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동아리, 재즈 밴드 그리고 타로
정익진
1학년
글자가 싫었다. 글자들 중 하나가 내 목덜미에서 피를 빤 적도 있다. 성공이라고 찍혀 있었다. 내 그림은 삶은 양배추 같았어요. 나른했죠. 누가 먹다 버린 책이나 휴지 뭉치, 실패한 단편 소설들 허공을 떠도는 물고기의 비늘, 파도에 구르는 공룡의 알,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부품, 이런 색깔과 모양에 연민을 느꼈습니다. 응용미학입니다. 사람을 못 그렸어요. 괴물처럼 보였거든요. 누구를 보는 것 같아 꺼림칙했어요. 어느 날, 16세기에 만든 자동차를 타고 캠퍼스에 도착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 복장이었지요. 몽환이었어요. 바위바람과 코뿔소폭풍을 동시에 그렸고 오후에는 주로 늑대의 반짝이는 귀를, 구름을 보면서는 친구들의 태아를 그렸습니다. 내가 아파야만 했습니다.
2학년
선율은 실핏줄을 타고 온다. 비가 흐느끼는 음악이다. 도둑이 놓고 간 악기 하나를 술집에서 주웠다. 더블베이스였죠. 뒤뚱뒤뚱 팅팅, 이것이 기본 리듬이었습니다. 좀 서러웠지만 중독되었습니다. 뒤뚱뒤뚱 팅팅. 트럼펫은 복학생 박경수가, 오타쿠 윤보라가 피아노와 보컬을 맡았죠. 마일스 데이비스를 마일수 데이비스라고 부르며 우리는 웃었습니다. 태양을 거부하는, 꽃향기를 풍기는 시체와 같은 소리를 냈죠. 재즈를 사랑했습니다. 건물들이 더욱 푸르러졌습니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이유가 나의 목을 졸랐지만, 공기는 달콤했고 죽은 자들도 웃고 있었어요.
3학년
기시감 때문인지 눈 밑에 미세한 벌레들이 우글거렸다. 결핍과 욕망, 이 둘은 치유할 수 없는 질병입니다. 명운의 나날들 타로는 타자로 가는 길이 아니라 일종의 타짜입니다. 아닙니다. 오해입니다. 무의식적인 행위를 통계상으로 판단하죠. 끝내 뜻한 바를 이룬다고 하는 말이 어리석게 들렸다. 우리는 여러 번의 기적을 희망합니다. 물론 평등하지 않죠. 죽음에도 격이 있고 시차가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땅콩을 까먹었죠. ‘전 재산을 몰수당한 자’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가끔 행운이었을까. 당신은 해외입양이 좋겠습니다. 남은 카드는 불행, 그보다 더한 불행, 새끼손가락, 차력사, 수면망치, 백조가발과 같은 것들이다. 타, 타, 타, 패를 돌려라.
그리고 4학년
-정익진,「그림 동아리, 재즈 밴드 그리고 타로」(『시인동네』, 2018년 12월호)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