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숙명인지 운명인지하는 그 뭔가가 느껴지는 때가 있다. 내
가 유홍준 교수님을 따라 답사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도 그러려니와
이번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제64차 답사에 동행하게 된 것은 더더욱
그러하며 코스를 생각하면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는 것을 여러번 느
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유홍준 교수님을 알게 된 것은 그
분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수십쇄를 거듭하여 온 국민이 열병을
앓아가며 그를 추종하는 광신도가 되고도 한참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때 나는 국립경찰대학에 근무하면서 장차 경찰간부가 될 학생들에
게 법학이나 행정학 경찰학이 아닌 철학이나 역사 국제정세나 경제
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의 이야기를 조금씩이라도 들려 줘야겠다는 생
각에서 각계의 저명인사들을 초빙하여 특강을 하던 때였다. 나는 그때
뒤늦게 유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홀딱 빠저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처럼 형광펜으로 줄을 치고 삼국유사나 조선왕조실록
등 관계서적을 뒤저 나의 의견과 함께 새카맣게 뭘 적어 가며 정독
아니 분해·분석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가 학생들에게 '모시어
듣고 싶은 강좌'가 있으면 의견을 얘기해 달라고 하였더니 '유홍준 교
수님을 꼭 한번 모셔 달라'는 것이었다. 대개의 교수섭외가 그렇지만
경찰대학의 경우 서울에서 1시간 이상은 내려와야 하는 용인에 위치
하고 있으며 국립이어서 강의료도 변변치 않아 꼭 모시고 싶은 분을
모시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다 나만 쳐다 보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방학 때여서인지 댁에서 전화를 받으셨다.
"유홍준 교수님 댁이시죠?"
"네 제가 유홍준인데요"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저 경찰대학 교수부 김성섭 경감입니다."
"아 그래요. 웬일이세요"
"저어... 그런데 저어 들꽃같은 평창색시도 잘 계십니까?"
"아 네...?!"
그렇게 해서 유 교수님의 초빙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루어 졌다. 아
시는 분은 다들 아시겠지만 들꽃같은 평창색시는 교수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2권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편에서 1972년 국립중앙박
물관 앞뜰 모과나무 밑 벤치에 앉아 수작(교수님의 표현에 의하면)을
부려 꼬신 사모님을 소개하며 그렇게 표현하셨는데 나에게는 그 표현
이 얼마나 신선했었는지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던 것이 늦다없이
튀어 나왔던 것이다. 결혼한지 10여년이좀 넘은 나에게도 아내에게서
들꽃같은 색시라는 느낌은 사라진지 꽤 오래된 듯 한데 30년이 다 되
어 가는 유 교수님은 어찌하여 사모님에 대한 처녀때의 상큼한 기분
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계신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아내에게서 들꽃같은 청초한 색시같은 모습을 찾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 서문에 있는
인용구도 생각하면서... 강도는 덜 하지만 나의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
고 있다. 들꽃만 보이면 아니면 산꽃이라도 어엿쁜 야생화만 보면 그
위에 아내의 얼굴을 오버랩 시켜 보기도 하고 또 거꾸로 아내의 얼굴
에 야생화의 모습을 오버랩 시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얼마나 계속해
야 아내의 모습이 들꽃같은 색시처럼 보일지 쉽게 자신이 서질 않는
다. 어쩌면 영영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아내는 과묵한 편이다. 냉
정한 편이고 지극히 이성적인 편이며 성실한 편이다. 나하고는 다른
점이 많은 편인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들꽃같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
니다. 거기다 아내는 권총사격의 명수이며 서울지방경찰청 제2대 여자
형사기동대장과 경찰관의 복무규율을 감독하는 감찰관을 거쳐 지금은
정보기록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여경간부이다. 요새는 테니스를 배워
열심히 코트를 누비고 있다. 그러니 들꽃같은 색시의 모습은 아예 포
기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그냥 시대를 조금 앞서 가는 맹렬여성그
룹의 하나로서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열심히 사는 늘 콧등에 구슬땀
이 송글 송글한 활기찬 그 모습을 간직하는 편이 훨씬 나을지 모른다.
