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74
12월16일[대림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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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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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6_ahbe8TcDQ
[작은형제회 조기영 안드레아(수원교구 세류동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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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
존경하는 선배께서 오래전 겪은 참담한 체험입니다. 한 모임에 참석하셨는데,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하고 실행하는 모임이었답니다. 거기에는 나름 좀 배웠다는 사람들이 다 모였는데, 모임 시작 때 쭉 돌아가면서 각자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특히 제일 관심을 끄는 질문은 “어느 대학에서 유학하셨습니까?”이었습니다.
들어보니 다들 말로만 듣던 엄청난 대학, 국내외 유수 대학에서 오랜 세월 공부한 박사님들이었습니다. 우리 신부님 차례가 되었는데,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셨답니다. “저는 사제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신학 공부 외에 다른 학력은 없습니다.”
그랬더니, 회의 중간에 담당자께서 조용히 신부님에게 다가오시더니, 귓속말로 그러더랍니다. “다음 모임에는 안 나오셔도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쌓아온 학력, 경력, 자격증, 스펙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 안에서 가방끈 긴 사람들 중 으뜸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수석 사제들이었습니다. 유다교를 대표하는 중요인사들이자 권위자들이었습니다.
한편 백성의 원로들은 정통 율법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사람들로서, 유다인들 사이에서 막강한 정치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제한된 권력이었지만 유다 사회 전반을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보아하니 예수님은 정식 율법학교 졸업생도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문하생도 아니었습니다. 교수 자격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자격자인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공식적인 허락이나 승인도 없이 성전에서 가르침을 펼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에 백성들이 환호하고 열광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심기가 많이 불편해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따져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있어서 목숨처럼 중요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권한이었습니다. 합당한 절차와 자격, 제도와 법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교사자격증도 없는 주제에 ‘야매’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며 예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처럼 어리석은 질문은 다시 또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 아버지와 모든 것을 공유하는 분이십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분입니다.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이치를 다 깨달은 분이십니다. 스승 중의 스승, 참스승이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 모든 피조물 전체, 인류 전체에 대한 권한을 당신 손에 쥐고 계신 분입니다.
이런 예수님께 한없이 부족하고 철딱서니 없는 한 인간이 예수님의 자격유무에 대해서 따져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보면 정말이지 기가 차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마치 5살짜리 유치원 아이가 한 분야를 완전히 터득한 대석학, 박사학위 심사를 심사하는 석좌교수에게 무슨 자격으로 가르치느냐고 따지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을 않는 편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장난에 개의치 않으시고 당신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노림수가 분명할뿐더러 잔뜩 꼬이고 꼬인 그들의 질문이 조금도 진실하지 않았기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을 거부하십니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할 텐데 그들의 질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려면 질문 자체가 진실된 질문이어여 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성의 있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한 질문, 영혼의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질문이어야 하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질문은 한 마디로 어리석은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응답(無應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삐뚤어지지 않고 정직한 사람들은 모두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이 보내신 마지막 대예언자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듯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을 선포한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있었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분의 성령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며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실 자격과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의 강력한 지지와 후원을 받고 세상 모든 인간의 권한 위에 서 계십니다.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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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3CCcjQrd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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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거룩함이 기적보다 큰 증거다>
오늘 복음도 세례자 요한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관한 논쟁입니다. 먼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이 만약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 왜 그가 증언한 나를 믿지 않느냐?”라고 할 것이고, 땅(사람)에서 왔다고 하면 그를 하늘에서 보낸 사람으로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을 것 같아서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세례자 요한을 대하는 그대로 나도 너희를 대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관심이 없다면 예수님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말 몰랐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니 똑똑한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의 거룩함을 못 알아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기적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기적을 하시는 예수님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알아보지 않으려 한 것으로 자기 양심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이 처음엔 윤석열 정권을 적극적으로 동조하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전에는 없었을까요? 일반 국민도 그가 말하고 토론하는 것 안에서 그 사람이 정상이 아님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치 빠른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그것을 못 알아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일상의 삶은 마지막 큰 사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거짓말을 하는 이는 결국 다른 거짓말로 자신을 다시 끌어올릴 것입니다. 아랫글은 이에 관하여 한 유튜브 구독자가 어떤 동영상에 올린 댓글입니다.
