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6월 28일 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성모 성심 공경은 17세기 요한 외드 성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다. 성모 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별도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반포하였다. 교황청 경신성사성은 1996년 1월 1일자 교령에서 해마다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에 이 축일을 의무 기념일로 지내게 하였다. ☆☆☆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Why were you looking for me?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으로부터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파견을 받았다. 그 기쁜 소식의 전달 대상자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형제애, 나눔과 섬김에 열려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권의 존중과 정의는 저울추와 같아서 이를 통하여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 축복, 민족들의 인정이 되살아난다(제1독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당신의 모든 사명이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마리아께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세상에 구원 계획을 알리셨을 뿐 아니라, 구원의 협력자로 자신을 택하셨음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마리아께서는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마음속 깊이 간직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범이 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성모님을 통하여 시작되었고, 성모님께서는 이 사업에 협력자가 되셨습니다. ☆☆☆
안젤라 씨는 신혼 초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남편의 잦은 외박에 신경이 예민해졌던 겁니다. 직장 때문인 줄은 알고 있지만 별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어느 날 무심코 성당에 갔다가 마당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엄청 화를 냅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겁니까?’ 남편이 오지 않는 날이면 늘 그렇게 성모상에 화풀이를 했습니다. 설마, 성모님께서 듣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그러나 소년 예수님의 답변은 의외였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미안하다는 말도 상냥한 어투도 아니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며 … - 한창현 신부-
본당신부를 처음 하는 저에게는 이곳에서 하는 모든 사목활동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이곳은 관광지라서 도시에서 보좌신부로 지내면서 보고 경험한 것으로는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하나 배우는 자세로 임하다 보니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우물이 깊은지 얕은지를 아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돌멩이 하나를 던져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즉, 돌이 물에 닿는데 걸리는 시간과 그때 들리는 소리를 통해서 우물의 깊이와 물의 양을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만약 돌을 던졌는데 소리가 한참 만에 들린다면 우물이 꽤 깊은 것이겠지요. 또한 돌이 떨어진 소리를 통해서 깊은 물속에 떨어졌는지, 얕은 물속에 떨어졌는지, 물이 말랐는지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우물 속이라 할지라도 돌멩이 하나를 던져 보면 그 깊이와 물의 양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깊이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즉, 다른 사람이 내게 던지는 말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내게 듣기 싫은 말을 했는데 그 말에 곧바로 흥분하고 흔들린다면 그것은 분명 내 마음의 깊이가 얕고 사랑의 마음이 풍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부정적인 말을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다면 분명 내 마음이 깊고 풍성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음이 깊고 그 안이 사랑으로 풍성함을 가지고 있다면 뭐가 좋을까요? 만약 우물이 깊지 않고 물도 없다면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을 것입니다. 우물이 얕으면 그만큼 물이 시원하지 않으며, 물이 없으면 사람들이 이 우물을 찾을 이유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물이 깊고 풍성한 물이 있다면, 언제나 시원한 물을 얻을 수 있어 사람들이 늘 모이게 되겠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 역시 깊고 풍성함으로 가득하다면 사람들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려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모두 이렇게 깊고 풍성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지요. 그래서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낸데 이어서,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면서 예수님과 성모님의 깊고 풍성한 마음을 우리 역시 간직해야 함을 교회는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 상태는 예수님과 성모님에 비해서 어떠할까요? 깊고 풍성한 마음보다는 얕고 초라한 마음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도 쉽게 감정이 좌우되는 그래서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의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따라서 부모를 제대로 쫓아오지 않는 자녀를 향해 혼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 말에 화를 내실 만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그 말에 대해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시지 않습니다. 성모님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렇게 깊고 풍성한 마음. 그 마음을 우리 역시 간직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인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자신을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도스토옙스키).
주님 찾기 -김훈일 신부-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글을 소개해드립니다.
