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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탐방,4.3 사태 실상 1
4.3 사테에 대한 글은
전에도 나간 바 있었지만 너무 복잡하여 널리 보급하기 어려웠다.그래서 누구나 읽기 쉽게 간략하게 요약해 보았다. 전 386 주사파 골수였던 프리존 뉴스 사장 강길모가 폭로한 글 중에는 이런 글이 있다.
"처음 의식화 교육을 받을 때 주로 선배들이 유혹하는 첫 미끼는 역사였습니다.좌파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역사투쟁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1980,,90년대에 후배들이 집중적으로 양산되었는데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역사였습니다.'김일성은 나쁜놈,우리나라는 좋은 나라'로 알고 대학에 갔는데,운동권 선배가 다가와 '네가 지금가지 알고 있던 대한민국의 역사는 거짓의 역사다. 너는 비주체적으로 남들이 주는 역사관을 주입받지 말아야 하며,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친일파들과 친미파들의 매국세력이 만든 나라,통일을 막고 분단을 선도했던 매국.반민족 정부이고,북한은 일제의 극한 탄압속에서도 끝까지 항일 투쟁을 했던 영웅들이 만든 정권이다.나이 10살도 안돼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신 위소한(원문;위대한)김일성 졸개놈(원문; 장군님)을 남한에서는 건달 김성주라고 왜곡선전하고 있지만 실제 외국사람들이 쓴 책을 보여줍니다.그 책에 보면,김일성은 실존 인물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통해 '진짜 역사가 이런 것이구나.그동안 나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가로막는 군사독재 세력에 의해서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혀있었구나'자조하게 만들면서,꿈에 부푼 대학 1년생을 지적으로 오만하게 만들어 줍니다. 자기가 새로 배운 것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을 내리 깔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저것들은 미제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으면사도 자신들이 꼭두각시인지도 모르는 한심한 인간들',그러나 나는 역사의 진실을 바라보며 자주성,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비로소 거듭난 것이다. 대학 1학년 시절에 그러한 자부심은 저에게 있어 대단히 큰 긍지였고 프라이드였습니다."
정석균 연구원이 쓰는 4.3 사건의 요약
(정석균; 전 국방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최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란사건을 민중항쟁으로 바꾸는 역사왜곡 현상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왜곡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시나리오는 피해자 입장만을 과도하게 부풀려 드라마틱하게 부각시킴으로써 진압군경을 양민학살자로 매도 하는 것이다. 역사왜곡 세력은 4.3 사건의 원인이 민족,민주,통일에 있다고 호도하고 이는 민중해방과 통일을 위한 민족적 항쟁이며 민족통일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제주도는
동서 78km,남북 32km,타원형의 섬으로 그 면적이 1,840제곱키로미터이며 해안선의 길이가 240km에 달한다. 섬 중앙에는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1,950m)이 솟아있고 해안을 따라 촌락과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최근들어 남북횡단 도로가 종횡으로 발달되어 있다. 해방직전 제주도의 인구는 15만 명이었고 행정체제는 전라남도에 귀속되어 일본인 '오노' 도사島司가 다스리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말기인
1945년 초 일본군은 이 섬을 일본 보토를 방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사용할 목적 하에 제17방면군 6만여 명을 배치했다. 이로 인해 제주도는 일본군의 요새로 인식되어 미군 폭격기의 주 공격대상이 됐다.일거에 400여 호의 가옥이 파괴되고 주민 500여 명이 피해를 입게되자 마을에 마다 방공호를 파느라 노동력이 소진되었으며 강제적인 곡물공출과 생필품 부족으로 주민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이런
제주도에 미군정이 진주한 것은 서울 진주보다 20일 늦은 9월 28일이었다.그러나 이때는 이미 제주도 공산당이 박헌영의 인공(인민공화국) 체제에 따라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행정을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제주도를 통치하고 있었다.해방 직전 제주도의 인구는 15만 명에 불과했지만,해방 후 일본과 중국에서 귀환한 동포들로 불과 몇 달 사이에 2배 가까이로 급증했다.이들 가운데는 일본군에 종군하였던 군인,군속,노무자들도 있었고,중국 팔로군에서 전투를 경험한 과격한 좌익계 인물들도 있었다.제주도 공산당이 뿌리는 달콤한 말들에 민주주의 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 가난한 도민들은 그대로 현혹되었고,가문 전체,마을 전체가 집단적으로 좌경화 되고 말았으며 좌경인구는 80%에 달했다.