“그냥 일반인이 봐도 참모한테 반말에 욕, 일반시민한테도 반말, 손에 왕자 적고 토론, 기차 좌석에 구두 신은 채로 발 올린 거 등등. 그냥 봐도 딱 토론 수준만 봐도 ‘저놈이 대통령 되면 나라 망하겠네’ 생각하고 당선되었을 때 친구들한테 ‘야 우리나라 경제 정치는 망했다.’라고 했는데 언론인이나 정치인처럼 눈치 빠른 놈들이 모른다고? 천만에 다 알고 있었지. 그냥 저놈 대통령 만들고 지들 빼먹을 거 생각한 게 맞지.”(@jjaryno77)
그래서 일상에서 풍기는 것으로 그 사람을 못 알아본다면 그건 거짓말이고 잘못된 의도로 눈이 먼 것일 뿐입니다. 기적을 요구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거짓말 시키는 본질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말 바꾸기를 할 뿐 언제든 자기 생존을 위해 또 거짓말로 현실을 왜곡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기적보다 우리 작은 일상이 신앙의 증거입니다. 이 증거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기적만 청한다면 이는 그저 믿기를 원치 않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1990년대 알제리의 작은 마을 티브히린, 이곳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지역 무슬림 공동체와 함께 조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수도자들은 시편을 노래하며 기도했고, 낮에는 밭을 일구고, 의사를 겸한 뤽 수사가 주민들을 치료하며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뤽 수사는 환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단순히 환자가 아닙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이들의 삶은 기적 없이도 주민들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알제리를 휩쓸던 내전과 이슬람 극단주의의 폭력은 이 평화로운 공동체를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주의자들이 마을에 찾아와 수도자들에게 협박을 가한 날, 크리스티앙 수도원장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무기를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극단주의자들을 설득하여 마을을 떠나게 했지만, 그 위협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위험 속에서도 수도자들은 자신들이 떠날지, 남아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갈등했습니다. 한 수도자는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우리의 목숨을 잃는 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일까요?”
크리스티앙은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떠나는 것은 우리의 소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도와 공동체 회의를 통해 남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단순히 고집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수도자들은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는 장면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부르심을 회상하며 침묵 속에서 와인과 빵을 나누었습니다. 뤽 수사는 눈물을 머금고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이 순간이 하느님의 평화로 가득 찬 순간임을 믿습니다.”
1996년 3월, 수도자들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 납치되었습니다. 두 달 후, 그들의 죽음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잘린 머리만이 남겨졌습니다. 영화는 수도자들이 눈 덮인 산속으로 호위되며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들의 침묵은 말보다 강렬하게 그들의 믿음과 평화를 증거합니다.
수도자들이 떠난 후, 그들과 함께했던 마을 주민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주민들은 이들을 “우리의 형제들이자 하느님의 사람들”로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을 자신들의 삶에 새겼습니다. 한 주민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믿도록 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거룩한 삶이야말로 신앙의 가장 강력한 증거임을 보여줍니다. 수도자들의 기적 없는 단순한 삶, 그리고 사랑과 희생의 선택은 하느님의 현존을 세상에 증거하며, 그들의 피로 물든 땅은 새로운 화해와 평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수도자들을 순교자로 공식 인정했으며, 다른 알제리 순교자들과 함께 알제리 오랑에서 시복되었습니다. 이는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과 신앙이 그리스도교적 삶의 모범임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일상의 삶으로 그 일을 시킨 누군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기 안에 뱀이 있고 사탄의 노예임을 증거하는 것이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은 그 일을 시킨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기적이 아닌 일상의 작은 표양으로 표현되어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거룩한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면서도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기 주인을 버리기 싫어서 보지 못하는 척하는 것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증거가 없었다고 하지 맙시다. 모든 사람이 증거가 없어도 믿을 수 있다면 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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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회는 2025년을 ‘희망의 희년’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님은 2025년 사목 지침으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번 희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희망의 순례자’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희년의 목적과 의미는 그저 ‘전대사를 얻는 좋은 기회’에 그치지 않고, ‘구원의 문’인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뜨겁게 하는 해로 우리를 초대함에 있습니다. 이 뜻깊은 희년에 예수님과 더욱 깊은 만남을 이어가면서, ‘우리의 희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번 ‘희년 선포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에서 ‘모든 희년 행사의 근본 요소는 순례’라고 하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순례 여정을 나서는 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도보 순례는 침묵, 노력, 단순한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됩니다.’라는 교황님의 말씀대로, 순례는 ‘우리 인생이 바로 순례하는 여정’임을 묵상케 합니다. 도보 순례에서 흘리는 땀방울을 통해 우리네 삶에서 땀 흘리는 수고로움의 고귀한 의미도 되새기게 되고, 순례 여정을 함께 하는 우리가 모두 영원한 생명을 향해 시노드 여정을 함께하는 길동무임을 새삼 고맙게 느끼게도 됩니다. 나아가, 도보 순례는 이 세상에서 ‘지나가는 것’과 ‘영원한 것’을 묵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5’를 읽고 있습니다. 2025년의 ‘화두’는 ‘지킴과 바꿈’이라고 합니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지킴’이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그 경쟁력을 잘 보여준 나라가 일본입니다. 일본은 대기업에 다니던 아들이 시골의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식당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본은 200년, 3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식당들이 많습니다. 일본은 그런 장인 정신으로 제조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한번 기업에 들어가면 평생, 직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기업도 그런 직원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1980년대에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그런 일본을 부러워했습니다. 한국의 문화, 예술, 경제는 일본을 모방하였습니다. 디지털 시대에는 ‘바꿈’이 경쟁력이 있습니다. 지킴으로는 일본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한국은 과감하게 ‘혁신과 개혁’을 선택했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아내 말고는 다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디지털의 생태계에서 변화와 혁신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블루오션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아직도 팩스와 도장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반면 한국은 전자결재와 인터넷으로 기업을 운영합니다. 