처하자, 원접사 수행원을 줄이고 폐단을 방지하려는 조처가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정의 반청 감정으로 인하여 원접사는 점차 관직에서 물러나 있거나 왕에게 미움을 받는 관원들이 임명되기 시작하였고 사신을 접대하는 각종 연회도 정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항 이후인 1890년(고종 27)까지도 원접사가 계속 임명되었습니다.
선위사(宣慰使)는 조선 시대에 여러 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였을 때 그 노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파견한 관리로 중국 사신에 대해서는 원접사와 함께 의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부의 5개 처에 선위사를 파견하였고, 일본 및 유구 사신에 대해서는 선위사만을 보내어 영송 하였습니다. 중국 사신에 대한 선위사는 2품 이상의 조관을, 요동 도사의 선위사와 일본과 유구 사신의 선위사는 정3품 이상의 조관을 임명하였습니다.
▲독립관(가운데)과 독립문의 옛 모습.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축하고 독립문을 새로 세웠으며 영은문은 훼철되고 주초석만 남았다.Ⓒ국립중앙박물관
▲원관사찰의 하나였던 무악재 사현사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사신에게 베푸는 향응은 종류도 많습니다.
중국 사신이 체류하는 동안 먼저 영접도감(迎接都監)을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도착 축하연인 하마연(下馬宴), 도착 다음 날까지 1박 2일간 베푸는 익일연(翌日宴), 왕이 대전에서 직접 베푸는 청연(請宴),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위연(慰宴), 사신이 떠나는 날이 정해진 후 베푸는 상마연(上馬宴), 사신이 떠날 때 베푸는 전별연(餞別宴) 등이 있었습니다.
조선이 이처럼 사신들에 대하여 저자세를 이어간 것은 고질적인 사대주의 탓도 있지만, 중국에 아쉬운 소리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전기 195년간은 창업 군주 이성계를 고려 시대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왜곡한 <대명회통> 기록을 고치려고 명나라에 끌려다녔으며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처럼 정통성에 자신이 없는 왕들도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절차
①사신이 온다는 통보가 오면 먼저 길부터 닦아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도로 사정이 상당히 열악했기 때문에 사신이 올 때마다 도로를 정비해야 했는데 이러는 과정에 백성의 경작지를 많이 훼손하였습니다.
②사신의 원활한 통행과 접대를 위해 칙사 영접 전담 기구인 영접도감을 설치했습니다.
③사신이 국경을 넘으면 의주까지 원접사가 파견되어 그들을 맞아 서울까지 인도하였습니다.
④사신이 지나는 안주, 평양, 황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 선위사를 보냈으며 평양에서는 단군묘, 기자묘, 동명왕묘에 참배도 하였습니다.
⑤사신은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⑥무악재를 넘으면 왕이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모화루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는데 이때 사신이 조칙을 대청에 내놓으면 길복을 갖춰 입은 왕이 대청 앞의 행각에 올라 사배례의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⑦사신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환영하는 뜻으로 색실, 색천, 색종이를 매달았습니다.
⑧왕이 사신을 영접하여 궁궐에 이르면 사신이 먼저 입궁하고 조선왕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⑨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조선왕에게 전하면 왕은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예[叩頭禮]를 행하였고 사신이 칙서를 낭독하면 왕은 꿇어앉아 듣습니다.
⑩의식이 끝나면 태평관으로 자리를 옮겨 다례를 행하고 환영 만찬인 하마연을 왕과 사신이 동서로 나눠 앉아 즐겼는데 익일연으로 이튿날까지 계속됐습니다.
⑪사신이 머무는 동안 재상이나 승지들이 매일 태평관으로 문안 인사를 가고 수시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⑫사신이 떠나기 전날 왕이 경회루에서 다례를 행한 후 태평관에서 전별연을 베풀었습니다.
⑬떠나는 당일 왕은 모화관까지 나가 전송하고 영의정 등 재상들은 벽제역까지 전송하였습니다.
⑭특히 왕은 남면(南面)하는 게 원칙이지만 중국 사신을 만났을 때는 동쪽을 보고 맞절을 했습니다. 조선의 왕이 남면으로 대하지 못한 대상은 고종황제 때의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 하면 중국 사신뿐이었습니다.
역원(驛院)은 주요 역에 설치하였던 여관 시설이며 역관, 역참, 우역으로 불렸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 지방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공무나 교역 및 여행에 나선 사람들이 증가함으로써 역원제의 기능이 커졌고,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525개의 역원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국에 540여 개의 역을 대, 중, 소로 등급을 정하여 간선, 지선에 설치하였습니다.
역(驛)은 대략 30리(12㎞) 간격으로 분포하였으나 지형 조건에 따라 평지에서는 역의 위치 간격이 조금 길고 험한 산지에서는 짧았습니다.
원(院)은 대략 100리(40km) 간격으로 각지의 주요 도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역과 함께 설치하여 관원과 일반 여행객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관이었으며, 임금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피난할 때 이용하고,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 숙식이나 마필 교체와 민심 파악과 수령들에 관한 내사 자료를 얻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기존 사원이나 역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주택, 누정을 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점차 본래의 기능을 잃고 대부분 주막이나 주점 등으로 전락하거나 사라졌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은 전국에 1,310개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관사찰(院館寺刹)은 고려 초에 정비된 역로(驛路) 망(網)이 전령, 사신 영송 등 공적 역할이 중심이어서 여행자들에게 실질적 여행 편의를 제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아, 국가의 부담을 줄이면서 여행자의 편의를 돕기 위해 불교계의 재력과 인력을 동원하여 객관을 갖춘 원관사찰을 건립하고 운영하게 하였습니다.
원관은 역과 역 사이, 역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곳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도로변, 길의 교차로, 수계가 만나는 곳에 주로 조성되어 상인, 여행자 등의 편의와 안전을 보장하였습니다.
원관은 고려 현종 대(1009~1031년)에 처음 출현하여 13세기 초까지 활발히 운영되다 몽골과의 항전으로 육상교통이 쇠퇴하는 1230년대 이후 축소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국의 주요 간선도로에 다수의 원관이 생겨났지만, 이전의 원관 사찰과 달리 불사의 기능이 없는 순수한 객관 성격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원관사찰로는 천안 광연통화원, 무악재 사현사, 파주 혜음원, 도봉산 도봉원, 충주 미륵대원, 단양 용부원, 안동 제비원 등이 있었습니다.
사현사(沙峴寺)는 1045년(정종 11) 고려의 수도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대로의 삼각산 사현 고갯길에 객관과 함께 혜소국사 정현이 창건하였습니다. 혜소국사는 이후 왕사,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안성 칠장사에서 입적하자 1060년(문종 14)에 그곳에 혜소국사비를 세웠습니다.
사현사에는 두 가지 귀중한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현사 오층석탑(보물)입니다. 사현사 오층석탑은 사현사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인데, 1970년 경복궁 고궁박물관 옆 뜰에 보존하다가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 정원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석조여래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입니다. 본래는 사현사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또 그곳에서 쫓겨가 진관외동의 한 민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과거 홍제천은 모래가 깔린 곳이라, 이 위에 지어진 사현사에 땅이 꺼져 내려앉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오층석탑 역시 밑단이 모래에 묻히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때 1972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홍제동의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사현사 오층석탑은 국립고궁박물관 뜰로 옮겨갔습니다. 반면에, 사현사 석조여래좌상은 홍제동 105-3번지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옮겨온 자리에는 1994년부터 인왕산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으로 정해져 있어 석조여래좌상은 다시 다른 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은평구 진관외동입니다. 나름 서울시 유형문화재이지만, 모시고 있는 곳의 절의 이름조차 없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사현사는 정식 절집의 형태로서 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현재는 민간의 집에서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야말로 칙사대접! 중국 사신(칙사)들이 오가던 길목에서, 떠오르는 상념들
2025년 1월 서울학교는 <한양의 사신맞이길>
2025년 1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7강(제7기 제3강)으로 중국을 ‘큰 나라로 모신’ 조선이 중국 사신을 극진히 맞이하며 치러진 의식과 베푼 접대의 내용과 그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갑니다. 비록 역사적 장소의 대부분이 없어지고 표지석과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는데 계묘년 새해를 맞이하여 ‘작은 나라’ 조선의 사신맞이 실상을 살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경복궁 경회루는 태종대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차츰 중국 사신 접대는 물론 왕실 잔치, 군신 간의 회합 등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국가유산청
서울학교 제107강은 2025년 1월 12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홍제역 2번출구 지하 역구내에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현사터-홍제원터-사신당터-무악재-모화관터/영은문/서지터-경기감영터-돈의문터-태평관터-남별궁터-광화문월대-광화문-근정전-경회루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함께 합니다.
