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에게 비트코인에 대한 첫 인상은 ‘익명성’입니다. 은행이나 신용카드 같은 제3기관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누구에게도 드러낼 필요없이 결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트코인의 익명성은 이중적입니다.
일반 시민의 관점에서 보면 비트코인은 개인의 비밀을 보호할 만큼 불투명합니다. 그러나 금지된 것들을 꿈꾸는 탈법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비트코인은 지나치게 투명합니다. 익명성과 투명성이라는 상극의 특성이 결합했다고 할 수 있는데 비트코인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런 미묘한 속성 때문이기도 합니다.
비트코인의 핵심을 이루는 기술은 블록체인(blockchain)입니다. ‘블록’은 일정기간 이루어진 거래를 기록한 장부이고, ‘체인’은 이런 장부를 순차적으로 쌓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블록체인의 또 다른 이름은 '공개된 분산장부(open distributed ledger)'입니다. 비트코인은 모든 거래를 기록하고 그 기록을 모두가 공유합니다(두 번째 글에서 'P2P 전자결제 시스템' 참조). 또 코인마다 개별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만큼 고유한 번호(해시, Hash)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조가 불가능합니다. 중복결제와 위조불가라는 핵심 특징은 바로 모든 거래를 낱낱이 기록해 보관하고 공유하는 블록체인이라는 시스템에서 유래합니다.
이렇게 모든 거래가 기록되고 공개된다는 사실은 수사당국이나 사법당국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일입니다. 수사당국이 어딘가에서 단 하나의 단서만을 찾아도 추적이 가능합니다. 조직의 거래망은 물론 그 거래망의 거래망, 그 거래망의 거래망까지 모두 밝혀낼 수 있습니다. 영장 없이도 계좌를 추적할 수 있는 데다 거래 기록이 모두 남는다는 블록체인의 속성에 따라 법정 증거물을 손쉽게 얻어낼 수 있습니다.
실제로 2013년 10월 실크로드라는 사이트가 미국 검찰에 의해 폐쇄되었습니다. 마약류를 거래하며 1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린 이 사이트는 익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트코인을 결제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FBI는 비트코인의 거래 기록이 공개되고 저장되는 특성을 이용해서 실크로드가 보유한 비트코인을 압수하고 모든 거래망을 확보했습니다. 실크로드로부터 약물을 구입한 이들이 나중에라도 돈이 아까워 그 계좌를 이용해 다른 거래를 시도하면 FBI는 약물거래자의 신원을 확보할 수도 있습니다.
비트코인이 제공하는 익명성은 이중적입니다. 비트코인은 신용카드 번호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속성 때문에 비트코인이 현금처럼 익명성을 보장한다는 오해가 확산되었습니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현금과 같은 익명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비트코인은 이중 지불(double spending*)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서버나 제3자를 개입시키는 대신 거래의 기록을 모두에게 공개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거래의 기록은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몇 년이 지나도 거래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비트코인의 익명성을 ‘유사익명성(pseudo-anonymity)’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중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비트코인의 이런 투명성 때문에 범죄자들이나 상속세의 피난처를 꿈꾸던 이들이 비트코인에 걸었던 희망은 비트코인에 대한 지식이 쌓일수록 사그라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중 지불(double spending)
이메일을 보내듯이 돈을 보내는 전자결제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제3자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중 지불’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00만원 밖에 없는 사람이 두 사람에게 100만원을 중복해서 보내는 경우입니다. 현실이라면 한 번 준 돈을 다른 사람에게 다시 줄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파일을 여러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인터넷에서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전자결제에서는 100만원을 직접 보내는 것이 아니라 소유권을 이전합니다. 즉, 내가 A라는 사람에게 100만원에 해당하는 소유권을 이전하고 나서 B라는 사람에게도 소유권을 이전하는 일을 방지해야 합니다. 즉 A에게 이전된 소유권이 B에게 확정되어야만 B가 이중 지불의 피해자가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뱅킹은 이 문제를 중앙의 서버로 해결합니다. 金씨가 100만원을 보유하고 있다가 李씨에게 보내면 중앙서버는 100만원에 대한 金씨의 소유권을 해지하고 李씨를 100만원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록합니다. 그래서 이후로는 金씨가 100만원을 崔씨에게 이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崔씨는 金씨에게 속지 않습니다. 즉, 金씨 컴퓨터에서 李씨의 컴퓨터로 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은행 서버에 접속해서 金씨 돈에 대한 소유권을 해지하고 李씨에게 이전하는 것입니다. 돈은 金씨 컴퓨터에서 李씨의 컴퓨터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은행의 金씨 계좌와 李씨 계좌에서 변경되었을 뿐입니다. 은행의 중앙서버가 통제하므로 이중 지불이 불가능합니다. 비트코인은 이중 지불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서버 (혹은 제3자의 금융기관)를 개입시키는 대신 거래의 기록을 모두에게 공개하는 P2P 시스템을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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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오후예배 때, “암호화폐는 발행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따로 없어 돈세탁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설명 드리고 싶어 글을 씁니다. 성도님의 궁금증 해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첫댓글 잘 읽어보겠습니다. 어려워서 들어야 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