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명당터
공주를 중심으로 동남쪽 40리쯤 되는 곳에 계룡산(鷄龍山)이 있고 서북쪽 40리쯤 되는 지
점에 무성산이 있으며 같은 방향으로 공주에서 80리 가량 되는 지점에 금계산(金鷄山)이 있
다. 무성산은 조선 중기 "茂城山"이라고 표기[동국여지승람]하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武城
山 이라고 표기[大東地志]하였으며 지금은 "武盛山" 라고 표기한다. 무성산(614m)과 국사봉
(國師峯)금계산(575m)의 일지맥이 흐르다가 각각 산맥이 끝나고 물이 도는 지지[山盡水廻
處]에 명당 터가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에는 역대로 천문(天文)지리(地理)에 조예 깊은 이가 적지 않았던 만큼 명당 터
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예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성산고 국사봉, 금계산이
분지를 형성하며 이뤄 놓은 이 명당 터에는 일찍이 신라 선덕여왕 9년(640·庚子)에 자장
(慈藏)율사가 절을 창건하여 향화(香火)를 피웠으니 이름하여 마곡사(麻谷寺)이다.
마곡사는 무성산 서쪽, 국사봉 금계산 남쪽에 자리잡은 천년 고찰로서 고려시대 고승 w
보조(普燥)국사, 조선 효종조 고승 각순(覺淳) 등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른다.
천안 태화산이 흐르다가 금계산과 국사봉으로 나뉘어 흐름이 끝나는 지점에 이뤄진 절터
이므로 산의 조종(祖宗)을 중시해 대개 태화산 마곡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무성산이 절 가까
이 있기 때문에 한때 무성산 마곡사로 불리 우기도 했었다.
운룡은 언젠가 이곳을 지나가면서 묘하게 형성된 마곡사 절터 못지 않게 묘 자리(陰宅)도
쓸 만한 곳이 더러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연로한 가친의 신후지(身後地)로 해드려야겠다
고 마음 먹었었다.
그래서 가친을 모시고 월남한 뒤 계룡산 마곡사 등지에 거주하다가 경인년의 불상사(不祥
事)를 피하기 위해 잠시 부산으로 가서 한의원을 하고 있던 중 마곡사 부근에 살던 아버지
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悲報)를 전해들었던 것이다.
운룡은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장례준비를 하는 한편 가친의 신후지
로 봐두었던 산소자리를 찾아갔다가 크게 실망하게 된다. 그 자리에는 새로 쓴 듯한 산소가
이미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운룡은 불현듯 친하게 지내던 윗동네 박씨와의 주석(酒席)에서 그 산소자리에 대해 이야
기를 나누었던 일이 떠올랐다.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산소자리 부근에 살고 있는 박씨가
하루는 술대접을 극진히 하면서, 나름대로 지가서(地家書)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느 지점 근
처에 명당자리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가나 확실하게 알 수 없어 고민중이라는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운룡이 비단 병 고치는 의술에 밝을 뿐만이 아니라 음택(陰宅)
양택(陽宅)의 지리(地理)에도 정통한 인물이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김 선생님, 이 뒷산은 저쪽 북쪽으로부터 생기를 띠고 흘러 내려와 좌청룡 우백호가 두
팔을 벌린 듯 좌우로 감쌌으니 분명 이 부근 어디에 쓸 만한 음택이 있으련만 저의 어두
운 눈에는 보이질 않습니다."
박씨는 운룡보다 너댓 살 아래였다. 전란(戰亂)을 피해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이리저
리 다니는 사람들은 그때만 해도 적지 않은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재앙[災殃]
과 여덟 가지 환난[八難]이 범하지 못한다는 열 곳의 명승지가 전설로 전해져 온다. 공주의
유구와 마곡, 무주의 무풍동, 보은의 속리산, 부안의 변산, 성주의 만수동 안동의 춘양면, 예
천의 금당동, 영월의 정동상류(正東上流), 운봉의 두류산, 풍기의 금계촌을 지칭한다. 사람들
은 그곳을 십승지지라고 부르며 굶주림과 전쟁의 피해가 미치지 않는 명승지라고 믿고 있
다.
박씨는 먼 조상 중 한 사람이 십승지지를 찾아 이곳으로 이사한 이래 대대로 농사를 지으
며 넉넉지 못한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으나 성실하고 마음씨 착한 사람이었다.
"자네가 아는 그대로야. 태화산서 흘러온 맥을 금계산이 받아 다시 흐르다가 그쯤에 쓸만
한 자리 하나 만들고 다시 흘러 마곡사 절터를 이루고 또다시 몇 군데 명당 터를 이뤄 놓
았지. 말이나 글로는 산을 보는 법 가운데 기본원리 이외의 사항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법이야. 요는 책에서 기본원리를 배우고 나서는 그것을 토대로 마음의 눈으로 산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운룡은 박씨가 문 창호지에 부근 산의 산맥의 흐름과 물의 흐름을 그려 놓은 그림을 보면
서 지리의 원리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박씨가 대접하는 술은 담근 지 오래된 것인 듯 향긋한 냄새에 빛깔도 고왔다. 권커니 자
커니 하면서 지리 이야기는 차츰 깊이를 더해 갔다.