답사이야기가 아내이야기로 빗나갔는데 하여튼 그렇게 교수님을 초
빙해 놓고 오시는 하루 전날 '내일은 유홍준 교수님이 우리 학교에 오
시는데..' 하면서 퇴근하다가 동료들과 만나 술판을 대판 벌였다. 밤새
마셨더니 새벽녘이 되어서야 술이 취해오기 시작하였다. 간신히 학교
로 돌아와 숙직실에 잠시 누었다가 그만 잠이 들었다. 유홍준 교수님
은 뵙지도 못하고 진짜 문화유산도 유홍준 교수님도 모르는 그쪽으로
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나의 후배가 교수님을 안내하여 특강을
마치고 돌아 가셨다. 오후1시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허둥지둥
유 교수님을 찾았으나 교수님은 이미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신
후였다. 아뿔사!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술을 먹고 실수를 하는구나. 하
고 크게 후회를 하였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직원들 보기가 민망하고
부끄러웠으나 지금도 경찰대학에 있는 한 이쁜 후배 남 경위는 "김
경감님 정말 인간다운 모습을 한번 보여 주셨습니다." 내가 숙직실에
쓰러져 있는 동안 유 교수님을 영접한 그러나 유홍준 교수님이 누군
지 뭐하시는 분인지를 몰라 나한테 죽도록 혼이 난 그 철부지 후배는
집에 가서도 나한테 혼난 얘기를 하며 "별걸 다 가지고 쫀쫀하게 군
다"고 아내에게 불평을 했다가 정말 "당신 내 남편 맞어!"하며 밤새
모욕과 고문을 당한후 내가 사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이젠
나보다도 훨씬 더 증세가 심한 광신도가 되어 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64차 답사이야기를 해야 한다. 한 달전쯤 참가신
청을 하였으나 벌써 마감되어 같이 갈 수 없다는 답사회 서 총무의
답변을 듣고 와신상담끝에 1주일전 쯤 혹시 급한 일이 생겨 못 가신
다는 분이 없는지 전화를 했더니 뜻밖에 유 교수님이 받으셨다. 그러
나 "결원이 없다"는 얘기에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 놓고 말았다. 그리
고는 친구들과 휴가를 떠나 버렸다. 일주일의 휴가였지만 강원도 평창
에 가 3박4일을 장대비를 맞으면서 그런대로 재미있게 놀다 왔다. 일
요일 새벽을 가르며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정선의 송천과 골지천이 합
처 지는 곳 '아우라지'를 다녀 왔으나 수항계곡 깊숙히 숙소를 잡았던
우리는 계곡물이 불어나 위험하니 철수해야 경고에 수항리 절터의 답
사를 포기하고 대신 강릉일대의 문화유적을 둘러 보는 것으로 대신하
고 아쉬움을 뒤로 한채 돌아 와야만 했다. 수요일의 돌아 오는 길은
교통사정이 원할하여 너무 수월하게 왔다. 오자마자 그래도 미련이 있
어 혹시나 하고 답사회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러지 않아도 서 총무가
날 찾았다는 것이다. 한 자리가 남았는데 동석이라는 것이다. 춘하추
동 중 동석은 관광버스 맨 뒷자리 5석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통 학생
이나 백수 또는 백조들이 앉아 가는 곳이다. 그러나 나에게 동석은 큰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황송하다시퍼 같이 가겠다고 접수를 하
고 보니 들꽃같지도 색시같지도 않은 아내에게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전승인을 받지도 않고 우선 접수
해 놓은 뒤 사후통보식의 내 얘기에 과연 아내가 순순히 다녀 오시라
고 할까 그러거나 말거나 가긴 가는데 그렇게 가면 기분이 날까 하고
걱정을 하다가 슬그머니 얘길 꺼냈더니 너무도 너무도 순순히 "그래
요? 다녀 오세요"하는 것이었다. 아내와 같이 못가는 서운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날아 갈 듯한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래 기회가 되면 나도 한번 이 해방감을 맛볼 기회를 주
지....
그렇게 해서 나는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제64차 답사에 동행하게 되었
다.
