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갔다.
바다로 들어서는 입구.
이미 추수가 끝난, 바람만 가득한 들판사이로
바다로 향하는 길이 열려있었다.
길옆엔 계절을 잃은듯한 코스모스 한 무더기가
빈들과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다.
지난 여름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내어 한바탕
신명나는 마당놀이를 펼쳤던 바다는 그 격정의 숨결을
삭이고 있는 듯 물결만 잔잔히 찰싹거리고 있었다.
고막을 찢는 듯한 째즈와 휘황찬란한 조명이 꺼지고
조용한 애수의 부르스가 흐르는 가을이라는 무대!
모래밭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유유히 떠 있는 흰 구름 한 덩이,
지금 내 곁에 아무도 없지만
내 어깨에 쏟아지는 햇살만으로
나의 기쁨은 충만해 있고
저 찰싹거리는 물소리만으로
나는 아주 기분 좋은
음악감상실에 앉아 있는 행복을 느낀다.
바다로 오는 차 속 차창 밖으로
끊임없이 번져오는 가을 풍경을 만났다.
구절초가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작은 산허리.
억새꽃이 구름처럼 나부끼고 있던 밭 언덕.
이 가을 유독 연두와 초록을 간직하고 잇는 무우와 배추 밭.
오직 누런빛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산등성이..
동네이름이 "감골"일 것 같은,
한 동네가 가득하도록 감들이
황금처럼 익어 가던 어느 마을.
나의 애마는 가을 풍경을
골고루 보여주며 2시간여를 달려와
여기,
이 세상 가장 적절한 구도로 배치된
풍경화 한 폭 속에 나를 던져 놓았다.
어디서 불어오는가?
가만가만 나의 볼을 쓰다듬고
머리칼을 날리는 이 바람은
그리고 또 가슴에 안겨오는 시원한 바람.
바다에도 이런 가을 낭만이 있었던가.
오늘 이 바다에 나 홀로 왔어도
나는 조금도 외롭지 않다.
가을엔 같이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은 계절이 아닌가
바다는 들이나 산처럼
색깔을 달리하여 계절을 구분 짓지 않는다.
사계마다 연두, 초록, 갈색, 회색의
서로 다른 색조로서 분위기를
바꿔 가는 것이 산이라면,
바다는 한사람의 솜씨로
풀어놓은 물감처럼 그 빛깔을 달리 하지 않는다.
그래도 더 빨리 느껴지는 바다의 계절.
지상 위에 내려앉은 가을을 눈으로 발견한다면
바다의 변화는 귀로 감지한다.
바다에 오면 열리는 귀.
바다의 소리를 듣는 귀.
저 편 섬에서 건너온 바람이 다시 가슴에 닿는다.
바람에 묻어 함께 달려오는 얼굴들....
가을 바다는
잊혀진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가버린 사람을 그립게 한다.
저 섬에 가고 싶다.
잊혀진 사람을 찾아,
가버린 사람을 찾아,
저 섬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