“종이학을 접었다. 날씬하게 잘 접었다. 그런데 누가 접은 거냐고 물으면 내가 접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내가 접은 것은 없다. 내가 접은 종이학도 나 혼자 접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무를 심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에 물을 뿌렸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를 베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나무로 종이를 만들었을 것이고, 누군가가 그 종이를 나에게 가져다줬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줬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을 소개해 줬을 것이고, 누군가는 나에게 종이학 접는 법을 가르쳐 준 사람을 소개해 준 사람을 소개해 줬을 것이다. 천 번을 접는다 해도 나 혼자 접은 종이학은 없다. 내 손을 잠시 만난 종이학이 있을 뿐.”(정철, ‘행복한 동행’중에서) 자기가 접은 종이학이지만 결국은 내 손을 잠시 만난 종이학이라는 말에 깊은 공감을 하게 됩니다. 바로 나도 모를 다른 이의 도움이 있었기에 한 마리의 종이학을 접을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내 손을 통한 것은 무엇이든 내가 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저작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지요. 그러나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그 창작물이 과연 자신의 순수한 힘으로 만든 것일까요? 하느님의 이끄심이 없다면 모든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저만이라도 제 글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사람들에게 선언을 했지요. 왜냐하면 나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저에게 어떤 저작권도 주장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즉, 제가 감히 하느님도 하지 않는 저작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결국 하느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교만과 이기심, 그리고 각종 욕심으로 인해서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는 불경은 피해야 합니다.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에 대해서 떠올려 봅시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낳은 자식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권리를 큰소리치며 주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내 자식이니까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멋대로 성전에 머물면서 부모의 마음을 애타게 만들었던 예수님을 혼내지 않지요. 대신 마음속에 그 모든 일을 간직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이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 진정한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오로는 결코 적을 물리칠 수가 없다. 오히려 자신이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고 약하게 만들어 버린다.(데일 카네기)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양승국신부- <긍정적 수용> ‘인간’이라는 존재, 어찌 보면 참으로 나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난다긴다’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5분 숨 못 쉬면 그걸로 끝입니다. 큰 파도에 제대로 한번 휩쓸리면 그걸로 그만입니다.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자연 재해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위대합니다. 무한하게 확장시켜나갈 수 있는 각자의 정신세계를 소유하고 있어서 그렇지요. 그 누구도 침해하지 못할 영혼의 영역을 지니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가온 현실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다 하더라도, 주어진 매일 매일의 일상이 아무리 지옥 같다 할지라도, 어깨에 메워진 십자가가 아무리 육체를 짓눌러도, 영혼만큼은 침해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신만큼은 유유자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각자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는 아무래도 ‘영혼의 자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사람을 두 평 남짓한 찌는 듯한 독방 속에서도 가두어도 그의 영혼만큼은 가둘 수 없습니다. 그의 꿈, 비전, 그의 희망, 그의 정신만큼은 가둘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열악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수용하는 삶의 태도만큼은 억압할 수가 없습니다. 성모님의 생애, 예수님으로 인해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당신의 태중에 모셨습니다. 몸소 그를 낳으셨습니다. 오랜 세월 그를 당신 품에 안고 고이고이 길렀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해나가는 소년 예수를 바라보며 참으로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전에는 양면이 있습니다.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구세주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한 남모를 고초와 아픔과 상처가 왜 없었겠습니까? 오늘 복음은 성모님의 상처와 슬픔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 순례 길에 오르셨던 성모님과 요셉은 어느 순간 소년 예수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부모님들, 행락 철, 수많은 인파 가운데 잠시 동안이나마 아이의 손을 놓쳐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미아보호소에서 되찾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과 요셉은 장장 사흘간이나 소년 예수를 찾아다녔습니다. 처음에는 곧 찾겠지, 했었는데, 사흘 동안이나 못 찾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마음은 불안해져갔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왜 이렇게 애를 태우는가, 화도 났을 것입니다. 더 시간이 흐르면서 혹시나 유괴된 것은 아닌지, 노예상인들에게 끌려간 것은 아닌지, 두려움에 떨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회당에 있었습니다. 부모의 걱정과는 달리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율법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었고, 기가 차지도 않았지만,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서 소년 예수에게 묻습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그 상황에서 소년 예수의 반응을 보십시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 모르셨습니까?” 참으로 많은 의미가 담긴 말이자, 소년 예수로서는 그 순간 꼭 해야 될 적절한 말씀이었겠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성모님께는 정말 가슴을 헤집는 비수 같은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구세주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해 한 두 번이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많이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할 예수님의 돌출발언들,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로 인해 많은 상처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때 마다 항상 그 모든 일들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습니다.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셨다는 것은 그냥 참지, 그냥 웃고 말지가 절대로 아닙니다. 아무리 이해하지 못할 상황, 견디기 힘든 상황이라 할지라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비극적인 현실 안에서도 희망의 날갯짓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성모님의 자녀 -이준석 신부-
성모님의 마음에는 의문투성이였습니다. 당신 아드님께 발생하는 범상치 않은
하나 되기 - 임순연 수녀-
저는 이 복음을 읽으며 예수님의 부모님의 마음, 특히 어머니의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오래전 입회하겠다는 저의 말에 섭섭해하시면서도 말리지 못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입회할 당시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던 부모님은 지금은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으시고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부모님의 변화를 보면서 저는 입회한 후 지금까지 수도자로 살면서 ‘나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가?’ 를 자문해 보았습니다.
