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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ogress of the game was reported by General of the Army K. A. Meretskov, Chief of General Staff. When he cited figures on the balance of forces of the two sides and on the superiority of the “blues” in the initial period, particularly in tanks and aircraft, Stalin, obviously irked by the poor showing of the “reds”, cut him short and said:
게임의 진척 사항은 총참모장 메레쵸프 육군 장군이 보고했다. 양 진영 전력의 균형과 초기 “청군”의 우월성 특히 탱크와 비행기에 대한 형세를 언급했을 때 스탈린은 분명 “적군”의 빈약한 모습에 지루해하며, 보고를 짧게 자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Don’t forget that it’s not only the arithmetical majority but the skill of commanders and troops that matters in battle.”
“산술적인 우위뿐만 아니라 지휘관과 부대의 숙련도가 전투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After several more remarks, Stalin asked:
몇 개 이상 의견을 피력한 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Has anyone anything to say?”
“말 할 게 더 있나?”
People’s Commissar Timoshenko spoke. He emphasized the growing operational and tactical progress of the commanding officers and chiefs of staff of military districts, and the unquestionable usefulness of the recently concluded conference and war game.
인민위원 티모센코가 발언했다. 그는 군관구의 참모장과 지휘 장교들의 작전과 전술의 진보가 성장하고 있으며, 워게임과 최근에 결론을 내린 회의와 워게임의 유용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In 1941,” Timoshenko pointed out, “the troops would have possibilities to train still more purposefully and with better organization since by that time they would have settled down in their newly appointed locations.”
“1941년에 부대들은 새로운 주둔지에 정착한 바로 그 시간 이후에 훨씬 더 나은 조직으로 더욱 합목적적으로 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Colonel-General Pavlov spoke next. He started out by evaluating the conference.
파블로프 대령이 다음으로 발언했다. 파블로프는 그 회의를 평가하면서 발언을 시작했다.
“What are the causes of the unsuccessful actions of the ‘red’ side?” Stalin asked. Pavlov tried to get off with a joke, saying that these things happen in war games. Stalin was not amused.
“”적군“의 행동이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가?” 스탈린이 질문했다. 파블로프는 이러한 일들이 워게임에서 일어난다고 말하면서 농담으로 모면하려(get off) 애를 썼다. 스탈린은 웃지 않았다.
“The officer commanding a district must be an expert, and must find correct solutions in any conditions, which is what you failed to do in this game.” Then Stalin asked again: “Does somebody else wish to speak?”
“군관구를 지휘하는 장교는 전문가가 되어야만 하며. 그리고 어떠한 조건에서라도 올바른 해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이 게임에서 실패한 것이 바로 그것이야.” 그후 스탈린이 다시 물었다. “발언하길 원하는 사람이 또 있는가?”
I asked for the floor.
나는 발언권을 요구했다.
Noting the considerable value of such games for raising the strategic and operational skills of high-ranking commanders, I suggested they should be held more often despite the difficulty of organizing them. To improve the competence of district commanders, their staff officers, and army commanders, I suggested “holding periodic command and staff field exercises with the employment of communications facilities under the general guidance of the Commissar for Defence and the General Staff”.
최고위 지휘관의 전략적이고 운영상의 기술을 높이기 위해 이러한 게임보다 가치가 있다고 고려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워게임을 조직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워게임은 더욱 자주 수행해야만 한다고 제안했다. 군관구의 지휘관들과 그들의 참모장교, 그리고 야전 지휘관의 경쟁력을 개선하기 위해서 “국방인민위원과 총참모부의 일반 지침 아래 통신설비를 동원하여 지휘 및 참모 야전 훈련을 주기적으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I then referred to the construction of fortified areas in Byelorussia. “In my view fortified zones in Byelorussia are being built too close to the frontier, and have an extremely disadvantageous operational configuration, particularly in the area of the Belostok bulge. This will enable enemy forces to strike from the Brest and Suwalki area at the rear of our Belostok group.
그 후 나는 벨로루시아에 요새화 지역 건설을 언급했다. ”제 생각에 벨로루시아 내 요새 지구는 전선과 매우 가깝게 건설되고 있으며, 지극히 불리한 기동 형태를 갖춘, 특히 벨로스토크의 돌출 지역에 서의 작전 구성이 지극히 불리합니다. 이를 통해 적의 군대는 벨로스토쿠 군 후방 지역에 있는 수발키와 브레스트로부터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Furthermore, due to inadequate depth the fortified zones cannot expect to hold out for long as they are completely vulnerable to artillery fire. I hold that the fortified zones should be built farther from the border.”
게다가 불충분한 깊이 때문에 요새 지역은 포격으로부터 완전 취약하기에 오랜 기간 버티길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요새 지역은 국경에서 더 멀리 떨어져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re the fortified zones correctly sited in the Ukraine then?” asked Pavlov, evidently annoyed by my criticism of his district.
