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의 자리 외 4편
홍계숙
1
싱크대 한켠,
요리에 쓰고 남은 무 반 토막
속살에 거뭇한 검버섯을 피우며
말라가는 대궁 끝에 푸른 뿔이 솟았다
뿔은 심장에서 먼 곳에 솟는다
무의 심장은 어디로 갔을까
무 끝에 돋아난 꼿꼿한 싹을 바라보며
내 심장을 더듬어본다
2
채널을 돌리니 들소와 사자의 격투가 한창이다
들소 무리 뒤를 공격한 사자, 순간
뒤돌아선 들소가 녀석을 뿔에 휘감아 내동댕이친다
간신히 다시 달려드는 사자를
맹렬한 뿔이 내던져버린다
저 뿔의 힘,
몸통에서 분리된 뿔의 당당함은
어느 뿌리에서 오는가
뿔의 각을 허물어 그 뿌리를 더듬는다
3
자신의 심장을 지키기 위해
적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에 뿔은 자란다
심장 근처에 모았던 손을 이마에 얹으니
내게도 들소의 뿔이 만져진다
뿔을 앞세운 성난 들소들이 내 이마 위를 내달린다
뿔로 인해 허물어진 수많은 꿈들이 이마에
실금을 풀어놓았다
4
메가케로스는 거대한 뿔을 가진 사슴,
위대한 뿔을 지녔지만 웅장하고 화려한 무게에 눌려
지구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세상에는 제 지위만을 믿고 위용을 휘두르다 파멸한
메가케로스의 뿔이 얼마나 많은가
태양을 향한 뿔과 땅의 중심으로 뻗는 뿌리는
모두 불을 향해 달려간다
뿌리를 짓밟고 뿔을 쫓으며 달리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5
말라가는 무에서 들소의 뿔이 만져진다
마지막 한 방울 제 안의 물을 끌어와 싹을 틔우고
죽어가는 뿌리가 몸에서 절망을 분리하고 있다
뿔의 각을 해체하면 뿌리로 돌아가는지
물을 소진한 이마 위로 초승달이 뜬다
미니멀 라이프
그녀는 가볍지 않아요
밥 대신 여백을 지어 허기를 채우는 그녀는 무거움을
버리려 해요
여백은 밥을 밀어내요
썰물 때 손가락 첫마디가 쓸려갔지만 싹이 돋고
고통은 금세 잊혀져요 손가락 한 마디만큼 더
가벼워져요
그녀의 허리는 개미처럼 가늘고 개미 등에 실린
짐은 무거워요 무거움을 덜기 위해
썰물이 그늘 뭉치를 서쪽으로 옮겨놓아요
그녀의 눈동자가 빛나요
눈동자는 자꾸만 자라나요 커다란 눈으로 바라보는 바다는
밀어낼 것이 많아요 바다가 쥐고 있는 것을
놓기 위해 썰물은 서둘러야 해요
미술관에서 마릴린 먼로 얼굴을 보았어요 입가에 점 하나만
달랑 남아 있었죠 눈과 코를 지우는 일은
쥐고 있던 것을 놓아주는 일이에요
뒤통수는 버려선 안 될 수만 가지 이유를 떠올려요
눈물 콧물 쏙 뺀 그녀, 모두들 채우려 할 때
비우려 몸부림을 치다 바다가 되어요
멀리서, 바람과 햇살이 바다를 골고루 나눠가질 때
비로소 그녀는 날개가 되어요
저녁이 있는 자리
이슬에 젖은 무릎으로
저녁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그 자리 앉아있지
짧은 봄볕의 꼬리까지 저금해 둔 나무들은
여름을 인출해
넉넉하게 그늘을 깔아두었지
산의 능선쯤에서
소리 없이 밀고 당기는 기운에 서쪽의 눈자위가 붉어지고
소멸되고 태어나는 빛과 어둠의 지루한 릴레이
그렇게 낮과 밤을 절반씩 나눠가지며
하루는 경계선을 넘어가고
알람을 켜고 끄며 우리도 조금씩 시들어가지
천년처럼 길고 하루처럼 짧은 시간을 목에 걸고
숲에서 걸어 나와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퉁퉁 부은 저녁의 발등들
사람보다 질긴 나무는 교대식을 마친
밤의 옷자락을 나뭇가지에 걸어두지
하늘로 뻗친 가지 끝으로 새벽이 팔랑팔랑 피어오를 때까지
짧아지고 길어지는 그림자를 가늠하며
세상에 풀어놓은 빛을 거두어들일 시간,
한 그루 나무를 붙잡고 나이테를 새기고
계절을 돌아 나온 쓸쓸한 저녁의 낯빛들
아름드리 회화나무 그늘에는
밤이 오기 전 돌아가야 할 저녁이
늘 거기에 앉아있지
모과의 건축학
봄이 푸른 모닥불을 지피면
잎새 사이 타닥타닥 피어나는 분홍꽃잎들
이때쯤 나무는 허공의 각도를 측량하고
집짓기를 서두른다
설계도면을 펼쳐 시작되는 공사
봄이 낙화한 자리에 풋 열매로 주춧돌을 놓고
나뭇가지 사이사이 창을 내고
따가운 햇살을 넉넉히 들여놓는다
천둥과 비바람의 외장재,
속으로 삭힌 시고 떫은 시간들과
기나긴 장마를 말려 빚은 내장재로