▲2025년 1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양의 사신맞이길>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천자의 명령인 조칙을 가져온 칙사의 대접에 소홀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조칙(詔勑)은 천자가 내리는 명령, 또는 그 명령을 적은 문서입니다. 조(詔)는 ‘비춘다’는 뜻으로 우매하여 일의 마땅함을 알지 못하여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밝혀 보여 주기 위해 천하에 반포하는 것이고, 칙(勅)은 ‘관리가 태만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명령’입니다. 제후의 나라에서 조칙의 봉영 의식은 조정에서 문무백관이 도열하여 거행되었습니다. 또한 조칙을 지니고 온 사신은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맞이하고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의 향응을 베풀고 돌아갈 때는 많은 품목의 선물을 챙겨줍니다. 그야말로 ‘칙사대접’입니다.
조선이 사대한 중국은 건국 초기에는 명나라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청나라였는데 재조지은의 명나라와 한낱 오랑캐로만 여겼던 청나라에 대한 사신맞이의 내용은 양과 질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명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첫째 황제나 황태자의 즉위, 책봉, 부고를 전하고, 둘째 중국과의 외교문서인 예부자문(禮部咨文)을 전달하고, 셋째 조선 국왕이나 왕세자에 대한 책봉 의식을 주관하고, 넷째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명의 사신은 유독 환관이 많았는데 이들은 탐욕스럽고 제멋대로 굴었으며 또 갖가지 무리한 요구를 하여 조선 조정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사신단이 한 차례 쓸고 가면 국고는 거덜 났고 특히 사신단이 쓸고 지나가는 평안도 일대는 접대비 확충을 위해 세금을 중앙에 내지 않고 자체적으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청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초기에는 조선이 변심할까 견제하려는 목적에서였고, 청이 중원 대륙을 장악하고 내부의 반청 세력을 제거한 뒤부터는 책봉이나 부고와 같은 의례적인 것과 조선인이 청의 국경을 넘는 월경 문제 해결과 국경선 확정을 위해 파견하였습니다.
청도 빈번하게 사신들이 조선에 왔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과거 명나라 사신들과는 달리 청 사신에게는 접대가 많이 소박해졌기 때문에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접대가 소박했던 이유는 먼저 조선에서 청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오랑캐였고, 이미 망한 명에 대한 일편단심이 여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명의 퇴폐한 황실에 비해 청의 군주들은 상당히 절제할 줄 알았고 이는 관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은 조선 사신으로 반드시 만주인을 임명했는데 과거 명 사신들의 만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립문(오른쪽) 옆에 남아 있는 영은문(迎恩門) 주초석(주춧돌).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인데 청에 대한 사대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철거되고 주초석만 남아 있다.Ⓒ국가유산청
사신 맞이에 원접사, 반송사 그리고 선위사를 임명하였습니다.
원접사(遠接使)는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관직 또는 그 관원으로,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반송사(伴送使)라 개칭하여 다시 의주까지 환송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여 중국에 가는 사신뿐 아니라,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의 접대에도 정성을 들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중국 사신 접대 장소는 한양 밖과 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자는 원접사 또는 접반사가, 후자는 영접도감의 관반이 지휘하였습니다.
원접사는 국경에서 처음으로 칙사를 맞이하는 접대 관원으로서, 체류 기간이나 돌아가는 여정에도 간여하므로 신중하게 선발했습니다. 태종대 이후 조선말까지 정2품 이상으로 임명되었는데, 병자호란 이후의 대청 관계에서는 대명 관계에서보다 덜 중시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태조 대까지는 접반사로 부르다가, 태종 초에 원접사로 바꾸었고, 점차 칙서를 가져오는 칙사는 정2품 이상의 원접사가, 그 밖의 사신은 종2품의 접반사가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중국의 공식문서인 패문(牌文)이나,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또는 풍문에 의해 칙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당일로 원접사가 선발되어 종사관 등 수행원을 거느리고 국경인 의주로 파견되어 칙사를 맞이하였습니다. 이후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에서 각 지역 선위사, 영위사와 지방관들을 지휘하며 사신 일행을 대접하며 호송하였고 사신이 한양에 머무는 동안 각종 연회와 행사에 사신 일행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대부분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까지 반송사로 전송하였습니다. 이때 원접사는 사신에 대한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고, 한편으로 사신과 조선 정부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환관 출신 사신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풍채와 위엄을 갖춘 인물을 임명하였으나, 문관 출신 사신이 주로 왔던 성종 대 이후에는 사신과의 문학적 교류가 중시되어 대제학 등 문장력이 있는 원접사를 파견하였고, 수행원도 시문을 잘 짓는 관원을 스스로 뽑아가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연이은 사신과 그에 대한 접대 행렬로 국고에 부담이 가고 백성들이 곤궁에 처하자, 원접사 수행원을 줄이고 폐단을 방지하려는 조처가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정의 반청 감정으로 인하여 원접사는 점차 관직에서 물러나 있거나 왕에게 미움을 받는 관원들이 임명되기 시작하였고 사신을 접대하는 각종 연회도 정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항 이후인 1890년(고종 27)까지도 원접사가 계속 임명되었습니다.
선위사(宣慰使)는 조선 시대에 여러 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였을 때 그 노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파견한 관리로 중국 사신에 대해서는 원접사와 함께 의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부의 5개 처에 선위사를 파견하였고, 일본 및 유구 사신에 대해서는 선위사만을 보내어 영송 하였습니다. 중국 사신에 대한 선위사는 2품 이상의 조관을, 요동 도사의 선위사와 일본과 유구 사신의 선위사는 정3품 이상의 조관을 임명하였습니다.
▲독립관(가운데)과 독립문의 옛 모습.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축하고 독립문을 새로 세웠으며 영은문은 훼철되고 주초석만 남았다.Ⓒ국립중앙박물관
▲원관사찰의 하나였던 무악재 사현사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사신에게 베푸는 향응은 종류도 많습니다.
중국 사신이 체류하는 동안 먼저 영접도감(迎接都監)을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도착 축하연인 하마연(下馬宴), 도착 다음 날까지 1박 2일간 베푸는 익일연(翌日宴), 왕이 대전에서 직접 베푸는 청연(請宴),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위연(慰宴), 사신이 떠나는 날이 정해진 후 베푸는 상마연(上馬宴), 사신이 떠날 때 베푸는 전별연(餞別宴) 등이 있었습니다.
조선이 이처럼 사신들에 대하여 저자세를 이어간 것은 고질적인 사대주의 탓도 있지만, 중국에 아쉬운 소리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전기 195년간은 창업 군주 이성계를 고려 시대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왜곡한 <대명회통> 기록을 고치려고 명나라에 끌려다녔으며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처럼 정통성에 자신이 없는 왕들도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절차
①사신이 온다는 통보가 오면 먼저 길부터 닦아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도로 사정이 상당히 열악했기 때문에 사신이 올 때마다 도로를 정비해야 했는데 이러는 과정에 백성의 경작지를 많이 훼손하였습니다.