“I was not the one who located the fortified zones in the Ukraine, but I do think that there, too, they should be farther away from the border.”
“그래서 우크라이나 요새화 지역은 적절한 지역에 건설했나?” 파블로프가 질문했다. 자기 지역에 대한 비판이 불쾌했음이 명백하다. “우크라이나에 요새화 지역을 설치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지만 그곳에서도 마찬가지로 국경선에서 더 멀리 요새를 구축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Fortified zones are built according to the approved plans of the Chief Military Council and the actual control over their construction is in the hands of Deputy Defence Commissar Marshal Shaposhnikov,” K. Ye. Voroshilov objected crisply.
Seeing that an argument was about to break out, I stopped short and sat down.
“요새화 지역은 최고군사위원회의 적절한 계획에 따라 건설되어야 하며, 건설에 대한 실제적 통제는 국방부위원인 사포스니코프 장군에게 있습니다,” 보로실로프가 분명하게 반대했다.
논쟁이 벌어질 것 같아 나는 바로 멈추고 앉았다.
A few other generals spoke on a number of controversial issues.
Some very pertinent comments were offered by the Air Force Commanderin-Chief General P. V. Rychagov. He insisted on the need for urgent introduction in our Air Force of the latest types of aircraft and felt it was essential to improve pilots’ combat training.
몇몇 장군들이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발언했다. 공군사령관 리챠고프 장군이 매우 타당한 비평 몇 개를 제안했다. 공군에 최신예 비행기를 긴급히 도입할 필요와 비행사의 전투 훈련을 개선하는 게 중요하게 느낀다고 주장했다.
A strange impression was made by the remarks of Deputy Defence Commissar for Armaments, Marshal G. I. Kulik. He suggested increasing the strength of a regular rifle division to 16,000-18,000 men and advocated developing horse-drawn artillery. Addressing himself to the experience in Spain, he concluded that tank units should act mainly as direct support for the infantry and solely on a company and battalion scale.
군비구축을 담당 국방부위원 쿨리크의 비평은 이상한 인상을 주었다. 그는 정규 소총 사단의 능력을 16,000-18,000명으로 늘리자고 제시하고, 말이 끄는 포를 개발할 것을 주장했다. 스페인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전차부대는 주로 보병부대를 직접 지원하고 대대나 중대규모여야만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For the time being,” continued Kulik, “we should refrain from forming tank and mechanized corps.” At this point People’s Commissar for Defence Timoshenko broke in to remark:
쿨릭은 계속해서 발언했다. “당분간 우리는 전차와 기계화 군단을 구성하는 것을 억제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국방인민위원인 티모센코가 끼어들어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혔다.
“The Army Command is fully aware of the need for the prompt
mechanization of the armed forces. Kulik is the only man who is still confused in these matters.”
“군사령부는 무력의 즉각적인 기계화의 필요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쿨릭은 이러한 사안에 대해 여전히 혼동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오.”
Stalin ended the discussion with a comment on Kulik’s obsolete views.
스탈린이 쿨릭의 시대에 뒤떨어진 관점에 대해 비평을 하면서 토론을 끝냈다.
“Victory in war,” he pointed out, “will be won by the side that has more tanks and more highly motorized troops.”
“전쟁에서의 승리는 더 많이 전차를 갖고 있고, 더 빠른 기동화 부대를 갖는 쪽이 얻을 것입니다.” 스탈린이 지적했다.
The following day I was summoned by Stalin. After a word of greeting, Stalin said:
다음날 스탈린이 나를 소환했다. 인사를 나눈 후 스탈린이 말했다.
“The Politbureau has decided to relieve Meretskov of the duties of Chief of General Staff and to appoint you in his place.”
I had been expecting anything but this, and did not know what to say. Then I replied:
“정치국은 메레초프에게 총참모장의 부담을 덜어주고 그 자리에 당신을 지명했소.”
나는 이것 외에는 기대한 바가 없었는데, 어찌 말할지 몰랐다. 나는 대답했다.
“I have never been on any staff before. I have always been in the field. I cannot be Chief of General Staff.”
“The Politbureau has decided to appoint you,” Stalin said, laying special emphasis on the word “decided”.
“나는 전에 참모를 맡아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전장에 있었습니다. 총참모장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정치국은 당신을 지명하기로 결정했소.” 스탈린은 “결정”이라는 단어에 특별히 방점을 찍으면서 말했다.
Seeing that objections were pointless, I offered my thanks for the trust placed in me, and added:
거부가 무의미함을 알고서 나에 대한 신뢰에 감사를 표하며 부가하여 말했다.
“But if I don’t make a good Chief of General Staff, I shall ask to be transferred back to the field.”
“하지만 내가 좋은 참모장이 아니라면 야전으로 귀환을 요구하겠습니다.”
