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75
12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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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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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KuNaL-fmLI
[인천교구 류범선 루치오(선원(준)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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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구차한 우리 인간의 일상사 안에 살아계시며 현존하시는 하느님!>
몇 년에 한 번씩 꼭 전화를 걸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뿌리 찾기 협회’인지 뭔지 하는 단체인데, 얼마나 집요한지 모릅니다. 이번에 다시 잘 정리된 족보가 새롭게 출간되었으니, 가문을 생각해서라도 꼭 한 권 사달라며 골백번도 더 전화를 거십니다.
요즘은 족보, 하면 잘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과거에 어르신들께서는 족보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선친께서 두툼한 족보 책을 조심스럽게 보자기에 싸서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하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집에 불이라도 나면 뛰쳐나오면서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족보였습니다. 그 다음이 집문서요 땅문서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를 때도 제일 먼저 족보를 챙겼습니다. 이렇게 가문의 역사와 전통, 선조들의 이름이 기록된 족보는 어르신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도 족보라는 것, 마치 뿌리, 생명,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사 다닐 때 마다, 유배 갈 때,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조차도 족보를 가슴에 품고 다녔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족보, 조상, 민족, 뿌리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첫 부분인 마태오 복음서, 그 첫 장에는 그 유명한 예수님의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서두에 별 재미도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족보가 줄줄이 나열되고 있는 것, 대체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왜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 의미 없어 보이는 낯선 이름들이 복음서 서두를 장식하고 있을까요? 왜 복음서 첫 출발이 이토록 무미건조하고 흥미 없는 사람 이름으로 시작될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 그 한가운데 현존해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세주께서는 인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한 정도의 천상 용모를 지니신 분, 우리 인간이 도저히 닿지 못하는 아득한 먼 곳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 두 발로 굳건히 딛고 서 계시는 분, 다사다난한 우리 인간사, 폭풍 속 같은 우리 인생살이 한가운데서 들어와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 그 안에 들어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예수님의 조상들 가운데는 인간의 위대함도 보이지만 인간의 타락과 죄의 어두운 그림자도 뚜렷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간통 행위, 솔로몬의 배교 행위, 이스라엘 역대 왕들의 추문록, 왕실의 혈통 안에 버젓이 끼어들어 있는 이방 여인들의 이름도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족보 안에는 상처투성이뿐인 인간의 역사, 인간의 고통, 인간의 아픔이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의 재림은 비록 이스라엘이 몰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현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스라엘 측, 다시 말해서 인간 측의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도래합니다. 거듭되는 인간 측의 불충실과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유대관계는 지속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측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성실하십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깊은 상처, 그 사이를 비집고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스며들어 오십니다. 우리 인간 측의 깊은 좌절을 딛고 하느님께서 일어서십니다. 우리 인간 측의 멸망과 죽음을 기반으로 하느님께서 살아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차한 우리 인간의 일상사 안에 살아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질구질한 우리 인간 역사 안에 현존해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때로 결핍투성이인 우리 인간사 안에서 당신 사랑의 역사를 계속 써나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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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한복판에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어린 시절 성경책을 처음 펼쳤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구약성경 첫 장을 탁 펼쳤더니, 창세기 이야기들이 전개되는데, 그 양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어렵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읽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럼 짧은 신약 성경을 먼저 읽어야지, 하면서 마태오 복음서 첫 장을 탁 펼쳤더니, 이번에는 발음하기도 힘들고, 생소한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는데.., 아무튼 어린 제게 성경은 첫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족보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신 동시에 참으로 인간이셨음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통상 위대한 인물의 생애를 소개하는 전기 작가들은 그의 탁월한 업적이나 고귀한 인품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그의 약점이나 흑역사는 가리기 마련입니다. 자녀나 후학들의 입장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사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조상들을 소개하면서, 수치스러운 인물들, 가문에 누를 끼친 인물들은 적당적당히 감추거나 빼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있는 그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람들입니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보십시오. 위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불의하게 결합된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문과 전통, 순혈주의를 중시하는 유다 역사 안에 그녀들은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율법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사가는 적절치 못함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한 사건의 당사자들을 족보에 넣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족보에서 지우고 싶은 인물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놓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셨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정한 인간 본성을 정화하기 위하여 그 본성과 혈연관계를 맺으신 것입니다. 병든 인간 본성을 치유하기 위하여 그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인간 본성을 위로 들어 높이기 위하여 그 본성을 취하신 것입니다.