어머니의 마음 -전삼용신부-
우리가 잘 알듯이 2차 세계 대전 때 히틀러 정권은 6백만이라고 하는 유태인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거기서 전해지는 이야기들도 수없이 많지만 오늘은 특별히 어머니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수용소에 아버지와 어머니, 또 아들 둘이 잡혀 들어왔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작업을 시켰고 작업을 할 체력이 없는 사람들은 가스실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 중 하나는 매우 병약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늘 걱정이었습니다. 작업이 끝나고 나면 가족은 서로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곤 하였는데 특히 나약한 아들을 먼저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그 병약한 아이와 어머니가 한꺼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둘이 가스실에 들어간 것이 확실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아버지와 남은 아들에게 어떻게 된 사실인지 설명하였습니다. 어리고 병약한 아들을 감시원이 끌고 가려고 하자 아이는 울며 발버둥을 쳤습니다. 어머니가 그것을 보고는 아이에게 뛰어가서 아이를 안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울지 마라, 이 어미가 같이 간다.” 그러자 아들은 다시 안정을 찾았고 어머니는 아들을 안고 당당히 가스실로 들어갔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늘은 무한히 넓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하늘을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하늘을 자신의 품에 담았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어떻게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그릇에 담길 수 있었을까요? 바로 성모님의 마음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넓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아들을 품에 안기 위해서는 아들만 안는 것이 아니라 죽음도 함께 품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무한하신 하느님을 품으실 때는 이미 그 무한하신 하느님이 인간이 되셔서 당해야 할 고통까지도 함께 품으신 것입니다. 오직 성모님만이 그 고통까지 품으실 수 있는 완전한 어머니의 마음을 지니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이 아니면 다른 누구를 통해서도 하느님은 사람이 되실 수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만이 원죄 없이 깨끗한 성심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각자의 그릇 안에 하느님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를 온전히 품고 그에게 당신 자신의 육체를 줄 수 있도록 완전히 깨끗하고 넓은 마음을 지닌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부터 죄에 물들지 않도록 인류구원을 위해 준비해 놓으신 것이니 성모님께 특별한 공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요. 만약 성모님께서 그렇게 기계 부속품처럼 사용되었다면 왜 천사가 나타나 성모님의 대답을 기다렸겠습니까? 천사는 성모님께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묻습니다. 성모님은 영원하신 하느님과 그 분이 당하실 무한한 고통을 동시에 품을 결심을 합니다. 이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버리는 순종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한한 하늘이 유한한 세상에 내려오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그것만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성자만을 아들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아들로 받아 품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으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가장 먼저 눈치 채신 분이 성모님입니다. 어머니는 자녀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가장 민첩하게 눈치 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간청합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달라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당신 자녀들의 영혼에 성령님을 부어 주십사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성심까지는 따라갈 수 없겠지만 우리 마음 안에 사람들과 그들로 인해 겪어야 하는 고통을 품어 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우리 마음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성모님 품 안에서 영적으로 새로 태어난 우리들이지만, 이렇게 우리들 역시 영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새로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작은 어머니들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죽음까지 품을 수 있는 어머니의 마음이 있다면 말이죠.
