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누얼 어디가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둘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사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작품해설
연희전문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1941년 9월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시는
진정한 삶을 추구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결연한 자세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윤동주
의 시는 대부분 자아 성찰을 통한 자기 완성을 지향하는 특징을 갖는데, 그 자아
성찰의 공간으로 등장하는 것이 주로 ‘방’ · ‘우물’ · ‘길’ 등의 이미지이다. ‘길’은
출발과 도착, 그리고 탐색의 과정을 지닌 행위의 공간이므로 ‘길’의 공간성은 항상
도달해야 할 목적지를 지닌다. 그러나 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으로의 ‘길’에는
반드시 겪어야 할 시련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길’은 시련의 극복이라는 정신적인
세계의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시에서의 ‘길’은 자기 성찰과 자시 수련을 통해 식
민지 시대를 극복하고 본질적 자아를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1연에서는 상실의 상황과 그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을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렸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또한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몰
라 두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으며 길을 나서고 있다. 여기서 주머니를 더듬는 행위는
길을 나서는 행위와 대비되는 것으로, 결국 두 손은 두 발로, 주머니는 길이라는
확장된 공간으로 점차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머니는 길에 비해 작고 내밀
한 공간으로 화자의 내면과 상통한다. 그러므로 두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는 화자의
행위는 곧 잃어버린 대상이 자신의 내면에 존재해 있던 것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2연에서는 화자가 걸어가는 길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길은 돌이 끝없이 연
달아 이어져 있는 돌담을 끼고 가는 길이다. 여기에서 돌담이 길을 안쪽과 바깥쪽으
로 갈라놓았기 때문에 그 길을 걷고 있는 화자로서는 결코 돌담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 곳은 바로 화자가 회복해야 할 이상적 자아의 세계이지만, 돌담이 그 길과
평행 상태로 끝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화자는 그 곳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돌담은, 자아의 안과 밖, 현실과 이상을 갈라놓으며 끝없이 계속되는 우리
네 삶의 과정을 의미한다.
3연에서는 돌담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긴 그
림자를 드리운 채 쇠문으로 굳게 닫혀 있다고 함으로써 절망적 상황임을 암시해 준다.
4연에서는 시간 속에서 시간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과정으로서의 길의 의미를 형
상화하고 있다. 길의 진행은 곧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는 것으로, 길을 걷는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며, 또한 산다는 것은 화자처럼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탐색
과정인 것이다.
5연에서는 부끄러움을 통한 자아의 갈등과 각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상적 자아를
회복할 수 없음을 깨달은 화자가 쳐다본 하늘은 현실적 자아를 일깨워 주는 지고(至高)
한 존재로 그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갖게 한다. 이 부끄러움이야말로 윤동주 시 세계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것으로, 준엄한 자기 성찰을 통한 자기 완성을 지향하게 해 주는
원동력인 것이다.
6.7연에서는 삶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풀 한 포지 없는’
불모의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존재해 있는 잃어버린 자아, 즉 본질적 자아를 찾
기 위함이다. 화자는 ‘긴 그림자가 드리운’ 돌담 같은 어둡고 절망적인 현실 상황 속에
서도, ‘내가 사는 것은, 다만, / 잃은 것을 찾’기 위함이라고 독백을 한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진정한 인간적 삶을 추구하기 위해 악랄한 식민지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끊임
없이 자아 회복의 길을 걷던 윤동즈의 결연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소개]
윤동주(尹東柱)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宋夢奎) 등과 문예지 『새 명동』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시집, 1948), 『별을 헤는 밤』(1977),
『윤동주 시집』(1984), 『윤동주자필시고전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