남로당
군사부 총책은 김달삼(25세)으로 그의 본명은 김승진, 당시 교사로 있다가 남로당 중앙당 간부 강문석의 사위가 되었다.그는 또한 인민유격대(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직을 겸하고 있었다.그가 이끄는 빨치산 유격대는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한라산에 매몰한 무기와 탄약을 찾아내 무장을 갖추었고,팔로군 출신들은 중국에서 사용했던 유격전술을 가르쳤다.무장병력은 500여 명 여기에 동조자 1,000여명을 합산함으로써 유격대 인력은 1,5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우익인사를 살해하는 등 섬 전체를 위압하는 강력한 세력으로 커가고 있었다. 제주도 도민의 80%가 좌경화 되고 행정이 마비되자,미 군정청 산하 경무부에서는 1947년 2월 17일 서울철도 경찰과 충남경찰에서 800여 명의 경찰을 차출하여 제주도 경찰국에 파견했다.그 뒤를 이어 .해방 후 평안도 황해도 등지에서 월남한 반공단체인 서북 청년단 500여 명을 제주도에 보내 적극적인 소탕작전을 펼치게 했다.이에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는 공공기관을 습격하는 등 각종 만행을 자행함으로써 기선을 빼앗기려 하지 않았다.
<3.1 사건>
1946년말,
경찰은 파괴분자 검거령을 내렸다. 이에 당황한 남로당은 주민의 이탈을 막고 포섭하기위해 대대적인 총파업과 반미시위를 획책했다.이것이 이른바 1947년의 '3.1 사건'이다.28주년째 맞는 3.1 절 기념일을 당세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던 것이다.남로당 전남도당의 3.1투쟁 지령문에는 '3.1절 기념투쟁 표어'가 들어 있다.
1,민주애국투사를 즉각 석방하라.!
2,최고 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3,정권을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겨라.!
4,진보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5,학원의 민주화를 보장하라.!
6,근로인민은 남조선 노동당 깃발 아래 뭉치자.!
7,남녀평등 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1947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찬탁시위가 일어났고,그것은 곧 폭동으로 변했다. 제주도에서는 각 면소재지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동원됐다.이들은 3.1정 행사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모스크바 3상회의 절대 지지"를 외치는가 하면 "양과자를 먹지 말자","사대주의를 척결하자"는 등의 반미구호를 외치면서 '3.1절 경축대회'를 찬탁시위 군중대회로 돌변시켰다.바로 이때 시위를 진압하던 기마경찰이 어린이 1명을 치어 상처를 입힌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을 본
좌익분자들은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어 죽였다고 군중을 선동허기 시작했다.이 말은 순식간에 시위군중으로 퍼져나갔고,평소부터 경찰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던 군중들은 경찰관에게 돌을 던지고 기마경찰관 1명의 발을 잡아 강제로 끌어 내리는 등 과격한 소요사태를 이끌어 냈다.
시위 군중들이
제주경찰서를 포위하고 압축해 들어가자 당황한 경찰관이 엉겹결에 발포를 했다.이 발포로 인해 이 날의 소요사태는 일단 진압되었으나 시위군중 6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을 당했다.남로당은 '3.1 사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사건의 모든 책임이 경찰에 있으므로 경찰이 민중에게 사과해야 하며,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했으니 경찰은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시위군중 사망 사건을 최대로 이용하여 1947년 3월 5일 3.1사건 대책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에 김용관을 선임하는 동시에 부서별 담당책임자를 임명하고 투쟁방침에 대한 지령문을 하달하면서 아래와 같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1,발포책임자 강동효 경찰서장 및 발포경찰을 즉시 살인죄로 처단하라
2,경찰의 수뇌부를 즉시 해임하라
3,경찰의무장을 즉시 해제하라
4, 경찰에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즉시 축출하라
이를 계기로
제주는 총파업에 돌입했다.도청을 비롯한 전 행정기관, 학교, 은행,교통기관 등이 총파업에 돌입함으로써 제주도의 전기능이 마비되고 연일 불법시위가 자행되었다.오직 법원,검찰,경찰만이 예외였다.
