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우리의 안보에 미치는 영향이 심각하다고 느낀 민간인 탐사자 몇 사람이 1998년 9월 초에 땅굴 징후지역의 하나인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에 있는 노곡교회 마당을 시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민간인들이 이곳에 미련을 둔 까닭은 무엇인가? 1990년 4월 윤태원씨가 노곡교회 마당에서 우물을 파던 중 지하 15m 지점에서 물이 빠지고 공기가 올라오는 현상을 목격한 사실이 있다. 우물시추 전문가인 윤씨는 “이같은 현상을 다른 곳에서 본 일이 없다”고 증언한다. 민간인 남침땅굴 대책모임을 이끌 이창근(李昌根) 팀장을 비롯하여 최민용(催民龍), 정지용(鄭址), 이준(李準)씨 등 1진은 9월 7일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에 있는 임진강가든에 제1진으로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이곳이 우리들의 기나긴 남침용 땅굴 발굴작전의 기지(基地)가 된다.
이튿날 라디에스테지 탐사 전문가인 최민용씨가 노곡교회 마당에서 탐사를 시작했다. 그가 땅굴이 있다고 짚은 지점은 며칠 전 이창근씨의 의뢰로 이곳을 탐사하고 다녀간 이종창(李鍾昌) 신부가 점찍은 지점과 일치했다. 9월 10일 서울방송 텔레비전 취재팀이 탐사팀이 묵고 있는 임진강가든에 도착하여 보안을 요구 하며 이번 탐사과정을 취재하겠다고 제안해왔다. 그들은 탐사팀과 함께 숙식을 하면서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살피며 취재에 열을 올렸다. 9월 13일 두 번째 시추공(試錐孔)에서 공기가 올라왔다. 노곡교회 목사, 노곡주유소 사장 등이 이를 확인했다. 서울방송 취재팀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어 9월 17일 기포가 더 많이 솟아 올랐다. 서울방송은 취재 내용을 9월 22일 ‘뉴스추적’ 시간에 보도했다. 방송사측은 사전에 이 프로그램을 일간지 텔레비전 프로그램 안내란에 예고하는 등 특종(特種)에 대한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노곡교회 탐사도 시추를 통한 문제 제기 또는 주의 환기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했다. 이 때만 해도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곧 확인될 것으로 기대하고 우리 팀에 끼어든 사람들이 20여 명이나 됐다.
이들은 연명으로 노곡교회 건으로 ‘북한의 남침용 땅굴 징후 발견 신고서’를 작성하여 관계당국에 체출했다. 노곡교회 시추는 우리 팀이 백학면 일대에서 본게임을 치르기 전에 시도한 전초전(前哨戰)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지난 1990년 4월에 윤태원씨가 우물을 시추 하면서 발견한 땅굴징후를 9년 후에 거듭 확인한것이다.
구미리 11번지의 1을 점찍고 파다
이창근 팀장은 마산에 머무르고 있는 이종창 신부와 이미 합숙을 시작한 최민용씨를 각각 다른 시각에 서로 모르게 불러 가장 확실한 곳을 점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이종창 신부와 최민용씨가 각각 다른 시각에 라디에스테지법으로 탐사한 결과 유력한 후보지로 단정한 곳은 북한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와 북한에서 발원했지만 남북한 영토를 구비치며 흐르는 임진강에 둘러싸여 있는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漣川郡 百鶴面 九尾里) 11번지의 1 김진태(金振泰)씨가 경작하고 있는 옥수수밭이다. 이곳이 우리 팀이 운명을 건 남침용 땅굴 발굴의 현장이 된다.
남침용 땅굴 발굴작업은 땅굴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탐사, 시추, 절개의 3박자가 맞아야 성공할 수 있다. 이 세가지 중 정확한 탐사와 절개는 절대로 빠뜨릴 수 없다. 이 중에도 옳은 탐사는 대전제(大前提)가 된다. 이것이 틀리면 다음의 모든 과정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만다.
이종창 신부와 최민용 탐사위원이 시도한 탐사법은 라디에스테지 탐사법이다. 라디에스테지 탐사법이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살았던 부울리 신부가 신비스런 막대나 추로 땅 속의 물을 찾는 법을 개발하여 ‘라디우스’라는 라틴어와 ‘에스테지’라는 희랍어를 합성해서 ‘라디에스테지’라는 이름을 붙인 데서 기인한다.
라디우스는 방사선, 적외선, 자외선등을 뜻한다. 에스테지는 어떤 느낌으로 알아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라디에스테지는 여러 가지 물체나 사물에서 나오는 방사력(放射力)을 감(感)으로 알아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라디에스테지법을 사용하는 탐사자는 정신을 집중하고 특수 막대나 추(錘)의 반응을 탐지하여 수맥(水脈)의 위치를 알아낸다. 두 손으로 평행선을 긋도록 쥐는 특수 막대는 수맥이 나오면 스스로 움직여 X자로 포개진다. 한 손으로 수직으로 드는 추는 수맥 근처에 이르면 저절로 흔들린다. 우리 나라로 파견된 프랑스 출신 신부들이 라디에스테지법으로 수맥(水脈)을 짚어 우물을 팠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 천주교에서 뿐아니라 이 분야의 전문가 사이에서 이종창 신부가 탁월한 전문가로 꼽히고 있다. 이 신부는 군종신부 시절 라디에스테지법으로 제2, 제3 땅굴을 찾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여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은 바 있다. 그는 라디에스테지 분야의 이론과 실천을 종합한 <과학적인 심령탐사>라는 책을 쓴 바도 있다.
한편 중동건설 특수(特需)가 일 때 기술자로 중동지역에 파견됐던 최민용씨는 사막에서 수맥을 찾는 데 놀라운 적중률을 보이는 라디에스테지법을 이라크인으로부터 전수받아 물길을 찾아내는 훈련을 쌓음으로써 소문 안난 전문가로 인정 받고 있다.
이 무렵 우리 팀은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식으로 끼어든 사람까지 포함해 20명 가까운 인원으로 북적댔다. 숙소인 임진강가든은 장터처럼 붐볐다. 그러나 하는 일 없이 서성대던 10여 명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사라져갔다. 나는 9월 말에 제2진으로 팀에 합류했다.
우리가 작업을 지작한지 4시간만에 북측은 반응을 보여왔다. 즉 오후 2시경 최민용 탐사위원은 “절개작업 지점으로부터 북쪽으로 10m-15m가 메워지고 있다”라고 전했다. 이것이 이른바 역대책(逆對策)이다.
북한은 우리들의 구미리 작업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없고, 자기들의 요원을 우리 틈에 끼어놓은 것도 아닌 것이 확실한데, 우리들의 행동을 이처럼 신속하고 소상하게 파악하고 이토록 기민하게 반응한단 말인가?
“기포(氣泡)가 솟아 오르고 있다”
우리가 땅을 파기 시작한지 16일만인 10월 12일. 현장 소장 오철록(吳喆祿)씨가 포크레인으로 지상에서 18m쯤 파들어갔을 때 지표수를 뚫고 기포(氣泡)가 솟아오르는 현상을 보았다.
오씨는 즉시 임진강가든에 있던 이창근 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팀장, 최민용씨가 급히 차를 몰고가 이를 확인했다. 이것은 우리 팀이 작업에 들어간 후 처음으로 포착한 이상징후(異常徵候)였다.
10월 16일에는 10명 이상이 지표수 위로 물방울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이러한 사실은 땅굴로 추정되는 지하에 공간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철록씨가 11월 24일 27m 지점에서 포크레인으로 바락을 퍼올릴 때 다시 기포가 솟아 올랐다. 브레커 기사 엄주용(嚴柱龍)씨가 11월 30일에 바위를 깰 때 3-4m 정도의 폭에서 기포가 솟아 올랐다.
12월 2일 오철록, 엄주용씨가 작업하면서 다시금 많은 기포가 솟아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12월 4일에는 기포가 가장 많이 올라왔다. 최민용씨가 기포가 솟는 부분에 손바닥을 대니 손바닥이 젖혀질 정도였다. 이 모습을 이창근 팀장, 엄주용 기사도 목격했다.
기포는 12월 6일에 이어 12월 8일에도 계속 솟았다. 12월 11일 오전 10시 22분에서 27분까지 목욕탕의 물에서 기포가 솟듯이 힘차게 올라왔다. 이날 오후 3시 30분에도 기포는 줄줄이 올라왔따. 12월 13일, 14, 19일에도 기포는 올라왔다.
기포는 1999년 3월 9일에도 나타났다. 이날은 평소에 잘 빠지던 물이 차올라 어렵게 물을 뺀 후 엄주용씨가 브레커로 바위를 두들기는 순간 장대비가 연못을 두들길 때 솟는 작은 물보라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기포가 솟아올랐다.
