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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나
너와 함께 잠기고 싶었다. 미지근한 공기가 우리의 뒷목을 스치고 열병처럼 앓았던 수없는 날들. 딱 그 시절, 우리의 간격에 바다가 깃들건 때에 나는 생각했다. 네 온기가 영원하게 어렴풋이 느껴지지만 한다면 영영 죽어도 좋다고. 영영, 죽어도, 좋다고.
은하수를 밟으면서도 뒤를 돌아보면 네가 있는게 당연했다. 한 박자 느리게 따라붙는 너의 발자욱 내음은 내게 가장 아름다웠던 음악으로 기억된다. 너는 그 음악의 주인. 더 나아가 내 삶의 지배자. 오로지 내 세상은 너로만 구성되어 있었던 열여덟. 활활 타는 멀미를 두 눈으로 관망하며 따라붙는 기억을 훑는다. 아무리 빙 돌아가도 너의 이름 앞에서는 재가 된다. 너에게 속절없이 쓰러진다. 그때도 그랬다. 너만 보면 나는 까무룩 하늘이 회전하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스러운 불친절함. 귓속으로 먼지가 파고든다.
아버지의 담배를 훔친 것은 충동이었다. 붉은 입술 위에서 요란하게 연기를 제공하는 그 모양새가 신기해서. 네 입에서 뿜어져 나온 회색 연기는 나의 뇌까지 희게 만든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이고 입으로 가져다 댔다. 하지만 나는 그 담배가 타들어갈 때 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단지 머릿속만은 끊임없이 네 이름을 되새겼다고. 나는 그 짧은 단어가 내 인생을 세차게 흔들어 줄 이정표가 되었으면 했다.
당시, 네 이름은 큰 이목을 끌기는 했다. 네 아버지는 사람을 죽였다. 아이들은 그것이 네 죄라도 되는 듯 검은 말들을 내뱉었다. 쟤 애비가 그리 악랄한 새끼라며? 덩치 큰 아이의 한마디에 너의 참을성은 한도를 넘어선 듯이 주먹을 들었다. 선생님들이 들어오시고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 대도 너는 한 문장만을 되내었다. 빌어, 씨발새끼야. 빌어. 네 밑에서 피떡이 된 아이가 울며 사과를 토해낼 때 까지 너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나 역시도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하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너는 정학 처분을 받았다. 조금 슬퍼졌다.
하굣길에 통화를 크게 한 것은 절대 너를 의식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네가 있을 거라 상상하지 못하였고 어린 나는 아직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니, 내 생각에는 먼저 아버지 얘기 꺼낸 애 잘못 같은데? 응. 맞은 애.] 친구는 먼저 너의 마음에 비수를 꽂은 그 아이의 편에 서 있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온연히 너의 편이고 싶었다. 듣는 네가 있을 줄은 모르고. [그거 혹시 내 얘기냐?] 삽시간이 눈 앞이 하얘졌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비집고 들어온다. 익숙한 향도 함께. 너였다. 살인자의 아들이 아닌 단지 너. 2학년 6반 17번인 너였다. [어? 왜…….] [뒷씨 까지마, 좆같은 년아.] 험한 욕을 뱉는 네 볼이 붉어 보였다면 나의 온전한 착각일까.
정학을 당한 기간 내내 너는 내 하굣길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 연기를 헤치고 지나갈 때 마다 언뜻 서려있는 네 비누 향이 좋아서 숨을 참지 않았다. 터져나오는 기침은 자의가 아니었다. 너는 가학성을 띄었는지 기침하는 나를 빤히 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담배를 툭 버리고 두 발짝 뒤에서 나를 쫓았다. 내가 집에 들어가면 너는 다시 뒤돌아 너의 갈을 갔다. 증오 비슷한 감정이 스멀스멀 마음을 잠식했다. 동시에 알수없는 멀미도 머리를 헤집었다. 사전적 정의를 내리자면 애증 정도가 좋겠다. 너는 나의.
금요일. 너의 정학이 끝나는 날이었다. 오늘도 네가 그 곳에 앉아 담배를 피울까. 뒷꿈치를 끼워 넣지 않아 질질 끌리는 신발을 끌며 교문을 관통하자 아주 예상치도 못한, 그래 그곳에는 네가 있었다. 담배 냄새 대신 서투른 비누 냄새가 나는 것도, 불만 가득한 눈빛도 네가 맞았다. 멀미가 온 몸을 묶는다. 너는 눈썹을 벅벅 긁고 말한다. [혼자 다니길래 불쌍해서 보러 왔다.] 이빨 사이로 멀미의 잔해인 웃음이 나온다. [그래, 고맙네. 가자] 우리의 거리 사이로 우주가 흘렀다. 가장 싫어하던 담배마저도 너라면 괜찮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갈게.] 눈빛이 나를 옥죄었다. 숨이 턱 막히는 동공을 지녔다. [그래.] 우리는 약속 한 듯 뒤를 돌았다. 나는 나의 집으로, 너는 너의 길으로. 그렇지만 또 약속한 듯이 서로를 돌아 보았다. 전류가 요란하게 튀었다. 이번에는 나의 볼이 붉어졌으리라. 마음이 밤을 태워 어서 내일의 해를 올려 보냈으면 했다. 오롯이 너를 생각한 탓이었다.
