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 폭동 참가자 정상용의 분석 <?XML:NAMESPACE PREFIX = O />
광주민주화운동 자료총서 17권 65쪽에는 5.18 주역이자 평민당 국회의원이었던 정상용의 회고가 들어 있다.
“5.18의 기동타격대 구성원은 그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청년이었고, 대부분이 학생이 아닌 도시근로자, 노동자, 점원, 실직자, 구두닦이, 품팔이, 식당 종업원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며 이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싸웠다. 지금까지는 광주민중항쟁이라는 말을 썼지만 나는 5월혁명이라고 부르고 싶다”
위는 5.18단체 측 핵심인물의 증언이며 1982년 3월 15일 육군본부가 발행한 ‘계엄사‘(戒嚴史)의 분석과 일치한다. 계엄사 134쪽에는 극렬시위의 전위대들이 불량배, 구두닦이, 넝마주이, 공장근로자, 전과자, 무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육군본부의 5.18 분석
계엄사 354쪽-367쪽에는 광주사건 수사기록 통계자료가 나와 있다. 광주사태 관련자 2,518명을 조사한 결과 1,957명은 훈방조치하고 561명이 검찰로 송치되었다. 1980.9.5-10.24간 제1심이 열렸고, 80.12.8-12.24에 제2심이 열렸다. 제1심 피고인 수는 모두 357명, 이들은 사형에서부터 징역1년에 집행유예 2년까지의 형을 받았다.
위 1심 피고인 357명을 연령별로 뜯어보면 10대가 71명으로 20%를 차지했고, 20대가 216명으로 61%를 차지했다. 10-20대가 81%를 차지한 것이다. 나머지는 30대 36명, 40대 23명, 50대 6명, 60대 5명으로 집계된다. 이들 357명중 학생은 80명으로 23%에 해당했다. 학생 80명을 뜯어보면 10대 고교생이 16명, 20대 대학생이 60명, 30대 복학생이 4명이었다.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의 직업을 보면 참으로 다양하다. 이들의 직업은 주로 하층 계의 직업들로 무려 59종에 이르며 직업별 구체적인 숫자는 아래와 같다,
학생80 농업30 무직27 운전수24 종업원21 노동13 방위병13 교수11 목공11 상업9 공업7 회사원6 양화공5 용접공5 행상4 미장공4 광부4 목수4 선원4 교사3 변호사3 재수생3 보일러공3 교직원3 인쇄업3 조수3 운수업2 샤시공2 제과공2 석공2 신부2 자개공2 가구공2 회사이사2 재봉사2 정비공2 실내장식1 약사1 개찰원1 다방1 전기공1 변호사사무장1 서적판매원1 세공1 도자기공1 의사1 이발사1 양복점1 엿장수1 건재상1 신문보급소1 당원1 청과물상1 불럭공1 매점1 대학이사1 회장1 화가1 가톨릭회장1(서경원)
학생80. 교수11, 교사3, 변호사3, 교직원3, 신부2, 이사3, 의사1.회장2. 화가1 약사1 등 110명을 제외한 나머지 247명(70%)이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소요를 주도했거나 적극 가담한 광주인들 중, 사망한 사람들과 중상을 입은 사람들은 재판을 받지 못했다. 성한 몸으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이 357명이며, 이들 중 90% 정도가 10대와 20대 그리고 하층계급(민주화 측 용어로는 기층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광주소요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상용 전의원(30. 사원, 무기형)이 기술한 바와 같이 5.18광주폭동은 소외받고 천대받던 젊은이들의 한풀이의 장이었다. 5.18의 영웅은 기동타격대이고, 그 영웅들의 80%가 17살에서 22살 사이의 노동자, 점원, 실직자, 구두닦이, 품팔이, 전과자, 넝마주이, 식당 종업원 등 소외받고 억눌려왔던 기층민중이기 때문에 소위 진보계 사람들은 광주사태를 민중항쟁이라고 부른다. 이들 10-20대와 기층세력이 바로 민주화 열사요 영웅이라는 것이다.
