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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기능 / 화이트헤드
버트런드 러쎌과 함께 20세기 영미 철학자의 거장으로 불리는 화이트헤드의 명저이다. 그의 철학은 과정철학이라고 불리고, 이름이 Whitehead라서 백두白頭 선생이라는 별명도 있다. 기존 서양 근대철학의 존재being 개념을 생성becoming개념으로 이해하는 사조와 맞닿아 있는 것이 과정철학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과 그에 따른 변화 속에서 존재를 인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존재에서 출발하는 서양 근대 철학의 이분법적 사고는 깨어질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서양 근대성의 한 획을 담당하는 (직접적으로 근대성 비판이라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진화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시도한다. 그렇다고 창조론을 지지한다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말 그대로 구 진화론을 극복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적자생존이라고 하는 진화론의 대원칙은 유기생물에 한해서만 타당한(?) 것이고, 논의 대상을 무기물까지로 넓히면 허무맹랑한 것이 된다. 수백만년을 버티어온 돌덩이는 누구보다 환경에 적응을 잘했지만(Survival of the fittest) 진화론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화이트헤이드 '목적'을 거부하는 물리적, 자연과학적 논리에 반항하지만, 무위한 가치를 읊조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물리적 논리에서 해방됨으로써 삶의 '목적'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사상체계를 확립한다.
https://m.cafe.daum.net/somdaripoem/rA34/1828?svc=cafeapp 우주의 무목적성
따라서 상향하는 인간의 방향도 긍정한다. 그는 이성의 기능이 잘 살고, 더 잘 살고, 가장 잘 살려는 '목적'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성으로써 권태에서 탈피해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위 내용이 1부라면 2부에서는 인간의 역사에서 이성이 발전해왔는가 논한다. 특히, 사변이성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 책에 대하여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야 할 점은, 도올 선생의 역안이다. 동양고전 번역처럼 원문-해석-안(주석)을 모두 병기한다는 성실함과 책임감이다. 그것은 "화이트헤드의 언어와 나(도올)의 언어 사이에 교감된 교감의 의미구조를 독자의 상응되는 체험의 구조 속으로 진입시키는 그러한 방법"인 것이다. 또한, 화이트헤드의 글임과 동시에 도올의 글이 되는 것이다
1. 몸으로서의 이성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이성은 저 하늘 위에 고고히 매달려 있는 어떤 추상적 실체나 본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몸'이라는 거대우주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현상과 일원적으로, 즉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어떤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이성"이란 "실체"가 아닌 "기능"이다. 이성이 우리의 몸에서 어떠한 기능을 달성하느냐 하는 그러한 각도에서만 그 실체성이 인정될 수 있을 뿐이다.
- 이성의 기능 The function of Reason p.24~25
그것은 물리학처럼 현실에 직접 와닿는 '이성'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살갗에서 느낄 수 있고, 변화하는 몸에서 기능하고 있는 실체로서의 이성이다. 사실 우리의 몸을 떠난 진리를 이야기한들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더 나아가 우리와 상관이 없어진 이데아를 이야기한들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겠는가. 공염불에 불과할 뿐이다.
“20세기의 데카르트”라 불리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의 『이성의 기능』(The Function of Reason)이 도올 김용옥 선생의 번역과 주석으로 나왔다.
1929년 3월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행한 강연록인 이 책에서 화이트헤드는 이성의 기능을 한마디로 “삶의 기술을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삶의 기술”이란 다시 ①산다 ②잘 산다 ③더 잘 산다라는 “삼중의 충동”으로 드러난다. 이런 이성관은 그리스철학이나 독일 관념론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2. 실천이성과 사변이성
그에 따르면 이성이란 “동물의 생존을 위한 기능”이기도 하고 “특정한 동물적 기능을 추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그것에 “실천이성”과 “사변이성”이라는 명료한 용어를 적용했다. 즉 전자의 생존을 위한 기능은 “실천이성”이라 하고 후자인 인간만의 특성으로 세계의 이해를 추구하는 기능은 “사변이성”이라 했다. 지금까지 철학사는 실천이성 대신 사변이성만 논의해 왔지만 화이트헤드는 이성에 관한 이 두 갈라진 전통을 조화시키려 하고 있다.