타마르, 밧세바 외에도 족보에 등장하는 특별한 여인이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서 보하즈를 낳고” 바로 라합입니다. 예리코의 임금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낸 정탐꾼과 사절을 죽이려고 했을 때, 라합은 그들을 자기 집 지붕에 숨겨주었습니다.
한때 라합은 유흥업에 종사하던 이방인 여인이었으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로 돌아섰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스라엘의 딸이 되었습니다. 자기 겨레보다 이스라엘을 더 사랑했고, 충실한 이스라엘의 아들이었던 살몬과 혼인합니다.
한때 우상숭배와 타락한 생활로 바닥살이를 전전했으나 거룩하신 하느님을 만나, 지체가 높아지고, 아리따운 시온의 딸로 변화된 라합은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 교회의 표상입니다. 거룩한 창녀!
오늘도 하느님께서는 구중궁궐 까마득히 높은 옥좌에 좌정해계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상처투성이인 꼬질꼬질한 우리네 인생사 안에 깊이 들어오셔서 자리 잡고 계십니다.
비록 오늘 부끄럽게 살아가지만 거룩한 갈망을 지닌 채, 어떻게 해서든 거듭나보려는 오늘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 한복판에 하느님께서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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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왜 우리는 무엇이 행복인 줄 알면서도 어떤 날은 다른 행복을 추구할까?>
오늘 복음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계획된 성취된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목적의 분명함 속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단순하게 말하면 이미 예언된 태어남과 가르침, 그리고 수난과 부활의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습니다. 그 예언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자유가 없으셨기 때문일까요? 그 예언이 행복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매일의 행복을 약속하는 예언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하셨고 그렇게 사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예언을 따라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 예언에서 벗어날 때가 많습니다.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왜 우리는 행복의 길을 알면서도 매일 헤맬까요? 우리 안에 있는 자아 때문입니다. 뱀은 자꾸 다른 행복의 길이 있다고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우리는 가끔 그 목소리를 듣고 불행을 선택합니다.
이와 관련된 좋은 영화는 ‘사랑의 블랙홀’입니다. 주인공 필 코너스는 똑같은 하루를 반복해서
살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 단조로움을 혐오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황을 악용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 다른 사람들을 돕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자신을 개선하면서 - 만족을 느끼고 결국 끝없는 반복에서 벗어납니다.
법칙은 존재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반복되는 일상에서 행복의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갑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 법칙을 믿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합니다. 이젠 우리가 “오늘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멈추고, 대신, “이건 우리가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설명하는 좋은 실험이 있습니다. 쥐와 인간이 제비뽑기를 계속해서 하면 100% 인간이 쥐에게 지고 만다는 결과의 실험입니다.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서 밝혀집니다.
A와 B, 두 개의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 안에 1,000원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200번을 선택하여 얼마를 벌 수 있는지 알아보는 실험입니다. 당첨 확률은 A가 75%, B가 25%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보통 100번 정도 하면 이런 확률을 인식하게 됩니다. 다음 100번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쥐에게는 돈 대신 먹을 것을 줍니다.
이때 쥐는 보통 사람보다 1만 2,500원이나 더 땁니다. 인간은 A에서 나오지 않는 25%까지 B에서 찾으려고 하다가 A만 누르면 받을 수 있는 돈보다 작게 받습니다. 그러나 쥐는 100번을 넘어가면 이 패턴, 곧 법칙을 알고 믿기 때문에 그냥 쭉 A만 누르는 것입니다. 3살 아이에게 시켜도 항상 어른을 이깁니다. 아기들은 자기 생각이 별로 없기에 법칙에 순응합니다.
