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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가해 6월26일 월요일 [(녹)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수도회]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는 겸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창세 12,1-9
† 복음 마태 7,1-5
◈ 오늘의 묵상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편안해져야 할 텐데, 오히려 더 팍팍해져
갑니다. 그것은 자꾸 우리의 시선이 주변 사람들에게 가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을 이웃과 비교하고, 내 삶 안에서의 옳고 그름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판단과 참된 성장은 하느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려면 주변을 기웃거려 내 시선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브람은 고향과 친족을 버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여행을 떠납니다. 그의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러 가기 위한 것이
아니고, 무언가를 잊어버리려고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참된 음성을 들으려고 떠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안에서 내 삶의 방향을 제대로 확립할
때, 비로소 경쟁도 건강해집니다. 내 안에 좀 더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좀 더 최선을 다하도록 나를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상대방의 성장도 축하해 줍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경쟁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나의 성장을
멈추게 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비하나 비난으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면, 내 눈 속의 들보는 저절로 보이고,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남을 심판하지 마라.
2017년 가해 6월26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제1독서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1-9
복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5
예전에 텔레비전을 통해서 2Km 이내의 거리는 걷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걷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웬만한 거리는 무조건 걸으려고 합니다. 사실 차를 타면서 볼 수 없는
것을 걸으면서는 잘 볼 수 있기 때문에 걷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런데
한 번은 걷고 있는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것입니다. 도저히 걷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버스정류장에 섰습니다. 버스가 도착해서 올라타서 승차권 단말기에
지갑을 접촉시켰지요. 지갑 안에 교통카드 신용카드가 들어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버스에서 내려야만 했습니다. 지갑 안에는 현금도
없이 교통카드 기능이 없는 신용카드 한 장만 있었던 것입니다. 비도
오는데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통카드를
자신 있게 단말기에 대면서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부럽던지요.
그리고 집에 두고 온 교통카드 기능이 있는 신용카드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평소에 가지고 있었지만 별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뜻밖의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니 그 어떤 것도 고맙지 않은 것이 없겠다
싶습니다.
언젠가 어떤 글을 읽다가 ‘라면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라는
질문이 눈에 띄었습니다. 정답은 무엇이었을까요? 꼬들꼬들하게
끓인다, 계란을 넣고 파를 송송 썰어 넣는다, 다 끓인 뒤에 찬 물에
그릇째 넣어서 식혀 먹는다 등등의 답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답은
‘몇 끼 굶은 뒤에 먹는다.’라고 합니다. 하긴 몇 끼 굶은 상태에서 먹는
라면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감사한 음식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어떤 것도 의미 없지 않습니다. 그 의미를 찾는 방법은 누리고 있는
것을 없이 지내게 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의미를 찾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연관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나에게 의미 없는 사람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멀어지면서 그 사람의 의미를 발견하곤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가까이 있을 때 잘 해주지 못했음에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남을 심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사람 본래의 의미를 보지 못하고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즉, 심판하는 가운데에서
그 사람의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역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소중한
것처럼 남 역시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분명히 모든 사람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혼자서 고독하게 뭔가를 해내는 일은 멋지지만,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국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김연수). .
들보가 뭔지 모르실까봐....
용서는 사랑의 완성입니다(최천호)
용서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라 합니다.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 참된 사랑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용서는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복은 보복을 낳는 법입니다. 확실히 상대방을
보복하는 방법은 그를 용서하는 겁니다.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처지가 되어 살아 보아야 하고 그
사람의 마음 속 아니 꿈속에까지 들어가 봐야 할 겁니다.
우리는 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설령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상대방의 실수를
용서해주세요.
나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요.
용서가 사랑의 완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더욱 더 가까이하면서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늘 우리편이 되어주시는 성모님.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는 겸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2017년 가해 6월26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마태 7,1-5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보는 겸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어떻게 관계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해 권고하신 것이지요. 먼저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7,1-2)
하십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나는 남을 심판할
때 우리도 주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심판권을 침해함으로써 다른 이의 구원의 길을 막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 구원에 대한 심판은 우리 영혼을
지으신 하느님의 권한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심판할 때, 그
사람이 영혼 구원으로 가는 길을 막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단죄하는 잘못은 한마디로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한 탐욕에서 나온
교만입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주인인양 다른 이의 영혼에
대해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내 영혼을 창조하신 분도,
나의 어둠을 지켜보시는 분도, 나를 빛으로 이끌어주시는 분도 오직
주님이심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약하고 힘없는 사람, 병자, 소외된 이들을 쉽게 판단하고
업신여기곤 하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늘 그들 편에 서 계십니다.
곧 우리가 그들을 판단할 때 하느님을 판단하고, 주님의 성체를
모독하는 것에 다름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7,3.5) ‘들보’란 수박 겉핥기식 시선, 왜곡된 시선,
악의적인 시선, 비합리적이고 고착된 사고의 틀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배제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눈길을 일컫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그 누구도 남의 인간됨됨이를 제대로 알 수 없고, 어떤
일의 원인과 결과, 그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남의 속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남을 판단할
만큼 잘 알지 못하며, 의롭지도 선하지도 않음을 자각할 필요가
있겠지요. 주님의 영에 젖어 바라보는 "속깊은 눈길"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의 명신(名臣) 범순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남을 나무라는 데는 총명하고, 총명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용서하는 데는 어리석다."