이성의 두 가지 기능의 조화
실천이성- 생존을 위한 기능
사변이성-인간만의 특성으로 세계의 이해를 추구하는 기능. 사변이성의 기능은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다. 무질 서의 척도인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유일한 방법 이다.
자연선택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인간의 본성으로서 도덕과 이성을 선사했다.
3. 상향 운동과 하향운동
하향운동 - 물리적인 세계에선 엔트로피의 법칙이 관철되는 까닭에 하향으로 퇴락
상향운동 - 생명이 갖는 이성의 창진적 기능에 의해 상향으로 움직여가는 상쇄적인 운동의 방향 또한 공존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두 가지 법칙이 있다. 첫 번째가 열역학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고, 두 번째가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이다.
인간이나 빌딩이나 자동차나 한 그루의 풀포기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에너지의 양을 나타내고 있다. 제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우주에 있어서 물질과 에너지의 총화는 일정하여 결코 더 이상 조성되거나 소멸되는 일이 없으며, 또한 변화하는 것은 형태뿐이고 본질은 변치 않는다’ 는 것이다.
제2법칙이라고 말해지는 엔트로피의 법칙은, 저자의 말에 따르면,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사용이 가능한 것에서 사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또는 질서 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 요컨대 제2법칙에서 우주 전체는 체계와 가치에서 시작되어 끊임없이 혼돈과 황폐로 향한다고 설명한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읽고 난 충격은 오래 갔다. 우리의 모든 물리적 운동과 실천은 필연적으로 하향의 길을 향해서 가지 않을 수밖에 없는가? 인류 문명은 이 물리학의 절대 유일의 법칙(아인슈타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혼돈과 황폐의 흐름으로 퇴락하고 마는가? 저자의 메시지는 물론 절망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에 이르는 길에 있었겠지만.
이 물리학의 법칙이란 것이 생태계, 즉 생명의 흐름 속에서도 같은 원리로 작용하는가? 본 주제에 관련된 연구나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 밖에 있었던 나의 입장에서는 나머지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는 괄호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근자에 들어 다시 이 주제에 대한 사유의 계기를 맞게 되었는데, 세기의 철학자 화이트헤드(1861-1947)가 1929년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한 강연의 전문을 엮은 책 ‘이성의 기능’(김용옥 역안)을 읽고서다.
“욕망에의 욕망, 이성을 사유하다. 화이트헤드로부터 도를 묻다. 이성의 창진적 기능, 지금 나를 흥분시키다. 상향으로 상향으로(upward upward)!”
화이트헤드는 이 세계의 운동의 방향을 두 가지로 역설한다. 그 하나는 엔트로피의 법칙에 지배를 받은 물리적 세계의 '하향으로 하향으로(downward downward)' 가는 운동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생명이 갖는 이성의 창진적 기능에 따라 ‘상향으로 상향으로(upward upward)’ 움직여가는 운동 방향이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물리적인 세계에선 엔트로피의 법칙이 관철되는 까닭에 하향으로 하향으로 퇴락해 가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 생명이 갖는 이성의 창진적 기능에 의해 상향으로 상향으로 움직여가는 상쇄적인 운동의 방향 또한 공존한다는 것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흐르지만, 저 계곡의 물속을 헤엄치는 날피리들과 물고기 떼들은 아래로부터 위쪽으로 위쪽으로 물길을 거스른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나 위대한가? 그리하여 화이트헤드의 논리에서 변증되고 있는 것처럼, 생명이란 환경에 잘 적응하여 생존하는 것이 아니고, 환경을 자신의 생명에 유리하게 적응시킴으로써 생존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다윈의 ‘적자 생존론’은 과학적 진실이 아니며, 환경에의 적응 능력으로만 보면 인간만큼 부족한 생명체도 없다고 말한다.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것으로 알려진 바위는 8천만년을 견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적자 생존론’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불리할 수밖에 없는 고도로 복잡한 유기체인 인간은, 이성의 창진적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환경을 그 자신에게 적응시키는 힘을 발달시켰다. 물질의 하향적 운동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환경을 자기 자신의 생존 방식에 맞게 조정하는 능력을 가진 다양한 생물 종들의 구체적 예시를 보면서, 나는 진실로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권태로움, 리듬감, 반복적 일상, 익숙함을 따라 저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적응해가는 것이 아닌, 여태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창진적 사고와 실천적 노력으로 물리적 흐름을 역행하는 것, 바로 그것이 생명만이 갖는 진정한 특질이며 특권이라는 논지에 이르러선, 막힌 출구를 열어 형이상학적 사유의 새 지평을 내오듯 간만의 희열감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였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란 이토록 위대한 것이구나. 물살을 거스르며 뛰어오르는 물고기의 비상처럼 아름다운 것이구나. 물질의 하향, 즉 엔트로피의 증대를 거부하는 생명의 창진적 노력이여, 그 역행의 수레에 동승하여 의식의 진화를 추구하는 이 땅의 모든 여행자여, 아름답구나!