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 -김찬선신부-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애야, 왜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양승국신부- <걱정이 밀물처럼> 인파가 들끓는 놀이공원이나 혼잡한 길거리에서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어린 자녀들을 놓쳐 고생해본 기억이 없으십니까? 그 순간, 부모님들의 심정은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지요. 이 녀석 혹시라도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유괴범에게 끌려간 것은 아닌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다 영영 못 찾는 것을 아닌가? 초초해짐에 따라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나중에는 욕까지 저절로 입에서 나옵니다. 저 역시 놀이공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가 따로 떨어진 한 아이를 찾느라 그 넓은 공원 전체를 3시간 동안이나 샅샅이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다. 화가 나다 못해 나중에는 아이들 표현대로 ‘꼭지’가 다 돌더군요. 또 한 번은 법정 보호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몇몇 아이들과 PC방에 놀러 갔습니다. 출입문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신부님,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하더군요. 평소 같았으면, 다른 아이 같았으면, “그래, 나도 같이 가자”라고 하며 화장실 안까지 따라 갔을텐데, 워낙 신뢰심이 가는 ‘품질 좋은’ 아이였기에 “그래, 다녀와라. 째면 안된다”고 그랬습니다. 아이는 웃으면서 “신부님도 참, 제가 왜 째요?”하면서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런데 30초, 1분, 2분이 지나도 아이가 화장실에서 안 나오는 것입니다. 혹시? 하면서 화장실로 달려갔었는데, 이미 늦었습니다. 밖으로 난 화장실 창문을 통해 아이는 이미 자유의 몸이 되어 멀리 멀리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내려다보니 꽤 까마득한 높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때 당시의 배신감, 모멸감, 허탈함은 아직도 손에 잡힐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부모님도 저 못지않은 체험을 하십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소년 예수와 함께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명절기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마리아와 요셉은 소년 예수를 놓치게 됩니다. ‘아마도 친척들이나 동네사람들과 함께 돌아오겠지?’하고 하룻길을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순례자들은 또래의 다른 순례자와 더불어 하나의 큰 카라반(그룹)을 이루어 여행하곤 했습니다. 12살 정도의 소년이었다면 부모와 떨어져 또래의 다른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함께 여행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은 하루 온 종일을 아무 염려 없이 여행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 하루가 지나서야 마리아와 요셉은 일행 중에 소년 예수가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와 요셉은 걱정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겠습니다. 혹시 이집트 상인들의 꼬임에 넘어가 머나먼 나라까지 노예로 팔려가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며 마리아와 요셉은 이곳저곳 기웃기웃,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가며 예수살렘을 향해 왔던 길을 되돌아간 것입니다. 침식을 잊고 사흘 밤낮을 헤매 다닌 끝에 겨우 소년 예수를 찾게 된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되찾았다는 기쁨도 컸지만, 태연히 성전에 앉아있는 소년 예수를 보고 있노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소년 예수에게 힐난조로 말합니다. “애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부모된 도리로서 어린 자녀가 행방불명되었는데, 아이를 찾아 헤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 예수는 당돌하게도 이렇게 응대합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소년 예수의 이 답변은 너무도 심오한 답변이요, 영적인 답변이자 메시아로서의 답변이었기에 마리아와 요셉은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여기서 소년 예수의 답변은 자신과 부모와의 단절을 암시합니다. 언젠가 소년 예수는 지상의 아버지 집을 떠날 것을 미리 암시합니다. 언젠가 인간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육신의 굴레를 벗고, 혈육을 떨치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갈 것을 예표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으신 분입니다.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웃들로부터 오해도 엄청 받았습니다. 인간적 아쉬움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아들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다 마리아는 인간적 섭섭함과 아쉬움을 접습니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향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낮춥니다. 그때 마다 마리아는 수시로 떠오르는 인간적 욕구를 접었습니다. 매일 사사로운 감정을 떨치고 매일 일어섰습니다. 매일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매일 새 출발했습니다. 이런 마리아였기에 그를 두고 참 신앙인, 신앙인의 모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요즘 날이 너무나 덥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단을 입기가 상당히 힘듭니다. 더군다나 수단을 입고서 제의까지 입을 때면 그 더위는 배가 되지요. 하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부니까 이 정도는 참아야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까지도 이겨내시지 않았습니까? 화를 먼저 내지 말고 그 화를 마음속에 우선은 간직합시다.