(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 똥뭍은 개가 겨 뭍은 개
나무라듯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따라서 먼저 자신의 큰
허물을 알아보고 고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남의 탓할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만 특이하다 할 일이 아니지요. 그 사람의 영혼 구원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으니 그 누구도 단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 사람
안에 숨어있는 ‘아름다움’과 ‘선’을 보고, 그의 아픔과 말못할 사정을
헤아리도록 해야겠지요.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겸손과, 나의 허물을 살피고 가슴
아파하며 내 영혼의 눈을 깨끗이 닦는 자기살핌이 선행될 때, 우리는
관계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깨끗하고
순수한 영(靈)의 눈과 사랑 깊은 관대함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봄으로써,
애정깊은 형제적 관계,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나갔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 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7년 가해 6월26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 5)
먼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먼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일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를 위선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위선자가 되지 않기위해서는 먼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내야합니다.
저 우리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이는 겸손한 사람일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성찰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지속적인 회개가 되기위해서는하느님만을
갈망하는 기도의 실천이 요구됩니다.
기도의 실천은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그라들고 구부러진 우리 마음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올바로 기도하는 사람은 남을 결코 심판하지 않습니다.
올바로 보기위해 먼저 우리의 욕심이라는 마음의 들보를 빼냅시다.
들보가 있었던 자리는 실은 예수님께서 계셔야할 자리입니다.
우리 마음안에 있는 들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은 온전해 질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2017년 가해 6월26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 7,1-5
제가 머무는 명동의 숙소는 땅값이 무척 비싼 곳이라고 합니다. 가끔
동료 신부님들이나, 교우분들이 비싼 땅에서 지낸다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땅은 ‘대지, 전답, 임야’로 구분되는 것
같습니다. 집을 지을 수 있고, 빌딩을 지을 수 있는 대지가 가격이 높을
것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답이 그 다음으로 가격이 높을
것입니다.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임야는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을 것입니다. 명동은 대지이고, 교통이 편리하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고, 뒤에는 남산이 있고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기 때문에 가격이
비싼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땅’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머물 수 있는 ‘에덴동산’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아브람에게도 새로운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집트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느님께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을 약속하시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땅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어기면 살 수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입니다. 땅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을 떠날 때, 땅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땅 때문에 싸울 일도 없고, 땅 때문에
마음이 상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땅에서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06년부터 안경을 쓰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지낼 때입니다. 길가의
표시판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영어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시력이 나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안경을 쓰고
길을 보니 표시판이 잘 보였습니다. 표시판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경에 이물질이 묻어있으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안경을 잘 닦아주면 다시금 잘 보이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이물질이 생기곤 합니다. ‘원망, 욕심, 시기, 질투, 교만, 불안, 걱정’의
이물질이 생기곤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일그러져 보입니다. 나의 탓을
하기보다는 세상을 탓하고, 이웃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이웃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부모를
바꿀 수도 없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세상이 새롭게 보입니다. 이웃의 허물도 이해하기
됩니다. 부모님께도 감사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마음에 ‘희망, 사랑,
믿음, 겸손, 인내, 친절, 온유’가 자라나면 다초점 렌즈보다 더 선명하게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내가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내가 믿음의 눈으로
이웃을 바라보면 이웃이 그렇게 믿음직해 보입니다. 내가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면 진흙 속에서 피는 연꽃이 보입니다. 고통 속에서
태어나는 아기가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먼저 당신
눈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2개 있습니다. 하나는 그동안 준비했던
강론들입니다. 일 년에 한권정도의 강론집이 생깁니다. 그 강론에는
저의 삶과 저의 생각들이 들어있습니다. 또 하나는 앨범입니다.
앨범에는 제가 신학생 때부터 찍었던 사진들이 있습니다. 가끔씩
앨범속의 사진들을 보면서 저의 지난날들을 떠올립니다. 강론집과
앨범은 저의 지난 시간들의 발자국입니다.
바닷가 모래 위를 걸어가면 뒤에는 발자국이 남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어떤 발자국을 남기면서 살아야 할까요? 겸손의 발자국,
성실의 발자국, 사랑의 발자국을 남기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청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7년 가해 6월26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마태7,1-5)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입니다. 남의 보기
싫은 모습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럭저럭 살아갈
때가 이 꼴, 저 꼴 안보고 마음이 편했습니다. 차라리 옛날처럼
살아가고픈 마음이 가득합니다. 언제쯤‘저 사람은 왜 저 모양일까?’
하는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지 말고, 남을 되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자신의 들보를 빼내야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으니 먼저 자신을 점검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운지라 여전히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지 못하고 남의 약점을
들추어내곤 합니다. 자신은 완벽하고, 다른 사람은 허물투성이처럼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이러다가 결국 누군가에게 똑같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더더욱
하느님께로부터 그렇게 심판을 받는다면 지금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입니다. 나에게 부드러운 만큼 타인에게도 부드럽기를 희망합니다.
남에게 엄격하기에 앞서 나에게 엄격하고 절제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자기성찰을 한다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자신을 살펴본 후에야 남을
도와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정한
사랑으로 도와줄 수 있습니다. 혹 남보다 내가 낫다는 마음을 가지고
누구를 돕는다면 받는 사람은 고마움보다는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잘 될 수 있도록 충고한다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내 삶의 모범 없이 강요하는
가르침이라면 상처만 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자기성찰을 한 후
행동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움은 기꺼이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옛 말씀도 “자기 몸을 닦은 뒤에 집안을 거느리고,
자기 집안 거느린 뒤에 나라를 다스린다.”
身修而后家濟, 家濟而后國治-대학- 고 했습니다. 자기 성찰이 모든
행위의 처음과 나중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자기성찰에 충실한 열심과 정열이 주어지길
기대합니다. 잘못된 열심은 영혼을 상처 나게 합니다.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이 더할수록 하느님 앞에 나를
비추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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