일본은 아직도 음반 판매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는데 한국은 음원과 유튜브로 음악시장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BTS, 유진스와 같은 가수들이 세계 음악시장에서 성공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모두 선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 관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유대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개혁과 혁신’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들에게 권위의 근거는 전통과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전통과 율법을 뛰어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바로 율법과 전통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혈연으로 맺어지는 형제와 자매의 ‘틀’도 과감하게 바꾸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이 모두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풀잎 끝에 맺혀 있는 이슬방울 같은 인생을, 피었다가 지고 마는 꽃잎 같은 인생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형벌의 도구였던 십자가를 영원한 생명의 표징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신학교에서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배웠습니다. 교회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복음의 메시지를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전통을 유지하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완전히 드러내고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려는 소명을 뜻합니다.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성찰하고 새로워지는 공동체로 남아야 함을 상기시키는 신학적 원리입니다. 이는 교회의 살아 있는 신앙과 시대적 책임,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 안에서의 지속적 변화와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성찬에 참여한 저희가 덧없이 지나가는 현세를 살면서도 지금부터 천상 양식에 맛 들여 영원한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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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23-27: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는다. 그들은 위대한 기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 기적들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터였고, 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 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사실 그들은 요한이 하늘에서 왔는지 사람에게서 왔는지 몰랐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 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고 하신다. 즉,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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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의논합니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마태 21,25-26) 이들의 마음 안에는 ‘다른 이들에게 받게 되는 평가’와 ‘체면’에 대한 생각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르겠소.”(21,27)
하느님을 의식하는 신앙생활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면 하느님 앞에서 진실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죄를 고백하면 신부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생각 때문에 용서를 청해야 할 때 “모르겠소.”라고 대답해 버립니다. 하느님을 찾아야 할 순간에도, 그분의 말씀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에도, 한사코 “모르겠소.”라고 대답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1,27)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며 “모르겠소.”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다. 만일 신앙생활이 메말라 가고 기도 안에서 하느님 체험이 사라지고 있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의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처럼 다른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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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은 하느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3-27)
1) 여기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라는 말은, “아무 권한도 없으면서 왜 당신 마음대로 이런 일을 하는가?”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좁은 뜻으로는 ‘성전 정화’를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전체를 가리킵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이 말하는 ‘권한’은 유대교에서 주는 권한을, 즉 제도권 안에서의 권한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권한을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사제들과 원로들의 눈에는, 제도권 밖에 있는 예수라는 ‘야인’이 어느 날 갑자기 예언자 행세를 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이 대부분 제도권의 ‘밖에’ 있었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언급하시면서 ‘반문’하신 것은, 대답을 회피하신 것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에게는 권한을 어디에서 받았느냐고 묻지 않았으면서, 왜 나에게는 그것을 묻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라는 말씀은, “세례자 요한은 이미 나에 대해서 증언했다. 너희가 요한의 증언을 믿는다면 내가 권한을 하느님에게서 받았음을 믿을 것이고, 나를 믿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백성들은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었고, 그 믿음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제도권 안에 있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도...... <앞의 3장을 보면,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세례를 받으려고 세례자 요한에게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마태 3,7)>
그러나 “나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라고 자처하는 위선자들은, 겉으로는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인정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요한의 회개 선포를 무시했습니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것을 믿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3)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라는 말은, 사제들과 원로들이, 요한을 보내신 하느님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한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재물만 섬기고 하느님은 섬기지 않은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우리는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의 세례를 받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4) 여기서 “모르겠소.”라는 사제들과 원로들의 말은, 정말로 몰라서 한 말이 아니라, “관심 없다. 말하기 싫다.”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정말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회개 선포에 대해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심 갖는 것은, 자신들의 지위와 재산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정말로 메시아인지에 대해서도, 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같은 일을 하심으로써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험하게 하신 것만 신경 썼습니다.>
5)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너희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면, 너희는 나의 복음을 들을 자격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자격이 없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으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고,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마태 18,14),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에서 아예 배제하신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사제들, 원로들 같은 위선자들과 기득권층 사람들도 회개시켜서 구원해야 할 ‘잃은 양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인간 쪽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회개와 구원을 ‘저절로(자동적으로)’ 얻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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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 우리는 '오시는 분이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파견되셨는가?' 하는 물음을 대면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다가와 이렇게 묻습니다. 말하자면 '자격' 논쟁이지요. 한낱 떠돌이 설교가인 목수 출신 가난뱅이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중심지인 성전에서 공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있느냐 하는 물음일 겁니다.