중용의 구절 한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子曰(자왈) 質勝文則野(질승문즉야) 文勝質則史(문승질즉사) 文質彬彬(문질빈빈) 然後君子(연후군자)”
꾸밈(文)과 바탕(質), 자연(野)과 역사(史)의 변증법을 오래된 공자의 말씀에서 찾는다. 바탕이 꾸밈을 이기는 것을 자연이라 하고(質勝文則野), 꾸밈이 바탕을 이기는 것을 역사라 한다(文勝質則史). 문과 질, 야와 사는 상호 침투하여 중용의 빛을 발휘한다. 하여, 무늬와 바탕이 온전히 부합해야 빛이 난다(文質彬彬, 문질빈빈). 그런 자라야 참된 인간, 참된 지도자가 된다(然後君子).
4. 과학우월주의에 대한 비판
: 당대 과학주의, 특히 다윈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환경에 의한 무력감이 많은 시대에 개인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요즘에는 서울대학교 30%이상이 강남 8학군 출신이더라는 기사, 혹은 타고난 머리•재력과 같은 유전적 요인이 삶을 좌우한다더라 하는 유튜브에 너무 쉽게 노출되곤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환경이 개인 간의 우위를 만들고, 대물림된다는 얘기는 개인 간의 경쟁과 분리•심리적 무력감을 남긴다. 실제로, 과거에 비해 청년들의 ‘대물림에 대한 개선 의지’가 감소되었다고.
반면<이성의 기능>은 인간의 능동적 삶에 집중한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은 환경에 지배되는 그런 쉬운 존재가 아니고, 이성의 통해 능동적으로 삶을 선택하는 존재란 걸 논증하고자 한다.
이성의 기능이란
“안정을 탈피하고,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세”이다. 여기서 이성이란 (1)경험(오감)과 반대되는 개념이며, (2)환경과의 반대개념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예를 들어 (1)의 경우,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인물 조르바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자유인 조르바는 도자를 만드는데 손가락이 방해가 되어, 스스로 잘라버렸다. 이는 경험(손가락이 방해가 된다는 감각)때문에 손가락을 자르는 고통을 감수한 것이다.
그러나, 조르바가 이성에 따른 인물이었다면 “손가락이 방해되지 않게 도구를 바꾸어보자”, 또는 “쉽게 만들 수 있게 도자 모양을 바꾸어보자”등등 사고를 통해 다른 선택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 이성은 사고를 통해 하는 선택이 된다.
예를 들어 (2)의 경우,
과거 잘못 해석된 다윈주의를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다. 과거 다윈주의에 따라, 세상에서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지금의 호모사피엔스가 다른 종보다 우월해서 살아남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강하지 않은 약자는 모두 죽는 것이 진화의 원리이다. 자연선택의 원리에 의해, 어떤 개인은 살아남고 어떤 개인은 죽게 된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들어가는 개별적 삶’보다 ‘환경에 의해 지배되는 보편적 삶’으로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싫어하는, ‘개인의 선택’을 환경의 지배로 묵살해버리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이때 이성이란 ‘스스로의 선택: 개별적 삶(자아)’를 인정하는 개념이 된다.
두 가지를 통합적으로 고려하여,
“이성은 ‘사고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기능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이성의 기능> 속으로 들어가보자
5. 동양고전을 번역하는 것과 같은 정중한 방법 선택
20세기 철학자 가운데 가장 난해한 문헌을 남긴 것으로 ‘악명’ 높은 화이트헤드가 이성을 이렇게 쉽고 명쾌하게 정의했다는 건 믿기 어려울 정도다. 옮긴이는 이를 “그리스철학에서 근세 합리주의에 이르기까지 이성을 초월적 실체나 추상성으로만 간주해 온 서양 이성주의 전통에 대한 하나의 반역이며 도전”이라고 말한다. ‘이성’을 자연주의적으로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이를 “인간의 기능 가운데 하나”라는 제자리로 돌려놓은 셈이다.