우리 안에 주어진 자유는 우리 스스로 주어진 법칙보다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법칙을 가볍게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은 돈, 내일은 쾌락, 모레는 명예나 권력을 행복으로 여기고 추구해봅니다. 매번 우리가 해 왔던 많은 경험들을 무시하면서.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예언처럼 반복하면 매일 행복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예언을 성취하며 사셨던 이유는 그렇게 순수하게 행복의 법칙에 순종할 수 있을 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던 것입니다. 행복의 예언인 그리스도의 삶에서 벗어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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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12월 17일입니다. 주님의 성탄까지 7일 남았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의 대림 시기는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난 3주 동안의 대림 시기 감사송은 구원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지니는 의미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구약에 마련된 임무는 무엇일까요? 대림 제1 주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때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에 한 약속을 이루어 주겠다. 그날과 그때 내가 다윗을 위하여 정의의 싹을 돋아나게 하리니, 그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룰 것이다.” 그렇습니다. 공정과 정의를 세우는 것이 구약에 마련된 임무였습니다. 대림 제2 주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그렇습니다. 구약에 마련된 임무는 참된 평화와 참된 자유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한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 제2주일은 ‘인권 주일’이라고 합니다. 대림 제3 주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시고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이스라엘 임금 주님께서 네 한가운데에 계시니 다시는 네가 불행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구약에 마련된 임무는 가난한 이, 외로운 이, 굶주린 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 제3주일은 ‘자선 주일’이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1주일은 구원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탄생보다는 예수님의 탄생 과정에 집중합니다. 나자렛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래서 감사송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알려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오늘부터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는 여정을 함께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신 곳은 화려한 궁궐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금수저로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오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거처할 방이 없어서 말구유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목동들이 양을 돌보는 베들레헴의 들판으로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대사제가 아닌, 멀리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배경에는 권력, 명예, 성공, 능력, 업적이라는 병풍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했던 처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랐던 목수 요셉이 있었습니다. 밤을 새워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이 있었습니다. 고단한 여행을 마쳤던 동방의 박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흙수저들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예수님의 곁에 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입니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입니다. 죄를 지어서 돌에 맞을 뻔했던 여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입니다. 루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대나무는 마디가 있습니다. 마디가 없는 대나무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삶의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상처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삶의 마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성탄은 그저, 즐겁고 기쁜 것만은 아닙니다. 성탄은 이제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다짐하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용기 있는 사람들을 자주 찾아온다고 합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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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17: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1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심을 믿도록 한 것이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육신으로 태어나신 두 번째 탄생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다윗은 둘 다 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계에서 훌륭한 선조였다. 주님께서는 할례로 유대 민족의 선조가 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가계에서 육신을 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원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6절)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다윗은 손이 뛰어난 또는 사랑받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분이셨다. 다윗은 행동으로, 자비로, 온화함으로, 그리스도를 예시하였다.
14대라는 말을 3번 하는데 여기에도 마태오가 의도적으로 족보를 14대씩 나눈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 족보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역사를 면밀히 이끌어 가시며, 그 역사의 절정, 즉 때가 찼을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 가문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와 같은 인간임을 이 족보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대림시기의 후반기에 접어들고 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주님의 오심을 잘 준비한다고 노력하지만, 우리의 삶은 이 족보에 나타나는 의미에서와같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는 삶으로 많은 은총 속에 사는 때도 있다. 그러나 주님의 뜻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겪는 때도 있다. 이 때문에 항상 주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제부터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나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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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의 족보에 나오는 몇몇 인물들을 살펴봅시다. 야곱은 형인 에사우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챘고, 유다는 며느리인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았습니다. 라합은 예리코의 창녀였고, 룻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다윗은 밧 세바를 차지하려고 우리야를 전쟁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로운 임금이었지만, 노년에 자신의 외국인 아내들 때문에 우상 숭배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인물들도 대부분 하느님께 성실한 믿음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 향하는 역사는 죄인들의 역사였고, 나라는 망하고 유배를 가게 된 실패의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의 마지막에 성모님께서 계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성모님의 믿음 때문에, 죄로 가득 찬 역사가, 모든 것이 실패한 듯 보이는 역사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 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삶도 예수님 족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죄로 가득 찼던 순간도, 하느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졌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모님처럼 ‘하느님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삶도 족보의 증언처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로 변화될 것입니다.
