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합니다.
뭐 그럴 수도 뭐 아니 그럴 수도.
배부른 돼지 보다 배고픈 돼지가 더 많을 것입니다.
배고픔이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자연스럽게 돼지는 소크라테스가 될 것입니다.
돼지에서 소크라테스로 도약하는데
그것은 돼지 스스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알 수 없는 계기가 있어 그렇게 되는지
정확하게 아직까지 알려지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이미 소크라테스로 도약한 경우는 자신이 왜 돼지가 좋아하는 것을 더이상 좋아하지 않게된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들도 드믑니다.
그냥 자신은 태어나면서 부터 이렇게 사색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하죠.
애벌레와 나비와의 관계에서
애벌레 보다 나비의 삶이 더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비는 애벌레의 과정을 거쳐 결국 지금 나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비가 애벌레 보다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애벌레의 삶이 있는 것이고 나비의 삶이 있는 것입니다.
애벌레의 삶은 나비의 삶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애벌레와 나비가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서 나비가 애벌레를 낮게 볼 근거도 딱히 없습니다.
애벌레는 결국 지금 나비가 되었지만
그게 그 애벌레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일까요?
의식이 펼쳐지는 세계가 다를 수 있는데
그 다름은 다름일 뿐입니다.
나비가 애벌레 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름은 다름이 아닌 우열로 변화됩니다.
소크라테스의 의식세계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세계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더 나은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각 개인은 그렇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돼지에겐 진주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개안의 살이 훨 더 중요하지요.
누군가에겐 진주가 훨 더 중요하겠지요.
어떤 경우의 개인은 지금까지 돼지의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 소크라테스의 삶을 살게 되는데
그럼 그런 경우는 그가 돼지였을까요? 아니면 돼지의 모습을 한 소크라테스였을까요?
아니면 돼지였다가 때가 되어 소크라테스가 된 것일까요?
돼지와 소크라테스의 중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어떨까요?
또는 돼지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도 아닌 경우는 또 어떨까요?
자신의 기호에 맞은 경우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그것이 나아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첫댓글 우리 모두 배부르고 등따신 소쿠리가 되어보아요 ^^
그리되면 지구의 삶이 지금과 조금 달라지겠지만
마 그렇지만 그렇게는 아닐 될 것 같네요.
ㅎㅎㅎ 공감합니다~
호랭이가 버팔로 잡아 성찬을 즐겨야지요~~~
@치우 때 되면 그런 날도 오겠지요.
그런데 과연 올까요?
쥐와 닥이 된들 어떠리요? 직위를 이용하야, 돈을 많이벌어서 편안히 살자,
소크라테스의 삶도 있습니다.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