이 책은 화이트헤드 사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이지만, 도올 김용옥 선생의 번역 방식이 더 흥미를 끈다. 그는 먼저 영어 원문을 문단 단위로 끊어 장마다 일련번호를 붙이고, 원문과 함께 번역문을 실은 뒤, 그 문단에 대한 자신의 해석인 “안”(案)을 덧붙이고 있다. 이는 동양 고전을 번역할 때 흔히 쓰는 방식이다. “화이트헤드의 언어는 번역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처럼 “동양고전을 번역하는 것과 같은 정중한 방법을 택했다”고 옮긴이는 밝히고 있다.
이 번역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끊임없이 동양철학과 견주고 있는 점이다. 예를 들어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역사의 상향운동과 하향운동을 기(氣)의 취산(聚散)으로 설명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동양철학을 현대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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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기능 by 화이트헤드
(譯) 상향적 경향에 수반된 것은 환경과 유기체 사이의 역의 관계의 성장. 동물들은 환경을 자기 자신에게 적응시키는 과업을 점진적으로 수행
(案) 화이트헤드의 논의는 진화론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진화론이 설명할 수 없었던 다른 자연의 사실을 다른 시각에서 고찰하는 것이다. 즉 그는 설명방식을 바꾼 것이다. 환경에의 수동적 적응이 아닌 환경의 자기에게로의 능동적 개변을 말하고 있는 것. 고등동물의 진화는 바로 이러한 능동적 개변 때문에 이루어진 것
(譯) 가장 단순한 생명체들도 그들의 먹이가 그들에게로 헤엄쳐 들어오게 만든다. 고등한 동물들은 그들의 먹이를 추적하며, 포획하고, 또 저작한다.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환경을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변형시키고 있는 것
생명의 고등한 형태들은 그들의 환경을 개변하는데 능동적으로 종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 인류라는 종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도 환경에로의 능동적 공격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생존의 가장 돌출한 사실
(譯) 이성의 기능이란 바로 삶의 기술의 증진. 이성의 원초적 기능은 바로 그 공격을 환경에로 방향지우는 것
(案) 환경에 대한 공격의 방향이란 환경을 공략하는 전략, 즉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어떠한 시기에 공격하는가라는 지시, 명령, 플랜 등을 포괄. 그것이 바로 이성의 원초적 기능
(譯) 우리는 이성을 동물적 몸의 생존에 관여하는 여러 기능 중의 하나로 생각할 수도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특정한 동물적 기능으로부터 추상되어있는 그 무엇으로도 생각할 수도 있다. 이 후자적 관찰의 양태에 있어서 이성이란 이론적 실현의 작동이다
(案) 이성에 대한 고찰의 두 가지 측면이 존재, 하나는 동물적 생존전략 또 하나는 추상적 사유능력. 전자가 실천이성이라면 후자는 이론이성이며 순수이성. 하지만 칸트의 용법과는 전혀 다름. 칸트에게 있어 실천이성이란 이론이성의 안티노미를 극복하는 윤리적인 맥락과 관련, 화이트헤드의 실천이성은 동물의 생리학적 레벨로 하락해버리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는 것. 추상의 형이상학이 아니라 생존의 실천
(譯) 이성을 고찰하는데 있어서 철학사의 전통적 논의들은 주로 후자의 사변적 양식에만 집중. 그들에게 있어서 이성이란 이해, 판단, 개관하는 신적인 능력
(案) 모든 사상은 그것이 사상이고자 하는 한에 있어서 반드시 새로움을 보유. 헌데 새로움은 반드시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데 공헌하고 있는 모든 사상과 마찰을 야기. 그 마찰에서 낡은 힘을 꺾을 수 있는 새로운 힘을 축적해내는 사상만이 생존