②사신의 원활한 통행과 접대를 위해 칙사 영접 전담 기구인 영접도감을 설치했습니다.
③사신이 국경을 넘으면 의주까지 원접사가 파견되어 그들을 맞아 서울까지 인도하였습니다.
④사신이 지나는 안주, 평양, 황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 선위사를 보냈으며 평양에서는 단군묘, 기자묘, 동명왕묘에 참배도 하였습니다.
⑤사신은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⑥무악재를 넘으면 왕이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모화루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는데 이때 사신이 조칙을 대청에 내놓으면 길복을 갖춰 입은 왕이 대청 앞의 행각에 올라 사배례의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⑦사신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환영하는 뜻으로 색실, 색천, 색종이를 매달았습니다.
⑧왕이 사신을 영접하여 궁궐에 이르면 사신이 먼저 입궁하고 조선왕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⑨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조선왕에게 전하면 왕은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예[叩頭禮]를 행하였고 사신이 칙서를 낭독하면 왕은 꿇어앉아 듣습니다.
⑩의식이 끝나면 태평관으로 자리를 옮겨 다례를 행하고 환영 만찬인 하마연을 왕과 사신이 동서로 나눠 앉아 즐겼는데 익일연으로 이튿날까지 계속됐습니다.
⑪사신이 머무는 동안 재상이나 승지들이 매일 태평관으로 문안 인사를 가고 수시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⑫사신이 떠나기 전날 왕이 경회루에서 다례를 행한 후 태평관에서 전별연을 베풀었습니다.
⑬떠나는 당일 왕은 모화관까지 나가 전송하고 영의정 등 재상들은 벽제역까지 전송하였습니다.
⑭특히 왕은 남면(南面)하는 게 원칙이지만 중국 사신을 만났을 때는 동쪽을 보고 맞절을 했습니다. 조선의 왕이 남면으로 대하지 못한 대상은 고종황제 때의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 하면 중국 사신뿐이었습니다.
역원(驛院)은 주요 역에 설치하였던 여관 시설이며 역관, 역참, 우역으로 불렸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 지방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공무나 교역 및 여행에 나선 사람들이 증가함으로써 역원제의 기능이 커졌고,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525개의 역원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국에 540여 개의 역을 대, 중, 소로 등급을 정하여 간선, 지선에 설치하였습니다.
역(驛)은 대략 30리(12㎞) 간격으로 분포하였으나 지형 조건에 따라 평지에서는 역의 위치 간격이 조금 길고 험한 산지에서는 짧았습니다.
원(院)은 대략 100리(40km) 간격으로 각지의 주요 도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역과 함께 설치하여 관원과 일반 여행객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관이었으며, 임금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피난할 때 이용하고,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 숙식이나 마필 교체와 민심 파악과 수령들에 관한 내사 자료를 얻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기존 사원이나 역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주택, 누정을 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점차 본래의 기능을 잃고 대부분 주막이나 주점 등으로 전락하거나 사라졌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은 전국에 1,310개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관사찰(院館寺刹)은 고려 초에 정비된 역로(驛路) 망(網)이 전령, 사신 영송 등 공적 역할이 중심이어서 여행자들에게 실질적 여행 편의를 제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아, 국가의 부담을 줄이면서 여행자의 편의를 돕기 위해 불교계의 재력과 인력을 동원하여 객관을 갖춘 원관사찰을 건립하고 운영하게 하였습니다.
원관은 역과 역 사이, 역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곳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도로변, 길의 교차로, 수계가 만나는 곳에 주로 조성되어 상인, 여행자 등의 편의와 안전을 보장하였습니다.
원관은 고려 현종 대(1009~1031년)에 처음 출현하여 13세기 초까지 활발히 운영되다 몽골과의 항전으로 육상교통이 쇠퇴하는 1230년대 이후 축소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국의 주요 간선도로에 다수의 원관이 생겨났지만, 이전의 원관 사찰과 달리 불사의 기능이 없는 순수한 객관 성격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원관사찰로는 천안 광연통화원, 무악재 사현사, 파주 혜음원, 도봉산 도봉원, 충주 미륵대원, 단양 용부원, 안동 제비원 등이 있었습니다.
사현사(沙峴寺)는 1045년(정종 11) 고려의 수도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대로의 삼각산 사현 고갯길에 객관과 함께 혜소국사 정현이 창건하였습니다. 혜소국사는 이후 왕사,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안성 칠장사에서 입적하자 1060년(문종 14)에 그곳에 혜소국사비를 세웠습니다.
사현사에는 두 가지 귀중한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현사 오층석탑(보물)입니다. 사현사 오층석탑은 사현사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인데, 1970년 경복궁 고궁박물관 옆 뜰에 보존하다가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 정원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석조여래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입니다. 본래는 사현사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또 그곳에서 쫓겨가 진관외동의 한 민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과거 홍제천은 모래가 깔린 곳이라, 이 위에 지어진 사현사에 땅이 꺼져 내려앉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오층석탑 역시 밑단이 모래에 묻히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때 1972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홍제동의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사현사 오층석탑은 국립고궁박물관 뜰로 옮겨갔습니다. 반면에, 사현사 석조여래좌상은 홍제동 105-3번지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옮겨온 자리에는 1994년부터 인왕산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으로 정해져 있어 석조여래좌상은 다시 다른 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은평구 진관외동입니다. 나름 서울시 유형문화재이지만, 모시고 있는 곳의 절의 이름조차 없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사현사는 정식 절집의 형태로서 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현재는 민간의 집에서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야말로 칙사대접! 중국 사신(칙사)들이 오가던 길목에서, 떠오르는 상념들
2025년 1월 서울학교는 <한양의 사신맞이길>
2025년 1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7강(제7기 제3강)으로 중국을 ‘큰 나라로 모신’ 조선이 중국 사신을 극진히 맞이하며 치러진 의식과 베푼 접대의 내용과 그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갑니다. 비록 역사적 장소의 대부분이 없어지고 표지석과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는데 계묘년 새해를 맞이하여 ‘작은 나라’ 조선의 사신맞이 실상을 살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경복궁 경회루는 태종대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차츰 중국 사신 접대는 물론 왕실 잔치, 군신 간의 회합 등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국가유산청
서울학교 제107강은 2025년 1월 12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홍제역 2번출구 지하 역구내에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현사터-홍제원터-사신당터-무악재-모화관터/영은문/서지터-경기감영터-돈의문터-태평관터-남별궁터-광화문월대-광화문-근정전-경회루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함께 합니다.
▲2025년 1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양의 사신맞이길>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천자의 명령인 조칙을 가져온 칙사의 대접에 소홀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조칙(詔勑)은 천자가 내리는 명령, 또는 그 명령을 적은 문서입니다. 조(詔)는 ‘비춘다’는 뜻으로 우매하여 일의 마땅함을 알지 못하여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밝혀 보여 주기 위해 천하에 반포하는 것이고, 칙(勅)은 ‘관리가 태만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명령’입니다. 제후의 나라에서 조칙의 봉영 의식은 조정에서 문무백관이 도열하여 거행되었습니다. 또한 조칙을 지니고 온 사신은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맞이하고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의 향응을 베풀고 돌아갈 때는 많은 품목의 선물을 챙겨줍니다. 그야말로 ‘칙사대접’입니다.
