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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되시는분은 글이 길어도 차분하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글은 효창원에 대한 설명하는글이며 또한 안중근의사님의 추모식을 알리는글입니다]
지난글
1)- 효창원의 유래와 그역사적 의미 그리고 수난사
2)- 민족의 성지-효창원의 통곡의 수난사 - 자세한 내용
3)- 효창원속의 임정주요인물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
4)- 삼의사의 묘 와 안중근의사의 실묘
4) 삼의사의 묘 와 안중근의사의 실묘
< 효창원 삼의사 묘역 과 안중근의사 실묘>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 실묘,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 세 사람을 죽으라고 내보낸 것은 바로 나다. 그러나 그 세 사람을 보낸 나만이 살아있으면서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3열사에 대하여 부끄럽기 한량없고 회고를 금할 수 없다. 조국을 위하여 심령을 바치고 지하에 잠드신 선열과 충의지사가 어찌 3열사뿐이랴만 대담무쌍히 왜적의 심장을 향하여 화살을 던져 조선민족의 불멸의 독립혼을 중외에 떨친 것은 아마 이 세 분이 으뜸이리라. 나는 지금 유골을 모심에 있어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을 억제할 수 없으며 그들 지하에 불귀의 손이 된 수만 수천의 동지들의 사심 없는 애국의 지성을 본받아 하루바삐 통일된 우리 정부수립이 실현되기 위하여 3천만과 같이 분골쇄신 노력하겠다.
《백범어록》에서 (1946.6.15 부산에서 있었던 유골봉환식을 전후해서)
안중근 의사 (1879.7.16∼1910.3.26)
황해도 신천信川 사람이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친을 따라 총을 들고 도내에서 동학혁명을 빙자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무리들의 토벌에 나서기도 하였다. 17세 되던 1895년에는 부친을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고 프랑스인 홍신부와 함께 선교에 나서기도 하였다. 27세 되던 광무 9년1905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강구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집을 평안도의 진남포로 옮기고 재산을 기울여 삼흥三興학교․돈의敦義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국권이 식민지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李範允, 김두성金斗星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융희 2년1908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 회령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다시 노령露領의 블라디보스토크․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을 만나 구국의 길을 강구하고, 1909년 봄에는 김기열金基烈․백낙길白樂吉․우덕순禹德淳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여 일사보국을 맹세하고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였다.
1909년 9월 노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등을 처단하기로 하였다. 일찍부터 뜻을 같이하던 우덕순 을 만나 함께 거사하기로 한 다음 권총을 한 개씩 준비하였다. 그리고 하얼빈 방면으로 향해서 가는 도중 다시 유동하劉東夏와 조도선曺道先 두 사람을 만나 함께 참가하게 되었으며, 거사장소를 남청南淸철도의 교환점인 채가구蔡家溝와 하얼빈의 두 곳으로 정하고 우덕순 은 채가구에서, 그는 하얼빈에서 기다리다가 엄습하기로 하였다.
10월 26일 9시경 이토우 히로부미가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의 재정대신 꼬꼬흐체프와 함께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그는 권총을 빼들고 이토우 히로부미를 향하여 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그는 다시 이등의 뒤를 따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총을 쏘아 일본 총영사 천상준언川上俊彦, 비서관 삼태이랑森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전중청태랑田中淸太郞 등을 차례로 거꾸러뜨렸다.
일본 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대들자 하늘을 향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거사의 성공을 알리는 개가凱歌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본국 동포들의 그 큰 기쁨이야 이루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또한 청일전쟁 이래로 일본제국주의의 위협에 떨고 있던 중국의 국민들에게도 큰 기쁨의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군대해산이 있은 후 중국 상해로 가서 조국의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예관睨신규식申奎植의 다음과 같은 시 또한 당시 상황의 일면을 말해주는 것이다.
