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출발 ☞ 성장배경 장준하 선생은 1918년 8월 27일 평북 의주 땅에서 아버지의 장석인씨와 어머니 김경문 여사 사이의 1남1녀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평북 의주라면 압록강의 바람결과 물살이 유난히 세차고, 뫼뿌리가 우람하게 뻗쳤으며, 땅이 기름진 곳으로 예부터 힘센 장사와 두뇌가 명석한 존재가 많이 배출된 곳이다. 바람찬 압록강 너머는 곧 관활한 대지 만주 벌판이라 이곳 사람들의 입가엔 만주에 대한 이야기가 잦았다. 멀리는 고구려와 발해의 군사가 나는 듯 말을 달려 대지를 석권하던 이야기며, 가까이는 맹호같은 우리 독립군이 수없이 드나들며 왜놈 병정을 쳐부순다는 이야기. 어린 장준하는 그가 자랄 적에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한 탓으로 국민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여 낮에는 밭에 나가 어른들 사이에서 농사일을 거들고, 밤에는 노인들로부터 만주의 넓은 들판을 주름잡던 고구려와 발해 군사의 무용담과 우리 독립군의 용맹스런 이야기를 듣는 것을 통하여 세상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생이 열 세 살 되던 해에 완고한 성품을 가진 선생의 아버지는 왠일인지 마음을 돌려 삭주 대관국민학교에 5학년으로 껑충 뛰어 입학을 시켰다. 국민학교에 입학한 어린 장준하는 난생 처음으로 책가방을 들고 학교문을 들어섰으나 곤란한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학교 교율이 몸에 맞지 않은 데다가 단번에 5학년 교과과정을 대하게 되니 그야말로 까막눈이어서 학우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어린 장준하는 어른들한테 들은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독립군의 이야기를 신나게 떠벌려 뒤진 학과에서 잃은 체면을 가려보려 했으나 애들한테는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여기서 어린 장준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 밑에서 베풀어지는 왜식교육의 반민족성을 직감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는지 모를 일이다. 비록 학교는 늦게 들어갔으나, 단 1년간의 노력으로 수석 졸업을 차지한 어린 장준하는 그해(1932)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곧 선친 신성중학교로 전학, 1937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선생은 중학과정에서 좋은 성적은 내지 못했다. 선생이 중학교에 다닐 시기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착취가 점점 심해져 참다 못해 들고 일어난 원산 노동자의 파업(1929~31)에 뒤이어 전국 도처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격화되고, 농민의 소작 쟁의의 열도와 회수가 점증할 뿐만아니라, 한만 국경지대는 완전히 독립군의 싸움터로 변했고, 상해 임시정부를 장악한 백범의 폭력 유격전이 만주와 중국의 왜놈 병영과 천황이 사는 동경에까지 번지는등 독립투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선생은 왜놈들이 주는 책으로 왜놈들의 일정한 식민지 교육정책에 순응하는 교육만 받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에 선생은 학교에서 왜식교육을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결행하다가 여러차례 학교측의 징계와 퇴학처분의 위험을 겪었다. 또 방학 때에는 농촌지대를 두루 살피며 무엇이 농민문제의 핵심인가를 따져보고, 또 틈만 있으면 책을 읽었다. 1937년 선생이 선생이 졸업할 무력 어느 잡지에 실린 중국의 문호 노신(魯迅)의 평론 한 편을 등사하여 돌려 읽다가 들켜 호된 고욕을 치른 것이 인연이 되어, 선생은 늘 이 세상에서 최고의 문호는 노신이라고 격찬하며 조국의 피흘리는 현실로 보아 어느 땐가 반드시 노신을 능가할 민족적 예술인이 나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 선생은 약 3년간 국민학교에서 선생 노릇을 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도 있고, 또 뜻한 바 있어 일본신학교에 유학을 간다는 명분으로 적지 일본에 뛰어들었다(1940). 여기서 청년 장준하는 두 가지 내면의 갈등을 겪었다고 전한다. 첫째, 선생은 압록강 바람결이 세찬 농촌, 그것도 왜놈들이 알맹이는 다 빼앗아 먹고 쭉정이만 남은 식민지 농촌에서 허덕이는 우리 농민의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40년대 초 일본 동경의 거리는 우리 농촌의 참상과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전쟁 준비에 부산했다. 바로 이런 때 식민지의 청년으로서 식민지 본국에 들어가 학문한다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점. 둘째, 1940년 4월 일본은 이미 만주와 중국을 사실상 석권하고 있었고, 다음해, 12월에는 미국의 해군기지인 진주만에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노도와 같이 태평양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며 잠정적인 승전을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파국으로 접어든 일제의 발악이었다. 