조선이 사대한 중국은 건국 초기에는 명나라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청나라였는데 재조지은의 명나라와 한낱 오랑캐로만 여겼던 청나라에 대한 사신맞이의 내용은 양과 질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명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첫째 황제나 황태자의 즉위, 책봉, 부고를 전하고, 둘째 중국과의 외교문서인 예부자문(禮部咨文)을 전달하고, 셋째 조선 국왕이나 왕세자에 대한 책봉 의식을 주관하고, 넷째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명의 사신은 유독 환관이 많았는데 이들은 탐욕스럽고 제멋대로 굴었으며 또 갖가지 무리한 요구를 하여 조선 조정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사신단이 한 차례 쓸고 가면 국고는 거덜 났고 특히 사신단이 쓸고 지나가는 평안도 일대는 접대비 확충을 위해 세금을 중앙에 내지 않고 자체적으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청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초기에는 조선이 변심할까 견제하려는 목적에서였고, 청이 중원 대륙을 장악하고 내부의 반청 세력을 제거한 뒤부터는 책봉이나 부고와 같은 의례적인 것과 조선인이 청의 국경을 넘는 월경 문제 해결과 국경선 확정을 위해 파견하였습니다.
청도 빈번하게 사신들이 조선에 왔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과거 명나라 사신들과는 달리 청 사신에게는 접대가 많이 소박해졌기 때문에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접대가 소박했던 이유는 먼저 조선에서 청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오랑캐였고, 이미 망한 명에 대한 일편단심이 여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명의 퇴폐한 황실에 비해 청의 군주들은 상당히 절제할 줄 알았고 이는 관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은 조선 사신으로 반드시 만주인을 임명했는데 과거 명 사신들의 만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립문(오른쪽) 옆에 남아 있는 영은문(迎恩門) 주초석(주춧돌).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인데 청에 대한 사대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철거되고 주초석만 남아 있다.Ⓒ국가유산청
사신 맞이에 원접사, 반송사 그리고 선위사를 임명하였습니다.
원접사(遠接使)는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관직 또는 그 관원으로,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반송사(伴送使)라 개칭하여 다시 의주까지 환송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여 중국에 가는 사신뿐 아니라,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의 접대에도 정성을 들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중국 사신 접대 장소는 한양 밖과 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자는 원접사 또는 접반사가, 후자는 영접도감의 관반이 지휘하였습니다.
원접사는 국경에서 처음으로 칙사를 맞이하는 접대 관원으로서, 체류 기간이나 돌아가는 여정에도 간여하므로 신중하게 선발했습니다. 태종대 이후 조선말까지 정2품 이상으로 임명되었는데, 병자호란 이후의 대청 관계에서는 대명 관계에서보다 덜 중시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태조 대까지는 접반사로 부르다가, 태종 초에 원접사로 바꾸었고, 점차 칙서를 가져오는 칙사는 정2품 이상의 원접사가, 그 밖의 사신은 종2품의 접반사가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중국의 공식문서인 패문(牌文)이나,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또는 풍문에 의해 칙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당일로 원접사가 선발되어 종사관 등 수행원을 거느리고 국경인 의주로 파견되어 칙사를 맞이하였습니다. 이후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에서 각 지역 선위사, 영위사와 지방관들을 지휘하며 사신 일행을 대접하며 호송하였고 사신이 한양에 머무는 동안 각종 연회와 행사에 사신 일행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대부분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까지 반송사로 전송하였습니다. 이때 원접사는 사신에 대한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고, 한편으로 사신과 조선 정부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환관 출신 사신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풍채와 위엄을 갖춘 인물을 임명하였으나, 문관 출신 사신이 주로 왔던 성종 대 이후에는 사신과의 문학적 교류가 중시되어 대제학 등 문장력이 있는 원접사를 파견하였고, 수행원도 시문을 잘 짓는 관원을 스스로 뽑아가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연이은 사신과 그에 대한 접대 행렬로 국고에 부담이 가고 백성들이 곤궁에 처하자, 원접사 수행원을 줄이고 폐단을 방지하려는 조처가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정의 반청 감정으로 인하여 원접사는 점차 관직에서 물러나 있거나 왕에게 미움을 받는 관원들이 임명되기 시작하였고 사신을 접대하는 각종 연회도 정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항 이후인 1890년(고종 27)까지도 원접사가 계속 임명되었습니다.
선위사(宣慰使)는 조선 시대에 여러 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였을 때 그 노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파견한 관리로 중국 사신에 대해서는 원접사와 함께 의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부의 5개 처에 선위사를 파견하였고, 일본 및 유구 사신에 대해서는 선위사만을 보내어 영송 하였습니다. 중국 사신에 대한 선위사는 2품 이상의 조관을, 요동 도사의 선위사와 일본과 유구 사신의 선위사는 정3품 이상의 조관을 임명하였습니다.
▲독립관(가운데)과 독립문의 옛 모습.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축하고 독립문을 새로 세웠으며 영은문은 훼철되고 주초석만 남았다.Ⓒ국립중앙박물관
▲원관사찰의 하나였던 무악재 사현사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사신에게 베푸는 향응은 종류도 많습니다.
중국 사신이 체류하는 동안 먼저 영접도감(迎接都監)을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도착 축하연인 하마연(下馬宴), 도착 다음 날까지 1박 2일간 베푸는 익일연(翌日宴), 왕이 대전에서 직접 베푸는 청연(請宴),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위연(慰宴), 사신이 떠나는 날이 정해진 후 베푸는 상마연(上馬宴), 사신이 떠날 때 베푸는 전별연(餞別宴) 등이 있었습니다.
조선이 이처럼 사신들에 대하여 저자세를 이어간 것은 고질적인 사대주의 탓도 있지만, 중국에 아쉬운 소리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전기 195년간은 창업 군주 이성계를 고려 시대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왜곡한 <대명회통> 기록을 고치려고 명나라에 끌려다녔으며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처럼 정통성에 자신이 없는 왕들도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절차
①사신이 온다는 통보가 오면 먼저 길부터 닦아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도로 사정이 상당히 열악했기 때문에 사신이 올 때마다 도로를 정비해야 했는데 이러는 과정에 백성의 경작지를 많이 훼손하였습니다.
②사신의 원활한 통행과 접대를 위해 칙사 영접 전담 기구인 영접도감을 설치했습니다.
③사신이 국경을 넘으면 의주까지 원접사가 파견되어 그들을 맞아 서울까지 인도하였습니다.
④사신이 지나는 안주, 평양, 황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 선위사를 보냈으며 평양에서는 단군묘, 기자묘, 동명왕묘에 참배도 하였습니다.
⑤사신은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⑥무악재를 넘으면 왕이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모화루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는데 이때 사신이 조칙을 대청에 내놓으면 길복을 갖춰 입은 왕이 대청 앞의 행각에 올라 사배례의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⑦사신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환영하는 뜻으로 색실, 색천, 색종이를 매달았습니다.
⑧왕이 사신을 영접하여 궁궐에 이르면 사신이 먼저 입궁하고 조선왕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⑨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조선왕에게 전하면 왕은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예[叩頭禮]를 행하였고 사신이 칙서를 낭독하면 왕은 꿇어앉아 듣습니다.
⑩의식이 끝나면 태평관으로 자리를 옮겨 다례를 행하고 환영 만찬인 하마연을 왕과 사신이 동서로 나눠 앉아 즐겼는데 익일연으로 이튿날까지 계속됐습니다.
⑪사신이 머무는 동안 재상이나 승지들이 매일 태평관으로 문안 인사를 가고 수시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⑫사신이 떠나기 전날 왕이 경회루에서 다례를 행한 후 태평관에서 전별연을 베풀었습니다.
⑬떠나는 당일 왕은 모화관까지 나가 전송하고 영의정 등 재상들은 벽제역까지 전송하였습니다.
⑭특히 왕은 남면(南面)하는 게 원칙이지만 중국 사신을 만났을 때는 동쪽을 보고 맞절을 했습니다. 조선의 왕이 남면으로 대하지 못한 대상은 고종황제 때의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 하면 중국 사신뿐이었습니다.
역원(驛院)은 주요 역에 설치하였던 여관 시설이며 역관, 역참, 우역으로 불렸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 지방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공무나 교역 및 여행에 나선 사람들이 증가함으로써 역원제의 기능이 커졌고,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525개의 역원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국에 540여 개의 역을 대, 중, 소로 등급을 정하여 간선, 지선에 설치하였습니다.