기포는 땅굴 가능성을 가늠할 결정적인 징후라는 사실이 제3땅굴의 경우에서 입증된 바 있다. 즉 1978년 6월의 어느 날 밤 시추공에서 10여m의 물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물기둥과 함께 타다 남은 플라스틱 조각과 철사도 튕겨올랐다.
이 물기둥은 무수히 많은 기포를 동반하면서 지하 공간을 압박해 들어가는 지상의 공기에 대한 반작용(反作用)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포는 그것이 남침용 땅굴이건, 자연 동굴이건 간에 지하공간이 있음을 의미한다.
속속 드러난 유력한 징후들
오씨가 1998년 12월 20일에 처음으로 지하 28m 지점에서 땅 밑이 울리는 현상을 느꼈다. 땅을 파고 바위를 깨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작업 도중에 땅의 반응을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바위를 두들길 때 아래서 울리는 현상은 머지 않은 곳에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창근 팀장은 1999년 2월 25일 지상에서 29m쯤 되는 곳의 경암(硬岩)에 가로 3m 정도의 틈이 발생한 것을 목격했다. 바위의 틈은 세로로 뻗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틈은 명백히 길이가 3m나 되는 가로틈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지하에서의 인위적 발파로 인한 진동의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물의 양에도 변화가 왔다. 3월 초까지는 양수기로 물을 퍼올리면 웅덩이의 물이 금방 없어졌다. 이것은 지표수가 흘러내리는 양보다 양수기로 빼내는 양 및 바위 틈으로 스며들어간다고 생각되는 양이 많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물이 빠지고 차오르는 양은 거의 일정한 기준으로 반복되어 온 터였다.
그러나 우리가 양수기로 물을 계속 퍼올리는데도 지하 웅덩이 물이 거의 줄어들지 않는 새로운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창근 팀장은 3월 6일 밤 10시 30분부터 7일 오후 6시 30분까지 8시간 동안 4인치 짜리 양수리를 돌렸다. 종전에는 4인치 양수기를 같은 시간 가동하면 웅덩이에 고인 물이 모두 빠졌었다. 하지만 이날에는 주야로 물을 뽑아냈는데도 물은 12시간이 지난 밤 10시 30분이 되어도 다 빠지지 않았다.
이것은 땅굴로 추정되는 지하공간의 차단벽까지 꽉 차서 물이 거꾸로 차올랐다가 메꿔놓은 바위의 새로운 틈으로 조금씩 더 깊은 지하로 스며들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느껴졌다. 암반이 비어있으면 물은 계속 흘러들어가야 원칙이다. 그러나 북한측이 역대책으로 만든 차단벽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을 다시 역류시키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보다 더 유력한 징후는 5월 20일 우리 팀이 절개한 지점의 정확성 여부를 시험삼아 확인하기 위해 북쪽으로 35m 떨어진 곳에 있는 ‘무명쉼터’ 마당을 코아링으로 시추(試)할 때 나타났다.
시추기의 놋트는 30m 쯤 이르렀을 때 단단한 경암을 힘들게 뚫고 들어갔다. 이것이 39.6m-41.5m에 이르렀을 때 부시식 소리를 내며 서서히 빠져들었다가 다시 지하 50m까지 내려가는 동안에 일직선상으로 아름다운 꽃무늬를 형성한 경암을 뽑아올렸다.
이같은 결과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바위가 39.6m-41.5m에서 다른 돌멩이들로 매꿔지고 그 위아래는 원래의 경암으로 채워져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무명쉼터’ 마당에서 7m 아래에 있는 옥수수밭을 시추했을 때 지하 32m-34.5m에서 놋트가 부시식 소리를 내면서 부러져서 작업을 중단 했다. 이 지점은 무명쉼터 마당의 지하 39m-41m와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징후는 6월 24일 우리 팀이 크로라드릴로 절개지역 바닥을 시추했을 때 발견됐다. 이날 시추팀은 크로라드릴로 바닥 경암을 35cm간격으로 3열 횡대로 구멍을 뚫었다. 깊이 3m와 6m의 구멍은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가운데 줄과 아래 줄에서 12m깊이로 시추했을 때 8m 아래에서 1m내지 1.7m의 깊이의 공간이 7군데나 나온 사실이 포착됐다.
작업현장은 밑바닥에 쌓여있는 2m 가량의 슬러지를 빼면 6m 아래에 잡석으로 메꾼 땅굴의 천장이 있음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공간의 높이가 1m 또는 1.7m로 차이가 나는 까닭은 굴의 천장이 돔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동료들
바다는 밀물로 들어오고 썰물로 빠져나간다. 사람들도 무엇인가 가능성이 보일 때는 밀물듯이 모여들지만 예상과 달리 어려움이 덮치면 썰물처럼 흩어진다.
우리 팀이 대망(待望)의 땅굴 발굴작업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구미리 현장과 숙소인 임진강가든은 더불어 따라온 사람들까지 합해 20명에 가까운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러나 우리 팀의 작업이 차츰 장기전으로 들어감으로써 성패 여부가 불투명해지고, 경비가 부족하여 자신들에게 부담이 돌아갈 기미가 보이자 하나 둘 사람져갔다.
쥐들은 배가 난파하기 직전에 예민한 감각으로 이를 탐지하고 탈줄하기 시작한다. 보잘것 없는 동물들의 사람을 능가하는 본능은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하지만 우리 팀이 역적질을 하는 것도 아니요, 최악의 경우에 땅굴을 못찾는다 해도 ‘장한 패배자’가 될 뿐인데 이것이 두려워 재빨리 빠져나간 사람들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甘呑苦吐)’ 인간상의 표본이라 할것이다.
우리 팀의 오랜 동지들 사이에도 금이 갔다. 작업이 시작된지 한달이 지간 10월 27일 정보자문역 정지용씨와 청음담당 이준씨는 현장을 지휘하느라 여념이 없던 이창근 팀장을 한 쪽으로 불러 “우리는 이곳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다른 곳에서 작업하기 위해 오늘부로 나가겠다”라고 통보해왔다.
기독교도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규정한다. 불가(佛家)는 “만나는 자는 반드시 헤어진다(會者定離)”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죄를 지으며, 지금은 서로 만나고 있지만 언젠가는 헤어질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헤어진 사람은 인연에 따라 다시 만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떠난 사람들을 미워할 필요가 없다.
펑크를 낸 스폰서
진광토건 김원규 사장은 우리 팀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작업비로 3천만원을 지원하겠다. 그리고 남침용 땅굴로 확인되면 부채 청산 명목으로 1억5천만원을 내겠다”라고 다짐했다. 경제력이 없는 우리 팀은 경제적 후원자가 없이는 작업을 진행시킬 수가 없었기 때문에 김 사장의 제의를 환영했다.
그러나 이 회사는 10월말까지 3백 18만원만 결재하고 나머지 결재액에 대한 약속을 11월 14일까지 네차례나 어겼다. 우리 팀은 이 회사가 작업팀이 머문 임진강가든의 외상 5백40만원을 갚는다는 조건을 걸고 후원자 역할에서 손을 떼도록했다.
우리 팀은 자세한 내막을 조사한 결과 진광도건이 약속어음을 결재하지 못해 부도처리됐으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김원규 사장이 우리 팀의 지원금으로 내놓은 2천만원 중 1천6백82만원을 이 회사의 이사 최모씨와 송모씨가 횡령한 사실을 알아냈다.
이 사건이 터지자 누구보다도 괴로운 사람든 진광토건을 우리 팀에게 ‘유력한 후원자’로 소개한 바 있는 정지용씨였다. 정씨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지만 신용에 타격을 입었으며, 또 다른 후원자를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한달만에 이준씨와 함께 구미리 현장을 사실상 이탈한 데는 이와 같은 심리적 부담도 작용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허물은 위태로운 후원자를 선정한 우리 팀 전체에 있지 정지용씨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곧 부도날 회사의 신용상태도 조사하지 않은 채 사장의 언약만 믿고 민족의 안위(安危)가 걸린 거창한 과업에 착수했다. 이것은 준비 부족과 정보 분석의 미숙에 기인한다.
우리 팀은 사적으로는 손해를 보면서도 공적으로 나서야 할 일이기 때문에 북한의 남침용 땅굴을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우리 팀의 모두가 개인의 영달과 편의보다는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행복이 훨씬 중요하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우리 팀은 진광토건 간부들의 위약으로 이륙(離陸)하자마자 기체 고장을 일으킨 비행기 또는 진수(進水)하자마자 선체 고장을 일으킨 군함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위험한 작업환경 속에서
우리 팀은 가로 50m, 세로 50m의 땅을 파헤치기 시작해서 밑으로 점점 공간을 좁혀갔다. 그러나 우리는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사고를 예방할 안전지렛대를 설지 하지 못했다.