광주 5.18의 대변자 박준성의 5.18분석
이른바 진보계열의 역사학연구소 연구원이자 노동자교육센터 부대표인 박준성은 2005년 9월5일 인터넷(http://blog.naver.com/logosist/17006521)에 “광주항쟁의 주역은 바로 노동자였다”는 제하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 . .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이었다.
5월20일 오후 6시쯤 택시노동자들이 택시 200여대를 몰고 무등경기장에 모였다. 그들은 18, 19일 광주시내 곳곳에서 벌어진 공수부대의 만행을 누구보다 생생히 눈으로 보고, 학생들과 부상자를 나르다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다. 7시쯤 버스와 대형트럭을 앞세운 차량 200여대가 금남로에 나타났다. 거리를 가득 메운 채 불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도청 쪽으로 나아갔다. 운수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은 시위 군중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로케트전기, 전남방직, 일신방직, 아시아자동차, 금호고속, 전일섬유, 광주어망, 남해어망 노동자들이 투쟁의 대열로 모였다. . .
<투사회보>를 만들던 들불야학팀도 노동자들이었고, <투사회보>를 돌리다 들키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일을 했던 이들은 회보를 하나라도 더 감춰 나르려고 ‘몸빼’같은 옷을 입고 나온 21살, 22살, 23살 여성노동자들이었다. 맨 앞에서 총을 들고 싸웠던 시민군 기동타격대원들을 보더라도 항쟁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5.18민중항쟁에 적극 참여했다가 군법회의에 넘겨진 기동타격대원 30명은 이렇다.
윤석루(20)-자개공, 이재호(33)-회사원, 이재춘(20)-방위병, 양기남(19)-샤시공, 임성택(17)-양복공, 구성회(16)-양화공, 오정호(33)-식당종업원, 박승렬(20)-레코드사, 박명국(18)-양화공, 김상규(19)-전파사, 박영수(18)-도자기공, 안성옥(19)-목공, 김두전(19)-재수생, 정광호(20)-타일공, 염동유(23)-다방, 이성주(18)-차량조수, 김공휴(19)-나전칠기공, 남승우(19)-삿슈공, 도준식(23)-식당종업원, 남영관(18)-농업, 박홍식(21)-목공, 김기광(18)-고3, 박인수(21)-노동, 김여수(20)-용접공, 나일성(18)-가구공, 김태찬(19)-석공, 김행남(16)-노동, 김재귀(16)-고2, 영용섭(19)-나전칠기공, 장승희(19)-양화공.
2001년에 조사된 사망자 162명의 직업분포를 보면 노동자가 가장 많은 35명, 학생이 31명, 무직이 23명, 불명 17명, 사무직 13명, 자영업 12명, 운수업 및 운전기사가 12명, 서비스직 11명, 농업 4명, 공무원과 방위병 각 2명이다. 학생사망자에는 대학생보다 초중고생과 재수생이 더 많다.(박준성의 글 끝).
박준성의 위 분석은 필자의 분석과 대체로 일치한다. 여기에서 박준성은 신원불상자가 17명이라고 했고, 계엄사에는 13명으로 기록돼 있다. 이런 기층 계급의 분노는, 잘 사는 사람들, 평소에 그들에게 억압을 가했던 경찰들에 대한 사회적 불만으로부터 연유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사회적 불만세력들이 5.18폭동에서 가장 먼저 파출소와 경찰을 광적으로 공격하고 불을 질렀다.
필자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빵이지 민주화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차량을 돌진하여 살인을 하고 남대문을 태우고 가옥과 차량에 연쇄적으로 불을 지르는 사회적 낙오자들이 있다. 모든 시위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회적 불만분자들인 것이다. 2008년 봄 광화문 촛불시위에서도 경찰차를 부수고 경찰에 폭력을 행사한 최초의 두 사람은 노숙자와 일용노동자였다. 5.18폭동은 바로 이런 한 많은 불만분자들이 ‘이 더러운 놈의 세상 한 번 뒤집어 보자’는 마음가짐에서 누군가들에 의해 조직화되어 시작한 폭동놀이의 한 판이 광주5.18폭동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에 대한 한을 안고 사회를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안녕질서나 국가의 장래에 대한 개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불만계층에 올바른 시민정신이 자랄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이들에게 민주화에 대한 정치철학이 과연 형성될 수 있는 것일까?