여기서 선생은 ‘내가 갈 길, 아니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태평양과 대륙에서 날아드는 승전보와 패보(敗報), 전쟁의 광풍에 휘말리는 동경 거리를 헤메는 식민지 청년 장준하는 오히려 이 부산한 동경 거리를 단 한방에 깨뜨려야 할 마지막 남은 복병의 존재로서의 자기를 확인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 일제 학도병에 끌려가다 그러나 이러한 선생의 뜻과 달리 1944년 1월 일제 학도병에 끌려가게 되었다. 1944년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지 4년째 되던 해로서 ‘태평양의 적진영은 뿌리까지 뽑혀 찍소리 못하누나’라는 군가가 말해 주듯, 전쟁 초기에 태평양상에서 왜군이 차지했던 섬들을 하나 둘씩 도로 빼앗기고, 미․영 연합군의 일본 본토 상륙작전이 눈앞에 다가온 시기였다. 원래 국내 부존자원의 결핍이라는 제국주의 성립기반의 결정적 약점을 안고 출발한 일제는 이 최후 결전의 시기를 앞에 두고 식민지 한국민에 대한 가장 야수적인 착취와 혹사로써 제국주의의 약번을 보완하며 침략전쟁을 끝까지 끌고가려고 하였다. 우선 우리 땅에 있는 지하자원은 모조리 가져갔으며, 심지어 솔방울, 관솔까지 거두어 갔고, 금(金)은 1년에 30톤을 캐간 적이 있었다. 그뿐인가. 쌀을 비롯한 낟알은 일제 말기에 전생산량의 7할 이상을 공출하여 갔고, 소는 1년에 최고 250만 마리까지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한 마리도 우리가 잡아먹을 수 없게 만들고, 모두 전쟁물자에 충당하는 바람에 우리는 콩비지, 밀기울, 심지어 솔가지를 갉아먹고 살았다. 수산물도 죄 빼앗겨 그 흔한 오징어 한 마리 먹은 사람이 없었다. 이 바람에 영양부족과 질병에 쓰러지는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실례로 국민학교에서 하루걸이로 앓는 아린이가 한 반의 3분의 2가 넘는 참상이었다. 일제는 이 비참한 민족 기근의 위기도 아랑곳없이 남녀노소를 전시보국을 위한 무료 노력봉사에 동원하여 매일같이 혹사시켰다. 따라서 장년은 징용에, 청년은 징병에, 그리고 이 땅의 꽃다운 아가씨는 왜병의 성의 노예인 정신대 또는 위안부로 끌려갔다. 이렇게 우리 민족을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명분은 왜놈 천황폐하를 위한 충효, 즉 일본제국주의를 위한 내선일체, 총화단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제의 착취에 대한 우리민족의 인간적 민족적 반항을 파괴하려는 술책이었다. 일제는 이 범죄적 폭거를 효과적으로 이끌기 위하여 우리말, 우리글을 못쓰게 했다. 우리문화,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성과 이름까지 고치게 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식민지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민족의 말살정책이었다. 이 비통한 현실을 그냥 놓아둔 채 일제의 침략전쟁의 희생물이 되어야할 운명에 놓인 청년 장준하는 괴로웠다. 그러나 더욱 괴로운 사실은 이렇게 피흘리는 조국의 현실을 외면한 채 원수 왜놈 천황이 강요하는 충효와 총화단결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만행을 보고 듣는 일이었다. 지식인 주요한(朱耀翰)은 QU가 QK지도록 농사를 지었으되, 먹을 낟알을 다 빼앗기고 명태마냥 말라 비틀어져 가는 우리 농촌의 참상을 자기 눈으로 똑똑이 보고 있으면서도.
천황 폐하를 위해서 아침 서리를 밟으며 가는 그 길을 귀하고 기쁘고 슬프기조차 하더라.(임종국,『친일문학론』, 378쪽)
고 하였고, 시인 모윤숙(毛允淑)은 우리들이 조국을 무참히 짓밟고 이어 태평양상에 미친 칼날을 번득이는 일제의 승전의 소리를 듣자,
7월 15일 밤 대 아시아의 거화(巨火), 대화혼(大和魂)의 칼이 번뜩이자 사슬은 끊기고 네 몸은 한번에 풀려 나왔다. 처녀야! 소남도(昭南島)의 처녀야!(같은 책)
라는 명시(?)를 써 일본 군대에 함락된 소남도의 처녀를 마치 해방군에 의해 사슬이 끙ㅎ겨 풀려난 것처럼 읊었다.또 김팔봉(金八峰)은,
가라! 아들아 군기(軍旗) 아래로! 신국(神國) 일본의 황민(皇民)이 되었거든 동아(東亞) 10억의 전위 (前衛)가 아니냐 철필을 던지고 총검을 잡아라 학문 이상의 학문이 기다린다 길은 한 가지, 가라! 아들아, 군기 아래로 활발히 가라! (같은 책, 243쪽)
고 외쳐 우리의 꽃다운 청춘남여를 일제 침략전쟁의 도살장으로 미친개 끌 듯이 몰고가는 데 앞장을 섰다. 우리들의 사람하는 겨레는 주림과 탄압에 허덕이고, 이름깨나 있는 지식인은 일제 총통지의 앞잡이가 되는 이 참담한 현실을 보고도 황소처럼 끌려가야만 했던 청년 장준하. 더구나 그날은 선생이 지금의 미망인 김희숙 여사와 결혼한 지 꼭 1주째 되는 날이었다. 불과 1주일밖에 생명을 같이하지 않은 젊은 아내와 눈물의 작별을 하지 않으면 안될 선생은 남편으로서 얼굴을 들어 할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다. 오직 ‘돌베개’라는 암호 한 마디를 귓속말로 일러주고 떠나야만 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만약 진중에서 보낸 편지 속에 ‘돌베개’라는 말이 쒸어 있거든 왜군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줄 알라는 암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아는 사람은 오빅 젊은 아내 김희숙 여사 뿐이었다. 입영하는 그날은 숱한 입영자의 가족들이 붐볐고, 입영자들은 너나없이 ‘천황폐하 만세’ 혹은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쓴 띠를 어깨에 두르고 있었고, 또 어떤 자는 흥분해서 날뒤었다. 그러나 장준한 선생만은 띠도 아니 두르고 소지품도 없이 그냥 맨몸으로 나와서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것이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서 보통의 간덩이갖고는 어림도 없는 일제에의 반항의 표시였다.