사실 예수님은 레위 지파나 아론 가문이 아니십니다.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파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시지요. 전통적인 교육을 받지도, 어느 계보를 잇거나 소속이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그 흔한 타이틀조차 없으시지요. 이런 예수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마도 무자격자에 가깝겠지요.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5)
그들의 의도를 정확히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요한에게 해당하는 답이 곧 예수님께도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나 예수님 모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존재들이기에 모든 권한을 하느님에게서 받았습니다. 하지만 "권한"을 인간적인 것으로 끌어내려 제도화한 이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세속화하고 권력화해서 거머쥔, 곧 사유화한 "권한"에 줄을 대지 않은 모든 행위는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우매한 민중을 교란시킬 수 있는 도전일 뿐입니다.
"모르겠소."(마태 21,27) 사실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모르겠습니다"라는 인간의 고백은 피조물로서 참으로 솔직하고 진실된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의 종교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그만큼 겸허하거나 진솔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답을 모르지 않는 그들이 모른다는 답을 택합니다. 답을 고르다 보니 자기들이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걸 안 게지요. 그래서 불리한 답을 하느니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편을 선택합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
그런데 예수님은 '나도 모른다'고 하시지 않고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이신 그분이 모르실 수 없으니, 혹 모른다고 하시면 거짓말이 될 겁니다.
발설되지 않은 말씀이 웅변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이시고, 그분의 가르침과 용서, 치유와 기적 등 모든 것이 "이루어진 말씀, 실행된 말씀"이십니다. 굳이 언명체계를 통해 답하시지 않아도 그 답은 이미 선포되었고 이루어졌으며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무언으로 답을 하신 겁니다. 사실 그 답은 묻는 이들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한 상태였을 겁니다.
제1독서에는 발라암이라는 이방인 예언자가 등장합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에 겁을 먹은 모압 임금이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라암을 불러 요청한 것입니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민수기 24,5)
그런데 그는 저주를 내리라는 모압 임금의 채근(採根)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에게 경탄을 보내며 도리어 그들을 축복합니다.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민수 24,4)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기 24,17)
이방 예언자의 입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이 이루실 일을 말씀하십니다. "별"은 모압을 물리친 다윗 임금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까지도 암시합니다. 먼먼 구약시대 초기에 오늘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방인의 입을 통해 언급되신 것이지요.
발라암도 모압 임금도 참 당황스러웠겠지요. 발라암을 부른 모압 임금은 제 목적을 이루기는커녕 되려 적에게 좋은 일만 한 꼴이 되었고, 발라암 역시 부탁받은 바를 이행하지 못했으니까요. 발라암은 후일 이스라엘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만(민수 31,8) 적어도 그는 제 이익을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조작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전한 성경 속 인물로 남습니다. 그로써 그의 예언자적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왔음을 증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도 하느님의 영께서 일러주신 것만을 전하십니다. 그 말씀이 당신께 해가 되어 돌아온다 해도 굽히지 않으시지요. 자기들의 안위를 위해 "모른다"고 발뺌하는 종교 지도자나 원로들과는 완전히 결이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느님에게서 모든 권한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치유와 용서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이고 바람입니다. 사실 세상에 마련된 제도와 조직, 소속과 권한은 세상의 편의와 질서를 위한 것이니 존중해야 하고, 그것이 신적 질서와 맞닿아 있다면 더욱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다만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목도(目睹)하면서도 그 앞에서 자격부터 따지는 모습은 영역 다툼이나 밥그릇 싸움처럼 치졸해보여 낯뜨겁습니다.
하늘 나라의 질서를 제 식대로 조작할 때, 하느님 말씀에 자기 본위를 섞을 때 권한은 힘과 빛을 잃습니다. 모르는 것 같지만 대하는 사람들이 다 느끼지요. 그럴수록 인간적인 힘과 제도를 보완하고 치장하며 권한을 강화하려 해도 "하느님의 영"(민수 24,2)이 퇴색된 권한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뜻을 점점 더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권한을 받은 분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그분이 선포하고 이루시는 "어질고 바른"(화답송) 하느님 나라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있나요? 혹 성당에서나 그 권한과 질서를 믿고 따르다가, 집과 직장과 모임과 관계 안에서는 철저히 세상 이치를 추구하는, 분열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다가 혹 오시는 주님 앞에서 누구들처럼 "모르겠소" 하고 발뺌하게 되지는 않을는지요...