역(驛)은 대략 30리(12㎞) 간격으로 분포하였으나 지형 조건에 따라 평지에서는 역의 위치 간격이 조금 길고 험한 산지에서는 짧았습니다.
원(院)은 대략 100리(40km) 간격으로 각지의 주요 도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역과 함께 설치하여 관원과 일반 여행객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관이었으며, 임금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피난할 때 이용하고,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 숙식이나 마필 교체와 민심 파악과 수령들에 관한 내사 자료를 얻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기존 사원이나 역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주택, 누정을 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점차 본래의 기능을 잃고 대부분 주막이나 주점 등으로 전락하거나 사라졌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은 전국에 1,310개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관사찰(院館寺刹)은 고려 초에 정비된 역로(驛路) 망(網)이 전령, 사신 영송 등 공적 역할이 중심이어서 여행자들에게 실질적 여행 편의를 제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아, 국가의 부담을 줄이면서 여행자의 편의를 돕기 위해 불교계의 재력과 인력을 동원하여 객관을 갖춘 원관사찰을 건립하고 운영하게 하였습니다.
원관은 역과 역 사이, 역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곳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도로변, 길의 교차로, 수계가 만나는 곳에 주로 조성되어 상인, 여행자 등의 편의와 안전을 보장하였습니다.
원관은 고려 현종 대(1009~1031년)에 처음 출현하여 13세기 초까지 활발히 운영되다 몽골과의 항전으로 육상교통이 쇠퇴하는 1230년대 이후 축소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국의 주요 간선도로에 다수의 원관이 생겨났지만, 이전의 원관 사찰과 달리 불사의 기능이 없는 순수한 객관 성격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원관사찰로는 천안 광연통화원, 무악재 사현사, 파주 혜음원, 도봉산 도봉원, 충주 미륵대원, 단양 용부원, 안동 제비원 등이 있었습니다.
사현사(沙峴寺)는 1045년(정종 11) 고려의 수도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대로의 삼각산 사현 고갯길에 객관과 함께 혜소국사 정현이 창건하였습니다. 혜소국사는 이후 왕사,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안성 칠장사에서 입적하자 1060년(문종 14)에 그곳에 혜소국사비를 세웠습니다.
사현사에는 두 가지 귀중한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현사 오층석탑(보물)입니다. 사현사 오층석탑은 사현사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인데, 1970년 경복궁 고궁박물관 옆 뜰에 보존하다가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 정원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석조여래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입니다. 본래는 사현사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또 그곳에서 쫓겨가 진관외동의 한 민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과거 홍제천은 모래가 깔린 곳이라, 이 위에 지어진 사현사에 땅이 꺼져 내려앉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오층석탑 역시 밑단이 모래에 묻히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때 1972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홍제동의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사현사 오층석탑은 국립고궁박물관 뜰로 옮겨갔습니다. 반면에, 사현사 석조여래좌상은 홍제동 105-3번지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옮겨온 자리에는 1994년부터 인왕산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으로 정해져 있어 석조여래좌상은 다시 다른 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은평구 진관외동입니다. 나름 서울시 유형문화재이지만, 모시고 있는 곳의 절의 이름조차 없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사현사는 정식 절집의 형태로서 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현재는 민간의 집에서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야말로 칙사대접! 중국 사신(칙사)들이 오가던 길목에서, 떠오르는 상념들
2025년 1월 서울학교는 <한양의 사신맞이길>
2025년 1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7강(제7기 제3강)으로 중국을 ‘큰 나라로 모신’ 조선이 중국 사신을 극진히 맞이하며 치러진 의식과 베푼 접대의 내용과 그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갑니다. 비록 역사적 장소의 대부분이 없어지고 표지석과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는데 계묘년 새해를 맞이하여 ‘작은 나라’ 조선의 사신맞이 실상을 살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경복궁 경회루는 태종대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차츰 중국 사신 접대는 물론 왕실 잔치, 군신 간의 회합 등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국가유산청
서울학교 제107강은 2025년 1월 12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홍제역 2번출구 지하 역구내에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현사터-홍제원터-사신당터-무악재-모화관터/영은문/서지터-경기감영터-돈의문터-태평관터-남별궁터-광화문월대-광화문-근정전-경회루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함께 합니다.
▲2025년 1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양의 사신맞이길>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천자의 명령인 조칙을 가져온 칙사의 대접에 소홀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조칙(詔勑)은 천자가 내리는 명령, 또는 그 명령을 적은 문서입니다. 조(詔)는 ‘비춘다’는 뜻으로 우매하여 일의 마땅함을 알지 못하여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밝혀 보여 주기 위해 천하에 반포하는 것이고, 칙(勅)은 ‘관리가 태만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명령’입니다. 제후의 나라에서 조칙의 봉영 의식은 조정에서 문무백관이 도열하여 거행되었습니다. 또한 조칙을 지니고 온 사신은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맞이하고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의 향응을 베풀고 돌아갈 때는 많은 품목의 선물을 챙겨줍니다. 그야말로 ‘칙사대접’입니다.
조선이 사대한 중국은 건국 초기에는 명나라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청나라였는데 재조지은의 명나라와 한낱 오랑캐로만 여겼던 청나라에 대한 사신맞이의 내용은 양과 질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명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첫째 황제나 황태자의 즉위, 책봉, 부고를 전하고, 둘째 중국과의 외교문서인 예부자문(禮部咨文)을 전달하고, 셋째 조선 국왕이나 왕세자에 대한 책봉 의식을 주관하고, 넷째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명의 사신은 유독 환관이 많았는데 이들은 탐욕스럽고 제멋대로 굴었으며 또 갖가지 무리한 요구를 하여 조선 조정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사신단이 한 차례 쓸고 가면 국고는 거덜 났고 특히 사신단이 쓸고 지나가는 평안도 일대는 접대비 확충을 위해 세금을 중앙에 내지 않고 자체적으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청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초기에는 조선이 변심할까 견제하려는 목적에서였고, 청이 중원 대륙을 장악하고 내부의 반청 세력을 제거한 뒤부터는 책봉이나 부고와 같은 의례적인 것과 조선인이 청의 국경을 넘는 월경 문제 해결과 국경선 확정을 위해 파견하였습니다.
청도 빈번하게 사신들이 조선에 왔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과거 명나라 사신들과는 달리 청 사신에게는 접대가 많이 소박해졌기 때문에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접대가 소박했던 이유는 먼저 조선에서 청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오랑캐였고, 이미 망한 명에 대한 일편단심이 여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명의 퇴폐한 황실에 비해 청의 군주들은 상당히 절제할 줄 알았고 이는 관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은 조선 사신으로 반드시 만주인을 임명했는데 과거 명 사신들의 만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립문(오른쪽) 옆에 남아 있는 영은문(迎恩門) 주초석(주춧돌).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인데 청에 대한 사대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철거되고 주초석만 남아 있다.Ⓒ국가유산청
사신 맞이에 원접사, 반송사 그리고 선위사를 임명하였습니다.
원접사(遠接使)는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관직 또는 그 관원으로,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반송사(伴送使)라 개칭하여 다시 의주까지 환송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여 중국에 가는 사신뿐 아니라,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의 접대에도 정성을 들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중국 사신 접대 장소는 한양 밖과 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자는 원접사 또는 접반사가, 후자는 영접도감의 관반이 지휘하였습니다.