브레커 엄주용 기사는 1998년 12월 5일 “와라층이 무너질 위험이 있어서 안전 지렛대를 설치하지 않고는 더 이상 굴진하기 힘들다”라고 불평했다. 그러나 이범찬(주, 이창근) 팀장은 “아직은 괜찮다. 작업을 계속하자”고 지시하여 위험한 환경속에서도 작업은 계속됐다.
12월 6일에는 지하 공간에 고인 물애서 기포(氣泡)가 올라와서 땅굴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켰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파들어가는 땅 위로 70도 기울기로 8m 가량 쌓인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엄 기사는 “와라층을 제거해야만 굴진할 수 있다”면서 작업을 하지 않았다.
나는 12월 19일 와라층 위로 접근하여 25m쯤 되는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현기증을 느꼈다. 바위들이 와라층을 받치고는 있으나 흙더미는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더구나 눈보라가 치는 겨울에는 얼어붙는 흙더미도 눈이 녹는 봄이면 붕괴 위험이 커진다.
12월 20일 물이 고인 바닥쪽으로 내려가 작업과정을 점검하던 나의 등위로 골프공만한 돌멩이 2개가 떨어졌다. 나는 권투선수의 주먹으로 등을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골프공 크기의 돌도 25m 높이에서 떨어지면 가속도가 붙어 강한 충격을 준다는 사실을 나는 절실하게 체험했다. 그 돌들이 머리에 맞지 않은 것이 다행이였다.
12월 21일 오철록씨는 바위 위에 아찔하게 걸쳐있는 와라층을 걷어내는 작업을 했다. 위험한 곳에 걸터앉아 쇠바구니로 흙을 퍼담는 포크레인을 바라보는 것만도 아슬아슬했다. 이런 불량 환경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에 열중하는 두 기사의 투혼은 눈물겨웠다.
이창근 팀장과 최민용씨는 “기사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데도 작업을 독려하기가 괴롭다”고 여러 차례 하소연했다. 그들은 웅덩이 쪽으로 내려가서 작업진행 상황을 살피거나, 지하에서 20m 높이의 중간 통로의 가장자리에서 밑을 내려 6월 한달 동안 일했던 브레커 기사 문준동씨는 30도 기울기의 지하 통로로 내려가서 작업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는 6월 28일 돌멩이가 떨어져 브레커 유리창을 깨뜨리자 육중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혼비백산(魂飛魄散)한 적이 있다
예측은 빗나가는데
우리 팀은 북한의 남침용 땅굴을 국민의 힘으로 기어이 찾고야 말겠다는 투철한 신념과 강인한 의욕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공사기일은 고무줄처럼 늘어나고 확인은 밤길을 더듬는 것처럼 더디었다.
현장팀은 최민용씨의 라디에스테지 탐사법과 오철록, 이xx, 이xx씨의 공사감각,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종합한 이창근 팀장의 판단을 거쳐 작전을 수행해왔다. 나는 사회와 현장을 오가며 작업을 도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치게 의욕을 앞세워 확인 가능성을 앞당겨 예측하거나, 공법(工法)의 우선순위를 그 때 그 때 즉흥적으로 고려하거나, 작업기간을 지나치게 오래 끎으로써 결과적으로 북한측에게 역대책(逆對策)의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등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범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창근 팀장의 작업일지는 안타까움과 회한(悔恨)과 울분으로 얼룩져 있다. 몇가지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998년 12월 5일. 오기사와 엄기사는 심도 3-4m에 터널이 있는 것 같다고 추정하였다. 12월 8일. 나(이창근)는 심도가 거진 가까이 왔다고 본다. 내일을 기대해야지. 오늘 현재 30cm정도 내려갔다. 1999년 2월 1일. 오늘은 정확한 심도를 알기 위해 줄자를 가지고 측량을 해보았다. 대략 지표에서 25-26m 정도였다. 이승환씨 댁의 징후 청음 심도는 33m 정도였다. 대략 4-5m정도 굴진하면 천공에 머무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월 14일. 어제 엄기사가 브레커를 때리는데 갑자기 해머가 1m이상 쑥 들어갔다고 했다. 다시 바로 옆에서 쑥 들어갔다고 한다. 최민용 선생이 엄기사에게 “경암을 두드릴 때 쑥 들어가는 경우도 있느냐?” 라고 물었다. 엄기사는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그럴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흥분되어 우비도 안 입고 삽을 들고 내려가 직접 쑤셔보았다. 삽의 절반 이상이 쑥 들어갔고 손을 집어넣어 전면 공간을 확인 하려 했으나 맨손으로는 50cm도 들어가지 않았다. 만일 엄 기사가 느낀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천정을 건드린 것이며 드디어 우리가 원하는 동공(洞空)이 나타난 것이다. 4월 11일. 오기사와 엄기사는 작업기간을 4-5일로 보고, 최선생은 7일로 잡았다. 나(이창근)는 12-13일로 잡았다.-----“
우리 팀은 이처럼 심도와 작업 종료 시점을 두고 마음이 급한 나머지 이처럼 주먹구구식 추단(推斷)을 거듭했다. 그 때마다 우리는 후원자들에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고의가 아니었다.
“아, 목마르다”
우리 팀이 땅굴 확인작업에 15개월 이상을 흘러보내고, 대홍수철을 제외하고도 6차례나 작업을 중단한 주요 원인은 경비 부족에 있었다. 돈이 없으면 하루도 작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의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 팀은 작업중에 돈이 없을 때마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는 했다. 이러한 상황을 꼭 집어서 표현하면 우리는 ‘거지신세’와 다를 바 없었다.
우리 팀이 돈에 얽힌 사연을 말하자면 끝이 없을 지경이다 이 세상에 돈은 많이 퍼져있다. 그러나 돈은 꼭 필요한 데 쓰려 하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 경우에 돈을 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은 쓴맛을 보기 마련이다.
이창근 팀장은 1998년 12월 18일 “언제까지 죽일 놈이 되어 나에게 희망을 보여주신 분들에게 무리한 자금 지원을 하고, 걱정을 끼쳐야 한단 말인가?”라고 탄식하는 등 현장 책임자로서 줄기차게 고민했다. 그는 임진강가든에서 나온 후 여관생활을 하는 동안 1주일에 2-3일씩 굶었다. 공중전화로 긴급구조신호를 보내기 위해 그는 가진 돈을 모두 동전으로 바꾼 일마저 있다.
최민용 탐사위원은 “집사람의 통장에서 아들의 대학교 등록금을 몰래 빼내 작업 현장의 기름 값 등으로 충당했다”고 자신의 딱한 처지를 호소한 바 있다. 그는 1999년 1월 2일 고향 사람들을 작업현장으로 초빙하여 경제 후원자가 되어달라고 사정하기도 했다.
우리 팀이 임진강가든에서 철수해 여관생활을 할 무렵에 최민용씨는 전통찻집 다래를 즐겨 찾았다. 그는 “식사 때가 되면 거기서 한 식구처럼 얻어먹는다”는 등 동료들에게 궁여지책을 토로하기도 했다.
홍보위원인 나는 집안 일로 갑자기 돈이 필요하다는 한 원로의 딱한 사정을 듣고 2년 전에 빚을 얻어 그에게 3백만원을 빌려준 사실이 있다. 나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을 확인하는 막바지 단계에 급히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국방성금을 하는 셈치고 그 돈을 돌려달라”고 여러 차례 호소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원로는 끝내 채무를 이행하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 상에 못막혀 고통을 참으며 숨져갈 때 “아, 목마르다”고 부르짖었다.
우리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일을 하는데도 돈이 없어 공사를 자꾸만 중단해야 했고, 그 때 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손을 내밀어야만 했다. 우리는 “아, 목마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경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돈에 비친 인간상
남침용 땅굴 확인과 같은 미묘한 문제에 돈을 끌어들이는 과업은 분단현실에서 쉬운 일 같았지만 사실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일은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등장한 군사정권 아래서는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햇볕정책을 정책 기조로 삼은 '국민의 정부' 아래서는 정부의 시책에 어긋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우리에게 비용을 대줄 것처럼 시사했던 몇 사람은 한 두주일이 지난 후에 거절의 의사를 전해왔다. 그들은 우리와 관련을 맺으면 정부가 싫어할 것 같다는 것, 사업을 하는 사람은 권력에게 잘못 보이면 순식간에 가버린다는 것을 거절의 이유로 들었다.
우리팀에게 1천만원 단위의 경비를 지원해준 사람들도 몫돈으로 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우리들이 10여 번 요청하면 한 번 꼴로 기백만원씩 주는 것이 상례였다. 이 정도의 돈은 우리가 외상을 갚는 데 알맞는 액수일 뿐 작업에 가속도를 붙이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한 회사 사장은 "조건 없이 1천만원을 대서 작업을 끝내도록 하겠다"고 4월 하순에 약속했다. 그러나 10차례 이상을 약속을 어기다가 연락을 끊어버려 우리들을 몹씨 당황하게 했다. 그는 뒤에 "회사 사정이 안풀려서 그랬다"고 해명했다.
