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부처
남편은 계산서를 보면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늘 그렇다. 다른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서기도 전에 그는 이미 계산대로 향한다. 카드 단말기에서 짧은 승인음이 울리고, 영수증은 반으로 접혀 그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됐어.” 한마디가 공기 속에 잠시 머문다. 어깨가 살짝 펴지고, 눈가에 미세한 힘이 흐른다. 아무 일 없다는 얼굴이지만, 나는 그 긴장과 완화의 리듬을 읽는다.
그가 직장을 다닐 때는 모른 척해주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곧 일이던 시절이었다. 거래처와의 식사, 동료들과의 모임, 선후배와의 자리에서 그는 늘 먼저 계산했다. 그가 지키려는 체면이 그의 직함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바깥에서의 단단함이 집안의 안정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몇 번 마음이 불편해도 눈을 감았다.
그러나 퇴직 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다. 명함은 서랍으로 들어갔는데, 그의 손은 여전히 빠르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그는 여전히 가장 먼저 일어나 계산대로 간다. 누가 얼마를 냈는지 따지는 대신 한 번에 정리한다. “잘 먹었다”라는 친구들의 말에 그는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이럴 때면 부처를 아궁이에 태운 스님 이야기가 떠오른다. 눈이 허공을 가득 메우던 밤, 절 마루 끝까지 냉기가 스며들고, 숨을 내쉴 때마다 흰 기운이 피어올랐다. 방 안에는 변변한 땔감이 없었다. 벽 한쪽에 모셔 둔 나무부처가 유일한 나무였다. 한 스님이 그 불상을 들어 아궁이에 던졌다. 불길이 오르자 다른 승려가 소리쳤다. 어찌 부처를 태우느냐고. 스님은 불 속을 헤집으며 말했다. 사리를 찾고 있소. 나무에서 무슨 사리가 나오겠느냐는 말에, 그는 되물었다. 사리가 없다면, 어찌 부처라 하겠느냐고.
그 이야기는 여전히 내게 질문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무엇을 부처라 부르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앞에서 무엇을 끝내 내려놓지 못하는가.
찻집으로 자리를 옮기는 길에 이제는 좀 나눠도 되지 않느냐며 뾰로통하게 말했다. 그는 내 말에 가볍게 답한다.
“그냥 습관이야.” 대답과 동시에 그이 어깨가 조금 굳는다.
습관이라는 말이 가슴에 꽂힌다. 그 말은 오래 모셔 둔 형상처럼 단단하다. 직함은 사라졌지만, 역할은 아직 남아 있는 듯하다. 그는 여전히 앞자리에 서고 싶어 한다. 나는 그 모습이 못마땅하다. 현실을 생각하자고 말하면 그는 체면을 이야기한다. 나는 숫자를 들고나오고, 그는 마음을 말한다. 계산서는 이미 치워졌는데, 우리 사이의 공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그가 붙들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이 여전히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증명일 것이다. 먼저 계산하는 손끝에 남은 것은 체면이 아니라 존재감에 가깝다. 누군가의 등을 두드려 줄 수 있는 사람, 아직은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라는 확인 같은 것.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해와 수긍은 다르다. 그래서 불편하다.
나 또한 다른 부처를 모시고 있다. 나는 ‘공평해야 한다’라는 말을 쉽게 놓지 못한다. 어릴 적 떠오르는 우리 집 풍경에는 지출이 생길 때마다 부모님의 얼굴에 스미던 특유의 그늘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인지, 바깥에 나가서도 돈 몇 푼에 순식간 서늘해지던 사람들의 표정이 유독 눈에 잘 밟혔다.
나는 그런 구차한 장면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정확해지려 했다. 각자 부담하고, 각자 책임지는 관계가 건강하다고 믿었다.
나는 합리성을 사리처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숫자 속에서 안심을 구하고,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또한 하나의 나무부처였을지 모른다.
찻집에서 남편의 손이 지갑 쪽으로 뻗었다가 잠시 공중에서 멈춘다.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다시 계산기에 찍힌 금액 위로 돌아간다.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일행 중 한 사람이 조심스레 카드를 내밀었다.
남편은 무엇을 지키려 애쓰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놓지 못하고 있는가.
부처를 태운 스님은 형상을 불에 넣었지만, 부처를 없애려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무를 태워 방을 덥히듯, 굳어 버린 믿음도 타야 비로소 온기가 남는다.
우리 부부의 아궁이 속 질문은 아직도 타고 있다.
첫댓글 그 나무 부처님은 진짜 부처님이십니다. 아직도 타면서 중생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계시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멋진 작품에 박수를 보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카페에 갔을 때 재무이니까 당연히 제가 계산을 하지요.
그런데 커피를 나르는 것도 제가 합니다. 몸이 먼저 나서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그런 말을 합니다. 저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도 가만히 앉아있는데 나선다고. ㅎ
여기서 단하 스님의 이야기를 만나니 문득 반갑습니다.
그 스님이야 사리 없는 목불(木佛)을 불태웠지만
이미경 선생님은 이웃 여러 분들께 공덕을 베푸시는 생불(生佛)을 섬기시니
언젠가 그 어느 날 오색영롱한 사리들이 와르르 쏟아지지 않겠습니까?
일단 이런 생각이 들긴 하는데,
이 선생님이 그 어르신을 들들 볶으시면
이 생불님의 수행이 더욱 깊어질런지
혹은 이와 아주 딴판으로 역효과가 나타날지는
제가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늘 지갑을 잘 여시던 친정아버님
생각납니다. 노환으로 하늘의 별이 되셨지만 암은 아니었습니다.
수석부회장님 장부님도 암은 안걸리시겠습니다. 말리지 마시소.
아껴야 직성이 풀리는 분 있고,
써야 맘 편한분이 있을지니.
댓글 감사합니다.
주위에서 늘 말합니다. 사람 좋다고.
그런 말하는 사람들은 알까요? 남들이 좋다고 하는 사는 사람은 좀 괴롭다는 걸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