원접사는 국경에서 처음으로 칙사를 맞이하는 접대 관원으로서, 체류 기간이나 돌아가는 여정에도 간여하므로 신중하게 선발했습니다. 태종대 이후 조선말까지 정2품 이상으로 임명되었는데, 병자호란 이후의 대청 관계에서는 대명 관계에서보다 덜 중시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태조 대까지는 접반사로 부르다가, 태종 초에 원접사로 바꾸었고, 점차 칙서를 가져오는 칙사는 정2품 이상의 원접사가, 그 밖의 사신은 종2품의 접반사가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중국의 공식문서인 패문(牌文)이나,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또는 풍문에 의해 칙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당일로 원접사가 선발되어 종사관 등 수행원을 거느리고 국경인 의주로 파견되어 칙사를 맞이하였습니다. 이후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에서 각 지역 선위사, 영위사와 지방관들을 지휘하며 사신 일행을 대접하며 호송하였고 사신이 한양에 머무는 동안 각종 연회와 행사에 사신 일행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대부분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까지 반송사로 전송하였습니다. 이때 원접사는 사신에 대한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고, 한편으로 사신과 조선 정부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환관 출신 사신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풍채와 위엄을 갖춘 인물을 임명하였으나, 문관 출신 사신이 주로 왔던 성종 대 이후에는 사신과의 문학적 교류가 중시되어 대제학 등 문장력이 있는 원접사를 파견하였고, 수행원도 시문을 잘 짓는 관원을 스스로 뽑아가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연이은 사신과 그에 대한 접대 행렬로 국고에 부담이 가고 백성들이 곤궁에 처하자, 원접사 수행원을 줄이고 폐단을 방지하려는 조처가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정의 반청 감정으로 인하여 원접사는 점차 관직에서 물러나 있거나 왕에게 미움을 받는 관원들이 임명되기 시작하였고 사신을 접대하는 각종 연회도 정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항 이후인 1890년(고종 27)까지도 원접사가 계속 임명되었습니다.
선위사(宣慰使)는 조선 시대에 여러 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였을 때 그 노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파견한 관리로 중국 사신에 대해서는 원접사와 함께 의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부의 5개 처에 선위사를 파견하였고, 일본 및 유구 사신에 대해서는 선위사만을 보내어 영송 하였습니다. 중국 사신에 대한 선위사는 2품 이상의 조관을, 요동 도사의 선위사와 일본과 유구 사신의 선위사는 정3품 이상의 조관을 임명하였습니다.
▲독립관(가운데)과 독립문의 옛 모습.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축하고 독립문을 새로 세웠으며 영은문은 훼철되고 주초석만 남았다.Ⓒ국립중앙박물관
▲원관사찰의 하나였던 무악재 사현사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사신에게 베푸는 향응은 종류도 많습니다.
중국 사신이 체류하는 동안 먼저 영접도감(迎接都監)을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도착 축하연인 하마연(下馬宴), 도착 다음 날까지 1박 2일간 베푸는 익일연(翌日宴), 왕이 대전에서 직접 베푸는 청연(請宴),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위연(慰宴), 사신이 떠나는 날이 정해진 후 베푸는 상마연(上馬宴), 사신이 떠날 때 베푸는 전별연(餞別宴) 등이 있었습니다.
조선이 이처럼 사신들에 대하여 저자세를 이어간 것은 고질적인 사대주의 탓도 있지만, 중국에 아쉬운 소리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전기 195년간은 창업 군주 이성계를 고려 시대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왜곡한 <대명회통> 기록을 고치려고 명나라에 끌려다녔으며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처럼 정통성에 자신이 없는 왕들도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절차
①사신이 온다는 통보가 오면 먼저 길부터 닦아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도로 사정이 상당히 열악했기 때문에 사신이 올 때마다 도로를 정비해야 했는데 이러는 과정에 백성의 경작지를 많이 훼손하였습니다.
②사신의 원활한 통행과 접대를 위해 칙사 영접 전담 기구인 영접도감을 설치했습니다.
③사신이 국경을 넘으면 의주까지 원접사가 파견되어 그들을 맞아 서울까지 인도하였습니다.
④사신이 지나는 안주, 평양, 황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 선위사를 보냈으며 평양에서는 단군묘, 기자묘, 동명왕묘에 참배도 하였습니다.
⑤사신은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⑥무악재를 넘으면 왕이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모화루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는데 이때 사신이 조칙을 대청에 내놓으면 길복을 갖춰 입은 왕이 대청 앞의 행각에 올라 사배례의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⑦사신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환영하는 뜻으로 색실, 색천, 색종이를 매달았습니다.
⑧왕이 사신을 영접하여 궁궐에 이르면 사신이 먼저 입궁하고 조선왕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⑨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조선왕에게 전하면 왕은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예[叩頭禮]를 행하였고 사신이 칙서를 낭독하면 왕은 꿇어앉아 듣습니다.
⑩의식이 끝나면 태평관으로 자리를 옮겨 다례를 행하고 환영 만찬인 하마연을 왕과 사신이 동서로 나눠 앉아 즐겼는데 익일연으로 이튿날까지 계속됐습니다.
⑪사신이 머무는 동안 재상이나 승지들이 매일 태평관으로 문안 인사를 가고 수시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⑫사신이 떠나기 전날 왕이 경회루에서 다례를 행한 후 태평관에서 전별연을 베풀었습니다.
⑬떠나는 당일 왕은 모화관까지 나가 전송하고 영의정 등 재상들은 벽제역까지 전송하였습니다.
⑭특히 왕은 남면(南面)하는 게 원칙이지만 중국 사신을 만났을 때는 동쪽을 보고 맞절을 했습니다. 조선의 왕이 남면으로 대하지 못한 대상은 고종황제 때의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 하면 중국 사신뿐이었습니다.
역원(驛院)은 주요 역에 설치하였던 여관 시설이며 역관, 역참, 우역으로 불렸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 지방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공무나 교역 및 여행에 나선 사람들이 증가함으로써 역원제의 기능이 커졌고,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525개의 역원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국에 540여 개의 역을 대, 중, 소로 등급을 정하여 간선, 지선에 설치하였습니다.
역(驛)은 대략 30리(12㎞) 간격으로 분포하였으나 지형 조건에 따라 평지에서는 역의 위치 간격이 조금 길고 험한 산지에서는 짧았습니다.
원(院)은 대략 100리(40km) 간격으로 각지의 주요 도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역과 함께 설치하여 관원과 일반 여행객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관이었으며, 임금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피난할 때 이용하고,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 숙식이나 마필 교체와 민심 파악과 수령들에 관한 내사 자료를 얻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기존 사원이나 역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주택, 누정을 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점차 본래의 기능을 잃고 대부분 주막이나 주점 등으로 전락하거나 사라졌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은 전국에 1,310개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관사찰(院館寺刹)은 고려 초에 정비된 역로(驛路) 망(網)이 전령, 사신 영송 등 공적 역할이 중심이어서 여행자들에게 실질적 여행 편의를 제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아, 국가의 부담을 줄이면서 여행자의 편의를 돕기 위해 불교계의 재력과 인력을 동원하여 객관을 갖춘 원관사찰을 건립하고 운영하게 하였습니다.
원관은 역과 역 사이, 역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곳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도로변, 길의 교차로, 수계가 만나는 곳에 주로 조성되어 상인, 여행자 등의 편의와 안전을 보장하였습니다.
원관은 고려 현종 대(1009~1031년)에 처음 출현하여 13세기 초까지 활발히 운영되다 몽골과의 항전으로 육상교통이 쇠퇴하는 1230년대 이후 축소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국의 주요 간선도로에 다수의 원관이 생겨났지만, 이전의 원관 사찰과 달리 불사의 기능이 없는 순수한 객관 성격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원관사찰로는 천안 광연통화원, 무악재 사현사, 파주 혜음원, 도봉산 도봉원, 충주 미륵대원, 단양 용부원, 안동 제비원 등이 있었습니다.
사현사(沙峴寺)는 1045년(정종 11) 고려의 수도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대로의 삼각산 사현 고갯길에 객관과 함께 혜소국사 정현이 창건하였습니다. 혜소국사는 이후 왕사,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안성 칠장사에서 입적하자 1060년(문종 14)에 그곳에 혜소국사비를 세웠습니다.