☞ 왜군 탈출, 독립군으로 ‘돌베게’라는 암호 하나를 최후의 선물로 받고 서있는 파리한 아내를 뒤에두고 왜병에 끌려간 식민지청년 장준하는 평양에 있는 42부대에 편입되었다. 그곳의 생활은 고된 훈련의 연속과 마굿간을 맨손으로 닦는 일이었다. 이 고된 일로 선생은 손가락이 까닭없이 붓고 쑤셔 왜놈 군의관으로부터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마취제가 없다는 핑계로 선생이 생손을 그냥 째게 되었을 때 “왜놈 군의관 앞에서 어찌 조선의 청년된 자로서 아프다는 내색을 하랴”고 꾹 참아 군의관을 놀라게 하는 둥, 선생의 왜군 생활은 왜군에의 적개심을 다지는 치가 떨리는 나날이었다. 42부대에 배속된 지 두달이 패 못되어 선생은 중국 서주로 끌려갔다. 선생은 우리 독립군이 활개를 치는 중국 투입된 것이 은근히 기쁘기도 하였으나, 관동군과 남주군이 판을 치는 중국 천지의 병영에는 이상한 기류가 돌고 있음을 느꼈다. 관동군으로 말하면 일찍이 중국의 신해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개입한 대륙침략의 주축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 배속된 한국인 출신의 군인들은 마치 자기자신이 중국 민족에 대한 지배자인 것같은 착각을 갖고 왜놈 군대의 우등생이 되려고 갖은 충성을 다 바쳐, 혹은 독립군 토벌의 선봉으로, 혹은 장교가 되고자 왜놈 군관학교와 사관학교를 지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선생은 ‘피흘리는 한․중 양민족의 참상을 보니 못한다면 결국 그의 갈 길은 무엇이겠는가, 이는 두말할 여지도 없이 민족 반역자의 길이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죽음을 갇오하고 왜군진영을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1944년 7월, 7일. 이 날은 광활한 대지에 나의 운명을 맡기던 날이다. 중경을 찾아가는 대륙횡단을 위해 중국 벌판의 황토 속으로 그 뜨거운 지열과 엄청난 비바람과 매서운 눈보라의 길 6천리를 헤매기 시작한 날이다. 풍전등화의 촛불처럼 나의 의지에 불을 붙이고 나의 신념으로 기름 부어 나의 길을 찾아 떠난 날이다.
이 글은 장준하 선생이 그의 수기『돌베개』에서 왜군을 탈출한 그날의 감격을 적어 놓은 것이다. 선생의 말씀대로 “나의 의지에 불을 붙이고 나의 신념으로 기름 부어 나의 길을 찾아 떠난” 그 길이란 대체 어떤 일이었을까? 왜놈들의 병영을 도망쳐 우리 독립군과 합세하려는 그 길이었다. 선생은 일단 탈출에 성공하자 고행에 있는 아네에게 글을 띄워 보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륙에 발을 옮기며 내가 벨 ‘들베개’를 찾았노라”고. 어느 아내가 이 글을 받아보고 울지 않았으랴. 이것은 잃었던 남편을 다시 찾은 기쁨의 눈물이요, 따라서 제아무리 왜놈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할지라도 언젠가는 그 하늘같은 남편이 돌베개 대신에 ‘나라’를 선물로 찾아가지고 돌아올 것이라는 확고한 신뢰의 눈물이었다. 슬기로운 우리의 아낙들은 이 모양으로 울고 웃고 넓적다리를 꼬집으며 캄캄한 일제하의 밤을 극복해 갔던 것이다.