白日靑天霹靂聲 백일청천벽력성 푸른 하늘 대낮에 벽력소리 진동하니
大州諸子魂膽驚 대주제자혼담경 6대주大州의 많은 사람들 가슴이 뛰놀았다.
英雄一怒奸雄斃 영웅일노간웅폐 영웅 한번 성내니 간웅奸雄이 거꾸러졌네.
獨立三呼祖國生 독립삼호조국생 독립만세 세 번 부르니 우리조국 살았다.
1909년 11월 그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일제 관리들은 위세를 부리며 중죄인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저들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통렬히 공박하여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일제 관리 또한 그의 의로운 기개에 감복하여 특별히 우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판정에서는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하여 적 이토우 히로부미를 죽였으니 이런 법정에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하여 재판을 거부하기도 하였으며, 재판장의 신문에 대하여 이토우 히로부미는 누차에 걸쳐 대한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양국간의 조약과 서명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위협하여 독립을 빼앗으니 이것은 세계 인도의 적이요, 우리 대한 신민臣民 만대의 원수인즉 죽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여 일제를 당황하게 하였다.
그는 또 이토우 히로부미가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불법무도한 일을 제 마음대로 하여 동양평화를 교란한 사실 등 15개조의 죄상을 들어 서면으로 저들에게 제출하여 다시금 이토우 히로부미를 논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토우 히로부미의 처단은 목적의 일부를 달성한 것이요, 정작 큰 소원은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임을 주장하였다.
1910년 2월 7일 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의 공판을 받았던 그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하였는데 순국 직전에 아우 정근定根․공근恭根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고 한다.
내 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國權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조국이 광복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남북이 갈라진 채 그의 유언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오직 부끄러울 따름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중근의사님 묘는
예전 2010년 3월 25일 이전까지는 허묘(虛墓;假墓)로 모셔져왔으나
2010년 3월 26일이 안중근의사님 서거100년이 되는 해가 되므로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와 각민족단체들이 함께 안중근의사님의 영을 불러오는 영신제을 하였다. 이로서, 안중근의사님의 유해을 찿지 못해 안장을 못했지만 의사님의 영혼을 모시는 영신제을 하였기에 실묘(實墓)로 의미을 갖게 되었다.
서울 사람이다.
10살에 용산의 사립 문창학교에 입학하였으며 4년 후 졸업하여, 일본인 경영의 제과점 종업원으로 있다가 19세 때 남만철도회사南滿鐵道會社 용산정거장에 운전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1931년 1월 중순,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은 일본말 섞인 한국말을 하며 임시정부를 일제가 부르던 식으로 가정부假政府라고 하며 행동하는 그를 수상히 여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구 는 일단 사무원인 김동우 에게 그가 묶을 여관을 잡아주라고 일렀다.
며칠 후, 그는 직원들과 함께 술과 국수를 사다가 같이 먹으면서 취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누게 되었다.
˝당신들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
˝일개 문무관文武官도 죽이지 쉽지 않은데, 일왕을 죽이기가 어디 쉽겠소?˝
˝내가 작년 동경에서 일왕이 능행陵幸한다고 행인을 엎드리라고 하기에 엎드려서 생각하기를 내게 지금 폭탄이 있다면 쉽게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의 이 말은 당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심하던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얼마 뒤 그는 김구 를 만나 그의 진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 김구 단장을 감복시킨 것은 그의 다음과 같은 인생관이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뜨거운 동지애로 의기투합하였고, 그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는 김구 와 약 일년의 준비기간을 두고 자금과 폭탄은 김구 가 준비하기로 하였으며, 자신은 준비기간 동안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경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김구 를 만나 거사를 계획․준비하였다..
1931년 12월 김구 는 그와 약속한 대로 거사 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동안 미주 등 해외 동포들이 보내준 자금으로 폭탄도 준비하였다. 폭탄은 두 개였는데, 한 개는 김홍일을 시켜 상해 병공창에서, 또 한 개는 김현을 하남성 유치劉峙 장군에게 보내어 구해온 것이다.