"자네는 앞으로 더 이상 지리공부를 하지 말게. 자네 아이들도 말일세. 조상 뼈를 파들고
명당 찾아다니는 눈먼 반 풍수들의 집안은 서리[霜] 내리고 마는 법이야. 지가서의 이론은
그렇다는 이야기일 뿐 정작 터를 잡는 것은 첫째 산안(山眼)이 열려야 가능한 것이지. 산
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백 번을 고쳐 잡아도 제자리를 찾지는 못해."
박씨는 운룡의 잔에 다시 두 손으로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김 선생님, 선생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저는 앞으로 지가서를 들고 세월 보내고 싶은 마
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명당 터를 잡을 수 있는 실질적인 지리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은
갖고 있습니다. 제게 지리공부를 지도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자네, 되지도 않을 일 애쓰지 말고 술이나 먹게. 산 안이 트인다는 것은 곧 머리가 열린
다는 말인데 아무나 공부한다고 해서 다 머리가 열릴 것 같으면 이 나라에는 도사(道士)
가 천지일 걸세."
박씨는 일순 실망의 빛이 어렸으나 다시 자세를 고쳐 앉더니 그림을 가리키며 묻는다.
"김 선생님, 원리상 이 부근에 틀림없이 명당 터가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정확하게
어느 지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아, 아까 자네 좌청룡 우백호라고 말하고도 모르나? 앞에 내(川)가 흐르고 내 건
너에 있는 이 봉우리가 안산(案山)일세. 이 지점이 바로 쓸만한 자리인데 자좌오향(子坐午
向)으로 앉히되 이 경우엔 깊이를 석자(三尺)가량 파야 제대로 발복(發福)하게 돼."
운룡은 과거에 박씨와 나누었던 대화내용을 생각하면서 하산하는 길에 산소자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박씨 집을 찾았다. 이곳에 산소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박씨
밖에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산소자리는 형제간에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옛 속
담이 떠올랐다.
지관(地官)들이 이곳에 백 번을 지나간다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운룡은 잘 알
고 있었다. 옛적의 도가 높은 고승 자장(慈藏)이나 원효(元曉), 의상(義湘), 도선(道詵), 보조
(普照) 같은 사람이 들르지 않는 한 그 자리를 찾지 못하리라는 생각만 하였지, 친구가 그것
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곳의 알만한 사람들은 운룡이 가친의 신후지로 그곳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과 그 때문에
가친을 모시고 이곳 벽지로 들어와 고생스레 살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로 믿고 지리의 원리를 터놓고 이야기하였던 박씨가 그런 짓을 하였으리라고 생각하니 왠
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박씨는 운룡을 보자 급히 뛰어나오면서 손을 붙잡고 반가이 맞아 들였다.
"김 선생님, 이게 얼마만 입니까? 참으로 오래간만입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박씨는 1년 전쯤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그곳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나 자기네 산도 아니고
해서 봉분(封墳)을 하지 못하고 평토로 해둔 채 지금껏 지내온 이야기며 운룡의 가친이 최
근 별세하여 그렇지 않아도 운룡이 올 것을 기다리는 중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하였다.
"전쟁통이라 세상도 어수선하던 차에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망설이다가 사실 명당자
리에 대한 욕심도 생기고 또 김 선생님은 산안(山眼)이 밝으시므로 다른 명당터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재가 그곳에 아버님 산소를 썼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
니다만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박씨는 운룡에게 기왕 자기가 가친을 모신 것이니 친하게 지내는 산주(山主)에게 잘 이야
기해 달라고 당부하였다. 운룡을 믿고 최근 봉분을 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운룡은 갑자기 산소자리를 더 알아볼 여가도 없고 또 알고 있는 매화낙지(梅花落地)라는
이름의 자리는 다른 모르는 사람의 소유지이므로 쓸 수가 없는 처지였다. 본래 보아두었던
자리 부근에 우선 산소를 모시고 뒷날 이장(移葬)시켜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임시로 아
버지의 유해를 그곳에 안장하였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살다가 떠나가는 것은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우주
영겁(永劫)의 시간선상에서 볼 때 1백 년 내외에 해당하는 인간의 생존기간은 일찰나(一刹
那)에 불과한 것이지만 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인간이 그려 놓은 그림은 온갖 사연들을 말
해 주고 있다.
흙을 둥그렇게 덮어 올리고 띠를 골고루 입히고 나자 운룡은 아버지의 삶이 다만 전설로
남을 뿐 모든 유형(有形)의 존재는 물거품처럼 무형(無形)이 세계로 소멸되어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인생을 뜬 구름에 비유하였던 이들 가운데 조선초기 득통(득통·1376∼1433) 선사는 존재
의 덧없음과 죽어도 죽지 않는 존재의 불멸성(不滅性)에 대해 아마도 가장 명쾌한 시(詩)를
남긴 사람의 하나로 생각된다.