마지막으로 “광주사태” 재판의 제1심에서 사형을 받은 사람은 정동년(37, 복학생), 배용수(34,운전수), 박노정(28,인쇄업), 박남선(26, 트럭운전수), 김종배(26,학생)이었고,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은 윤석루(20,구두공) 허규정(27,학생) 정상용(30,회사원) 하영열(31,공원) 윤재근(28,공원) 서만석(36,상업) 홍남순(67,변호사)였다.
결 론
5.18의 막강한 대변자 박준성은 우리가 챙겨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 주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간 뒤 광주를 지키며 끝까지 싸웠던 이들은 노동자, 농민, 기층 민중이었다.”
‘민주화의 봄’은 광주폭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폭동을 이끌던 지도부가 광주를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도부가 빠져 나간 그 자리에는 광주폭동에 부나비처럼 뛰어들었던 기층민중만 남아 지휘부 없이 오합지졸 상태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5월 27일 새벽에 힘없이 무너졌다는 뜻이다.
박준성은 5월 22일까지 광주에는 지휘부가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5월 22일 밤부터 폭도들이 동력을 잃으면서부터는 폭도를 지휘했던 보이지 않는 지휘부가 광주시에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기운으로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수사기록을 모두 들춰 봐도 그 어마어마했던 광주폭력을 생산해 낸 지휘부가 없다. 당시 정부당국이나 군당국이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은 역사적으로나 수사기술상으로나 매우 낯 부끄러운 일이다.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이 폭동 행위의 질에 따라 사형과 무기징역을 언도받은 사람들의 나이와 직업을 보자. 이들이 과연 그 어마어마한 규모의 폭동과 조직적으로 움직인 폭동을 지휘할만한 사람이었는가? 절대로 아니다.
그렇기에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5월 25일에 형성된 학생대책위에서 상황실장을 맡았던 26세의 골재채취화물자 운전수를 안성기 역으로 분장하여 ‘공수부대 대령 출신’으로 신분 상승시켜 가지고 ‘시민군대장’이라 각색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이 황석영과 윤이상을 데려다 만든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에서는 광주폭동 기간 내내 도망가 있던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을 사실과 다르게 영웅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5.18폭동의 현장 지휘자는 북한특수군이었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5.18광주 폭동에 남한 사람으로 형성된 지휘부는 결코 없었다! 100% 없었다! 그런데 당시 광주5.18폭동을 진압한 전두환 군부세력은 사실도 아닌 유언비어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느니 여학생 젖가슴을 도려냈다느니 등등의 더러운 역사왜곡과 조작의 오명을 몽땅 뒤집어쓰고도 왜 30여년간 침묵을 하고 있는가?
이것이 광주5.18폭동의 역사 미스테리인 것이다! 5.18내란죄 주모자 김대중을 전두환 군부세력은 결국 사면으로 풀어주고 노태우.김영삼정부에서 전두환,노태우가 차례대로 다시 죄인되고 광주 5.18폭동이 민주항쟁으로 미화,각색되는 5.18 역사의 변천과정은 그 역사배경을 다시 한번 밝혀내야 할 책무가 바로 후세 역사가들의 연구과제임이 틀림없다!
-2012.8.25. 시스템 클럽 지만원 박사의 글을 읽고서-
첫댓글 중요한 자료 제방에 접대용으로 업고 갑니다. 애쓰십니다. 은새님

이또한 선거를 앞두고 여당은 건드리지도 못할것 같습니다.
혁명을 쿠테타로...폭동을 민주화 항쟁으로...잘나가는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