영악한 사람들은 "1천만원을 낼테니 포상금이 나오면 1억원을 달라"라든가, "1천만원을 내면 포상금 지분의 10%를 보장해달라"든가, "성공 가능성이 낮은 일에 돈을 빌려주려면 담보를 잡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뱃짱을 튕기며 내뱉은 이같은 말은 우리들의 가슴에 비수(匕首)로 꽂혀왔다.
이와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일에 더욱 열성적이었다. 재정부문 지도위원인 이용섭씨의 어머니는 서울의 변두리에서 구멍가게 규모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만일 발굴팀이 실패할 경우 판 땅을 매꿔주어야 할 터인데 그것을 예상하고 내가 마련해둔 돈이 여기 있다"라면서 돈이 바닥나 작업을 못하고 있던 우리 팀에게 2월 20일 2백만원(주, 나의 노모가 개인적으로 1998년 9월부터 지원한 돈은 약 3천만원을 왔다갔다 한다. 돈을 보냈던 은행 계좌 영수증도 거의 다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을 선뜻 내놓았다. 우리는 그녀의 은공(恩功)을 잊지 않기로 했다.
수맥(水脈)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물은 땅 밖으로 흐를 때 강(江)이나 내(川)가 되고, 땅 속으로 흐를 때 수맥(水脈)이 된다. 사람이 수맥을 건드리면 물은 샘(泉)이 된다. 그러나 땅 속의 물은 수시로 흐름을 튼다.
우리 팀이 파들어간 구미리 11번지의 1도 지하에 수맥을 뻗치고 있었다. 현장소장 오철록씨가 절개 지역의 북단(北端)쪽을 10m 가량 포크레인으로 파헤치고. 브레커 엄주용씨가 그 부근의 바위를 깨뜨렸을 때 지하 수맥은 몸부림을 치며 방행을 선회(旋回)했다. 우리 팀과 물은 운명의 해후(邂逅)를 시작한 것이다.
수맥은 미꾸라지다. 손으로 잡으려면 미끌미끌한 체액을 남기며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미꾸라지. 머리와 몸통과 꼬리를 S자로 꿈틀거리면서도 빈틈을 발견하면 곧장 뚫고 들어가는 미꾸라지.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인하고 잡힐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미꾸라지. 수맥은 이 물고기의 습성을 닮아 그것을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포크레인으로 뒤집히고, 프레커에 찍힌 수맥은 상처를 아파할 틈도 없이 새로운 길을 찾는다. 어떤 사람은 이 경우에 "수맥을 끊었다고"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맥은 끊어지지 않고 종래의 방향을 멈췄을 뿐이다. 끊어도 끊어지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물은 확실히 양성적(陽性的)이다.
구미리 11번지의 1 밭의 지하 수맥도 한 때 끊겨 웅덩이를 이루고, 그것을 방치하면 호수처럼 커졌다. 하지만 수맥은 보이지 않는 바위 틈으로 새로운 탐출구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생명체다.
작업현장의 언덕받이에 있는 '무명쉼터'는 뒷마당의 지하수를 뽑아 올려 식수로 쓰고 있다. 우리가 그 집 마당의 복판에 시추공을 뚫었을 때 지하 35m 지점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현상이 관측됐다. 물은 그 후에 차올랐다. 이 가게 주인 정춘모씨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가 팠던 시추공의 물을 제2의 샘물로 삼았다.
그러나 정씨의 기쁨도 잠시였다. 우리 팀은 6월 23일과 24일 이틀에 걸쳐 작업현장의 지하 30m 지점에 있는 경암을 15군데나 크로라드릴로 뜷어 마지막 깊이를 점검한 바 있다. 직선 거리로 40m 북쪽에 있는 '무명쉼터'의 제2의 우물은 이순간 바짝 말라버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리저리 흐르고 빠져나가는 물이 모여서 만들어진 수맥은 무소불통(無所不通)이다. 그것이 한 곳에 머물러 인간에게 제공하는 샘. 온천수. 공업용수 등은 얼마나 유용한가? 하지만 인간이 북새통을 이루며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파괴하면 수맥은 몽니를 부리며 사라지고 만다.
수맥이 지나가는 땅위에 지어진 건물은 아무리 높아도 왜 금이 가는가? 이 문제에 대해 천주교 임응승 신부는 "사람의 몸도 감기 몸살을 앓고 났을 때 입술이 터지듯이 수맥이 지나가는 자리는 깨져야만 한다. 그것은 수맥이 물줄기를 공급받기 위한 자체운동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자괴(自愧)현상이다"라고 설명한다.
우리들의 상전이 된 양수기
물은 앞에서 수맥으로부터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암반수(岩盤水)와 뒤에서 임진강 바닥을 타고 흘러드는 유입수(流入水)를 통해 쌍방공격을 감행했다. 우리는 물이 철철 흘러들어오는 굴착 현장에서 물이 없는 땅은 죽은 땅이란 사실을 잠시 잊은 채 "물이 나오지 않으면 이 공사가 얼마나 쉽겠는가?"라고 탄식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우리 팀은 1998년 11월 19일 동아수중펌프 류태근(柳泰根) 사장에게 양수기를 섭외하여 물퍼내기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하루만에 호스가 터져 이 작전은 중단됐다. 그리고 11월 21일에도 호스는 터졌다. 현장 작업팀은 처음으로 "물 때문에 포기상태다. 정말 힘들다"라고 탄식했다. 11월 22일 또 호스가 터졌다. 그리하여 우리는 4인치와 6인치짜리 호스를 섭외하여 갈아 끼웠다. 우리는 11월 23일에야 고인 물을 80%가량 퍼냈다.
그러나 양수기는 11월 29일 모터 고장을 일으켰다. 우리는 양수기를 수리하여 다시 가동시켰다. 12월 3일에도 양수기가 터졌다. 이창근 팀장은 이날 상황을 '물과의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12월 7일 양수기가 또 고장을 일으켰다. 4인치 공화호스로 갈아 끼웠다. 현장 작업팀이 일제히 내뱉은 말은 "양수기와의 싸움은 지겹다. 지긋지긋하다"였다. 12월 12일에는 4인치 공화 호스가 터진데 이어 양수기가 고장났다.
현장팀은 12월 13일 양수기를 교환했다. 그러나 이 양수기는 12월 17일에도 또 터졌다. 우리는 양수기를 모터 부분만 빼고 모두 교환했다. 양수기가 자꾸 고장난 까닭은 브레커로 바위를 깨뜨릴 때 생기는 버럭과 이것이 물과 섞여 생기는 진흙이 양수기로 끼어드는데다가, 좁은 바닥을 치는 브레커 헤머가 가끔 양수기에 달린 호스를 찢기 때문이다.
1999년 2월 24일에는 오철록 소장의 포크레인 이빨이 양수기의 전선을 건드려 또 터졌다. 6인치 호스가 터지더니 4인치 고무 바킹 부위에 물이 터져나왔다. 저녁 6시에야 4인치 양수기가 도착했다. 작업팀은 종일 양수기 호스를 자르고 조이고 묶어야 했다.
이창근 팀장은 이날 밤 "하느님! 제발 이젠 작업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양수기가 터지거나, 합선되거나, 고무 바킹이 빠져나오가서, 호스가 헤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도와주십시오. 두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작업팀은 2월 26일에도 양수기가 돌아가지 않아 또 한번 고생을 했다. 이 팀장, 오 소장, 엄 기사 등은 밑바닥에 물이 차올라 작업에 큰 지장을 받아서 모두 지쳤다. 오 소장과 엄 기사는 "10년 이상 땅을 파고 돌을 깨왔지만 물이 이렇게도 끈질기게 괴롭힌 적은 처음이다"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물 속으로 뛰어든 사연
자금이 부족하여 10일째 공사가 중단되고 있던 1999년 1월 1일 작업장은 물로 가득차 호수(湖水)를 이루었다. 우리는 이것을 '인공호수'라 불렀다. 바위를 깨는 소리가 멈춘 현장는 고즈녁했다. 20세기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새해를 '인공호수'가에서 맞은 나의 심경은 착잡했다. 진초록 빛깔의 물은 싱싱했다.
북한측이 땅굴속을 바위와 잡석으로 메꾸고 그래도 안심이 안돼 차단벽을 설치함으로써 물은 빠져나갈 틈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흘러드는 물은 차오르기만 한다. 우리 호수의 최고 수위는 임진강 물 높이와 같다. 우리는 이 호수를 낭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다.
우리가 27일 동안 작업을 하지 않았던 4월 초순에도 이 호수는 만수(滿水)를 이루었다. 암반수와 유입수는 종전처럼 흘러들고 바위 틈으로 조금씩 물을 흘려보내면서 구덩이를 채운 저 호수는 무슨 운명을 타고 났기에 우리들을 이토록 물먹이는가?