사현사에는 두 가지 귀중한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현사 오층석탑(보물)입니다. 사현사 오층석탑은 사현사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인데, 1970년 경복궁 고궁박물관 옆 뜰에 보존하다가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 정원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석조여래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입니다. 본래는 사현사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또 그곳에서 쫓겨가 진관외동의 한 민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과거 홍제천은 모래가 깔린 곳이라, 이 위에 지어진 사현사에 땅이 꺼져 내려앉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오층석탑 역시 밑단이 모래에 묻히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때 1972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홍제동의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사현사 오층석탑은 국립고궁박물관 뜰로 옮겨갔습니다. 반면에, 사현사 석조여래좌상은 홍제동 105-3번지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옮겨온 자리에는 1994년부터 인왕산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으로 정해져 있어 석조여래좌상은 다시 다른 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은평구 진관외동입니다. 나름 서울시 유형문화재이지만, 모시고 있는 곳의 절의 이름조차 없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사현사는 정식 절집의 형태로서 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현재는 민간의 집에서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야말로 칙사대접! 중국 사신(칙사)들이 오가던 길목에서, 떠오르는 상념들
2025년 1월 서울학교는 <한양의 사신맞이길>
2025년 1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7강(제7기 제3강)으로 중국을 ‘큰 나라로 모신’ 조선이 중국 사신을 극진히 맞이하며 치러진 의식과 베푼 접대의 내용과 그 역사적인 장소를 찾아갑니다. 비록 역사적 장소의 대부분이 없어지고 표지석과 기록으로만 전해지고 있는데 계묘년 새해를 맞이하여 ‘작은 나라’ 조선의 사신맞이 실상을 살펴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경복궁 경회루는 태종대에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지었는데 차츰 중국 사신 접대는 물론 왕실 잔치, 군신 간의 회합 등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국가유산청
서울학교 제107강은 2025년 1월 12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홍제역 2번출구 지하 역구내에 모입니다.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현사터-홍제원터-사신당터-무악재-모화관터/영은문/서지터-경기감영터-돈의문터-태평관터-남별궁터-광화문월대-광화문-근정전-경회루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답사 도중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함께 합니다.
▲2025년 1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한양의 사신맞이길>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천자의 명령인 조칙을 가져온 칙사의 대접에 소홀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조칙(詔勑)은 천자가 내리는 명령, 또는 그 명령을 적은 문서입니다. 조(詔)는 ‘비춘다’는 뜻으로 우매하여 일의 마땅함을 알지 못하여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밝혀 보여 주기 위해 천하에 반포하는 것이고, 칙(勅)은 ‘관리가 태만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명령’입니다. 제후의 나라에서 조칙의 봉영 의식은 조정에서 문무백관이 도열하여 거행되었습니다. 또한 조칙을 지니고 온 사신은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 맞이하고 머무는 동안 여러 차례의 향응을 베풀고 돌아갈 때는 많은 품목의 선물을 챙겨줍니다. 그야말로 ‘칙사대접’입니다.
조선이 사대한 중국은 건국 초기에는 명나라였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청나라였는데 재조지은의 명나라와 한낱 오랑캐로만 여겼던 청나라에 대한 사신맞이의 내용은 양과 질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명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첫째 황제나 황태자의 즉위, 책봉, 부고를 전하고, 둘째 중국과의 외교문서인 예부자문(禮部咨文)을 전달하고, 셋째 조선 국왕이나 왕세자에 대한 책봉 의식을 주관하고, 넷째 공물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명의 사신은 유독 환관이 많았는데 이들은 탐욕스럽고 제멋대로 굴었으며 또 갖가지 무리한 요구를 하여 조선 조정은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사신단이 한 차례 쓸고 가면 국고는 거덜 났고 특히 사신단이 쓸고 지나가는 평안도 일대는 접대비 확충을 위해 세금을 중앙에 내지 않고 자체적으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청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한 목적은 초기에는 조선이 변심할까 견제하려는 목적에서였고, 청이 중원 대륙을 장악하고 내부의 반청 세력을 제거한 뒤부터는 책봉이나 부고와 같은 의례적인 것과 조선인이 청의 국경을 넘는 월경 문제 해결과 국경선 확정을 위해 파견하였습니다.
청도 빈번하게 사신들이 조선에 왔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과거 명나라 사신들과는 달리 청 사신에게는 접대가 많이 소박해졌기 때문에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접대가 소박했던 이유는 먼저 조선에서 청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오랑캐였고, 이미 망한 명에 대한 일편단심이 여전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명의 퇴폐한 황실에 비해 청의 군주들은 상당히 절제할 줄 알았고 이는 관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은 조선 사신으로 반드시 만주인을 임명했는데 과거 명 사신들의 만행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립문(오른쪽) 옆에 남아 있는 영은문(迎恩門) 주초석(주춧돌). 영은문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 앞에 세웠던 문인데 청에 대한 사대 굴욕외교의 상징으로 철거되고 주초석만 남아 있다.Ⓒ국가유산청
사신 맞이에 원접사, 반송사 그리고 선위사를 임명하였습니다.
원접사(遠接使)는 조선 시대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관직 또는 그 관원으로,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는 반송사(伴送使)라 개칭하여 다시 의주까지 환송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여 중국에 가는 사신뿐 아니라, 조선으로 오는 중국 사신의 접대에도 정성을 들였습니다. 조선 시대의 중국 사신 접대 장소는 한양 밖과 안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자는 원접사 또는 접반사가, 후자는 영접도감의 관반이 지휘하였습니다.
원접사는 국경에서 처음으로 칙사를 맞이하는 접대 관원으로서, 체류 기간이나 돌아가는 여정에도 간여하므로 신중하게 선발했습니다. 태종대 이후 조선말까지 정2품 이상으로 임명되었는데, 병자호란 이후의 대청 관계에서는 대명 관계에서보다 덜 중시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태조 대까지는 접반사로 부르다가, 태종 초에 원접사로 바꾸었고, 점차 칙서를 가져오는 칙사는 정2품 이상의 원접사가, 그 밖의 사신은 종2품의 접반사가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중국의 공식문서인 패문(牌文)이나, 중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또는 풍문에 의해 칙사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당일로 원접사가 선발되어 종사관 등 수행원을 거느리고 국경인 의주로 파견되어 칙사를 맞이하였습니다. 이후 한양에 도착할 때까지의 여정에서 각 지역 선위사, 영위사와 지방관들을 지휘하며 사신 일행을 대접하며 호송하였고 사신이 한양에 머무는 동안 각종 연회와 행사에 사신 일행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대부분 사신이 돌아갈 때 국경까지 반송사로 전송하였습니다. 이때 원접사는 사신에 대한 정보를 조정에 보고하고, 한편으로 사신과 조선 정부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였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환관 출신 사신이 대부분이어서 그들의 횡포를 막을 수 있는 풍채와 위엄을 갖춘 인물을 임명하였으나, 문관 출신 사신이 주로 왔던 성종 대 이후에는 사신과의 문학적 교류가 중시되어 대제학 등 문장력이 있는 원접사를 파견하였고, 수행원도 시문을 잘 짓는 관원을 스스로 뽑아가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연이은 사신과 그에 대한 접대 행렬로 국고에 부담이 가고 백성들이 곤궁에 처하자, 원접사 수행원을 줄이고 폐단을 방지하려는 조처가 행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조정의 반청 감정으로 인하여 원접사는 점차 관직에서 물러나 있거나 왕에게 미움을 받는 관원들이 임명되기 시작하였고 사신을 접대하는 각종 연회도 정지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개항 이후인 1890년(고종 27)까지도 원접사가 계속 임명되었습니다.