드디어 1931년 12월 13일 그는 김구 가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함으로써 결의를 다졌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首魁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 이튿날 그의 장거를 위한 송별회가 있었으며 기념촬영이 있었다. 이때 김구 는 비장감에 젖어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는 ‘제가 영원한 쾌락을 얻으러 가는 길이니 우리 기쁜 낯으로 사진을 찍읍시다´라고 김구 를 위로하였다.
1931년 12월 17일 김구 단장의 전송을 받으면서 목하창장木下昌藏이라는 일본이름으로 가장하여 동경으로 출발하였다. 동경에 도착한 그는 여관에 묵으면서 일왕의 일정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러던 중, 12월 말경 그는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裕仁가 동경 교외에 있는 대대목大大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입수하여 그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상해의 김구 단장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전보를 보내어 거사일을 알렸다.
1932년 1월 8일 그는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행렬이 나타나자, 때를 놓치지 않고 군중 속에서 몸을 일으켜 일왕을 향하여 수류탄을 투척하였으나,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宮內大臣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 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 필 만을 거꾸러뜨리고 말았다.
그는 현장에서 피체되었고 같은 해 9월 30일 동경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비록 그가 일왕을 폭살시키는데 실패는 하였지만, 그의 장거는 1930년대 한국독립운동사를 장식하는 의열투쟁의 선봉이었다. 또한 그의 의거는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전선에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보산萬寶山 사건 이래 한․중 감정대립도 씻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그의 장거가 있자 1932년 1월 9일 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동경발 기사로 이 장거를 즉각 보도하면서, “일왕이 불행히 맞지 않았다´라는 표현을 하며 그들도 일왕이 폭살되지 않았음을 매우 애석히 여겼다. 그리고 그의 장거가 갖는 보다 중요한 의미는,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 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함으로써 한국독립운동의 강인성과 한국민의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윤봉길 의사 (1908.6.21∼1932.12.19)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인 1919년 3․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교육을 배척하여 학교를 자퇴하고, 사설서당인 오치서숙烏致書塾에 들어가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에게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학업은 일취월장하였고 특히 시詩에는 발군이었다. 16세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한시를 보아도 그의 시재詩才는 짐작할 수 있다.
부후성명사기명 不朽聲名士氣明 길이 남길 그 이름 선비의 기개 밝고
사기명명만고청 士氣明明萬古淸 밝고 밝은 그 기개 만고에 빛나리.
만고청심도재학 萬古淸心都在學 만고에 빛나는 마음 학문에서 우러나느니
도재학행부일성 都在學行不一聲 부지런히 학행 쌓아 그 명성 스러지지 않으리.
그는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는 동안 1920년대를 풍미했던 새 방향의 민족주의 운동에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그는 당시 민족운동의 기조적인 방향을 잘 제시하여 주었던 ≪개벽≫開闢 등의 잡지와 ≪동아일보≫ 등의 신문을 읽고 나름대로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7년 그는 구매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의 경제자립을 추구하였으며 독서회를 통해서 문맹퇴치에 힘썼다. 또한 1928년 부흥야학원富興夜學院을 설립하여 농민의 자녀를 교육시켰고, 월례강연회 등을 열어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지어 허례허식을 지양하는 교육정신과 주체적 민족정신의 확립과 근검․절약 그리고 근로정신에 대한 그의 의식을 표출하였고,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1929년에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월진회를 통해서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그리고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등 농촌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으나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전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한 그는 한인 동포 실업인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중국종품공사中國騣品公司에 취직하여 말총모자 등을 만드는 직공으로 근무하며 한인공우친목회韓人工友親睦會를 조직해서 회장의 일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2년 이른 봄부터 그는 상해의 홍구虹口 일대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일본군관계의 정보를 탐지하던 중, 박진의 소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한인교포단장인 백범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이 당시 김구 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 의혈투쟁을 계획하고, 그 첫 결실로서 1932년 1월 8일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으로 하여금 왜왕倭王을 폭사시키려 하였으나 불행히 성공치 못하였다. 하지만 이봉창 의 의거는 중국내의 동포들과 독립운동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투쟁에 대한 열기가 식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게 되었다. 또한 윤봉길 에게는 일제에 대해 새로운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김구를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론하고 의열투쟁의 기회를 열망하는 상태에서 1932년 4월 29일 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해사변으로 상해에 진주한 일본군은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며, 상해에 있는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 그리고 입장권만을 휴대하고 참가하라는 보도를 ≪상해일일신문≫에 보도하였다.