결코 절망하지 마십시오. 성모님의 믿음을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은 죄로 가득 찬 역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여러분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향하는 새로운 족보’가 될 것입니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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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족보는 충실한 신앙인들의 족보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마태 1,1-7)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마태 1,15-17)
1)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족보를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메시아’ 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의 야곱은 유다 지파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않으리라."(창세 49,10)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하게 할 것이다."(2사무 7,12-13)
‘미카’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미카 5,1)
베들레헴은 다윗의 본적지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성모님에게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 하느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다시 확인했습니다.(루카 1,32-33)
그리고 미카서의 예언은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확인되었습니다.(마태 2,5-6) 복음서 저자는 그 모든 예언들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음을 증명하려고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2) 예수님의 족보에는 인간 세상의 ‘빛과 그림자’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족보에서 그림자만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인간들의 죄의 역사’로만 보이겠지만, 빛을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 역사가 곧 ‘하느님의 은총의 역사’ 라는 것이 보입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20ㄴ-21)
우리 교회는 그 은총을 ‘하느님의 섭리’ 라고 표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섭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인간 세상의 역사는 하느님과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진행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어떤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그 작용을 전혀 모르다가,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그게 모두 하느님의 섭리였구나!”라고 깨닫게 됩니다.>
3) 예수님의 족보는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때’가 있음을, 즉 ‘하느님의 시간표’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때’ 태어나신 것은, 그때가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잘 모릅니다. 어떻든 복음서를 보면,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와 출생, 그의 활동과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탄생,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이 모두 ‘하느님의 시간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 시간표는 종말, 재림, 심판 때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 각 개인의 인생도 그 시간표 안에서 진행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시간표를 우리에게 미리 알려 주지 않으시는 것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회개하고 구원받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4) 예수님의 족보는 예수님의 이름에서 끝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족보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족보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예수님의 이름 뒤에 계속 기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6-17ㄷ)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족보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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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마태오 복음 1장 2-17절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다윗을 거쳐 예수님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역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며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의 탄생으로 하느님 백성의 구원 역사는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특별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야곱의 아들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요셉은 예수님을 낳았다.” 대신에 “마리아에게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15절까지 줄곧 사용한 능동태 문장이 아니라 수동태 문장이 사용된 이유는 단순히 다윗 가문의 계보를 나열하는 문학적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목적만은 아닐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16절의 수동태 표현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분의 탄생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초자연적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마태오 1,18.20 참조) 또한 이러한 문학적 형식의 파괴는 예수님의 족보 다음에 등장하는 이야기(마태오 1,18-25)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 줍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집중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분께서는 다윗 가문 출신이시지만 성령의 힘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먼저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기다림’은 ‘바라봄’을 통해서 실현될 수 있습니다. 대림 시기 둘째 부분을 시작하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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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대림 시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는 때” (「전례주년에 관한 일반 규범」, 39항)이고,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림 시기의 두 가지 의미를 드러내고자 대림 제1주일부터 12월 16일까지를 ‘세상 끝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로, 그리고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를 ‘주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로 나누어 전례를 거행합니다.
오늘은 대림 시기 둘째 부분의 첫날입니다. 오늘 복음 속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모든 약속이 지켜졌음을 다시금 깨달으면서, 화답송의 시편처럼 “정의와 큰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라고 응답해 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복음서 1-2장에서 유다인의 전통적 주석 방법을 사용하여,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이행하신 모든 약속을 예수님 탄생 이야기로 드러냅니다. 특히 창세기 원역사(창세기 1-11장 참조)의 ‘하늘과 땅의 족보’(창세기 2,5 참조)와 ‘아담의 족보’(창세기 5,1 참조)가 가지는 하느님 축복의 효과를 염두에 두면서 예수님의 족보를 창조와 인간 역사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하느님께서 지난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이사야 예언서 51,1-2 참조), 다윗 임금에게서 펼쳐 보이셨으며(이사야 예언서 9,6 참조), 예수님 안에서 성취하신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줍니다.