「태어남이여, 한 조각 뜬 구름이 온 건가/ 죽음이여, 한 조각 뜬 구름이 간건가/ 뜬 구름
본디 실체 없던 것/ 덧 없는 몸나고 죽는 것도 이와 같으리/ 그러나 한 가지 상존하는 영
물(靈物)은/ 아무리 겁화(劫火) 겪어도 변함이 없고녀」(生也-片浮雲起/ 死也- 片浮雲滅/
浮雲自體徹底空/ 幻身生滅亦如然/ 就中-個長靈物/ 幾經劫火常[ 甚]然)
물론 생멸(生滅)하는 현상의 배후에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여여(如如)한 존재에 대한 암
시가 이 시의 내용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어쨌든 육친과의 이별은 마음에 아쉬움과 안타까움
을 남겨 놓는다.
할아버지 면섭(冕燮)의 외아들로 태어난 아버지 경삼(慶參)은 호가 중삼(仲參)이다. 슬하
에 모두 7남 2녀를 두었다.
운룡은 7남 2녀 중 3남으로서 호적상에는 이름이 누락되었다. 한일 합방되기 한 해 전, 즉
조선 순종 융희(隆熙) 3년(1909·己酉)에 태어나 16세 되던 해(1924·甲子) 가을에 집을 떠
났으므로 형제들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사항뿐이다. 형제 중 맏이(長男)는 1900년(庚子)에 태어났고
둘째(長女)는 1905년(乙巳)에 태어났으며 셋째는 1906년(丙午)에 태어났고 이름을 봉진(鳳
鎭),아명을 용봉(龍鳳)이라고 하였다. 넷째(三男)는 운룡 본인이고 다섯째(次女)는 1911년(辛
亥?)에 태어났으며 여섯째(四男)는 이름이 익진(翼鎭)이고 일곱째(五男)는 이름·나이를 다
모르며 여덟째(六男)는 이름이 순진(順鎭)이고 아홉째(七男)는 이름이 영진(永鎭)이다.
운룡은 16세 되던 해에 평북 의주에서 보통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때 같은 또래의 일본
아이들이 조선 아이들에게 온갖 행패를 다 부리고 다니는 광경을 보다 못해 친구 네 명과
힘을 합하여 가장 못되게 굴던 열다섯 명의 일본 아이들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두들겨 패
주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달아나 광복운동에 가담하였다.
동만주 일대는 물론 소련 땅에까지 떠돌아다니면서 광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경(日警)
에 쫓겨 주로 백두산·묘향산·소백산·천마산 등지의 심산 속에 숨어살았으므로 가족에 대
해서는 자연 잘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서른 살 무렵 의주를 지나가다가 잠깐 옛집에 드려
아버지와 형제들을 만나보고 8·15광복 직후 다시 찾아갔더니 함경남도 홍원 읍으로 이사하
여 살고 있었다.
운룡은 고향집에 잇던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머지않아 3·8 이북은 공산당의 통치를 받게
될 터이니 고향을 떠나 3·8 이남으로 가서 사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였다. 모두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삶의 터전과 선영(先塋)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며 운룡의 제의를 거절하였
으나 아버지만은 삼남의 이야기대로 3·8 이남에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운룡의 아버지[慶參]는 1926년에 작고한 할아버지[면섭]의 유언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김면섭 조부는 임종(臨終)시 외아들 경삼에게 "일본이 망하고 나서 나라에 큰 변화
가 나타날 것이니 그때 너는 반드시 셋째 아이[운룡]의 의견을 쫓아 그 말대로 따르도록 하
라"는 간곡한 유언을 남긴 바 있다.
운룡은 그 즈음, 묘향산으로 가는 길에 잠시 집에 들렸다가 마침 아버지와 함께 할아버지
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므로 할아버지의 유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48년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운룡은 고향집으로 가서 아버지와 약혼녀[張永玉]와 함께 월남(越南)하여 계룡산
백암동, 공주 마곡사 등지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이른 다섯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은 운룡이 여덟 살 되던 해인 1926년
한겨울 동지(冬至)무렵이었다. 홍원서 살 때였는데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그 날, 집 주
위에는 이상한 향내가 진동하였고, 그 날부터 혹한의 기후가 따뜻한 봄 날씨로 변하여 7일
동안 줄곧 한겨울 속의 봄이 계속되었던 기이한 현상을 운룡은 기억하고 있다.
조선조 고종9년(임신·1872)에 시작된 아버지의 삶의 노정(路程)은 이제 임진년(1952) 여
름, 공주 사곡면 운암리 마곡사 골짜기에서 끝을 맺었다. 육신의 존재는 이처럼 덧없음의 법
칙에 따라 가야만 하는 것이다.
운룡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부산으로 돌아갔다가 그 해 초가을, 아내가 장남을
출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세춘 한의원을 정리한 뒤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로 거처를 옮겼
다. 그곳에서는 참나루골 지와막에 거주하며 주로 산 판에 나가 저물도록 소나무 장작을 패
서 지게에 져 나르는 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갔다.
삼가 일생대오(여백) 올립니다.
카페 게시글
생활 상담실
신의 이야기 (20) 잃어버린 명당터
익명
추천 0
조회 214
04.03.28 02:19
댓글 0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