성탄을 향해 더 깊고 진하게 무르익어가는 이 기다림의 시기에 권한 논쟁이 던지는 화두에 진솔하게 머무르는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이사야 예언서 24,16)는 복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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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예수님과 종교 지도자들의 갈등은 더욱 깊어집니다. 마태오 복음 21장 23절─22장 46절에서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수난 전 반대자와 하신 마지막 논쟁을 보도합니다. 이 부분은 다섯 가지 논쟁과 세 가지 비유로 구성되는데, 오늘 복음은 첫 번째 논쟁 사화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권한을 의심하며 묻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메시아로서 공개적으로 보여 주신 활동 (성전 정화, 병자 치유, 무화과나무 저주) 때문에 반대자들과 대결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한이 하느님에게서 직접 왔다고 스스로 인정하시도록 강요함으로써 그분께 신성 모독이라는 죄명을 씌워 죽음으로 몰아가려고 합니다.(마태 26,65-66 참조)
반대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질문 형식으로 답하십니다. 라삐 논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러한 방식은 반대자들의 질문에 직접적 답변을 피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가 오로지 하느님께 근거한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적대자들을 무력한 침묵에 빠지게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도 당신처럼 하느님에게서 파견된 이로서 신적 권한을 가지고 활동하는 예언자라고 인정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이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나요? 예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활동하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고자 하시지만,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지키려고 예수님의 권한을 의심하면서 그분의 죄를 단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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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오.21.23)
살면서 사람과 세상을 위해 하는 좋은 일들은 하늘나라의 일입니다. 이타적인 사랑을 하며 진리와 정의를 위한 일은 하늘나라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많은 관계 속에 얽혀 우리는 많은 일을 하면서 살지만, 그 중에서도 하늘나라의 본질적인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의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좋은 양심입니다. 우리는 좋은 양심을 길러야 합니다.
양심이라고 다 좋은 양심은 아닙니다. 양심은 부지런히 닦아야 좋은 양심으로 됩니다. 주님의 사람들은 좋은 양심에 따라서 삽니다. 세상의 모든 법은 인간의 좋은 양심에 그 기초를 둡니다. 모든 인간에게 유익한 보편성을 바탕으로 법을 만들고 그 법은 모두를 더 자유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편적인 진리에 따라 법이 집행되지 않으면 좋은 양심들은 소리를 치게 됩니다. 좋은 양심의 소리를 내는 예언자적 소명은 주님께서 주신 천부적인 권한입니다. 양심의 소리는 이 땅에서 때로는 천둥처럼 울리며 번개처럼 파고드는 하늘나라 주님의 음성입니다. 아무도 이 땅에서 거슬러서는 안 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좋은 양심으로 사는 사람들은 양심의 빛이 세상을 아름답게 비추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세상을 만드는데 삶을 투신합니다. 하지만, 이기적인 욕심에 얽매여 사는 사람은 양심을 자주 외면합니다. 속물 근성에 젖어 살면 현실적인 자신의 권한만을 따지지만 좋은 양심은 하늘나라의 자유가 이 땅에서 빛나게 합니다.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권리는 사람과 세상을 억압하고 통제하지만, 좋은 양심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 권한은 사람과 세상에게 자유를 줍니다.
권력에 집착하며 기득권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무슨 권한”이냐고 따지지만, 좋은 양심으로 사는 주님의 사람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는 권한’이냐고 묻습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받은 권한’이냐고 따지지만, 좋은 양심을 외치는 주님의 사람은 ‘누구를 위한 권한’이냐고 묻습니다.
법의 본질인 좋은 양심을 드러내시는 주님께서 법으로 사람들을 억누르고 횡포를 부리던 기득권자의 어리석은 질문에 지혜로운 답을 주십니다. 좋은 양심에 따라 진리와 사랑 그리고 선한 일을 하도록 외치며 행동으로 옮기는 것과, 자유와 정의와 평등과 평화를 누릴 권한은 하늘나라의 주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천부적 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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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세상을 떠나 홀로 있고 싶은 마음>
+찬미예수님
사제로써 살아가다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본당 신자분들과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의 학생들, 외부 강의에서 만나는 분들을 비롯해 유학 시절 만난 많은 분들, 그곳의 친구들과 신자분들과 동료 사제들 모두가 지난 시간 제가 만나온 이들입니다. 그밖에도 친분이 있는 경우가 아닌 익명의 사람들도 자주 만나게 되니 사실상 사제의 인간관계는 그 수를 헤아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과의 만남이 자주 이루어지다 보면 간혹 사람을 “만난다”기보다는 “상대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끔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크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연속해서 이루어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미움이 생기고 사람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벗어나 혼자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느님만 생각한다면 얼마나 삶은 편안하고 행복할지요. 죄를 지을 기회도 없을 것 같고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들 때마다 언젠가 읽었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기억하곤 합니다. “여러분들이 길거리로 나서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때로는 우려할 만한 사고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교회가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살아간다면, 교회는 노후해질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고통을 겪는 교회, 그리고 집안에 갇혀서 병에 걸려 시름하는 교회,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러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은 가끔 세상을 떠나 홀로 있고 싶은 저에게 커다란 지침이 되어줍니다. 사제란 계속해서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며 자신 안에 안주하지 말아야 함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제는 사람들을 피해 홀로 안주하는 것이 가능하긴 합니다. 누군가가 면담을 요청하거나 어떠한 제안을 할 때 그냥 지나친다 하더라도 크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고 굳이 새로운 일을 벌릴 필요도 없습니다. 봉사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적당히 개인 기도와 미사만 해도 적당히 사제생활은 흘러갑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황님이 말씀하셨듯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 그 사제는 노후해지고 교만의 병 혹은 태만의 병에 걸려 시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제의 정체성은 사람들을 만나 고민을 듣고 성사를 줌으로써 견고해지는데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본당에서 활동을 하다 보면 간혹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마음에 미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본당 뿐만 아니라 각자의 터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러한 기회는 어떻게든 피할 수 있기도 합니다. 어떠한 봉사도 하지 않고, 갈등의 소지가 있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 시간을 최대한 줄이며 내 가족, 내 구미에 맞는 친구들과만 시간을 보낸다면 그 삶은 한결 편안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살아간다면 선을 실천할 기회는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이익에만 안주하게 됩니다. 그러한 삶은 결코 하느님이 원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 삶에 이웃의 자리는 없고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자리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삶의 전형을 바라보게 됩니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에 대한 예수님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합니다.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하면 그런데 왜 믿지 않느냐는 말을 들을 것 같고,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면 군중의 반감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되려 공격받을 것을 우려해 어떠한 대답도 내어놓지 못합니다. 이 안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 피하려는 이기적인 모습이 있는 한편, 진리를 위한 성찰은 전혀 없습니다.