☞ 거대한 백범의 품으로 ‘돌베개’라는 암호를 전해 받은 아내가 즐거움에 들떠 있을 무렵, 선생은 넓은 중국 천지 6천 리를 헤매어야만 했다. 왜군의 추격과 포위를 맨손으로 뚫어야 했고, 때로는 중국 국민군에게 포로가 되는 신세도 감수해야 했다. 말과 풍속이 다른 땅, 모진 비바람과 굶주림, 그리고 질병에도 지칠줄 모르고 끝내 찾아가려는 목적지는 중경에 있는 우리 독립군의 근거지 임시정부였다. 그 당시 선생은 임시정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임시정부는 일제와 싸우고 있다는 점, 그것만을 알고 있을 뿐, 임정이 갖는 성격이라든가, 또 우리나라 독립투쟁전선에서 임정이 차지하는 위치가 무엇인지 몰랐다. 또 알 필요도 없었다. 일제가 최재의 적이매 일제와 싸우는 곳만 찾아가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래서 끈질기게 임정을 찾아 헤매기 7개월 만에 중경에 도달, 즉각 광복군에 편입되는 것으로 감격하기만 했다(1945.1). 이것이 선생의 전생애의 방향을 결정지은 중대한 고비였다. 이 중대한 고비길을 더욱 뜻있게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선생이 7개월의 긴 여로 끝에 도달한 임정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3․1봉기 이래 국내에서 양성적 투쟁을 계속하기 어려웠던 민족지도자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세운 것으로, 첫째 나라를 빼앗긴 우리 민중과 세계 각국에 우리나라가 영구히 존립한다는 신뢰를 주었고, 둘째는 해외 독립투쟁 전열을 통합한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1921년 손문(孫文)이 이끄는 광동 비상정부와 혁명 러시아정부도 우리의 입정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승만 일파는 분열책운동으로 임정의 단결을 어지럽히고, 또 일부는 임정을 수양단체로 변질시키려 함으로써 임정은 이가 빠진 독사처럼 비분강개파들의 한숨짓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1930년대에 백범이 임정을 장악하게 되자 대번에 임정을 폭력 유격전의 본부로 발전시키고 1939년에는 우리나라의 농민문제의 핵심인 토지를 국유화한다는 건국강령을 채택하여 항일투쟁에 전농민이 가담할 계기를 만들어 광복군은 그 전위에서 싸우는 계획을 착착 진행시켰다. 장준하 선생은 이러한 백범 노선에 적극 찬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인간수양의 최고 차원에 도달해 있는 백범의 모습을 보고 여러 번 놀랐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광복군 훈련 중 백범 선생을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어울려 점심을 드는데, 광복군 훈련을 돕던 미국장교 하나가 시험삼아 폭음용 폭탄을 터뜨려 버렸다. 꽝! 하는 소리가 갑자기 터지자 이청천 장군은 밥그릇을 떨어뜨렸고, 장준하 선생은 너무나 놀라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백범 선생만은 흙먼지가 묻은 진지를 여전히 드시며 “이게 무슨 소리인고?”하시더란다. 장준하 선생은 그제서야 ‘나는 아직 멀었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준하 선생은 광복군 훈련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앞장을 서 1945년에는 광복군 대위로 승진되고, 한반도를 싸워서 다시 찾을 적전 상륙의 날은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무슨 원통한 일이랴! 우리 광복군이 적전 상륙을 감행하기 직전에 일제는 드디어 미․영 연합군에 항복을 하고 말았다. 갈고 닦은 칼을 배보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원통해서 노혁명가 백범선생도 울었다고 한다. 이 원통한 그날이 지난 지 20여 년이 되던 해인 1966년 말 경 장준하 선생이 경영하시던 잡지 『사상계』가 당국의 간섭으로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을 때 선생은 필자에게 이런 말은 한 적이 있음은 기억한다. “나의 실펴는 이미 내가 20대 때 격분의 총을 들고 군산 앞바다에 상륙하여 왜놈을 우리 손으로 몰아내려다가 실패한 그때부터의 연속이다‘라고. 이 말을 필자는 그때 몇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첫째로 나 장준하는 본래 일제 식민지하에서 낳아서 식민지하에서 잔뼈가 굵은 몸, 일제의 총칼 밑에서 자란 자는 평생을 총칼을 쥐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는 철칙을 터득해야 하는 것인데, 공연히 지식인들과 어울려 잡지를 만들어 팔어먹다 망했다는 뜻으로도 해석되었고, 또 한편으로는 장준하는 젊은 그날 한 몫에 활짝 피었다가 민족사의 어느 한 줄기를 마무리짓는 열매를 맺고 사라졌어야 할 것을 이렇게 오래도록 생명이 부지되는 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닌 것같다는 해석이다. 좌우간 선생은 그 당시 광복군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2. 해방, 분단, 반이승만 운동 ☞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장준하 선생은 8․15 민족해방이 된지 사흘 뒤인 8월 18일 광복군 국내 정진대(挺進隊)의 한 사람으로 중국 서안으로부터 여의도 비행장에 침투하는 대오에 참여했다. 물론 일제가 일단 미․영․소 연합군에 대하여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이후이긴 하였으나 적어도 무장한 조성의 독립군으로서는 최초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무장해제를 하지 않고 있었던 왜군의 완강한 정항으로 선생의 일행은 서안으로 다시 기수를 돌려야만 핶다. 이리하여 선생은 그 해 11월에 백범 선생을 비롯한 임정요인들과 같이 해방된 조국에 돌아왔다. 해외에 떠돌기 40년만에 돌아온 백범 선생은 조국땅을 밟기가 무섭게 엎드려 조국의 땅에 빰을 비벼대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 얼마나 그리던 내 나라 내 땅이었던가!” 