5월 15일부터 6월 2일까지 여섯번째 작업중단 사태를 겪고 가까스로 일을 시작한지 사흘이 지난 6월 5일 현장 소장 오철록씨는 흙탕물에 낀 양수기를 끄집어내 청소하기 위해 장비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양수기는 도중에 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 팀은 호수에서 물을 많이 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수심은 8m가량 되었다. 양수기가 그 안에서 실종되면 물을 더 이상 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포크레인 옆에 있던 이창근 팀장은 즉시 호수가로 뛰어내려가 팬티차림으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1분 동안 물 속을 뒤졌으나 양수기를 찾지 못하고 땅으로 올라왔다. 그는 가쁜 숨을 내쉰 후 8차례나 물 속으로 뛰어든 끝에 겨우 양수기를 걷어 올렸다.
현장 소장 오철록씨, 브레커 기사 문준동씨는 "죽으려고 결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 찬 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단 말이가?"라면서 혀를 내둘렀다. 지난 5월 초부터 작업에 가담한 브레커 문씨는 "이 팀장의 결사적인 의지를 보니 나도 확신이 선다"라고 말했다.
발파 허가를 받고
단단한 바위를 브레커로 깨뜨리고 포크레인으로 긁어올리며, 고인 물을 빼고, 길을 넓히고 깎는 일은 작업 진도를 느리게했다. 우리 팀은 30m를 판 이래 자금이 없어 자주 작업이 중단되고, 물이 차면 물을 빼는 데 시간과 기름값을 소비하느라 지쳐있었다.
우리는 6월로 들어서면서 장마철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장마가 오기 전에 작업을 완료하는 것이었다. 6월 10일 우리는 화약으로 바위를 폭파시켜 승부를 빨리 내리기로 결단했다(주, 발파팀은 내가 데리고 왔다).
그러나 보통 사람이 화약류 사용허가 신청서를 관할 경찰서에 제출하면 15일 이상이 걸려야 허가 여부가 결정된다. 우리는 이런 관례를 기다리려면 브레커로 깨뜨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발파를 일단 포기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한에 쫓기던 우리는 되든지 안되든지 한번 부딛쳐보기로 했다. 이창근 팀장은 6월 13일 연천경찰서로 찾아갔다. 그는 서장을 면회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발파허가증을 내줄 수 없느냐고 사정했다. 이 팀장의 말을 유심히 듣던 서장은 "국가안보에 관한 중대한 일인데다, 장마가 다가오므로 작업을 빨리 끝내는 것이 서로 좋을 것이므로 관련서류를 제출하면 특별히 사흘 안에 허가를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팀장은 이날 화약류 사용허가 신청서, 화약류 관리보안 책임자 선임신고서, 화약류 공수급 계약서, 화약류 양수허가 신청서 등 4가지 서류를 받아가지고 왔다. 우리는 아는 사람을 내세워 관련서류를 작성하여 6월 15일 연천경철서에 제출했다. 경찰은 몇가지 보안 요청을 한 다음에 서류를 접수했다.
연천경찰서장은 화약류 양수허가증과 화약류 사용허가증을 6월 18일자로 발부해주었다. 서장은 경기도 경찰청 및 관할 사단과 협의하여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창근 팀장은 두 서류를 받아 쥔 채 허리를 펴고 현장에 나타났다.
화약류 사용허가증은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에 이어 종류 및 수량 항목에 폭약 2천kg, 전기뇌관 5백개, 사용목적 항목에 암석절개(남침용 땅굴 발견용), 사용일시 항목에 평일 주간에 한 함, 사용장소 항목에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 11번지, 사용기간 항목에 1999년 6월 18일-1999년 7월 16일, 조건 항목에 화약류 사용상 지시사항 준수 등을 요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쓸어가버린 임진강
우리 팀이 발파허가를 받고도 돈이 없어 제대로 작업을 하지도 못한 채 장마철은 다가왔다. 과연 7월 31일부터 8월 3일까지 쏟아진 장대비는 임진강의 수위를 둑 위로까지 끌어올렸다. 도도한 탁류는 현천군과 파주시 일대를 휩쓸었다. 1996년. 1998년에 이어 또다시 수마(水魔)가 민중의 삶의 터전을 유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재해를 천재(天災)라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엄청난 수해가 어찌하여 4년 동안에 3번이나 반복된다는 말인가. 이것은 방재를 소홀히 한 인재(人災)였다.
연천군 군남면 남계리에서 한탄강과 합쳐진 임진강은 무서운 기세로 동리리를 휩쓸고 백학면 아미리쪽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아미리는 바위로 형성된 천연의 둑을 방패로 삼고 기다린다. 물은 아미리의 바위를 치면서 휘돌아 구미리의 토막포, 구미소 등 낮은 지역을 휩쓸며 집과 논밭을 순식간에 집어 삼키고 야산 중턱에 있는 구미리 마을회관 아래까지 들어찬다.
8월 1일 새벽에 연천군 백학면과 파주시를 잇는 비룡교(飛龍橋)가 임진강의 범람으로 통행이 통제되자 백학면 구미리, 학곡리, 노곡리, 전동리, 통구리, 두일리와 장남면 일대는 물바다로 변한 채 고립되고 말았다.
물살은 전봇대의 꼭대기 위로 넘실댔다. 특히 장남면과 백학면 구미리는 사흘동안 완전히 고립되어 굶주리고 아픈 사람들이 속출했는데도 뽀족한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이 홍수로 우리 팀의 작업 현장은 탁류 속에 묻히고 말았다. 현장 부근의 언덕받이에 세워두었던 브레커 1대, 크로라드릴 1대, 발전기 등이 탁류에 잠겨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장비 기사들이 포크레인 1대와 브레커 2대는 산 중턱으로 미리 옮겨놓아 피해를 덜 보았다. 이xx씨는 포크레인을 옮기다가 기계가 길 옆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크게 다쳤다.
장비 기사들은 포크레인 안에서 이틀 동안 굶으며 비룡교가 뚫리기를 기다렸다가 10리를 걸어서 적성면으로 올 수 있었다. 이범찬(주, 이창근) 팀장은 임시 숙소에 둔 옷가지와 몇가지 기록들을 홍수로 떠나보냈다. 그는 주민들과 함께 급히 구리리에 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회관으로 몸을 피했다.
우리 팀의 작업현장 부근에 있는 정춘모씨 가게는 처마까지 물에 잠기는 바람에 모든 가재도구를 잃었다. 돌을 갓 지난 그의 아들은 마을회관에서 말라리아 증세를 일으켜 한 때 위험하기도 했다. 김진태씨는 목장에서 젖소 42 마리를 떠납 보내는 아픔을 되씹어야 했다.
이창근. 정춘모. 김진태씨 등은 8월 3일 강물이 웬만큼 빠지자 작업 현장 부근으로 노를 저어 왔다. 그들은 이순간에 가게와 목장 부근의 젖은 땅에서 남북으로 강력한 공기가 분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물기가 없는 곳에서까지‘쉬 쉬’소리가 나며 공기가 솟아올랐다.
이 팀장은 검정 비닐 봉지를 공기가 솟는 곳에 뒤집어 씌웠다. 그러자 비닐 봉지가 부풀어 오르더니 재봉된 틈으로 공기가 터져나왔다. 이팀장이 냄새를 맡아보니 산소가 분명했다.
이같은 사실은 북한측이 땅굴을 파내려오며 굴 속에 강압 산소를 공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땅굴 속에 차있던 산소가 수압(水壓)을 견디지 못하고 팽창하면서 바위 틈을 뚫고 땅 위로 솟아오른 것으로 추정한다.
우리는 지난 해 말에 절개작업 현장에서도 여러 차례 기포가 솟아오르는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할 때 구미리에 남침용 땅굴이 분명히 존재 한다고 우리는 확신했다.
우리는 강물이 평상시의 수위로 줄어들어야 호수의 물을 퍼낼 수가 있었다. 그에 앞서 발전기와 양수기를 새로 교섭해야만 했다. 현장의 모래와 자갈은 이미 바위를 깨서 확보해놓은 공간에 차있는것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걷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것으로 판단됐다.
이런 점을 모두 고려하면 일단 작업을 시작할 경우 20여 일 정도가 더 걸릴 것 같았다. 그만큼 경비가 더 든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무거운 부담이 된다.
다만 우리는 별다른 인명 피해를 내지 않고, 장비 3대를 안전하게 보관한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자위했다. 만일 이 두가지 중에 한가지라도 문제가 있었다면 우리는 작업을 속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홍수가 호사다마(好事多魔)의 일종이라 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시련으로 그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용섭 주, 이 당시 나는 잠시 고향을 다녀왔던 최민용씨와 함께 큰 위험을 무릅쓰고 길이 다 끊어진 적성면에 들어가 보았다. 이 와중 속에서 술에 취해 집에서 자고 있던 나는 새벽에 깨어 한 환상(환시)을 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땅굴은 땅굴이지만 생전에 한번도 못 보았던 형태의 땅굴이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다
이창근 팀장은 이 소용돌이 속에서도 외상으로 양수기와 발전기를 새로 설치하고 8월 20일까지 작업을 새로 시작할 준비를 완료했다.
