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소리의 끝
‘꽃구경 달구경 비록 좋다 하나, 가족의 화목한 얼굴색만 같지 못하고, 거문고 소리 바둑 소리 비록 좋으나, 자손들 책 읽는 소리만 같지 못하다(觀花色 明月色 雖云好 不如家族和顔色 彈琴聲 落棋聲 雖云好 不如兒孫讀書聲)’라는 송강 정철의 시는 매우 인간적이며 교훈적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하는 모든 것 중, 글 읽는 모습이 무엇보다 대견했던 모양이다. 중국 북송 때의 시인인 소동파(蘇東坡, 1037-1101)도 그러하여, 이사 온 저녁, 옆집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를 듣고 기뻐서 시를 지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은거하는 집에 개구리 소리 어지럽게 들려, 사람과 짐승 반반 섞여 사는 것 같은 삶, 사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기쁜데, 하물며 책 읽는 소리 들으니, 아이의 소리 원만하고 아름다운데, 누구 집의 두 아이일까? 모여서 책을 읽으니 기쁘고, 월나라 사투리 있어도 웃지 않으리. 책을 꺼내 아이들과 어울려 읽으며, 술을 옆에 두고 혼자서 마시니, 가히 내가 취하도록 권하는데, 낭랑한 글 소리는 옥금(玉琴)과 같네.’ 소동파는 책 읽는 소리를 거문고 소리와 같다고 하였으나, 송강은 거문고 소리보다 낫다고 했다.
우리 전통사회의 가정집 울타리 너머에서 들려왔던 소리는 곧 정겨움 그 자체였다. 혹 박물관에 가면 그 사라진 정겨운 기억을 되돌려 볼 수 있을까. 흔히 건강한 가정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움은 아이의 울음소리, 책 읽는 소리 그리고 여인들의 다듬이 소리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에게 아득한 그리움만 남긴 채 멀어져 간 추억일 뿐이다.
이제 아이의 울음소리가 도시에서도 그리 들려오지 않는다. 그만큼 젊은이들이 아이를 이전처럼 출산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결혼이라는 인생의 대사(大事)도 선택사항이 됐다. 가정을 이뤄 생육하고 번성해, 땅에 충만(充滿) 하라는 창조주의 문화명령이 지켜지지 않는다.
비록 가정집 울타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소리는 없어졌을지라도 산과 들에서 울려 나는 바람 소리와 물소리 등 자연의 음성과 온갖 새와 개구리, 매미, 풀벌레들이 계절을 따라 울리는 소리가 남아있으니 다행한 일이다.
우리는 가을이 오는 낌새를 어떻게 알까. 시인 박성룡은 그의 시 처서기(處暑記)에서, “역시 나는 자정을 넘어/이 새벽의 나른한 시간까지는/고단한 꿈길을 참고 견뎌야만/처음으로 가을이 이 땅을 찾아오는/벌레 설레이는 소리라도 듣게 되나 보다.”라며 풀벌레 소리가 가을을 알리는 신호로 여겼다.
이 산동네에서 두 번의 여름을 지나면서 가을이 오는 전조를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그리도 맹렬하게 울어대던 개구리들의 소리가 그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스쳐오며 자연의 악기는 풀벌레들의 차례가 되었다. 이것이 곧 가을을 준비하는 표적이다.
개구리나 풀벌레 모두 짝짓기를 위해 자신을 알리려고 운다고 한다. 수 개구리들의 합창은 그들의 생존 방법이다. 혼자 울면 상대를 유혹하기는 쉽지만 자기 위치를 노출 시켜 포식자의 공격목표가 될 수 있으므로, 이를 회피하기 위해 한 마리가 울면 일제히 따라서 운다. 그런데 맹꽁이는 장마를 지나면서 짝짓기를 끝낸 후 2주 만에 땅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이 땅에서의 그들의 임무는 끝났기 때문이다.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울음주머니에서 나오지만, 가을벌레들은 앞날개를 비비며 소리를 낸다고 한다. 곤충마다 소리가 다른 것은 날개의 크기와 진동 횟수가 다르기 때문이며, 가을밤이 깊어질수록 그들의 소리가 뚜렷이 들리는 것은 찬 공기로 인해 소리의 속도가 떨어져 지면 위로 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름 내내 살아서 움직이는 생명 활동을 오케스트라처럼 우리의 청각으로 전하여주는 그들이 자기만의 생존 방법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창조주의 섭리를 지켜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여름도 뜨거운 햇볕을 내려보내는 일에 지친 표정이다. 그래서인지 저녁 무렵이면 제법 선선한 기운이 돈다. 여의천 변을 돌아 둑길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쳐다본다. 서쪽 하늘에는 샛별이 제자리에 서 있고 동쪽 하늘에는 화성이 달 가까이에서 붉게 반짝인다. 그러할 때 갑자기 둑길에서 청개구리가, 온몸을 소리통으로 터질 듯, 울어 댄다. 수컷의 구애 소리인 것 같다. 가까이 가보니 그 수컷은 둑 가드 레일 위 난간에 자리하고, 어디에선가 조심스레 다가온 암컷은 아래 난간에 와있다. 곧 가을이 올 텐데 그들은 어떻게 만날까 걱정이 되었다.
그들을 보자 초저녁 꽃밭 풀 섶에 누워 피곤한 몸을 뒤척이며 마지막 노래를 부르는 매미가 생각났다. 매미 소리 때문인지 개미 떼가 몰려와 죽어가는 매미를 공격하고 있었다. 매미는 짜증스레 쇳소리로 그냥 내버려 달라고 소리쳤다. 한여름의 절정이 이렇게 끝나는 것 같아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정녕 생명은 아름다운 것이고 죽음은 장엄한 것일까.
가을이 오기 전에 황급히 해야 할 일인 듯, 한 소리는 생명을 준비하고 다른 외침은 죽음을 알리는 마지막 노래였다. 마치 자연의 섭리가 그러하듯 어느 소리의 끝은 생명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의 끝으로 들렸다.
붙임 :
어느 소리의 끝
1.
온몸을 소리통으로
터질 듯 울어대자
그 구애 소리에 이끌려
어디선가 조심스레 다가와
수컷은 위 난간에 자리하고
암컷은 아래 난간에 와 있네.
곧 가을일 텐데
그들은 어떻게 만날까.
청개구리 울음소리가
늦여름 저녁 들판을 가르네.
2.
초저녁 꽃밭 풀숲에
누군가 피곤한 몸을 뒤척이며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네.
그러자 개미 떼가 몰려왔지
매미는 짜증스레 쇳소리로
그냥 내버려 달라고 소리쳐
한여름 절정이 이렇게 끝나나 봐
정말 생명은 아름답고
죽음은 장엄한 것일까.
3.
가을이 오기 전에
황급히 해야 할 일인 듯
한 소리는 생명을 준비하고
다른 소리는 죽음을 알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