둥근 집을 완성하는 모과나무 건축가
가장 먼저인 것은 내부의 견고함이다
내벽에 조밀한 향기를 바를 때쯤
건축감리사인 가을이 다녀간다
예리한 눈길을 통과한 둥근 집
꼿꼿이 받아낸 고통의 표면은 울퉁불퉁하고
노란 벽에 배어난 땀방울 진득하다
계절의 모닥불이 사위어가면
찬바람이 바삐 가지를 드나들고
모과는 집 한 채 완성하고
쿵, 나무를 떠나간다
고목 혹은 골목
오래된 골목 한 그루,
변두리에 뿌리를 내리고 도시의 민낯을
줄기에 매달고 있다
뿌리를 따라 암각화 같은 집들이
좁은 하늘을 나누어 이고 앉아
막다른 허기에 불을 밝힌다
오르내릴수록 헐거워지는 시멘트 계단위로
뿌리의 맨살이 거뭇거뭇하다
변방에서 길어 올린 숱한 발자국들이
줄기를 타고 올라
푸른 언덕을 무성히 꽃피운다
이 골목에서 늙어버린 고목들
소슬바람이 불면 도시보다 먼저
단풍이 들고 무릎이 시리다
한 잎 한 잎 지고 있는
골목 한 그루,
떨어진 발자국들이
또다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당선소감
홍계숙
여름 첫 페이지의 기록이다.
매미 울음이 여물기 전 초여름 밤은 자두 빛으로 익어갔고 그때 고요함 속으로 간간이 소나기가 뛰어들었다.
밤새 빗소리가 지나간 뒤 허공에 문이 열렸다. 여름의 첨병인 한 마리 매미 울음이 축축한 땅의 문을 열었다. 그 첫울음을 출산한 여름밤이 지나고 매미들은 허공을 장악하였다.
한겨울을 가장 눈부시게 살다 가는 것이 눈사람이라면 여름을 가장 치열하게 살다 가는 것이 매미일 것이다. 수컷 매미의 울림판 위에 뜨겁던 8월이었다. 생일 바로 전날, 선물처럼 신인상 확정 소식을 들었다. 순간, 허물을 벗고 우화하는 매미처럼 내 등에 희망이라는 날개가 돋고 있었다. 아이들을 다 키워놓고 세상으로 향했던 시선을 자신에게 되돌릴 즈음 詩는 매미 노래처럼 내게 달려왔다. 이제 마음껏 노래할 수 있겠구나. 붙들고 울어야할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보였다. 세상에 모든 사물과 현상이 시제가 되어 나를 다시 재정립했다. 나는 아직 여름이고, 가슴이 이토록 뜨거운 것은 가을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 창작 수업 중 호된 합평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문우가 울먹울먹 문자를 보내왔다. “내가 왜 시를 쓰려 했을까요?” 그 물음이 가슴 한가운데 박혀있다. 뒤늦게 詩를 다시 시작하고 한순간도 그것을 후회한 적 없지만 시를 쓰는 동안 그 물음은 안고 가려한다.
부족한 글을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먼저 머리 숙여 감사를 전한다. 시적詩的 인식 정립을 도와주신 마경덕 선생님, 책나무 출판사 임정일 선생님, 습작의 글을 독자들과 활발히 소통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카카오채널 문학세상 윤동렬 시인님, 시 창작교실 영등포 문우들과 카카오스토리 달빛글방 모든 가족들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뒤늦게 시詩에 빠진 아내와 엄마를 이해해준 가족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이 등단을 계기로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한 치열한 내적고투의 글을 쓰는 시인으로 거듭나고 싶다. 어렵게 주어진 기회인만큼 낮은 자세로 시제詩題의 자리마다 향기롭게 글밭을 일구리라 다짐해본다.
심사평
심사위원 강현국 ·엄원태(글)
예심을 통과한 열 분의 백 편 남짓한 시들을 일독한 첫 느낌은, 여전히 많은 분이 좋은 시를 쓰고자 열정을 다하고 있다는 위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느낌은, 참 시들이 고만고만한 말들에 머무른 듯해서 아쉽다는 것이었다. 시가 안 읽히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시인과 시들은 범람하는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는 듯해 조금 씁쓸했다.