학교에 다시 나온 너는 '거의' 그대로였다. 네 친구들과 시덥잖은 농담 따먹기를 하며 수업시간에는 잠을 자지만 문학시간에는 깨어있는. 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너의 시선은 끈덕지게 나를 쫓았다. 귀 끝이 내내 붉은 것을 보았을까. 내심 너의 얼굴도 나로 인해 붉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난 붉은 얼굴 말고, 참는 붉은 얼굴도 말고, 설레여 하는. 수줍어하는 붉음 말이다. 적어도 내가 그랬으니 너도 그렇길 바라는 것은 어린 치기, 더 나아가 사랑. 너와의 순간들을 맞추어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붓질이 적어도 더없이 아름다운. 너와 나로 꽉 찬 그림.
너는 문학시간을 좋아하는 것 처럼 보였다.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문학이었고, 교과서의 시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그 날은 좋아하는 시를 낭송하면 가산점을 준다고 했던 날이었다. 고민을 하다 손을 들었다. 내가 교과서에 문신처럼 새기던 시를 읊기로 한다. 심보선의 '청춘' 이었다.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 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질러 뛰어갔을 때 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 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 때 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 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 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 때 솔직히 말하지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
문장부호가 없이 띄어쓰기 만으로 연결 된 시였다. 이 시를 읽으며 나는 콱 죽어버리고 싶다가도 네 생각이 나 떨려하였다. 때때로는 네가 없이 멀미를 잃은 삶을 연정했고 너의 속눈썹에 가만히 걸터앉아 있기도 했다. 문득 네 쪽을 보았다. 그러자 교실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청춘을 실은 바람이 교실을 메운다. 나는 네 입술에 담배보다는 나의 입술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너의 불온함마저 앓아버린 것이 아닌가. 또 다시 숨이 멎는다.
다시 우리는 하굣길에 덩그러니 놓였다. 여름은 밤을 데우고 분위기 조성 형 별을 몇개 박아 준다. 뭉근히 우리에게 고이는 달빛마저도 우리의 우주를 수축시켜 팔이 닿을 정도로 붙여 놓는다. 여전하게도 내 귀는 붉다. [너도 친구 없지?] 괜히 시빗조로 말을 튼다. 너의 시선이 또 진득하게 나에게 붙는다. 순식간에 후회를 했다. [너보단 많아.] 생각보다는 시덥잖은 말을 뱉고 미소를 건다. 속절없이 또 나는 잠겨 버린다. [너 웃는거 나 처음본다.] [그건 네가 나를 안봐서 그렇고.] 괜히 오늘 너의 시선이 상기되며 심장이 뛴다. [평소에 나 좀 봐라.] 살고 싶었다. 살고 싶지만 내 삶에 마약같은 무언가를 불어넣은 범인이 나를 죽이려 한다. 네 짓이라면 기꺼이. 죽음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자, 그럼.]
예의라는 것은 우리 사이에도 존재했다. 우리 집 앞에서 한번 진하게 눈을 맞추는 것. 그 사이의 공기가 더웠다. 너는 나를 데려다 주면서 많은 얘기를 해 주었다. 아버지에 관한 얘기나, 어렸을 적의 추억. 대부분 상처를 내뱉는 식이었지만 나는 집중해서 들었다. 너의 상처라면 등을 내 줄 의향이 다분했다. 너의 아버지는 너를 때렸단다. 울며 아버지의 바지춤에 매달리다가도 포기하게 됐다고 했다. 그 시절의 너를 막아 서서 아픔을 막아주고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내 심장은 네 것이 되었다. 너와 함께 무엇이든지 헤쳐 보고 싶었다. 어쩔 때엔 너의 어머니의 빈자리가 되주고 싶었고 때론 동반자, 또 때로는 칭얼대는 동생이 되고 싶었다. 우리는 별이 쏟아지는 날에 입을 맞추고 나는 그제야 뛰는 네 심장을 느낀다. 귀에서 피아노 소리가 났다.
네 친구들은 넉살이 좋았다.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는 그들 대화의 주제는 꼭 너였다. 나마저 그들의 화두에 오르는 날은 붉어진 너의 볼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 묘한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괜히 몰래 볼을 붉혔다. 그럼 또 그것을 귀신같이 알고 나를 보며 웃었다. 나를 보는 너의 눈빛이 따스해 진 일이 나는 아주 많이 행복했다. 순간에 영원을 바란다면 지금일 정도로 살고 싶었다. 네 옆에서 살고 싶었다.