마태오는 구약 성경 속 네 명의 여인을 족보에 삽입하면서 그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분으로 자리매김시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의 명단을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각 십사 대로 압축하여 기록하면서 다윗과 그 후손의 지속성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에 감사하며, 화답송을 다시 한 번 노래합니다. “정의와 평화가, 그의 시대에 꽃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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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천사와 요셉의 거래>
마태오복음 1-2장은 예수님의 공생활(가르침과 행적)을 소개하기에 앞서 비교적 먼 과거의 이야기를 엮어만든 전사(前史)에 속한다.
이러한 전사는 루카복음(1-2장)에도 있다. 둘 다 원전이 될 마르코복음과 예수어록에 없는 전승들과 각자 고유의 자료들을 토대로 전사를 엮었을 것이다.
루카복음의 전사(前史)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 그리고 성장과정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 암시한다.
아울러 루카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즈가리야, 엘리사벳, 마리아, 요셉, 목동들, 그리고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 등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서술도 포함시켰다.
이와는 달리 마태오는 예수님 단 한 분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족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경위, 동방박사들의 방문, 헤로데 대왕의 베들레헴 아기학살, 이집트 피난, 그리고 성가정의 나자렛 정착에 관한 이야기를 위주로 전사(前史)를 엮었다.
미리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이러한 전사(前史)들이 예수의 생애 시초와 어린 시절에 대한 확실한 사실을 근거로 엮어진 기록들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성과 그 의미를 밝히려는 신학적인 서술이라는 것이다.
즉, 인류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신뢰와 신앙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사가 마구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전사가 사실과 달라야 하는 법도 없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경위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물론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설명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의 족보를 소개한 마태오가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마태오가 저술한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전자(前者)는 인간의 이름이요, 후자는 하느님의 이름이다.
즉, 예수는 인간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어야 하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어야 한다. 마태오는 다윗의 후손인 요셉을 예수의 합법적인 아버지로 서술함으로써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 되게 하였다.
마태오는 예수의 공생활 중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예수께 8번이나 더 부여한다.(마태 9,27; 12,23; 15,22; 21,9.15 등)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만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 밝혔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히는 일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 일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추진하신다. 그것이 바로 "동정녀의 잉태"(이사 7,14), 즉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이다.(18절)
루카복음은 예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하느님의 계획과 이 계획에 대한 동정녀 마리아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짐을 시사하고 있다.(루카 1,26-38)
또한 루카는 마리아의 합법적인 남편 요셉을 두세 번 언급할 뿐 전적으로 배경에 머물게 한다.(1,27; 3,23) 그러나 마태오는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에 관한 사실은 간단하게만 밝히고, 오히려 요셉을 부각시킨다. 마리아의 잉태가 자신과 무관한 사실을 알았을 때 요셉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이 점은 상상에 맡기겠다.
복음은 요셉이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나, 마리아를 법대로(신명 22,20-21) 다루지 않고 자비로이 선처(善處)하려 하였음을 시사한다. 이 때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여 다윗의 후손인 요셉에게 사건의 정황을 설득시키고, 요셉은 이에 순명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들에게 천사의 명대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된다.(21절, 25절)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합법적인 아들로서 다윗이 자손이 되었고, 동정녀를 통한 성령의 잉태로 하느님의 아들이 된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 인간의 아들이요, 하느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더 나은 이름이 있다. 바로 "임마누엘"이다.(23절)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린 적은 없다.
"임마누엘"은 실상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는 의미상의 이름이다.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참다운 만남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예수께서 저 바깥 마구간 구유에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느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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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중략)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오.1,1,16)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예수님이 단지 하느님의 아들일 뿐 만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 가족의 역사를 가진 사실을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보이는 인간의 모습으로 인류의 역사에 존재하심으로써 인간인 우리의 모습을 빛나게 해주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인류의 역사에 하느님이 오신 것은,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처럼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흘러넘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인 또한 주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내셨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태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호가 새겨진 사람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알려면, 예수님의 족보처럼, 우리는 누구이며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자신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부모와 형제, 가정환경과 교사와 친척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관계성의 역사를 통해서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성장해왔기 때문입니다.