『시와반시』 신인상의 투고 성향이라 할 새로운 ‘전복적 상상력’의 실험적인 시편들이 이번엔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대신 적지 않은 공부의 내공을 보여주는, 기본기를 잘 갖춘 수준급 시편들이 대부분이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시를 써야만 하는 절실한 진정성과 삶의 구체적 세목細目들을 놓치지 않는 감각과 사유의 깊이와 넓이, 자신만의 어법으로 참신한 언어의 결을 보여주는 괄목한 신인은, 아쉽게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릇 예술이 그러하듯 ‘기본기’를 통해서야 최소한의 표현 수단인 어법이나, 주법奏法/필법筆法 등이 비로소 발현된다. 그러나 예술은 기본기 ‘너머’의 그 무엇에 도달해야 하는 숙명이라 할 지향점을 가진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언어를 통해 언어 ‘너머’의 그 무엇의 이르고자 하는 자이다.
최종적으로 다섯 분의 작품들을 놓고 거듭 읽으며 숙고에 들었다. 멀리 호주에서 투고해 온 김수진 씨의 ‘Aequori 외 9편’은 사물을 새롭게 보려는 태도와 독특한 행간의 호흡이 참신하게 읽혔다. 그러나 생경하다 할 정도로 적실하지 못한 단어들의 어색한 조합이 거슬렸다. 이질적인 말들의 성긴 조합만으로는 좋은 시적 모호성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되새기며 정진하기 바란다.
강진영 씨의 ‘헬로우 스마일 외 9편’은 먼저 그만의 사변적이라 할 시적 언술 태도가 돋보였다. 실험적이라 할 만큼 개성적인 화법을 보여주는 것도 특장점이라 하겠다. 하지만, 일상의 가벼운 사변이나 아기자기한 감정들의 치장에 머무른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요즘 젊은 시인들이 즐겨 쓰는 ‘가벼운 상상력’의 시편들을 답습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오로지 자신만의 사유를 획득하기 바란다. 가벼움은 단순히 무거움을 외면하는 데서 생겨나선 안 될 것이다. 일상의 지리멸렬에 대한 응전방식으로서의 전략적 가벼움이라면 좋겠다. 기대해 보겠다.
박혜정 씨의 ‘일요일의 사람 외 9편’은 기본기의 교과서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언어들은 단정하면서도 발랄하고 세련되었으며 언어도단의 시적 아이러니마저 능숙하게 구사한다. 처음엔 당선을 염두에 두고 읽었으나, 고심 끝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자주 등장하는 죽음과 침실/지하실의 시적 세계가, 조금 더 고통스러운 의미의 자장을 잘 견뎌내며 통과해서 나름의 숙성과 진정성에 이르기 바란다. 그렇게 되면 그는 분명 좋은 시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다만 시간과 경험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홍계숙 씨의 ‘뿔의 자리 외 9편’은 응모자 중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말의 결을 다룰 줄 아는 원숙한 어법을 보여준다. 문장은 단단하고 사유는 일정한 존재론적 깊이에 닿아있다. ‘뿔의 자리’, ‘미니멀 라이프’, ‘저녁이 있는 자리’ 같은 가편들은 놓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저력 같은 게 있다. 다만 때로 상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편들이 보여 염려되는 바 없지 않다. 존재의 근원적인 한계에 대한 시적 인식의 깊이를 더해 주기를 바란다.
끝으로 박형민 씨의 ‘노량진에서 쓰는 일기 외 11편’은 응모자 중 가장 진솔하고 거침없는 화법을 구사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아직 젊어 보이는 연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직면하고 성찰하려는 태도에 있다. 그의 분방한 시적 언술은 자칫 치기만만한 방백에 그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주기도 한다. 그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선자들은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서 보기 힘든 이런 치열한 현실 인식의 시적 태도를 귀하게 사고 싶은 것이다.
고심초사를 거듭한 끝에, 최종심에 선고된 분 중 양극단의 모습을 보여준 두 분, 박형민 씨와 홍계숙 씨를 공동당선자로 천거하기로 한다. 두 분의 시는 상호보완의 모습으로 읽힌다. 이 상호보완의 조합은 결코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닐 게다. 오로지 각자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나름의 뼈저린 성찰과 시적 인식의 거듭남을 통해 마침내 이르러야 할 그 ‘너머’의 무엇이다. 모쪼록 등단을 계기로 정진 또 정진하기 바란다. 이번에 아쉽게 탈락한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격려를 전한다. 그들은 이미 좋은 시인들임이 분명하다.
홍계숙 시인
초등학교 교사
2017년 상반기 <시와반시> 신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