그러나 이것이 내 동포가 살고 있는 땅인 것은 사실이로되, 다시 찾은 내 나라는 아니라는 것을 장준하 선생은 직감할 수 있었다. 우선 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부는 백범이 임정의 강제해산이었다. 무엇 때문에 미국은 임정에 대하여 그렇게까지 깊이 간섭해야만 했을까. 장준하선생은 이를 미군에 의한 한반도 분할정책의 일환으로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임정의 입장이란 독립투쟁전선의 일개 전략적 단위 이상의 의미를 한국민에게 주고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백범 선생 자신도 임정을 배경으로 환국하여 임정의 체재를 그대로 실현할 야망은 전연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군이 굳이 임정을 헤치려 들었던 것은 미국이 임정 요인들을 첫판부터 미군정의 분할정책에 동조할 세력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이들의 활동을 미리 견제함으로써 오직 미군정의 분할정책에 동조할 세력만 부식하자는 저의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것은 미군정이 실시됨에 따라서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미군정이 장악한 거대한 권력체계 안에서는 친일파․민족반역자가 옹호되었다. 그리하여 미군정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권력체계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단계적인 증거로 미군정하의 군청이나 경찰서를 습격한 폭도를 잡아들여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물으면 영락없이 “저 경찰서 안엔 독립군이었던 우리 부모를 때려잡은 일제 때의 순사가 그대로 있다”고 도리어 호통을 쳤다는 것을 보아 알 만하다. 이리하여 미군정의 시책은 모주 국민으로부터 점점 눈 밖에 나기 시작하고, 미군에 의한 분할정책이 현실화되면 될 수록 민족분화의 위기는 점점 고조되었다. 한마디로 38선에 의한 조국분단을 현실로 접수하느냐, 아니면 그것을 용서할 수 없는 민족의 파괴행위로 판단하고 민족의 자주통일노성으로 가느냐 하는 두 갈랴 길이었다. 즉 전자는 이승만의 길이었고, 후자는 백범의 길로 특정지어졌다. 이승만의 길은 새로운 세계분할로서의 동서 냉전체제를 우리의 민족적 현실에서 파악하여 거부하는 새로운 민족투쟁의 차원이었다. 이승만 의 길은 친일파민족반역자가 득실거렸고, 백범의 길은 민중이 아우성으로 따랐다. 장준하 선생이 이와 같은 백범 선생의 길을 앞장서 달린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한몸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 (백범사상연구소편,『백범어록』, 180쪽)
고 울부짖은 위대한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의 노선은 5천년 민족사의 주체적 맥락을 한마디로 요약한 독립정신이라고 보아야지, 이를 동서냉전이라는 시대적 눈으로 모함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일제 36년간의 지배에 대하여 일관되게 정항한 우리 민족의 보편적 염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일당은 1949년 6월 26일 온 국민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대낮에 백범 선생을 무참히 살해하고 말았다. 산천초목이 몸부림치고 하늘마저 비통한 눈물을 뿌리는 백범의 장례식날, 백범에 대하여 다시 한번 깨달은 장준하 선생은 훗날 그날의 뉘우침을 이렇게 회술하고 있다.
나는 백범 선생의 죽음을, 일찍이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환국할 당시 백범 선생이 입고 계셨던 임시정부 주석의 옷을 미군이 강제로 벗겼을 때 이미 예측했어야만 했다. 백범 선생은 동․서 냉전체재에 번가룰 든 최초의 세계적 지도자요, 따라서 동․서 냉전체재에 의하여 희생된 최초의 민족지도자다.이승만은 그 하수인에 불과하다. 나는 이 점을 너무나 늦게야 깨달았구나.
☞ 반이승만의 깃발 백범 선생을 빼앗긴 이후 우리 민족자주 통일운동은 이승만에 의하여 혹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애당초 친일파․민족반역자를 기반으로 정권의 기초를 닥았던 이승만은 그가 걷고 있는 민족분열에의 노선이 점차로 자각되는 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날로 격화되는 민중의 저항으로부터 살아남는 방편으로 독선․독재를 일삼게 되고, 이러한 독선․독재를 동시에 분단의 현실을 고착시키는 체제로 굳혀 갔다. 더구나 이승만 독제는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사나운 발톱을 갈기 시작하였다. 헌법을 두 번씩(52년, 54년)이나 불법적으로 뜯어고쳐 민중이 원치 않는 정권의 연장을 꾀하였다. 장준하 선생은 바로 이러한 대중사회의 동요가 이승만 일당의 독재를 쳐부술 절호의 기회임을 깨닫고 반이승만 투쟁의 무기로 잡지『사상계』를 발간하였다(1953). 잡지『사상계』의 맨 처음의 직원은 장준하 선생 자신과 아내 김희숙 여사였다. 선생이 손수 원고를 정리하고 아내는 교정을 도왔다. 또 책이 나오면 선생이 배달원이 되어 손수레를 끌면 아내는 뒤에서 밀었다. 언덕을 오르다 지쳐 버리면 그 짐이 백범 선생이 지워 준 짐이라고 생각하며 힘껏 끌었다. 또 그래도 가다가 지치면 그 짐이 이승만의 모가지라고 생각하며 끌었다. 물론『사상계』는 6․25민족상쟁 이후의 날카로운 국민감정이 깔린 50년대 초에 출발했기 때문에 그 편집정신과 편집내용에 편견이 작용하고 있는 점이 많았다. 그러나『사상계』가 들고 나온 자유. 민권의 기치는 민중의 호응을 나날이 확대해 가 1958년부터는 판매부수가 7만부를 돌파했다. 이 막대한 부수에 의한 영향력을 행사하여『사상계』는 1960년 드디어 4․19 혁명을 폭발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맨손으로 손수레를 끌며 시작한 일이 끝내 이승만의 모가지를 끌어내리자 숱한 사람들이 거리에 뛰어나와 자유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다. 장준하 선생도 뒤질세라 4월 26일 저녁『사상계』가 자리잡고 있던 종로 네거리로 뛰어나왔다. 여기서 장준하 선생은 혼자서 소리 높여 외쳤다. 자유민주주의 만세가 아니라 ‘이재야 백범의 원수를 갚았구나!’하고.