옹기처럼 주님의 손으로 우리 삶은 빚어집니다. 옹기장이이신 주님의 손으로 빚어진 우리는 주님의 목적대로 살도록 구워졌습니다. 주님의 도구가 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도록 우리는 만들어졌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주님은, 우리 개인 삶의 역사에서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주님께서는, 끊이없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와 깊은 관계를 맺고자 하십니다. 대림시기는 주님과 하는 대화인 기도하는 시기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이 땅의 인간이 되어 오심을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인간인 우리와 더욱 깊고 사랑스런 관계를 갈망하는 주님 사랑의 징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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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일반적인 침팬지 공동체는 20~30마리로 구성되고, 드물게는 150~200마리까지 늘어나기도 한다고 합니다. 고인류인 네안데르탈인과 고대 사피엔스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약 7,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는 무리와 협력하는 전례 없는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무역이 이루어졌고, 예술이 등장했으며, 무엇보다 먼 지역으로 이동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인류학자들은 스토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이야기 능력이 생기면서 뇌구조와 언어 능력에 변화가 이루어졌고, 이로써 소규모가 아닌 대규모로 연결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를 지구상 가장 힘 있는 종족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 능력은 누구에게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혼자 하는 혼잣말로 이루어질까요? 아닙니다. 함께했을 때 그 이야기 능력은 배가 되며 그 안에서 커다란 힘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함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이 세상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없애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또 군중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우리가 혼자 살 수 없음을 주님께서 직접 모범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직접 뽑은 제자들이지만, 주님을 팔아넘긴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십자가 죽음 후에는 다락방에 숨어 벌벌 떨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다시는 상종 안 하셨을까요? 그들에게 부활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거부했고 아픔을 주었어도 함께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올바르게 살았던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하느님 뜻에 반해서 잘못된 길로 나아갔던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 역사를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불안한 사람들의 역사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어떻게든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하면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야 합니다. 때로는 나에게 커다란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나의 역사 안에서 갈라치기를 하면서 함께할 사람을 줄여나간다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과도 함께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이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나의 이웃과 함께해야 합니다.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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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
<길>
“그리하여 이 모든 세대의 수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십사 대이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배까지가 십사 대이며, 바빌론 유배부터 그리스도까지가 십사 대이다.”(마태 1,17)
스스로에게
갇힌
이에게
있음에도
감추는
길
기꺼이
여는
이에게
숨지 않고
내미는
길
그저
바라보는
이에게
아득히
멀고 먼
길
오롯이
걷는
이에게
나누임 없는
곁 내준
길
제 자리
멈춘
이에게
결코
끝나지 않는
길
한결같이
걷는
이에게
늘
끝닿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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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안의 족보를 보면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이 담겨있나 봅니다. 그리고 나이에 상관없이 아저씨뻘이니 형님뻘이니 하며 ‘촌수’를 따지곤 했습니다. 누가 출세하면 그것을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호들갑을 떨고 먼 친척도 그때는 아주 가까운 것처럼 느끼며 자랑했습니다. 족보는 뿌리를 찾아 주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리스도의 족보에 여인이 등장했습니다. 그것도 훌륭한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은 사람도 부끄럼 없이 올라 있습니다.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자식을 낳은 다말, 창녀로써 적군과 내통한 라합, 그리고 젊은 과부로 보아즈를 유혹했던 이방인인 룻, 자기 남편을 죽인 다윗의 자식을 낳은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입니다. 감추고 싶은 죄인들이 등장함은 의미가 큽니다. 메시아의 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기묘한 방법으로 대를 이어가셨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의인과 죄인의 장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룻을 등장시킴으로써 구세주 그리스도는 유다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의 메시아도 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계십니다. 결국 주님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주시려 인간 역사 안에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이어지는 족보의 끝에 나의 이름도 기록될 것입니다. 기왕이면 내로라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죄인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아니 회개한 죄인으로 기록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역대 이스라엘 왕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마태 3,17)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요, 주님의 영을 받은 이(루카 4,18) 입니다. 이제 그분의 자녀가 그분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의 족보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기에 앞서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어디인가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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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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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 우리 믿는 이들의 족보이자 뿌리 -
“배웁시다, 하느님의 항구한 인내와 겸손의 사랑을!”