그는 이를 살신구국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였다. 그 이유는 그날의 전승경축식에는 상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軍·정政 수뇌들이 그대로 이동하여 식장에 모일 것이며, 만약 그 원흉들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다면 이봉창 의 동경의거보다 훨씬 더 큰 용기와 자긍심을 동포들에게 줄 수가 있을뿐더러, 중국군이 막대한 희생을 내고도 이기지 못하였던 일본 침략군의 수뇌부를 폭파시키는 전과를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신구국의 결심을 한 그는 의거 4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단원 자격으로 김구 단장 앞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 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4월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고, 특히 28일에는 오후 2시 부터 5시 까지 그곳에 머물러 준비하는 축하식장의 팻말을 보고 도륙의 대상인 일본군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해군 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의 설자리와 그 주위에 모일 인물들까지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4월 29일 일찍 한 교포 집에서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어깨에 메고 손에 들었다. 이 준비된 폭탄은 김구 단장의 요청으로 중국 상해 병공창兵工廠 창장 송식표宋式驫가 기사 왕백수王伯修를 시켜 비밀리에 제조한 것으로, 병공창의 병기주임이었던 김홍일金弘壹의 주선으로 김구 에서 윤봉길로 전달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홍구공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새 시계를 김구 단장의 헌 것과 바꾸어 갖고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의 나머지를 김구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오전 7시 50분경, 그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투척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중앙의 식단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에는 일본 관민이 정연히 도열하였고, 그 앞에 일본 학생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 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삼중으로 경계하고 그 뒤엔 일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식단 위에는 표적물인 시라가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이 중앙에 자리 잡았고, 그 좌우로 일제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貞次,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倉松․灌, 민단 간부 도모노友野盛) 등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참석해 있었다. 그는 미리 보아두었던 뒤편의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오전 11시 20분경 기념식의 첫 순서인 관병식觀兵式을 끝내고 이어서 두 번째 순서인 축하식 순으로 접어들어 일본 국가가 제창되었고 그것이 거의 끝날 무렵이 되었다. 드디어 11시 40분경 운명의 시각이 되자 그는 도시락으로 된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그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 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쓰의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하여 일본 육군대장 시라가와는 전신에 24개 처의 파편을 맞아 신음하다 5월 26일 사망하였고, 제9사단장 육군총장 우에다는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해군총사령관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는 실명하였다. 또한 주중공사 시게미쓰는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고, 거류민단장이며 상해사변의 민간 원흉인 카와바다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총영사 무라이와 민단 간부인 도모노도 각기 중상을 입었다.
그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피체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그해 5월 25일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8일 오오사카大阪 육군 위수衛戍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교외에 있던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그의 순국은 그의 뜻대로 한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민족의 마음속에 살신구국의 높은 정신을 영원히 기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유시遺詩에서 의거 당시 그의 살신구국의 의혈정신과 일제치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 의사義士의 소원을 엿볼 수가 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고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백정기 의사 (1896∼1934.6.5)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과 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 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 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閔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 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 중국, 일본,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본공사駐中日本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 명을 상해 홍구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피체되었다. 그는 일본 장기법원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폐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효창원(효창공원)의 위치와 효창원의 각주요 묘역과 동상 그리고 시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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