유리가 깨지는 것이 쉬운 일이거니와, 우리가 유리인 것은 절대 아니었다. 환경이, 시선이, 우리를 유리로 만들고 있었다. 나와 말동무를 해 주던 친구들은 나를 떠났다. 단지 너를 사랑한단 이유로.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떠날 사람들은 그러려니 해야 했다. 단지 네가 나의 몫까지 괴로워하였다. 친구를 잃을 만큼 내가 소중하냐는 물음에 나는 불같이 화를 냈다. 너는 너의 소중함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살짝씩 너는 피폐해져 갔고 그런 너를 지키려 나는 몇번씩이나 혀를 씹었다.
마침내 네가 유리로 변했던 날은 분명 유독 평화로웠다. 네 손을 잡고 학교에 가서 시덥잖은 사랑을 논하고, 경멸하는 눈빛에 굴하지 않으며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 함께 놀게 된 너의 친구들에게서부터 너의 중학생 시절 얘기를 듣고 깔깔대기도 하면서 행복해했다. 악마가 스멀스멀 우리의 옷자락을 잡는 것도 모른 채. 너와 팔짱을 끼고 집으로 향할 때 까지만 해도 너의 아름다움이 해양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곳에서 끝없이 잠기고 말이다. [내일도 오늘처럼 웃자.] [모레는 내일처럼 웃자, 그럼] 웃으며 너를 마주했다. 눈의 전류만으로도 너의 체온이 느껴졌다.
다음 날, 너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학교는 너에 대한 가십으로 검게 물들었다. 네 아버지의 출소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마 너의 집으로 편지가 갔거나 언론에 보도됐으리라. 도저히 쓰레기 소문을 견디지 못해 교문을 나섰다. 너는 없었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못했다. 네가 있는 곳으로 무작정 달렸다. 우리,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기도를 외듯 계속 읊조렸다. 행복하자, 우리.
뻔하게도 너는 문을 열지 않았다. 죄 없는 문을 발로 차며 마음을 짓이겼다. [제발, 웃자며. 어제처럼.] 눈물이 네가 털던 담뱃재 처럼 쌓여갔다. 강경한 네가 증오스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그리웠다. 열 여덟. 실상 우리는 모든것을 지기에는 어렸다. 검은 입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쉽게 떠들었다. 나는 그제야 내 숨을 멎게하는 것이 네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문 사이로 느껴지는 네 상처에 연고를 바르며 도리어 죽어갔다. 우리는 아주 깊고 검은 바다에 함께 잠기는 것이다. 왕자님 없이, 둘 다 인어공주가 되어 헛된 물방울로 변하는.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너의 집 앞을 찾아갔다. 우리가 걸었던 길들을 맨발로 느끼기도 했다. 어리석고 겁쟁이라며 네 욕도 잔뜩 해주었다. 아픈것은 네가 아닌 나의 마음이었다. 네가 문을 연 것은 근 한달만의 일이었다.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너를 노려보았다. [내가 미안해.] 도저히 서있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너의 앞에 주저앉아 울었다. [개새끼…….] 살이 내린 얼굴로 나의 눈물을 닦는 네 목을 껴안았다. [이제 우리 어제처럼 웃는거지?] 너는 끝까지 [미안해.] 집 앞 가로등이 수명을 다했다.
다음 날 너는 집에서 목을 맸다. 예상 가능한 결과였기에 나 역시도 죽으려 했다. 네가 혼자 가져가려 했던 죽은 심장. 그것에 숨을 불어넣은 것은 나였다. 환하게 웃는 너를 검은 곳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모순이 들끓었다. 견디기 힘들었다. 내 눈꺼풀에 네가 앉아있다. 진짜 너 맞아? 그럼 내가 나지, 누구겠냐. 달콤하지만 불친절한 어투로 멀미를 일으킨다. 나 죽을까. 그 전에 나한테 죽어. 내 삶을 보안하는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빨간 불이 눈 앞을 스쳤다. 이 때 건너는 것이다. 완벽하게.
너의 장례식 날에 너의 아버지는 출소를 했다. 신문기사는 너와 너의 아버지의 이야기로 자극적인 신파극을 엮어 냈고 나는 죽어가는 피해자로 남았다. 사랑은 죄악이며 순간은 실수였다. 그 앞의 나는 깃털보다 나약하며, 모래보다 작은. 그러나 마음은 태양에 닿게끔 불어난 사람이었다. 기억에 매달려 자퇴를 결심했다. 그 순간에도 해는 꿋꿋이 떴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잔인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여전히 너에게 속해있다. 여름이 오면 죽으려 하고 네 얼굴이 생각나는 날에는 숨 쉬기가 어려우나 나는 살아있다. 너의 삶을 기억하며 현존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그것을 자처해 고통을 담는다. 여전히 너는 처음처럼 애증으로 다가온다. 이제서야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 증오는 사랑을 기반한 감정이라는 것을.
-여름 오니까 그냥 슬픈 첫사랑 얘기가 쓰고 싶어지네요 걸걸
첫댓글 헐..,완전 취격 와진심ㅜ 잘읽었어ㅜ 진심 너무 글하나하나 너무이쁜거같아ㅜ
이번에도 좋은 글 써줬구나 매번 좋은글 써줘서 고마워! 잘 읽고 가 다음에도 봤으면 좋겠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