나는 그 무렵 헝클어진 마음을 가다듬고 동료들에게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이 있지 않느냐. 대의(大義)를 위해 단결하자”라고 호소 했다.
이 팀장은 나와 협의한 후 8월 21일자로 군과 관에 8쪽짜리 보고서를 제출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보고서의 내용을 “땅굴 민원의 잘못 인식된 사안을 정리하여 관계기관의 오판 방지 용도”라고 규정했다.
그는 보고서 작성 사유를 “당 보고사항으로 인하여 잘못을 바로 잡고 본인이 절개를 강행하는 연천군 구미리의 땅굴 징후지역의 땅굴 존재에 관한 기관의 판단을 요망함”이라고 밝혔다.
‘땅굴 민원의 시발과 문제점', ‘땅굴 민원인의 탐지 방법', ‘땅굴 민원 결론’, ‘기타 건의 사항’ 등의 순서로 쓰여진 이 보고서 중 제3항 결론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A지역 : 지하 시추 후 청음 내용 각 기관에 1998. 9. 30. 신고(시추자 본인, 녹음자 본인, 조작일 수 없음). B지역 : 25사단 자체조사 1991, 1992년도. D, E지역 : 굴착음 1998년 12월-1999년 1월 중순경 본인 청음(크로스 절개작업 소음). F지역 : 지하 32m에서 기포 발생 및 코아링 시추 결과 모니터 촬영 후 25사단 및 국방부에 신고. 수포 발생된 지역 사진 촬영 후 사진 내용 25사단, 국방부, 정보원에 보냄. 다) 결론 : 앞으로 20여일. 작업은 군관민 협동으로 하기를 기대 요망 함.”
이창근 팀장의 보고서의 핵심은 마무리 작업을 민관군(民官軍)이 힘을 합하여 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군 및 정보기관과 합심하여 최종적으로 확인할 것을 기대하며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우리 팀 스스로 땅굴을 확인할 경우 국가 기관을 음해하거나 골탕먹일 의도가 없음을 사전에 명확히 밝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하지만 관계당국은 여러 차례 현장조사를 하는 등 관심을 표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자금 또는 장비 지원 등 실질적인 조력은 끝내 하지 않았다. 우리는 철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미국방부의 1997년판 <북한 핸드북>이란 보고서는 휴전선 부근에 남침용 땅굴이 20여 개나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9월 12일자 미과학자협회(FAS)의 인터넷 사이트(http://www.fas.org)를 통해 경종을 울렸다.
나는 미국이 베를린회담에서 북한과 미사일협상을 타결지은 바로 그 시점에 남침용 땅굴문제를 공개한 사실을 주목한다.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미국은 북한에 대해 결코 무분별하게 양보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준비해두고 있다는 사실을 이 인터넷 사이트는 확실하게 보여준다.
“믿을 것은 맨주먹밖에 없다.” “조국을 우리 손으로 지키자.” 이것은 헐벗고 굶주린 민중들이 탐관오리들의 폭정에 맞서 민란(民亂)을 일으키거나 외적의 침입으로 국가가 위태로울 때 의병(義兵)을 조직하여 적진으로 진격하면서 외친 말이다. 맨주먹을 앞세운 조상들의 그 비장한 애국심이 없었다면 이 나라가 지금 남아있을 것인가?
마지막 강행군
우리의 비장한 행군은 9월 1일에 시작됐다. 메꾸어진 모래를 포크레인으로 파고 덤프 트럭으로 옮기는 일을 우리 팀은 새벽부터 해질 무렵까지 해냈다.
이창근 팀장은 낡은 승용차를 2백35만원에 팔아 기름값 외상 중의 일부를 갚았다. 팀원들은 푼돈을 모아 빛을 갚아가며 나머지 공정을 외상으로 밀고 나갔다. 이창근, 오철록, 이xx, 이xx씨등 현장팀은 여관비와 식대를 절약하기 위해 현장 부근에 대형 천막을 치고 숙식을 했다. 이 무렵 최민용씨는 따로 적성면 구읍리 송원여관에 머물렀다.
이창근 팀장은 9월 16일에 연천경찰서장으로부터 화약류 사용허가증(사용기간 9.16-11.15)을 재발급 받았다. 그러나 우리 팀은 화약을 살 돈 3백만원이 없어서 발파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태풍 앤호를 맞아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중북부지방에 거세게 내린 비로 임진강 물이 다시 불어나는 바람에 천신만고 끝에 원상회복시켜 놓은 구덩이에 또다시 물이 차는 비극을 맞았다.
지난 7월말부터 8월초까지의 집중호우로 임진강이 범람하기 직전에도 우리 팀은 발파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우리 팀이 발파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물이 불었다. 이것은 재앙은 홀로 오지 않는다는 화불단행(禍不單行)이란 옛말 그대로였다.
이창근, 오철록, 이xx, 이xx씨 등은 이번에도 현장에 물이 차기 직전에 양수기와 발전기, 포크레인, 브레커 등을 높은 곳으로 옮기고, 정들었던 천막을 철거한 채 9월 19일 오후 5시에 임진강가든으로 임시 거처를 정했다.
여기에다 우리는 추석 연휴(9월 23일-26일)을 앞두고 발굴자금이 바닥났다. 장비 기사들은 최소한의 떡값마저 지불하지 못하는 지도부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토로했다. 이창근 팀장과 나는 9월 21일과 22일에 장한평, 구의동, 영등포동 등으로 아는 사람들을 찾아가 절박한 실정을 호소했다. 결국 우리는 영등포문고 이강산(李江山) 사장으로부터 1천만원을 마련하여 현장의 불만을 가까스로 잠재웠다.
현장팀은 추석 연휴가 끝난 9월 27일부터 발전기(3,500kw) 1대와 양수기(6인지 짜리 2대, 4인치 짜리 3대), 샌드모터 및 에어 콤푸레셔 등을 가동하여 물과 진흙을 뿜어냈다. 우리가 이미 파놓은 32.5m 깊이의 바닥은 10월 11일에야 드러났다.
우리팀은 천모 사장으로부터 T4기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키로 했다. T4기란 주로 온천을 발굴할 때 지하 수백m 암반을 뚫는 고성능 굴착기다. 이 기계는 1일 대여료만 7백만원 이상 되는 고가 장비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을 이틀 동안 쓰는 데 5백만원을 주기로 하고 빌렸다. 경기도 수원에서 대기중이던 이 기계는 우리 팀이 물을 다 퍼내고 난 후인 10월 13일 오전 7시 구미리 현장으로 옮겨졌다.
T4 기사들은 이날부터 이틀 동안 우리 팀이 남침용 땅굴 천장 부위라고 믿는 암반을 직경 40cm의 크기로 잇대서 6군데를 뚫었다. 10월 14일 오후 두시경 약간 고였던 물이 급격히 빨려 들어가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현장팀은 바짝 긴장하고 침을 삼켰다.
경암은 T4에 의해 직경 1m 10cm, 깊이 7m 50cm의 크기로 뻥 뚫렸다. 특수 카메라를 넣어보니 바닥에는 인민군들이 역대책으로 막아놓은 것으로 보이는 잡석들이 있었다. 지표수가 동공으로 흘러들어 서서히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급히 시멘트를 외상으로 구해와 동공 주변에 방수벽을 둘러치는 공사에 착수했으나 물 때문에 시멘트가 양생되지 않아 10월 18일에 속이 빈 원통형 알미늄관(管)을 1백 70만원에 구입하여 동공 위에 고정하고 그 밑둘레만 시멘트를 말라 10월 20일에야 공사를 끝낼수 있었다.
제5땅굴이 뚫렸다
한편 우리는 동공에 우물용 도르레를 설치하여 바닥에 있는 슬러지와 잡석 등을 긁어올리는 마지막 공정으로 들어갔다. 이창근 팀장과 이xx, 이xx씨가 번갈아 이 작업에 임했다. 현장팀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방독면을 착용하고 탐조등을 준비했다. 도르레를 타고 오르내리는 쇠바구니에 잡석을 담는 손들이 떨렸다. 우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바위 틈에 폭약을 넣어 무진동 발파하고 바닥을 정리한 후 땅굴을 따라 약간 파고들어갔다.