(譯) 인간사의 행위는 우리의 목적을 결정하는 예견의 승인과 행위로 귀결되는 목적에 의해 완전히 지배
(案) 인간의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 행위를 지배하는 목적이 있기 마련이며 그 목적을 결정하는 예지의 통찰이 있게 마련. 그러한 목적을 전제로 하지 않는 단순한 행동의 생리적 고찰은 현실적으로 무의미
(譯) 모든 방법론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생활사를 가지고 있다. 방법론이란 생명의 갓 피어오르는 충동의 성취를 촉진하기 위한 보호적인 수단으로서 출발. 그것의 전성시대에는, 방법론은 사고와 행동의 광범위한 협동을 대변하며, 이러한 것에 의해 생명의 충동은 존재의 주요한 만족으로서 자신을 표현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제2의 유년기라고도 할 수 있는 노년기의 무기력과 권태감으로 진입. 그 방법의 범위 내에서 성취할 수 있는 더 큰 대비들이 다 탐구되었고 또 친근하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반복으로부터 생기는 만족감도 시들시들. 그러면 생명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국면하게 되는 것
(案) 방법론이란 우리 세포의 레벨에서부터 우리의 사고와 사회, 역사의 영역까지 일관되게 적용되는 하나의 개념. 산다는 것 자체가 방법이 없이는 못 사는 것
(譯) 한 방법론의 탄생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살려고 하는 안전한 방법의 발견. 그것은 전성시대에는 좋은 삶을 위한 긴박한 조건들을 만족시킨다. 그러나 좋은 삶이라고 하는 것은 불안정. 피곤의 법칙이 엄습. 삶의 어떠한 방법론이라도 그 범위내의 신선함을 다 고갈시키고, 또 피로가 물밀쳐 올때까지 그 신선한 것들을 다 써먹어버리게 되면, 하나의 마지막 결단이 그 종의 운명을 결정. 하나는 그 자신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그냥 생존하는 수준으로 퇴행해버리는 것. 또 하나는 과거의 관습들을 자유롭게 떨쳐버리고, 더 잘사는 모험을 시작하는 것
(案) 여기서 좋은 삶이란 더 나은 삶의 대비가 매우 중요. 좋은 이란 말은 한 방법론의 유기체적 싸이클의 범위에 고착. 항상 불안정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 쇠락. 쇠락의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는 항상 더 나은 삶에로 비약하느냐? 그냥 생존의 화석으로 고착되느냐? 하는 선택. 더 나은 삶으로의 비약은 실천이성의 힘으로만은 불가능. 반드시 사변이성의 작동을 요구.
(譯) 한 종이 새로운 모험을 거부한 상황에서는, 단순한 생존의 잘 입증된 습관에로의 퇴행. 그렇게 되면 최초의 방법은 이제 연장된 노년기의 삶으로 들어가고, 그 노년기속에서 훌륭한 존재는 구차한 존재로 퇴보. 다양한 신선함이 없어지고, 그 종은 낡은 관례의 맹목적 요구에 의존. 이성의 본질은 가장 하급한 형태에 있어서는 새로움이 번뜩이는 순간의 포착이며 판단. 그 새로움은 긴박한 실현 속에 있으며, 아직 행동에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욕구에는 적절한 것. 즉 안정된 삶속에는 이성의 여지가 없는 것. 방법론은 새로움의 방법에서 반복의 방법으로 퇴행. 이성이란 새로움을 강조하는 기관. 그것은 목적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판단을 제공.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실을 실현.
(案) 화이트헤드에 있어 모든 안정이란 보이지 않는 쇠락. 안정이란 곧 하향을 의미. 하향은 이성과 불일치. 이성은 인간과 우주를 포함한 상향의 힘. 상향이란 반드시 새로움을 동반. 이성이란 새로움을 강조하는 조직이요 기관이요 힘.
(譯) 삶의 권태란 새로운 대비를 향한 충동의 좌절로부터 연유되는 피로.
(案) 리듬이란 궁극적으로 단순 반복. 반복을 지속시키기 위한 반복적 방법이 리듬을 형성. 반복의 지속, 반복에서 파생되는 피로를 제거시키는 양면적 효과를 동시에 만족시키기 위해 발생. 사실 우리가 음악을 듣는다는 것도 반복의 시간을 반복의 권태가 느껴지지 않도록 보내기 위해 듣는 것. 엔터테인먼트란 반복적 시간의 효율적 소비 방법일 뿐. 반복의 리듬의 주기가 자기치유적일 때, 반복으로부터 파생되는 피로는 기나긴 시간의 축적을 요구. 그리고 저급한 단계로 내려갈수록 피로의 느낌은 보다 기나긴 시간의 축적을 요구.