3. 반 독재, 한․일협정 반대투쟁의 선봉장으로 4․19 민주혁명과 함께 60년대에 들어선 우리나라의 내외정세는 몇가지 심상치 않는 징조 보였다. 우선 60년대의 미국의 동북아정책은 중공을 겨냥하여 한국과 일본을 하나로 묶으려는 계획이 점차 구체화될 움직임을 보인 점, 그리고 국내적으로는 새로이 등장한 장면 내각이 정치안정을 이룩할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것이다. 한국을 일본과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두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이 동북아에 쳐놓은 냉전체제에 일본은 끌어들임으로써 냉전체제를 더욱 굳히겠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를 일본에 예속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동북아 전략을 받아 그러한 능력이 없었다. 그러면 어찌되는가. 『사상계』라는 잡지 하나만을 가지고 씨름해 온 장준하 선생을 이와 같이 심상치 않은 먹구름이 감도는 내외정세에 대처할 아무런 조직도 능력도 없는 자기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총소리가 나더니 군인들이 거리에 나온 것은 목격했다. 5․16이었다. 장준하 선생은 4․19 이래 닫았던『사상계』의 포문을 다시 열었다.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정당항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사상계』의 편집방향을 결정한 것은 이승만 시대의 명제인 자유․민권만이 아니었다. 강행되는 한․일교섭이 중요한 비판의 개상으로 올랐다. 그러나 웬일인가. 간악한 이승만 치하에서도 비판을 계속해온 『사상계』에 대한 간섭이 가중되어 1964년부터는 문을 닫느냐 마느냐 하는 숨가쁜 고비를 매달 넘겨야 했으니 말이다.
만약 우리들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이 체결, 발효 됐다고 칩시다.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지만 36년 동안 왜놈들이 우리는 못살게 굴며 빼앗아간 우리들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6억 불의 돈이 이 땅에 들어온다고 칩시다. 그것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이겠습니까? 말이 피에 대한 보상이지 그 동니 한국 경제를 일본 독점자본에 예속시키고 우리 국토를 온통 일본 상품의 시장으로 만드는 정지작업에 쓰여질 것이 뻔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홍수처럼 밀려오는 일본 자본과 기타 외래자본의 도입으로 경기는 북적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경제의 알맹이는 다 빼앗기고 몇 사람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 될 것이며, 굶주린 절대 다수 국민의 반항을 막으려는 정치권력은 독재화할 것이 분명합니다. 과거 이승만은 조국의 분단과 민족분열에 반대하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하여 독재를 썼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정권은 일본자본의 이익을 반대하는 민중을 탄압하기위해 강권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한․일협정을 결사반대하는 이유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고 자유와 인권이 신장되는 나라를 만들자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이 정당한 주장을 갈기갈기 찢으며 끝끝내 한․일협정을 강행하는 세력은 뉘 집의 자식들입니까. 그들은 우리말을 쓰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지 사실은 일제의 잔재라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일제 때의 얻은 지식, 일제 때 터득한 황군의 체질을 가진 친일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일제의 패망과 함께 역사의 물거품으로 사라졌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땅에 온존돼 있었습니다. 누가 온존시켰나요. 지난날의 미군정이요, 이승만입니다. 미군정은 바로 오늘의 한․일관계를 다시 정립할 잠재세력으로서 친일파를 온존시켜 놓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국내외의 여건이 노늘 또다시 밀려오는 일본의 배경이요, 어찌 보면 우린의 반대투쟁이 갖는 역사적 한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처럼 젊은 나이에 왜놈과 싸웠습니다. 그때 죽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거니와 이제는 죽어 보렵니다.......