이처럼
제주도의 행정기능이 마비되었음에도 사건발생 14일만인 3월 26일에야 비로소 도지사 관사에서 3.1 사건 수습을 위한 제1차 대책회의가 열렸으며,4월 1일에는 조병옥 군정청 경무부장이 제주도에 내려와 경찰병력의 증원과 부족식량 해결을 약속했다.이는 좌익계 활동에 제동을 걸고 일부 도민들의 경찰에 대한 불신을 해소시켜 주었다.(주;5.18에서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유사)
그 후
제주경찰국에서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4월 15일,비밀리에 투쟁모의를 하고 있던 주동인물인 안세훈,김용해,노대진.이도백,조몽구를 비롯한 각 읍면 대표 28명을 체포 연행했지만,미군정의 경찰 고문관 패드릿치 대위는 "뚜렷한 증거도 없이 사람을 무더기로 연행 구속하는 것은 인권유린임으로 삭방하라"고 하여 석방하고 말았다(주;최규하의 서울의 봄과 유사함)
이
석방을 계기로 좌익계에서는 민중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다.제주도 인민해방군 사령관 김달삼은 1948년 2월 7일을 기하여 인민해방군을 지휘하여 신창,고산,저지.세화,김녕 등의 경찰지서를 습격,기물을 파괴하고 경찰관을 폭행하는 과정에서 순찰중인 경찰관 2명을 수심 명의 남로당원이 집단폭행하여 결박하고 생매장하려다 저지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4.3 사건>
북한은
1945년 9월 20일 "북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동년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했다. 2개월 후인 12월 17일 북조선 공산당으로 바꾸고 이듬해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실질적인 정권기관을 출범시켰다.1946년 11월 3일 북한 전인민이 참가하는 가운데 북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도.시.군 인민위원회의 각급 인민위원회 대회를 열어 최고 입법기관으로 북조선인민회의를 수립했으며,1948년 2월 8일,조선인민군대가 창설됨으로써 북한만의 단독정부를 완료했다.
이렇게 해놓고도
공산당은 통일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948년 5월 10일로 예정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통일 책동이라며 온갖 선동과 폭력으로 방해했던 것이다.
1948년4월 3일 새벽 2시를 기하여,
한라산 정상을 위시한 주요 고지에서 일제히 봉화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이들은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제주도내 총 15개 지서 중에서 14개 지사가 이들의 습격을 받아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으며 경찰관 13명이 살상당하고 민가 4채가 불에 탔다.공비들은 경찰관,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독립촉성회 등 숙청 대상자 명단을 가지고 사무실을 습격하여 미처 피신하지 못한 청년당원과 그 가족들을 마구 학살했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공포와 불인에 떨고 있었다. 당시 남로당은
1 미제는 즉시 물러가라,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2,단독선거,단독저부 결사반대
3, 조선 통일 독립만세
4,리승만 매국도도당 타도하자
5,경찰대와 테러집단을 즉시 철수시켜라
6,신탁통치를 찬성한다.
7,5.10 총선거 결사반대 라는 구호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이에
경무부에서는 각도 경찰국에서 1개 중대씩 8개중대 1,700여 명의 경찰을 급파하여 김태일 경무관과 최치환 총경으로 하여금 이미 파견되어 있던 100여 명의 경찰병력을 통합 지휘케 하여 사태를 스습토록 했다.그러나 국방경비대와 경찰과의 관계는 경비대 창설 당시부터 군.경간의 알력으로 군.경간의 협조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으며,공비들은 과거 전투경력이 많은 무장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어 경찰의 단독작전으로는 많은희생자만 발생할 뿐이었다.,
한편,
국방경비데 총사령부에서는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는 제9연대의 전투력이 1개 대대에 불과했으므로 4월 10일 부산에 주둔 중인 제5연대 제 2대대를 제주도로 공수하여 제9연대에 배속했다(주; 광주로 공수부대 투입한 것과 유사함) 그러나 제주도에 도착한 제 5연대 제2 대대장 오일균 소령은 대대장병의 훈련이 미숙하다는 이유로 토벌작전을 보류한 채 1개월 간에 걸쳐 경찰의 횡포와 서북청년단의 과격한 행도을 비난하는 내용과 경비대는 경찰과 민간인간의 싸움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요지의 정신교육만을 실시했다.이러한 정신교육을 받은 일부 경비대 장병들은 감화되어 경찰에 협조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오일균은
경찰의 간곡한 출동 요청이 있어도 이를 교묘한 말로 회피하면서 출동을 거절했으며,주민들의 공비출현 신고를 받고도 이를 묵살한 채 출동하지 않았다.