우리는 11월 20일 까지 폭 3.5m, 높이 2.2m-2.5m, 길이 6m의 공간을 확보했다. 바위 또는 잡석들과 고압으로 밀어넣은 듯한 흰색 접착제 및 방수제가 줄기차게 묻어 나왔다. 이것은 이 땅굴이 자연 동굴이 아니라 인공 동굴임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우리는 잡석들을 깨뜨리고 지상으로 퍼올리는 작업을 계속했다. 12월 20일이 되자 지하공간은 높이 2.5m-3.5m, 폭 5.5m, 길이 9m로 확대되었다. 공간이 이처럼 넓어진 이유는 우리가 끈질기게 땅굴을 파들어가자 북한측이 땅굴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고의로 넓게 파놓고 바위와 잡석들로 메꿔놓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운명의 12월 23일 아침. 본래 단단한 바위와 인민군들이 땅굴의 공간을 매워놓은 잡석들이 육안으로 확연히 구별되었다. 경암과 잡석뭉치, 회색 접착제 및 방수제 등 이물질(異物質)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리고 북한측이 역대책의 일환으로 땅굴을 위장용 잡석으로 메꾸는 동안 흘러드는 물을 막기위해 설치한 콘크리트 차수벽(遮水壁)도 발견됐다. 경암으로된 기울기 20도의 땅굴 바닥까지 나왔다.
아! 그것은 지상에서 40m 깊이의 암반속에 숨어있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틀림없다.
우리는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 순간을 위해 우리는 15개월을 몸부림치지 않았던가. 미친 사람들이란 비웃음을 못들은 척 하지 않았던가. 지쳐서 고꾸라질 때마다 하느님, 부처님 또는 조상님께 도와달라고 울부짖지 않았던가.
사람들은 이 땅굴이 공간 그대로 있었다면 남침용 땅굴인지 자연동굴인지 속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북한측은 남침용 땅굴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잡석으로 공간을 메꿔놓음으로써 도리어 이 땅굴이 인위적인 동굴임을 입증한 셈이 되고 말았다.
내외신 기자회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권과 특히 국방부는 북한이 남침땅굴을 파며 정상회담을 하는 등 파렴치한 이중 플레이를 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입장을 감싸기에 급급했다.
국가 안보가 만의 하나의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라면 이 정권은 국가안보에는 관심이 약하고 북한의 김정일 일파와 대화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을 정치의 우선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이적성(利敵性)'이 의심되는 구석이 없지 않다.
이 정권 담당자들은 민간인들이 희생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남침땅굴을 확인하고 있는 동안 단 한번도 격려의 말을 한 일이 없다. 오히려 국방부 탐지과 당국자들은 남침땅굴이 아니라고만 해명하고 민관이 공동으로 절개작업을 하여 속시원히 남침땅굴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을 외면했다.
이러한 행위는 사춘기 소년소녀가 바람이 나서 상대방 이성의 자태에 눈이 먼 나머지 공부고 시험이고 팽개친 채 그의 뒤를 좇으며 침을 흘리는 것과 크게 다름이 없다 할 것이다. 상대방이 자신의 운명을 망칠 악인인지, 그의 정당한 배필이 될 선인인지를 구별한다는 것은 그에게 무리일지도 모른다. 왜나하면 그는 이성(理性)을 상실하고 있으니까--.
그리하여 민간인 남침땅굴 대책모임은 1999년 12월 23일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 11번지의 1 남침땅굴 발굴 현장에서 내외신 기자회견(內外信 記者會見)을 갖고 제5땅굴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한국의 주요 언론들이 외면한 가운데 <시민운동 연합신문>은 이 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으며, 일본의 NHK방송과 <산께이신문(産經新聞)>은 이를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이 회견에서 우리가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민간인 남침땅굴 대책모임은 1998년 9월 26일부터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에서 직선 거리로 약 11.8km 남하한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京畿道 連川郡 百鶴面 九尾里) 11번지의 1 옥수수밭 지하를 40m 가량 절개(切開)하여 1999년 12월 23일 북한의 남침용 땅굴로 보이는 지하공간(地下空間)을 확인했다.
2) 우리가 이것을 북한의 남침용 땅굴로 판단하는 근거(根據)는
가) 라디에스테지(Radiestesie) 탐사 결과 이 땅굴이 북한쪽으로부터 완만하게 상승하면서 남하해온 점.
나) 우리가 작업을 하지 않은 심야에 지하로부터 바위를 뚫는 소리가 들린 점.
다) 암반의 틈에서 기포(氣泡)가 솟아 오른 점.
라) 암반이 뚫리는 순간에 지표수(地表水)가 빨려들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른 점.
마) 이 땅굴이 1975년에 우리 군(軍)에 의해 발견된 제2 땅굴 처럼 북한측의 역대책(逆對策)에 의해 또 다른 바위들로 메꿔졌으며 그 바위들은 접착제 및 방수제로 응고된 점.
바) 땅굴의 남동쪽 끝에 콘크리트와 바위로 된 차수벽(遮水壁)이 설치된 점.
사) 땅굴안에 20도 경사(傾斜)의 바닥이 보이는 점 등 때문이다.
3) 대책모임은 이번 발굴의 역사적 (意義)를 다음과 같이 요약(要約)한다. 즉 그것은 첫째, 민간인들이 최초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을 발굴하여 그 실체(實體)를 직접 확인한 점, 둘째, 호국(護國)의 의지와 단결(團結)과 인내(忍耐) 등 삼위일체(三位一體)로 이 일을 성사(成事)시킨 점, 셋째, 밖으로는 평화(平和)를 추구하면서, 안으로는 끊임없이 전쟁(戰爭)을 준비하는 북한의 이중성(二重性)을 폭로(暴露)한 점 등이다.
4) 우리는 국방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아군(我軍)이 우리 팀과 함께 땅굴 내부를 철저히 수색하여 보다 더 구체적(具體的)인 증거를 확보해 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5) 우리는 국가안보(國家安保)를 위해 민관군(民官軍)이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最善)의 노력(努力)을 기울이되, 필요한 경우에는 긴밀(緊密)한 공조체제(共助體制)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6) 우리는 북한이 남침을 위한 일체의 군사적 행동(軍事的 行動)을 중단(中斷)하고 한반도(韓半島)에 평화(平和)를 정착(定着)시키기 위해 함께 노력(努力)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제6땅굴도 찾아내다
한편 민간인 남침땅굴 대책모임은 2000년 6월 20일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 174-1 이승환씨 집 지하를 시추하여 또 하나의 남침땅굴로 판단되는 지하공간을 발견하고 김정일이 서울을 방문하기 전에 이 지역을 절개하여 남침땅굴의 존재를 보다 명백하게 확인해줄 것을 국방부에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당국자들과 집권 여당소속 정치인들은 "역사적인 남북대화가 계속되고 있는 이 때 남침땅굴이 있을 리가 없다"라고나 "남북대화에 방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등 절개를 해보지도 않은 채 북한 인민군의 대변인(代辯人)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
이에 뜻있는 국민들은 대남 및 국제 테러공작에 깊숙이 관여했을 뿐 아니라 핵무기 개발 의혹을 받고 있으며 화학무기와 강력한 재래식 무기를 휴전선 부근에 전진배치해놓고 있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앞두고 일고 있는 이 안보위기론을 비상한 관심으로 주시하고 있다.
민간인 남침땅굴 대책모임이 국민 신분으로서 1999년 12월 임진강변에서 처음으로 남침땅굴을 찾은 이래 이번에 두번째로 발견한 남침땅굴은 이승환씨 집 마당을 직경 600mm의 시추공으로 41m를 파내려가 물에 차있는 너비 2.5m, 높이 2.2m, 길이 7m의 공간을 SBS의 수중 촬영기를 빌려 촬영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잠수를 통한 최종 확인작업에는 대책모임의 이창근, 이xx, 홍xx씨 등이 참여한 바 있다.
이들이 촬영한 비디오 필름을 검토한 전 6사단장 겸 제2 땅굴 발견 지휘자 정명환 장군, 전 국가안전기획부 일본과장 김철희씨, 강원대학교 지질학과 우경식교수, 대한 지질학회 정회원 권기옥씨, 신우엔지니어링 이사 이정배씨, 다산쏘일테그 사장 이상근씨, 시추업자 강xx, 박xx씨, 동아수중펌프 사장 유태근씨, 삼일환경 팀장 유승씨 등은 이 곳이 남침땅굴 또는 인공동굴을 가능성이 높다고 증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남침땅굴 대책모임의 업적은 햇볕정책에 집착하고 있는 청와대와 새천년민주당(주, 현재의 도로 열우당), 국방부 당국자들, 그리고 진실을 알지 못하는 거의 모든 언론들의 외면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제6땅굴을 찾기까지
민간인들은 연천군 백학면 일대의 지하를 북한군이 남침땅굴을 벌집처럼 뚫고 들어왔으리라는 판단 아래 또 하나의 땅굴징후를 찾았다. 그 과정은 이렇다.
2000년 1월 28일 민간인 남침땅굴 대책모임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174-1 이승환씨 집 마당에 6인치짜리 시추 파이프를 박는 공사를 시작, 지하 41m까지 파내려감.