이것이 지난 65년 한․일협정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대성건물 성당에서 장준하 선생이 하신 말씀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생이 이미 10여년 전에 지적하신 예언자적인 말씀의 내용을 다시 한번 눈여겨 보아야 할 듯 하다. 즉 새로운 한․일협력을 추구하는 자 일제 잔재이며, 일제 잔재는 냉전 초기에 미국이 온존시킨 것으로서 일제 잔재와 일본 자본의 결합은 불가피하게 독재화 한다는 딱부러진 주장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또다시 일본을 이 땅에 끌어들이려는 세력에게는 가장 아픈 곳이었으며, 이 때문에 장준하 선생이 하는 일에는 항상 모진 방해와 탄압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66년에 이른바 ‘밀수 왕초’사건으로 투옥된 것이 그것이며, 다음해 67년에는 잡지『사상계』가 문을 닫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래도 선생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67년 초에는 대여투쟁의 한 방편으로 기존 야당의 통합을 주선하다가 동년 4월에 또다시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옥중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옥중에서 당선되는 등 열렬한 국민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1966년 가을 대통령의 3선을 허용하는 개헌운동이 고개를 들자, “이것은 미주헌정의 끝장을 알리는 최후의 경종”이요, “외국의 돈으로 경제건설을 서두르는 정권의 필연적인 자기귀경이다.”라고 외치며 반대에 앞장섰다.
4. 70년대의 장준하 70년대에 접어들면서 선생은 자기가 걸어온 반독재 투쟁의 발자취를 가장 냉엄하게 반성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나날이 경화되어가는 권력체제에 결정적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은, 반독재 투쟁을 담당하여 온 가족 야당의 애매한 태도로 인하여 투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데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5․16 이래 피해를 입어온 국민대중을 결속하여 그들의 의사와 사회적 입장을 정치세력으로 바꾸어 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선생은 한반도를 싸고도는 79년대의 국제기류를 날카롭게 주시하였다. 그것은 냉전논리를 탈각하여 동서 화해시대로 접어든 국제기류였다. 이러한 국내ㅚ의 조건을 냉엄히 검토한 장준하 선생은 이에 대처하는방법으로, 기존야당에 대신한 정치세력으로 70년도 말 경 ‘민주통일국민회의’를 구상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근로자, 학생, 그리고 서민대중을 상대로 민족문제를 논의하고 실처하는 지성의 유격전, ‘민족학교’를 지도하였다(1970. 10.). EH한 72년 7․4낭북공동성명이 나오자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백범사상연구’의 발족을 서둘렀다. 또 선생 자신이 7․4성명에 응답하는 형식의 하나로 아래와 같은 글을 써 세상에 공개하였다.
민족적 양심에 살려는 사람앞에 갈라진 민족, 둘로 나누어진 자기를 다시 하나로 통일하는 것 이상의 명제는 앖다. 이를 위한 안팎의 조건을 만들어 가는 이상의 절실한 과제는 없다. 어떤 논리도 이해도 이 앞에서는 뒤로 물러나야 한다. 이런 대원칙 아래서 굳어진 논리, 고집스런 자세를 고쳐가야 한다. 근본과 말단을 바꾸어서는 안된다. 무엇이 앞선 당위이며, 가치며, 무엇이 거기에 따른 것인가를 가려야 한다. 모든 통일은 좋은가? 그렇다. 통일 이상의 지상명령은 없다. 통일은 갈라진 민족이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민족사의 전진이라면 당연히 모든 가치있는 것들은 그 속에 실현될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론 민주주의, 평등, 자유, 번영, 복지 이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통일과 대립하는 개념인 동안은 진정한 실체를 획득할 수 없다.(『씨의 소리』, 1972년 9월호, 「민족주의자의 길」)
선생의 말씀을 다시 새기자니 가슴이 뭉클해서 필자는 잠시 붓을 멈추는 도리 밖에 없다. 7․4성명은 누가 했던가. 장준하 선생이 그렇게도 절실하게 비판해온 세력이 하였다. 어떤 조건 하에서 했던가. 통일이라는 ‘통’자만 입에 올려도 잡아갈 정도로 통제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암암리에 북쪽을 오가며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국내 조건을 감안한 연후에 7․4성명이 나오기가 무섭게 즉각적인 찬의를 표한 것은 일종의 과오가 아니었겠는가…. 선생이 여러차례 글과 말을 통해서 7․4성명에 대해서 선생의 의견을 발표하자, 주변에서는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선생에게 따지고 드는 사람이 많았다. 그럴 적마다 선생은 대답하시되,
나 자신 7․4성명을 합의한 사람들이 민족통일은 고사하고 남북의 대화를 할 만한 주체적 역량도 없고 객관적 조건도 아니 만들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7․4성명의 문맥으로 보면 그것은 누가 해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만들 수 없는 민족통일의 대원칙이 부각되어 있다. 오히려 그 대원칙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후퇴하지 못하도록 밀어 주는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우리의 통일 운동은 그래야만 하는 높은 차원이다. 따라서 7․4성명은 우리 민족의 거울이다. 이놈을 우리 민족의 현실 앞에 걸어 놓고 있으면 조만간에 가짜와 진짜가 가려질 것이다. 통일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이 한 짓인지, 아니면 자기전권을 유지하는 명분으로 한 짓인지 분명이 가려질 날이 곧 올 것이니 두고 보라.