오일균은
본시 국방 경비대 창설 당시 경비대에 침투한 남로당 당원으로 연대장과 일부 우익계열 장교들을 암살하고 김달삼 일당과 합세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였다,이에 오일균은 제9연대 내 좌익 세포 조직책인 문상길 중위와 비밀리에 회합하고,남로당 제주도 군사부 총책인 김달삼과 은밀히 내통하면서 경비대원들에게 좌익사상을 주입시켜 군 내부와 좌익 세포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문상길은
육사 3기로 생도시절 그의 구대장이었던 오일균으로부터 공산주의 세뇌교육을 받은 자였다.이러한 가운데 오일균의 계략에 따라 공비 두목 김달삼은 연대장에게 "한번 만나서 아야기나 해보자"고 제의 했다.연대장 김익렬 중장은 김달삼이 자기와 같은 일본군 학병 출신인 점을 감안하여 이 자를 설득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한 끝에 이를 승낙하고 대대장 오일군 소령과 정보장교 이윤락 중위를 대동하여 남제주군 대저읍 구억리의 공비훈련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은
"제주도 인민과 인민해방군의 투쟁목표는 경찰타도이며 경비대는 우리의 적이 아니다. 서로 적대시하지 말자"고 제의 했다. 이에 대하여 연대장은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눈 동포이다. 무고한 양민을 괴롭히고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죄과를 뉘우치고 귀순하라.그것만이 너희들이 살길이다" 라고 자수를 권유하였으나 김달삼은 끝내 이에 응하지 않아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제9연대장은
수 차에 걸쳐 병력을 출동시켜 토벌작전에 임하였으나 공비를 포착할 수조차 없었다.그 이유는 오일균과 문상길 등이 조종하는 좌익계 하사관들이 사전에 작전계획을 공비에게 누설시켰기 때문이었다. 연대장이 때때로 최초 작전계획과 상이한 지역으로 이동하여 공비들과 조우할 때가 있었으나,공비들은 신속히 경비대와의 접전을 회피하고 달아나 버렸다.
따라서
경비대는 공비와의 접촉을 전혀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어 전과도 없고 피해도 없었다. 그러나 경찰의 피해는 점차 늘어났다. 한편, 경비대 총사령부에서는 제9연대장 이하 간부들이 김달삼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진상조사에 나섰다.조사 결과 연대장은 협상동기가 명백하여 혐의는 풀렸으나 보직이 해임되었으며, 오일균은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경찰은
단독작전으로 희생이 증가하자 공비들의 거점을 소탕하기 위해 작전에 방해가 되고 있는 산간에 산재한 민가를 불태워 없애고 주민들은 하산하게 하여 평지에 준비한 임시주탹에 이주시키는 작전을 마련했다. 경찰의 제의로 경비대는 해안을 경비하고,경찰은 공비의 거점인 한라산을 소탕하기로 협의가 되었다. 하지만 군내 좌익 하사관들이 이 작전계획을 공비에게 알렸다. 원래 제주도 공비들은 산간에 거주하는 빈농 출신이 대부분이었다.경찰이 산간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강제 소개시킨다는 소문이 퍼지자 산간부락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입산하여 그들과 성분이 같은 공비들과 합류해 버렸다.
~~~~~~~~~~~~~~계 속~~~~~~~~~~~~~
글쓴이;지만원 박사.정석균 전 국방군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실린곳;시국진단 9월호
펴낸곳;국민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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