지금껏 같은 생각을 가진 그들만의 논의 안에서 모든 일을 편안하게 선택하여 왔으니 다른 사람의 반응이 두렵기만 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렇다면 그들의 질문에 답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그들이 본인의 의향에 따라 어떠한 답을 선택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요목조목 그 답에 대해 잘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듣고자 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배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대하고 마주하는 기회를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결국 그들은 아무런 답도 얻어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속에 계속해서 남아있는 것은 자신들의 편견에서 비롯된 미움 뿐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지금껏 많은 시간 동안 사람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고 주기도 했습니다. 그 안에서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미안함을 느끼기도 하며 하루하루 살아왔습니다. 왜 그때엔 그렇게 미숙했는지 다소 후회되는 일도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부족한 사제이지만 지난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도 더욱 덜 떨어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오늘 영성체송의 말씀인,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상처를 입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나의 마음을 짓누르는 여러 갈등과 미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잘 다듬고 다듬어 실수와 미움을 줄이고 사랑을 늘려나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 3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들로부터 많은 상처와 미움과 오해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꾸준히 사람들을 만나 사랑을 실천하였고 특별히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오늘 다시금 이렇게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 역시 수많은 사람들 안에서 상처와 미움을 덜어내고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할 것을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사랑스러운 아기 예수님이 그러한 우리를 돌보아주시기 위해 오실 날이 이렇게 또 하루 줄어들었습니다.
“길거리에서 고통을 겪는 교회, 그리고 집안에 갇혀서 병에 걸려 시름하는 교회,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전자를 선택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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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세상에서 가장 비싼 피자 가격은 얼마일까요? 보통 2~3만 원 정도니까, 아무리 비싸도 10만 원은 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가격인 피자가 있습니다. 2010년 5월 22일에 프로그래머 라스줄로 핸예츠가 1만 비트코인으로 피자 두 판을 산 것입니다. 이것이 비트코인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상거래였습니다. 2024년 12월 현재, 1비트코인은 1억 4천5백만 원입니다. 그렇다면 프로그래머 핸예츠가 샀던 피자의 가격은 1조 원이 넘습니다. 피자 한 판에 7천억 원이 넘는다고 하니 정말 비싼 피자가 아닐까요?
비트코인의 가치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래의 일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지를 조금만 미래로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의 추억이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렸을 때는 그 시간을 소중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주님의 가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것들을 더 윗자리에 놓고 있는 우리입니다. 하지만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 것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주님이 먼저일까요? 지금 당장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자기에게 어떤 가치가 가장 필요한 가치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권한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즉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철부지들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입니다.