“That’s a deal. The Central Committee’s decision will be issued toworrow,” Stalin concluded. A quarter of an hour later I was in the Defence Commissar’s office. Smiling broadly, he told me:
“좋아. 중앙위원회의 결정은 내일 발표할 것이야.” 스탈린이 결론을 내렸다. 15분 후 나는 국방위원회 사무실에 도착했다. 활짝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I know how you tried to refuse the post of Chief of General Staff. I just had a phone call from Stalin. You may return to your District now, but come back to Moscow as soon as possible. You will be replaced as Commander of the District by Colonel-General M. P. Kirponos. But don’t wait till he comes. You can leave District Chief of Staff Purkayev to look after things for the time being.”
“당신이 총참모장의 자리를 거절하느라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소. 지금 스탈린에게서 전화를 받았어요. 지금 당장 당신의 관구로 돌아가서 가능한 빨리 모스크바로 돌아오시오. 관구 사령관은 키르포노스 중장이 대신 할 거요. 하지만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진 마시오. 당분간 관구 참모장 푸르카예프에게 일을 맡기시오.”
I had never served with Mikhail Kirponos, but judging by what those who had said of him he was a highly experienced army general who had served in the old, prerevolutionary army. During the February revolution of 1917 he had been elected chairman of the Regimental Soldiers’ Committee. In May 1918 he joined the Party. From 1934 to 1939 he had been chief of the Kazan Rifle School. For meritorious service as commander of the 70th Infantry Division in action he had been conferred the title of Hero of the Soviet Union. In June 1940, Kirponos was
appointed Commander of the Leningrad Military District.
미하일 키르포노스와 함께 일을 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판단하자면 혁명전 옛 군대에서 복무했던 고도로 훈련된 장성이었다. 1917년 2월 혁명 기간에 키르포노스는 연대 군사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5월, 당에 합류하고, 1934년부터 1939년까지 카잔 소총학교장이었다. 제70보병사단의 사령관으로 가치 있는 복무 때문에 실제로 소련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1940년 6월 키르포노스는 레닌그라드 군사지구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I was pleased that the Kiev Special Military District was entrusted to such a worthy commander. Naturally, like many others, he still lacked the knowledge and experience essential to command such a big frontier district, but nonetheless his past experience, industriousness and resourcefulness were a guarantee that Kirponos would be a first-class field commander.
이렇게 훌륭한 사령관이 키예프 특별군사지구를 맡게 되어 기뻤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연스럽게 그는 이렇게 큰 전선 지구를 지휘하는데 필수적인 경험과 지식이 여전히 부족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지난 경험, 근면함과 수완은 키르포노스가 제1급 야전사령관이 되리라 보장했다.
I left for Kiev the same night, to be back in Moscow as soon as possible. To be frank, I was leaving with a heavy heart. I had always liked the Ukraine and the beautiful old city of Kiev. The Ukrainian people had given me their trust and had honoured me by electing me to the Supreme Soviet of the Ukraine and the Supreme Soviet of the USSR. The Ukrainian Party’s Central Committee had given vigorous assistance to the troops of the District in organizing our field training and instruction, and saw to the welfare of the troops.
나는 가능한 빨리 모스크바로 돌아가기 위해 그날 밤 키예프를 떠났다. 사실 난 무거운 마음으로 떠났다. 난 늘 우크라이나와 키예프의 아름다운 도시를 좋아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 최고소비에트와 소연방의 최고소비에트에 나를 선출함으로써 나를 믿어줬고 자랑스러워했다. 우크라이나 당중앙위원회는 우리 야전훈련과 지침을 조직하고 부대 복지를 보는데 있어 지구 부대에 열렬한 지원을 보내주었다.
During my brief tour of duty as District Commander I had come to know and to admire the diligence and initiative of the District Command, particularly I. Kh. Bagramyan, E. S. Ptukhin, N. D. Yakovlev, and the army, corps and divisional commanders. I had profound trust in these men and felt that if the hour of battle should strike, they could well be relied upon. And later events
proved that I was not mistaken.
지구 사령관으로서의 내 짧은 복무 기간에 지구사령관, 특히 바그라미안, 푸투킨, 야코블레프, 그리고 군과 군구 그리고 사단 지휘관의 주도와 부지런함을 알고 존경하게 되었다. 나는 이들 사병들에게 깊은 신뢰를 가졌으며, 전투가 개시되면 잘 대응할 수 있으리라 느꼈다. 그리고 후에 일어난 사건들은 내가 잘못 판단한 게 아니란 걸 증명했다.
I had many phone calls from the People’s Commissar for Defence, urging me to wind up my affairs in the District more expeditiously. I did not stay long in Kiev. On January 31, I was already in Moscow. The day after, having taken over K. A. Meretskov’s duties, I became Chief of General Staff.
나는 국방인민위원들에게 지구의 일을 더 빨리 마무리하라고 촉구하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 나는 키예프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1월 31일 나는 이미 모스크바에 있었다. 그날 이후 메레츠코프가 일을 넘겨받았고, 나는 참모총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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