“오 지혜 지극히 높으신 이의 말씀이여, 끝에서 끝까지 미치시며 권능과 자애로 다스리시는 이여, 오시어 우리에게 슬기의 길을 가르쳐주소서.”
매해 대림시기 둘째 부분 첫날 12월17일 반복되는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노래 "오(O)!" 후렴은 늘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매일 미사중 복음 환호송에서도 반복되는, 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생신일이기도 합니다.
1936년12월17일생이니 만88세가 되는 날입니다. 코르시카 하루 방문후 귀국중 기내에서는 동행했던 언론인들에게 “Happy Birthday” 축하노래도 선물 받았고, 교황은 웃으며 “Thank you!” 감사인사와 더불어 강복으로 응답했습니다. 귀국 후 또 여러 방문객들을 접견하시니 교황님보다 사람들 많이 만나고 바쁘신 분도 없을 것입니다. 개인 시간은 전혀 없는 모두가 공개된 공인으로서의 삶입니다. 만88세 고령의 연세에 피곤한 기색없이 늘 미소띈 모습으로 한결같이 대하는 모습은 진정 예수님의 후예답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그대로 잇고 있는 교회의 최고 어른입니다.
“투기나 전쟁이 아닌 희망에 투자하라!”
교황청을 방문한 은행원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노후대책뿐 아니라 사후대책을 위해 희망에 투자하라 했다는 어느 주교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희망의 순례자로 사는 것보다 더 좋은 미래에 대한 투자는 없을 것입니다.
“화해는 마음의 일이다. 주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닿을 때, 그분은 우리를 변형시킨다.”
역시 교황청을 방문한 개신교 감리교회 목사들에게 요지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대림시기 둘째 부분인 오늘 12월17일은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족보이며 뿌리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족보에 뿌리를 둔 교황님의 한결같은 맹활약은 늘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가톨릭교회는 물론 모든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 소개된 예수님의 족보는 면면히 흐르는 살아 있는 하느님의 장강(長江)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족보에서 후렴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동사가 “낳았다”입니다. 계속되는 출산이 그대로 하느님의 희망이 반영된 축복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며 작금의 출산율 저하가 심히 우려됩니다.
이미 제1독서 창세기에서 야곱의 유다에 대한 각별한 축복을 통해 유다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에 중요한 몫에 참여하고 있음을 봅니다. 우연은 없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 모두가 필연적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모두가 ‘신의 한수’ 같은 하느님 구원 섭리의 도구요 유다는 더욱 그러합니다.
“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하리라. 누가 감히 너를 건드리랴? 유다에게 조공을 바치고, 민족들이 그에게 순종할 때 까지, 왕홀이 유다에게서, 지휘봉이 그의 다리에서 떠나지 않으리라.”
흡사 이스라엘 야곱의 각별한 신뢰를 받았던 그의 아들 유다를 통해 먼훗날 활약할 메시아 예수님의 모습을 감지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잘난이들 못난이들, 큰 이들 작은 이들, 의인들 죄인들, 유명인들 무명인들 모두를 당신 구원섭리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하느님께는 쓸모없다 버릴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모두가 각자 자리에서 각자의 몫에 최선을 다하게 하십니다.
흡사 묵주끈에 달린 묵주알처럼 하나하나가 족보의 줄에 매어져 있음이 존재이유가 되고 있음을 봅니다.
묵주알이 하나의 묵주끈에 매여져 있기에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지 사람도 공동체 족보의 끈에서 떨어져 나가면 무의미한 무명의 존재로 전락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족보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요! 그리스도 예수님이 탄생하기까지 그 아득한 희망의 미래를 내다보며 끝없이 기다렸을 하느님 사랑의 인내와 겸손이 참으로 놀랍고 감사하고 감격스럽습니다.