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권한, 자격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권한과 자격만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의 권한, 자격이 아닌, 이 세상 안에서의 권한과 자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라는 질문에, “모르겠소.”라고 답합니다.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왜 믿지 않았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하늘에서 온 사람으로 믿고 있었던 군중들의 질타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만을 따지게 되면, 당연히 주님을 알아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의 가치가 자기에게 어떤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 자기를 계시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묵상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가치를 알고 이 주님과 함께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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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런 사람이고 싶다>
마태오 21,23-27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이런 사람이고 싶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마태 21,24)
약한 사람
앞에서
약해지는 사람
강한 사람
앞에서
강해지는 사람
작은 사람
앞에서
작아지는 사람
큰 사람
앞에서
커지는 사람
낮은 사람
앞에서
낮아지는 사람
높은 사람
앞에서
높아지는 사람
없는 사람
앞에서
비워지는 사람
가진 사람
앞에서
채워지는 사람
무른 사람
앞에서
물러지는 사람
센 사람
앞에서
꼿꼿해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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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기적을 베풀고 말씀을 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한 후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대답은‘ 눈 가리고 아웅’한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진실을 외면할 때가 있습니다. 아닌 줄을 알면서도 나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에 지배당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뜻을 굽히지 않을 때가 있고, 때로는 내 뜻을 주님의 뜻 인양 내세우기도 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내가 그분에게 맞춰야 하지만 합리화 거리를 찾습니다. 주님을 나의 들러리로 세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습니다.”(집회42,20)
“세상에서 사람이 하는 일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인데 하나는 주님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일”(이현주)입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일이 앞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믿음의 길이 멀기만 합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람의 일을 줄이고 하느님의 일을 늘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신 소명과 권한에 모두를 걸었듯이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신자들의 유형이 여러 가지인데‘백설공주형'이 있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백방으로 설치고 다니는 공포의 주둥이’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바빠야 하는 데 오히려 남을 흉보고 헐뜯고 욕하는 사람이지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원망하고, 불평 불만하며 교만한 '원불교' 신자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우거지’형도 있습니다. ‘우아하고, 거룩하고, 지성적인’신자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데 기왕이면 ‘우거지 신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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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권한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 “분별의 지혜”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시편25,4)
교황님 홈페이지 뉴스에 감동했습니다. 영원한 청춘의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가 제47차 해외 사목 방문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프랑스와 이태리 사이에 있는 지중해에 있는 프랑스의 섬인 인국 35만의 “코르시카”섬입니다. 교황님의 생년월일은 1936년 12월 17일이니 내일이면 만 88세가 됩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 12월17일은 교황님의 생신입니다.
고령의 연세에 여전히 지혜의 절정을 누리시는 교황님을 통해 새삼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게 됩니다. 교황님의 존재자체가 노령의 신자들에게 용기를 붇돋아 줍니다. 코르시카에서 한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라, 언제나 용서하라.”(Forgive everything, forgive always)
괄호안에 영어를 삽입하니 더욱 분명히 마음에 각인됩니다. 코르시카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에게 하신 강론의 요지입니다. 역시 현자의 지혜로운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은 인간으로부터가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교황님을 통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다산 정약용의 지혜도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삶을 돌아보면 기뻐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굶지는 않으니 애써 다시 근심하지 마라.”
“하늘이 만물을 낳을 때는 아울러 그가 먹을 양식도 함께 주신다. 그런데 어찌 근심 때문에 방황하며 기회를 놓칠까 두려워하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입니다. 제가 볼 때 지혜와 무지의 대결같습니다. 정말 눈밝은 현자라면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인데 편견의 무지에 눈먼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의 권한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신학적 지식이 반드시 지혜와 함께 가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 직후입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소?”
무지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무엇으로 답변해도 무지한 이들은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교황님의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는 충고도 생각납니다. 이에 대해 질문으로 역공하는 예수님의 지혜와 용기가 빛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를 들면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의 근거를 묻습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예수님의 적대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진퇴양난의 물음입니다. 하늘에서 왔다하면 왜 믿지 않느냐는 물음에 직면할 것이고, 인간에게서 왔다하면 하늘에서 왔음을 믿는 군중이 두려워 도저히 답변할 수 없으니 궁지에 몰린 적대자들의 답변에 더 이상의 질문을 봉쇄해 버립니다.
“모르겠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무지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정말 볼 줄 하는 지혜를 지닌 자라면 교황님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오듯,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의 권한도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자에게 선사되는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민심이 천심입니다. 민심을 이기는 위정자들은 없습니다. 민심이 바다라면 위정자들은 바다위에 떠있는 배같습니다. 엊그제 국회의 탄핵 결정에 200백만 시민이 감격의 환호로 응답한 사실은 이 결정이 하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런 거대한 사건 말고도 가짜뉴스와 정보와 지식이 범람하는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분별의 지혜가, 지혜로운 삶이 참으로 절박한 시대입니다.
무엇보다 지혜의 눈이 열리는 개안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현실입니다. 바로 개안의 모범이 예수님은 물론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발라암입니다. 두 환시가 그대로 대림과 성탄에 있을 이상향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브오르의 아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무지의 눈이, 무지의 귀가 활짝 열린 참 멋진 발라암은 두 환시가 대림을 지내는 우리들에게 무한한 위로와 힘을 줍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구나!”
아름답기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현실을, 주님과 함께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꽃자리 환경을 묘사하는 듯 합니다. 신비롭고 황홀한 발라암이 전하는 선물같은 비전이자 환시입니다. 발라암의 두 환시는 그대로 인간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닫습니다. 두 번째 멋진 환시도 그대로 메시아 탄생을 예시하는 환시입니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야곱에게서 솟는 별 하나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는 왕홀이 상징하는 바 탄생하실 메시아 예수님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무지의 눈을 열어주시어 하느님의 지혜인 주님과 하나되어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지혜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 25,5ㄱ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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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영적인 식별>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발상(發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선한 발상이라는 말도 있고, 발상의 전환이라는 말도 있듯 어떤 생각이 생겨나온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엇이 있다면 생겨나온 것입니다. 발생(發生)이나 발출(發出)과 같은 뜻입니다.