고 하셨다. 선생이 이 말씀을 하신지 두 달도 채 안 되어 유신이 일어났다. 유신이 있은 지 8개월 후인 73년 6월에는 6․23선성이 나왔다. 또 6․23선언이 있은 지 불과 한달도 채 안돼서 ‘선통일 후건설’이냐, 아니면‘선건설 후통일’이냐 하는 맹랑한 논의가 제기외었다. 장준하 선생은 전례없이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소리냐? 통일은 우리 민족의 지상명령이요, 최대과업이요, 최대염원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통일로 행한 한 과정이다. 어떠한 가치도 어떠한 생활도 이 민족의 최대 엽원인 통일과 분리되고 따라서 대립되는 한, 그것은 분단의 논리요 7․4성명 이전으로, 다시 말하면 낡은 냉전시대의 논리로 다시금 민족사의 전진과 세계사의 발전을 비끌어매자는 반민족행위다. 정확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바로 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분이었기에 오늘의 모든 문제는 결국 민주주의 문제로 귀착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다시금 민중의 맨 앞에 섰다가 1974년 1월 또 투옥되너 17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다음해 2월 15일 형사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가 바로 그 해 1975년 8월 17일 형기 16년의 빚을 남딘 채 56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민족지도자의 생애를 마치셨다.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의 일생을 가로막았던 사나운 물길은 두 줄기였다. 하나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요, 또 하나는 민족의 분단을 강요한 동서냉전의 논리다. 그러니까 하나는 민족의 독립, 또 하나는 민족의 통일을 위한 싸움이었다. 다시 말하면 선생의 일생은 외세와 맞선 일생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선생은 그 파란많은 생애를 한 발자국도 흐트러뜨림이 없이 민족의 수난과 함께 살 수 있었을까. 필자는 이를 선생이 일찍이 일제 식민지 하에서 피흘리는 조국의 현실을 자각하고 독립군으로 몸을 일으킨 최초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만역 그때 선생이 동경 유학을 마친 창백한 식민지의 청년으로 고히 살고자 했다면 선생도 식민지 체제에 귀속되어 왜의 앞잡이로 출세의 길을 걸었을지 모를 일이다. 또 왜군에 끌려가서도 고분고분 주어진 상황에 붙어 돌아갔다든가, 아니면 남들처럼 황군의 우량아로 출세하려고 발악을 했었다면 선생도 평생을 민족반역자의 길을 갔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선생은 일찍이 20대 때 조국의 역사가 요구하는 긴장을 택함으로써 우리 민족사의 전진과 함께 한 없이 자기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그 다음 선생의 위해한 일생을 보람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매일매일 민족적으로 자각하며 산 선생의 인간적 성실성이 문제가 아닌가 한다. 사람은 때와 상황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일찍부터 지혜의 눈이 뜨이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깨달음을 역사와 함께 전진시키고자 하는 매일매일의 긴장된 자각이 없는 사람은 썩는 법이다. 그리고 남는 것은 관념적인 비판정신과 자기 혼자만 편케 사로자 하는 소시민의 지혜다. 그러나 장준하 선생은 매일매일 깨닫는 것으로 자기발전의 높은 성층권을 형성해 갔다. 선생은 매일매일 자기를 불지르고 매일매일 자기를 버리는 것으로 진정한 자기를 획득하고 있었다. 선생은 60평생을 살았으나 선생이 남긴 재산이라곤 60만원짜리 조그만 전셋집 하나뿐이었다. 자식들이 컸으되 대학에 보낼 생각은 아니하고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만 몸을 바쳤다. 언젠가 필자와 같이 야외로 산책을 나섰을 때의 일이다. 양지바른 산등성이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무덤 하나가 오랜 풍우에 시달려 허물어져 가는 것을 보고 “저렇게 몇 십년도 못갈 무덤을 굳이 만들 어서 무얼 한담. 저 앵지바른 곳에 과실나무나 심어 먹을 일이지. 여보게 이담 내가 먼저 죽거든 내 몸은 재를 만들어 북쪽을 향해 뿌리게. 통일이 소원이니”라고 하신 말씀이 새롭거니와 죽어서 무덤이나 남갈 바에야 차라리 뜻을 남겨 영원히 사시겠다는 높은 경지의 표현인 것같았다. 또 75년 7월 경, 그러니까 선생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중랑천 어느 가난한 집안을 살피다가 한집안 다섯 식구가 월 수 1만 2천원, 즉 쌀 반가마니 값의 수입으로 산다는 말을 듣고 “ 여보게, 자네 통일이 소원이라며? 통일이란 저 사람들의 생활이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것, 그것이 통일일세”하셨다. 어리석은 필자는 그제서야 항상 내 머리에서 희미하게 뱅뱅 돌고 있던 ‘통일’이 진정 무었인지, 그 위대한 통일이 전체상(全體像)이 선명하게 부각되어옴을 느끼게 외었다. 그러나 민족통일의 화신 장준하 선생은 가셨다. 1949년에 백범 선생이 가셨고, 1975년에는 장준하 선생이 가셨다. 백범 선생은 동서 냉전 초기, 냉전의 피해로부터 조국을 지키려다가 돌아가셨고, 장준하 선생은 동서냉전이 후퇴기로 접어든 이때 이 시기를 민족사의 발전의 계기로 삼으려던 싸움터에서 돌아가셨다. 냉전시대의 찌꺼기와 마지막 싸움을 벌여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하늘은 선생의 구한 생명이 끊기는 것을 가로막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