특히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은 마리아 성모님에 앞선 인간적으로 참 불우하고 기구했던 네 여인들, 다말, 나합, 룻, 바세바가 이 족보에서 참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원주민이고, 룻은 모압 출신 여자요, 솔로몬의 어머니 바쎄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기 전에 히디트 출신 군인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도구로서 우선적 조건은 신분이나 혈통, 도덕군자나 요조숙녀가 아닌, 주님께 대한 충실하고 한결같은 믿음뿐임을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탄생에 결정적 협조자가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족보는 다음 구절로써 끝납니다. 하느님 사랑의 인내와 겸손의 결정체같은 구절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어제 수도원 배밭에는 2200 여개의 비료부대가 반입되었고 또 다섯분의 인부들에 의해 배나무들 전지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해 배농사의 끝은 새로운 시작의 반복임을 깨닫습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예수님의 기나긴 족보는 끝납니다만, 예수님께로부터 시작되는 교회의 족보가 뒤를 잇고 세상 끝날까지 새롭게 계속될 것이며,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의 족보에 속해 있는 하느님의 한가족, 한식구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 90,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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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대단하지 않지만 필요한>
오늘은 주님 성탄 한 주일 전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래서 교회 전례는 오늘부터 성탄 대축일까지 주님의 탄생을 가까이서 준비한 사람들 얘기를 들려주는데 오늘은 예수님의 족보 얘기입니다.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 예수님 오시려면 필요한 인물, 더 강조하면 꼭 필요한 인물들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이 족보에는 차독이라는 조상이 있는데 우리는 차독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개똥이나 마찬가지인 이 차독이 없으면 대가 끊겨 안 됩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족보가 무슨 필요가 있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오늘 우리가 들은 족보가 예수님께 어울리기나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족보는 필요하다는 얘기이고, 그래서 우리 전례는 이 족보 얘기를 들려줍니다.
왜 필요하냐고요?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기 위해선 족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동정녀 마리아와 요셉의 족보뿐 아니라 인간의 족보가 필요하기에 주님은 꼭 이 족보가 아니라도 족보를 통해 오셔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이 족보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영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저의 인간적인 족보는 제게서 끊겼습니다.
그리고 저는 대단한 인간이 아닙니다. 대단한 인간은 아니지만 필요한 인간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영적 족보를 위해 필요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족보가 끊긴 것만도 서러운데 영적인 족보마저 끊긴다면 더 서럽잖습니까?
가능하다면 저도 마리아처럼 주님을 낳고, 주님을 낳을 수 없다면 영적인 자녀라도 낳는 데 필요한 인물이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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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1)
<사람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1,1-17)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두루 갖추신 분, 곧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족보는 바로 예수님께서 신화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브라함에서 시작된 다윗의 자손으로서 합법적이고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과, 죄 말고는 우리와 똑같은 존재, 곧 인성을 지닌 분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1,16)
대림시기에는 '두 개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재림)에 대한 기다림'이고, 또 하나는 '주님의 성탄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전례로 볼 때 어제까지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오늘(12.17)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탄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요?'
'내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실 수 있도록 마음의 청소는 잘 되어가고 있는지요?'
지금 많은 성당에서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해 판공성사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합천성당도 12.20(금) 저녁에 판공성사가 있습니다.
판공성사인 고해성사가 늘 해오는 형식적 의무적인 성사가 아니라, 내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는 은혜로운 성사,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시는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하게 해 주는 성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판공성사인 고해성사를 잘 보려면, 첫째로 '성찰'을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고 단순하게 나의 죄를 고백하면' 됩니다. '남의 죄를 고백하지 말고, 그리고 나의 죄에 대한 어떤 이유나 변명을 길게 늘어놓지 말고, 짧게 나의 죄만을 고백하면' 됩니다.
'함께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잘 준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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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 1, 1)
선과 악의
양면성을
보게 되는
우리의 아픈
현실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모든 탄생을
지켜내는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구원의 약속은
우리의
낡은 틀을
깨뜨리며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역사의
밑거름이 됩니다.
성탄은
기어이
오고야 말
하느님의
뜻입니다.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합니다.
모든 새로움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탄생의 족보는
살아있는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언제나
살아있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를 살아
숨쉬게 하는
놀랍고도
감사한
근원입니다.
창조의
역사 안에
뜨거운
구원의
탄생이 되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성탄의 강물은
결코
멈추지 않으며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흐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만나는
새로운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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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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