관건은 자가발생이냐 아니냐입니다. 자체 발광처럼 자체적으로 생겨난 것도 있고, 자체적으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고 외부에서 오는 것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오는 것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요한이 어디서 온 사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사람인지 세속적인 사람인지 물으시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우리도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는 사람이 돼야겠지요.
가장 근본적으로는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온 것인지,
일상적으로는 지금 떠오른 생각이 어디서 온 것인지,
내가 지금 판단하고 있는데 이 판단은 어디서 온 것인지, 내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데 이 주장은 어디서 온 것인지, 심지어 지금 나의 사랑은 어디서 온 것인지 물어야 하고, 하느님에게서 온 건지 내게서 온 건지 묻는 사람이 신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물은 다음에는 그것들이 영적인지 세속적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겠지요. 앞에서 심지어 사랑조차도 어디서 온 것인지 물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의 사랑도 어디서 온 사랑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제일 중요시하고 제일 소유하고 싶은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에서 비롯된 소유하려는 사랑은 당연히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지요.
오늘 성무일도 독서의 기도에서 굴리에모 아빠스는 성령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 안에 부어 주신 사랑의 정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반면에 최고선이시고 궁극선이신 당신이 지니신 사랑은 선 자체이신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출하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태초에 만물이 창조될 때부터 물위에서
즉 인간 자녀들의 출렁이는 마음 위에서 휘돌고 계시면서, 모든 이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고 모든 것을 당신께로 이끄시며, 그들에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시며 해로운 것들을 멀리하시고 유익한 것을 대주시며 우리를 하느님과 하느님을 우리와 일치시키십니다.”
아무튼 우리는 나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일을 할 때도 심지어 사랑할 때도 늘 영적인 식별을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사랑에서 왔는지. 그것이 하느님 사랑을 지향하는지, 공동선을 지향하고 이웃 사랑을 지향하는지 식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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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느님의 도구들>
오늘 민수기의 발라암은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이민족의 예언자인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는 부탁이랄까 요구를 모압 왕에게 받지만 오히려 이스라엘에게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축복을 해주는 인물입니다.
물론 이민족인 그가 이스라엘을 축복해주고 싶어서 축복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입을 빌리신 것뿐이고, 하느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주셔서 환시를 봤기 때문에 본 것을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싫어도 얘기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그의 축복은 진심이 아니고 그래서 그의 축복은 역설적으로 하느님의 강복입니다.
제가 ‘마호멧’에 대해 얘기를 듣고 참으로 놀라고 감동한 것은 ‘마호멧’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건데 이슬람 신자들은 그런 그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래서 그가 참된 예언자라고 믿고 자랑스러워한다는 겁니다.
그가 문맹자이기에 그가 쓴 코란이 그의 창작품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이라는 증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많은 유식한 사람이 하느님 말씀을 한다면서도 실은 하느님 말씀을 빌려 자기 말을 하곤 하지요. 저처럼.
그렇습니다. 저도 하느님 말씀을 전하면서 제 말을 빼려고 하지만 저라는 존재가 매우 육적이기에 제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제가 발라암을 보면서 위안 삼는 것은 발라암도 저도 불의하지만 하느님의 도구들이라는 점이고, 하느님께서 발라암처럼 저를 도구 삼아 당신 말씀을 하실 거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본받지 말아야 하지만 그들의 말은 들어야 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에게서 제 말을 듣지 말고 하느님 말씀만 들으시는 여러분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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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소?"(마태 21,23ㄴ)
<나는???>
오늘 복음(마태 21,23-27)은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일과 성전에서 눈먼 이들과 절름거리는 이들을 고쳐주신 일'(마태 21,12-14)을 가지고, 예수님의 권한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마태 21,24-25ㄱ)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합니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그를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마태 21,25ㄴ-26)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ㄷ)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마태 11,27)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권한이 하느님으로부터 넘겨 받으신 것임을 잘 알고 계셨지만, 바로 답변하지 않으시고, 세례자 요한의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반문하심으로써 당신의 권한이 하늘(하느님)에서 비롯되었음을 암시하십니다.
선구자 세례자 요한을 두고 메시아로 생각하면서도, 정작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메시아(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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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2.16.월.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 23)
기다림은 사랑을
동반하지만
교만은 언제나
착각을 동반합니다.
기다림을
사라지게 하는
한결같은 착각과
교만입니다.
우리를
더욱 아프게
찌르는 것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신 하느님께
함부로 어색한 권한을
언급합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을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요한 세례자도
하느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하느님을
기다리고 하느님을
높입니다.
이와같이
소중한 관계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보다 더 소중한
관계는 없습니다.
참된 권한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힘은
사랑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권한의 진위
여부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이
더 소중합니다.
기다림도
권한도 세례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권한은
끊어진 길을
여기에서 다시
이어줍니다.
사랑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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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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