(譯) 아주 저급한 형태에 있어서는 이성은 기분을 전환시키는 새로움에 달라붙는 개념적 장치의 강조를 제공. 이러한 이성은 추상적 사유의 구성적 범주를 결여한 이성. 어떤 개념적 번뜩임을 하나의 효과적인 욕망으로 제고시키고, 또 그 효과적인 욕망을 실현된 사실로 제고시키는 아주 단순한 직접적 판단으로서만 작용할 뿐.
(譯) 단순 반복이라는 것은 기회의 저지를 의미. 이성을 짓누르는 관성의 체계는 새로움에 의해 구원되지 않는 단순한 변화의 재현되는 틀의 생산일 뿐. 그러한 관성으로 질식된 이성의 충동이 곧 피로. 이제 단순한 반복적 삶에로의 퇴행만 있을 뿐. 단지 산다고 하는 데만 급급하고 잘 살려고 하는 노력을 포함한 어떤 노력도 결여. 이러한 정적인 듯이 보이는 삶의 단계는 실제적으로 안정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의 복잡한 형태가 단순한 형태로 서서히 몰락해가는 아주 완만하고 오랜 시간에 걸치는 부패를 표상
(案) 인간의 진화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활동이 이성적인 어떤 것을 지향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역사의 진행
(案) 이 책에서 주장하는 이성의 기능이란 “이성은 욕망들의 욕망”
여태까지 인간의 몸밖에 두었던 이성을 몸속으로 끌여들였다는 혁명적 발상. 즉 데카르트 이래 초월주의적 신비론에 묶여있던 이성을 상식적 경험의 차원으로 즉 생물학적 현실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발상.
이 욕망과 관련된 정신적 경험이라는 것은 새로움의 기관. 자신을 넘어서려는 충동. 정신이 있는 한 현재의 답보상태에 반복적으로 안주할 수 없다. 모든 새로움이란 혼돈. 새로움은 무정부적 상태를 수반. 모든 새로움은 不定性. 우리는 바로 이러한 무정부상태를 대비적으로 경험하는 사태를 통해서만 질서를 이해. 카오스의 경험으로 통해서만 대비적으로 코스모스를 인식
(案) 사변이성이란 내 삶의 경험을 이해하려는 것. 단순히 매일매일 먹고 산다고 하는 생존의 방법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호기심의 충동. 사변이성은 사변이성 자신만을 위해 봉사. 그리고 자신의 호기심으로 인하여 유발될 수 있는 다름 관심의 동기에 의하여 한눈팔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추구하는 일반원리와 같은 지배적 관심을 일관되게 밀고나가려는 경향이 있다.
(譯) 중세기의 운동은 너무 지적이었음. 너무도 습득된 지식만의 전개였음. 그것은 타인의 사상에 대한 사고의 폐쇄된 체계를 형성시켰다. 이러한 방식으로 중세철학은 그리고 실상 근세철학까지도, 자연의 풍요로움과 그에 상응하는 사유의 풍요로움에 대한 부적절한 파악으로 인하여 사변이성의 디시플린으로서의 효용으로부터 멀어져만 갔다.
그들의 철학 속에서 생각한 것들보다 저 푸른 하늘과 이 누런 땅위에 더 많은 생생한 아이디어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譯) 스콜라철학은 이제 그 가능성을 소진하였다. 근원적 관념의 자본을 제공하였고, 또 그것은 이러한 관념들을 과조하는 방법에 의해서 하나의 궁극적인 독단적 체계를 제공하려는 노력으로 우리 인간들을 심히 지치게 만들었다. 르네상스 사람들은 스콜라철학자들처럼 그렇게 학식을 무겁게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학식을 직접적 경험의 희열로 단련시켰다. 그래서 또 하나의 고대의 비밀이 발견된 것이다. 그 비밀은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지만, 슬프게도 중세기의 지성계의 뒷켠에 몰래 숨어 있었다. 그 비밀이란 바로 자기자신 스스로 바라보는 습관이다. 그것은 바로 관찰이라는 습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