선위사(宣慰使)는 조선 시대에 여러 나라의 사신이 입국하였을 때 그 노고를 위문하기 위하여 파견한 관리로 중국 사신에 대해서는 원접사와 함께 의주, 안주, 평양, 황주, 개성부의 5개 처에 선위사를 파견하였고, 일본 및 유구 사신에 대해서는 선위사만을 보내어 영송 하였습니다. 중국 사신에 대한 선위사는 2품 이상의 조관을, 요동 도사의 선위사와 일본과 유구 사신의 선위사는 정3품 이상의 조관을 임명하였습니다.
▲독립관(가운데)과 독립문의 옛 모습.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축하고 독립문을 새로 세웠으며 영은문은 훼철되고 주초석만 남았다.Ⓒ국립중앙박물관
▲원관사찰의 하나였던 무악재 사현사와 오층석탑Ⓒ국립중앙박물관
중국 사신에게 베푸는 향응은 종류도 많습니다.
중국 사신이 체류하는 동안 먼저 영접도감(迎接都監)을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연회를 베풀었는데 도착 축하연인 하마연(下馬宴), 도착 다음 날까지 1박 2일간 베푸는 익일연(翌日宴), 왕이 대전에서 직접 베푸는 청연(請宴),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위연(慰宴), 사신이 떠나는 날이 정해진 후 베푸는 상마연(上馬宴), 사신이 떠날 때 베푸는 전별연(餞別宴) 등이 있었습니다.
조선이 이처럼 사신들에 대하여 저자세를 이어간 것은 고질적인 사대주의 탓도 있지만, 중국에 아쉬운 소리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선 전기 195년간은 창업 군주 이성계를 고려 시대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왜곡한 <대명회통> 기록을 고치려고 명나라에 끌려다녔으며 중종, 선조, 광해군, 인조처럼 정통성에 자신이 없는 왕들도 중국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절차
①사신이 온다는 통보가 오면 먼저 길부터 닦아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도로 사정이 상당히 열악했기 때문에 사신이 올 때마다 도로를 정비해야 했는데 이러는 과정에 백성의 경작지를 많이 훼손하였습니다.
②사신의 원활한 통행과 접대를 위해 칙사 영접 전담 기구인 영접도감을 설치했습니다.
③사신이 국경을 넘으면 의주까지 원접사가 파견되어 그들을 맞아 서울까지 인도하였습니다.
④사신이 지나는 안주, 평양, 황주, 개성 등 주요 도시에 선위사를 보냈으며 평양에서는 단군묘, 기자묘, 동명왕묘에 참배도 하였습니다.
⑤사신은 홍제원에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⑥무악재를 넘으면 왕이 세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모화루까지 나와 사신을 맞이했는데 이때 사신이 조칙을 대청에 내놓으면 길복을 갖춰 입은 왕이 대청 앞의 행각에 올라 사배례의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⑦사신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환영하는 뜻으로 색실, 색천, 색종이를 매달았습니다.
⑧왕이 사신을 영접하여 궁궐에 이르면 사신이 먼저 입궁하고 조선왕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⑨사신이 황제의 칙서를 조선왕에게 전하면 왕은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예[叩頭禮]를 행하였고 사신이 칙서를 낭독하면 왕은 꿇어앉아 듣습니다.
⑩의식이 끝나면 태평관으로 자리를 옮겨 다례를 행하고 환영 만찬인 하마연을 왕과 사신이 동서로 나눠 앉아 즐겼는데 익일연으로 이튿날까지 계속됐습니다.
⑪사신이 머무는 동안 재상이나 승지들이 매일 태평관으로 문안 인사를 가고 수시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⑫사신이 떠나기 전날 왕이 경회루에서 다례를 행한 후 태평관에서 전별연을 베풀었습니다.
⑬떠나는 당일 왕은 모화관까지 나가 전송하고 영의정 등 재상들은 벽제역까지 전송하였습니다.
⑭특히 왕은 남면(南面)하는 게 원칙이지만 중국 사신을 만났을 때는 동쪽을 보고 맞절을 했습니다. 조선의 왕이 남면으로 대하지 못한 대상은 고종황제 때의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 하면 중국 사신뿐이었습니다.
역원(驛院)은 주요 역에 설치하였던 여관 시설이며 역관, 역참, 우역으로 불렸습니다. 통일 신라 시대 지방통치 체제가 정비되고 공무나 교역 및 여행에 나선 사람들이 증가함으로써 역원제의 기능이 커졌고,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525개의 역원이 있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국에 540여 개의 역을 대, 중, 소로 등급을 정하여 간선, 지선에 설치하였습니다.
역(驛)은 대략 30리(12㎞) 간격으로 분포하였으나 지형 조건에 따라 평지에서는 역의 위치 간격이 조금 길고 험한 산지에서는 짧았습니다.
원(院)은 대략 100리(40km) 간격으로 각지의 주요 도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역과 함께 설치하여 관원과 일반 여행객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관이었으며, 임금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피난할 때 이용하고,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 숙식이나 마필 교체와 민심 파악과 수령들에 관한 내사 자료를 얻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기존 사원이나 역원뿐만 아니라 개인의 주택, 누정을 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점차 본래의 기능을 잃고 대부분 주막이나 주점 등으로 전락하거나 사라졌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은 전국에 1,310개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원관사찰(院館寺刹)은 고려 초에 정비된 역로(驛路) 망(網)이 전령, 사신 영송 등 공적 역할이 중심이어서 여행자들에게 실질적 여행 편의를 제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보아, 국가의 부담을 줄이면서 여행자의 편의를 돕기 위해 불교계의 재력과 인력을 동원하여 객관을 갖춘 원관사찰을 건립하고 운영하게 하였습니다.
원관은 역과 역 사이, 역이 만들어지기 어려운 곳에 주로 설치되었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도로변, 길의 교차로, 수계가 만나는 곳에 주로 조성되어 상인, 여행자 등의 편의와 안전을 보장하였습니다.
원관은 고려 현종 대(1009~1031년)에 처음 출현하여 13세기 초까지 활발히 운영되다 몽골과의 항전으로 육상교통이 쇠퇴하는 1230년대 이후 축소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는 전국의 주요 간선도로에 다수의 원관이 생겨났지만, 이전의 원관 사찰과 달리 불사의 기능이 없는 순수한 객관 성격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원관사찰로는 천안 광연통화원, 무악재 사현사, 파주 혜음원, 도봉산 도봉원, 충주 미륵대원, 단양 용부원, 안동 제비원 등이 있었습니다.
사현사(沙峴寺)는 1045년(정종 11) 고려의 수도 개경과 남경을 연결하는 대로의 삼각산 사현 고갯길에 객관과 함께 혜소국사 정현이 창건하였습니다. 혜소국사는 이후 왕사, 국사로 책봉되었으며 안성 칠장사에서 입적하자 1060년(문종 14)에 그곳에 혜소국사비를 세웠습니다.
사현사에는 두 가지 귀중한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현사 오층석탑(보물)입니다. 사현사 오층석탑은 사현사 창건 당시부터 있던 것인데, 1970년 경복궁 고궁박물관 옆 뜰에 보존하다가 현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물 정원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석조여래좌상(서울시 유형문화재)입니다. 본래는 사현사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 또 그곳에서 쫓겨가 진관외동의 한 민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과거 홍제천은 모래가 깔린 곳이라, 이 위에 지어진 사현사에 땅이 꺼져 내려앉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오층석탑 역시 밑단이 모래에 묻히기 직전이었습니다.
이때 1972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홍제동의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사현사 오층석탑은 국립고궁박물관 뜰로 옮겨갔습니다. 반면에, 사현사 석조여래좌상은 홍제동 105-3번지로 옮겨갔습니다. 하지만 새롭게 옮겨온 자리에는 1994년부터 인왕산 현대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으로 정해져 있어 석조여래좌상은 다시 다른 터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은평구 진관외동입니다. 나름 서울시 유형문화재이지만, 모시고 있는 곳의 절의 이름조차 없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사현사는 정식 절집의 형태로서 인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현재는 민간의 집에서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 형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