조 기사님이 운전하는 대한여행사의 45인승 관광버스는 어느덧 원주
를 거쳐 제천 단양을 지나고 있었다. 보기에도 웅장한 시멘트 공장들
이 산맥의 허리를 마구 동강낸 모습을 가르키며 유 교수님이 시멘트
에 대한 공로와 폐해의 애증을 한 동안 설파하시는 동안 차는 영주의
부석사에 도착했다. 부석사에는 이 절을 세운 신라의 고승 의상이 중
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에 의상에게 반한 중국 여인 선묘(善
妙)가 냉정하게 떠나가는 의상의 배가 무사히 귀국하게 해 달라며 바
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고 하는 전설을 간직한 선묘각(善妙閣)이
조촐히 서 있는데 지극히 감상적인 나는 끝내 일행과 떨어져 언덕배
기 중턱에 화장실처럼 서 있는 선묘각에 올라 낭자의 초상화라도 유
심히 보는 관심을 보였는데 이는 사랑하는 한국인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 이국 여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뜬 바위 위에 세워져 부석
사(浮石寺)라는 이 절은 1,300여 년 전 사랑하는 님의 안녕을 위해 만
경창파에 가냘픈 몸을 던진 이국 소녀의 혼을 모신 그런 절이다. 그런
데 초상화의 선묘낭자는 양볼이 너무 통통하여 의상도 나처럼 살찐
여자는 싫어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봉화를
지나 황장목(黃腸木)이라고도 하고 금강송(金剛松)이라고도 하는 미인
송 군락지를 둘러보고 통고산 삼림 휴양소에서 하룻밤을 묶었다. 이튼
날 아침 불영계곡을 따라 불영사를 둘러보고 동해안고속도로를 달려
삼척의 해안에 서 있는 해신당(海神堂)에 도착했다. 황장목과 불영계
곡 그리고 불영사에 대한 얘기는 이루 다 적을 수도 없으려니와 어설
프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한번 가보아야 한다는 나의 바램을 강
조하기 위해 건너 뛰기로 한 것이다. 해신당은 김을 따러 갔던 한 처
녀가 풍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살려 달라며 애를 쓰다가 죽고 말았
다는데 그 뒤로 흉어와 사고가 잇달아 그 처녀의 원한을 달래 주기
위해 남근을 깎아 바치며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곳
에 남근조각공원을 새롭게 조성하면서 내키보다도 훨씬 더 큰 성난
남근의 기기묘묘한 모습을 깎아 세워 놓았는데 여성회원들 하고 같이
답사하기엔 좀 쑥스럽기까지 했다. 결국 유 교수님이 차안에서 마이크
를 잡더니 "흉칙하기 짝이 없다. 어느 젊은 엄마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왔는데 아이가 '엄마 저게 남자의 거시기야?'하는데 엄마가 뭐라
고 했는지 모르겠다"며 "현대를 사는 우리가 하는 짓이 다 그렇다. 그
래서 뭘 한다면 겁이 난다."고 혹평을 하였다.
동해의 척주비와 죽서루를 거쳐 무릉계곡과 삼화사를 휘휘 둘러 보
고 백복령을 넘어 정선의 아우라지에 도착했다. 사실 휘휘 둘러 본 것
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렇게 밖에는 적을 수가 없다. 척주
비의 유래와 특이한 글씨체, 죽서루가 최규하 대통령이 10. 26사건이
나고 졸지에 대통령이 되어 잠시 재임하면서 강원도에 있는 청간정과
월송정 등 몇 군데 문화유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는 얘기, 무릉계
곡의 그 절경과 용추폭포 그리고 삼화사에 엄청난 모습으로 세워진
동제불상(銅製佛像)의 흉한 몰골 등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는 것이
다. 아우라지의 옥산장 여관 '할머니과 아줌마'의 '돌과 이야기'에 얽힌
얘기를 듣고 나보다 한 살 아래인 張楠基아우님 등 남자 몇이 작당을
하여 아우라지에 나가 민물매운탕을 맛있게 끓여 소주 두어병을 마신
뒤 노래방인지 단란주점인지를 거쳐 거나하게 취한 꽤나 늦은 시간에
살그머니 숙소로 돌아왔다. 동동주로 시작해서 소주를 마시다 맥주로
마무릴 하였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머리가 좀 아팠다.
설잠을 자고 6시에 일어나니 동침한 '섬진강은 말이 없다'의 禹英俊
형이 안 보였다. 나중에 어디 갔었느냐고 물었더니 5시에 일어나 아우
라지에 가서 멱을 감고 왔단다. 그 시간에는 아무도 없더란다. 배가
불쑥 튀어 나온 형이 새벽정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냇가에서 멱을 감
았다는데 좋은 구경거리 놓치고 만 것 같아 아쉬웠다. 우영준형은 답
사회에서는 대단한 인물로 평가되는 분인데 형이 언젠가 나처럼 혼자
답사길을 나섰는데 구례에서 하동까지 섬진강을 끼고 도는 정감어린
강마을길을 간다고 하니 형수되시는 분이 "갔다 와서 얘기나 좀 해줘
요" 하여 그러기로 하였는데 막상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려 하니 형수
와의 약속이 걱정이 되어 유 교수님께 "집에가서 뭐라고 하지?"하여
-다음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