2월 초에 SBS 고철종 기자가 5차에 걸쳐 시추공을 통해 소형 카메라로 바닥을 촬영하여 전문가들의 확인을 거쳐 3월 2일 뉴스추적시간에 보도함.
2000년 3월 4일 국박부는 이 뉴스를 부인하고 이곳이 자연동공이라고 발표함.
민간인 남침땅굴 대책모임은 4월 4일부터 6일까지 바브장비로 직경 600mm의 시추공을 41m까지 시추함. 지하 공간은 바닥에서 위로 30m 가량 물로 채워져 있었음.
그 이후 잠수부들이 60여 차례 내려가 너비 1.5m, 높이 1.7m, 길이 3m의 사람이 판것으로 보이는 공간을 확인함.
2000년 6월 10일 잠수부 홍xx, 이창근, 이xx씨 등이 천공 구멍, 바닥과 벽 상태가 인공으로 깍인 흔적을 발견함. 탑전자의 유승 부장이 지상에서 줄로 매단 수중 카메라를 내리뜨려 지하공간을 촬영함.
대책모임 이창근 대표가 한동안 남침땅굴 문제를 집중적으로 보도해왔으나 남북 정상회담이 시작된 시점부터는 침묵하고 있는 SBS로부터 고성능 수중 카메라를 빌림. 6월 20일 잠수부 이xx씨가 이 카메라로 너비 2.5m, 높이 2.2m 길이 7m의 남침 땅굴로 보이는 지하공간을 촬영했음.
그러나 정부 당국과 진실을 알지 못하는 거의 모든 언론들은 남침땅굴을 찾아 나선 국민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특히 정부 당국은 김정일의 새로운 테러 경령을 입증할만한 중대 사안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의 확인을 외면한 채 김정일을 국빈으로 모실 행사 준비에 골몰하고 있다.
한편 지금까지 군인들이 찾은 제1-제4 남침땅굴에 이어 국민이 찾은 이 땅굴이 제5-제6땅굴이 가능성을 주목한 재야 인사와 깨어 있는 국민은 민간인 남침땅굴 대책모임을 후원하거나 자발적으로 땅굴 확인작업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는 1) 연천군 백학면 구미리 소재 땅굴을 절개하여 온 국민에게 그 진상을 밝힐 것, 2) 금번 땅굴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묵살한 국방부 관계자 문책, 3) 민간땅굴 조사비용에 대한 전액 배상, 4) 현지 주민들에 대한 보상대책 수립, 5) 국회 민관합동 땅굴탐지사업 진행 검토, 6) 현 땅굴 탐지사업에 대한 전면 재검토 등을 요구했다.
이용섭 주, 나는 2000년 여름, 당시 월간조선 기자였던 이동욱 기자를 조선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얼마 전 그 자신이 직접 이 곳 바닥까지 잠수하여 땅굴 여부를 눈으로 확인한 인물이었다. 당시 그는 나에게 그 곳이 남침 땅굴(인공 동굴)은 아닌 것 같으나 국가 안보와 국민들의 불안감의 해소를 위해 속시원하게 그 곳을 절개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월간조선>이 취재한 것
이에 앞서 <월간조선> 취재팀은 1992년 3월호에 우리 나라 일대의 남침땅굴 의혹 지점에 대해 취재를 한 결과를 종합하여 이 해 6월호에 상세하게 보도했다.
이 가운데 연천지역의 이상징후는 다음과 같다.
-- 1988년 3월 장상리 논에서 물이 빠지고 공기가 상승하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 1989년 봄부터 1990년 가을까지 백학면 두일 3리 백모씨가 앞마당 부근 지하에서 궤도차가 굴러가는 듯한 소리를 가끔 들었다.
-- 1989년 9월 두일 2리에서 주민 2명이 지하에서 방이 울릴 정도의 폭음과 궤도차 소리가 10여일간 들리는 것을 청취.
-- 1989년 6월, 1990년 겨울 미산면 아미 2리에서 심야에 지하 폭음을 청취.
-- 1990년 4월 백학면 노곡리교회 앞마당에서 우물을 파던 중 지하에서 물이 빠지고 공기가 상승하는 현상이 발생.
-- 1990년 5월 백학면 구미리 최종록씨 집 앞마당에서 우물을 파던 중에 물이 빠지고 찬바람이 상승.
정지용씨는 1991년 11월부터 1992년 2월까지 최씨 집 주변에서 여러 개의 시추공을 뚫었으며 한 때 시추공 부근을 포크레인으로 파고 내려가는 절개작업을 시도 했다. 그리하여 정씨는 "땅굴이 자연공간과 연결돼 소음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군당국도 남침땅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992년 1월 6일부터 2월 21일까지 시추작업을 했다. 군당국은 "징후가 나온 절개부근을 중심으로 15cm 간격으로 시추한 후 CW, 팸스 등 첨단 과학장비로 확인한 결과 22m-25m 사이에 물층은 발견되었지만 땅굴은 없었다"고 결론 지었다.
<월간조선> 취재팀은 1992년 3월 13일 이와 같이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백학면 일대의 현장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기 위해" 취재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취재팀은 최봉현, 이정희씨 부부는 만나지 못했다. 그 대신 최씨 집 이웃에 사는 유희열씨와 1991년 11월의 시추작업 때 시추기사로 일했던 김영태씨 등을 만났다.
유희열씨의 증언.
"나는 1991년 8월의 상황은 잘 모른다. 그 때의 상황은 정씨의 녹음 테이프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1991년 11월의 작업 때는 녹음을 하는 현장에서 여러 가지 소리를 직접 들은 바 있다. 무슨 소리라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으나 '따따따따'하는 착암기 진동음과 비슷한 소리, 갱차음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은 사실이다"
현장에서 기사로 뛰고 있던 김영태씨의 경우 작업 때문에 소리를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작업 후에 녹음 테이프로 이상음을 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가 나느냐며 의심을 가졌다. 그러나 계속 들어보니 기계음이 많이 들렸다. 나도 중장비를 만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는 대충 감이 잡혔다. 특히 착암기 작동하는 소리가 많이 들렸다. 또 물 빠지는 소리, 파이프를 탁탁 치는 소리 등을 들은 바있다."
다음은 북위 38도선 바로 위에 있는 두일 2리 박씨 할머니(이름이 없다고 함)의 증언.
"1989년 겨울 어느 날인가 밤에 안방 아랫목에서 잠을 자는데 쿵하는 소리가 울리며 몸이 털썩 흔들렸다. 그 때가 새벽 1시쯤이었는데 그런 소리가 가끔 나다가 2시간쯤 후에야 잠잠해졌다. 나는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 그게 포탄 터지는 소리인 줄은 짐작했지만 집 밖을 둘러봐도 별일이 없는 것 같아 그날을 그냥 자버렸다. 그런데 다음 날에도 똑같은 소리가 새벽녘에 들렸다. 이 때는 며느리 이영순도 같이 들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또 찌그럭찌그럭하며 뭔가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에필로그 : 국가안보는 어디로?
우리는 지금까지 연천군 백학면 일대의 지하가 인민군의 남침땅굴로 벌집처럼 뚫려 있을 개연성을 살펴보았다. 동시에 우리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민간인들이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해내는 과정을 접할 수 있었다.
우리는 '국민의 정부'라고 자처하고 있는 이 정권에게 묻는다. 미국방부가 한국에 20여개의 장거리 남침땅굴이 있을 개연성을 보고서에 밝혔고, 남침땅굴 굴착작업에 참여했다가 귀순한 전 인민군 병사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침땅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는 그대들은 대한민국의 공직자인가? 조선노동당 간부인가? 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무원소속 고관인가?
또한 우리는 이 나라의 국회의원들에게 묻는다. 국회는 민간인들이 여러 차례 남침땅굴 문제에 대해 호소하고 국정조사 등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당도 야당도 차이가 없다. 과연 국회의원 그대들은 대한민국 국회의원인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가?
북한의 남침땅굴의 존재 여부를 가장 확실하게 증명하는 방법은 혐의가 짙은곳을 국민과 정부와 군인과 국회가 합동으로 절개하여 공동 결론을 내리는 것 외에 왕도가 없다.
대한민국의 면 한개가 남침땅굴로 도배가 되고 있는 현상이 드러나고 있다. 과연 그것이 면 하나의 불행으로 그칠 일인가? 전방이 무너지면 후방도 위험하다. 바야흐로 '햇볕정책'이란 미명 아래 대한민국의 안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음을 의미한다.
국민은 발을 뻗고 자고 싶다. 민간인 남침땅굴 대책모임은 남침땅굴을 확인한 후 생업으로 돌아가고 싶다. 누가 그 시간을 지연시키고 있는가? 이러한 상황은 누구에게 유리한가? 국민은 안보에 관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할
시점에 온 것 같다.
경기도 화성남침땅굴현장본부장겸 남굴사홈페이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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