빠다킹신부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양승국신부- <입 큰 붕어낚시회> 내일은 드디어 아이들과 수사님들로 구성된 "입 큰 붕어낚시회"가 첫 번째로 출조 하는 날입니다. 한 달 전부터 회원을 모집했는데...신청한 아이들 기대가 이만저만이 아닌데...내일 날씨가 별로 일 것 같아 걱정이 많이 앞섭니다. 회원모집 광고까지 그럴듯하게 게시판에 써서 붙였는데...선발 자격 기준이 보통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발인원: OO명 특전: 고급 낚시대와 우럭매운탕 무료제공 신청자격: 바닷바람을 맞으며 새 출발을 결심하고픈 기숙생, 낚싯대를 드리우면서 "욱"하는 마음을 버리고 싶은 기숙생, 금연각서에 서명한 기숙생 참가를 신청한 몇몇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설레는 얼굴로 "미끼는 뭘 로 할거냐?" "낚시대를 주긴 줄거냐?" "나도 왕년에 아빠 따라가서 이따만한 것도 잡아봤다"는 등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설렘과 흥분으로 가득 찬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저도 무척 기뻤습니다.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보고 싶었던 사람, 정겹고 포근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전의 마음은 기쁨으로 설렙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합니다. 막 재미를 붙인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하러가기 전의 기쁨 역시 대단한 것이지요. 마음이 설레다 못해 초조해지기까지 합니다. 결과가 언제나 참담하지만 저 역시 출조하기 전의 각오는 대단합니다. 가슴이 마구 뜁니다. "오늘은 큰놈들 많이 잡아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끓이고, 남은 녀석들은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가져와야지"하면서 초장이다, 양념이다, 잔뜩 준비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의 기쁨과 설렘으로 충만한 신앙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기쁘다. 나의 하느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뛴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신앙고백 역시 마찬가지로 기쁨과 환희에 찬 것이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 앞에서 크게 기뻐하나이다." 제대 위에서 신자 석을 향해 내려다보면 미사에 임하는 자세가 천차만별입니다. 마치 민방위 교육이라도 와 계신 것 같은 분들도 계십니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무덤덤한 얼굴로 방관자처럼 소 닭 보듯이 쳐다만 보곤 하시지요. 또 어떤 분들은 죽지 못해 앉아 계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정말 지겨워. 도대체 언제 끝나지?"하는 얼굴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뭄에 콩 나듯이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죽겠다"는 얼굴들도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보게 되면 정말 기분이 째지지요. 힘이 생깁니다. 성가를 부를 때도 정말 우렁차게 부르십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귀를 기울입니다. 영성체를 하고 나서는 마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보물을 얻은 듯이 행복한 얼굴이십니다. 기쁨과 설렘은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본질적인 측면 중에 하나이지요. 우리 삶의 주인이시자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우리 부족한 인간을 찾아오시는데, 이것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 앞에 우리 인간이 취할 태도는 감사와 찬미, 기쁨과 설렘입니다. 한 가지 명심할 일이 있습니다. 세상이나 인간이 주는 기쁨은 있다가도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얻었다가도 한 순간에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 기쁨을 추구해야겠지요. 깊고도 은근한 기쁨,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 결국 주님으로 인한 기쁨이겠습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알아 가는데서 오는 기쁨, 주님께서 주시는 그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박영봉 신부- 예수님께서는 부모님에게 순종하셨으며,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우리는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가? -곽용승 신부- 특별히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성령으로 성자인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후에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전적으로 그의 구원 활동에 헌신하고 온전히 이바지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이자 신앙인의 모범으로서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일치한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 최재현 신부- 오늘은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기억하고 떠올릴 때 함께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분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성자인 예수님을 잉태하고 출산한 후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전적으로 그분의 구원 활동에 헌신하고 온전히 이바지하였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이자 신앙인의 모범으로서 하느님의 말씀 자체인 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일치한 어머니이기도 하기에, 성모 성심은 예수 성심과 가장 긴밀하게 결합됩니다. 그러나 성모 성심 공경은 예수 성심 공경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예수 성심 공경은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인간이 그 은혜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모욕 받으신 사랑에 대하여 보속하고 공경하는 것이라면, 성모 성심 공경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공경하는 것이 그 목표입니다. 어떠한 형태의 성모 신심이든 성모에 대한 공경은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모 마리아의 인격에 대한 공경이고, 둘째는 덕행에 대한 공경이며, 셋째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에 온전히 동참하는 성모 마리아의 역할에 대한 공경입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자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인 모든 신앙인의 영적인 어머니이므로 친아들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였듯이 각 그리스도인을 모성적인 애정으로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인류와 교회의 어머니, 은총의 중개자, 전구자, 교회의 보호자로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모 마리아는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었고, 말씀을 품고 사셨으며, 하느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안에 늘 머물러 계셨습니다. 또한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며 묵상하는 구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밑에 계셨던 마리아는 도망가지 않았고 숨지 않았으며, 형틀에 달린 아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끝까지 남아 계셨던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아주 값비싼 보석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작은 티끌이 들어있다면 그 보석의 가치는 떨어지게 됩니다. 순수함을 가지고 있을 때 보석은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공경한다는 것은 마음과 생각과 영혼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여 생활하였던 마리아의 순수한 믿음을 공경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힘들면 하느님을 찾다가 괜찮아지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나 자신이 잘 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교만에 빠지는 우리의 생활은 많은 티끌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은 하늘을 향해 있다고 하면서도 몸은 땅의 일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값싼 신앙을 이제는 벗어버려야 할 때입니다.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앞길을 준비해주신다는 굳은 믿음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간직해야겠습니다. 삶 전체를 주님과 함께 하셨던 마리아의 인격과 그 덕행, 그리고 구원 사업의 협력자이셨던 성모 마리아와 그분의 성심을 공경하면서, 우리도 온전한 믿음과 순수한 사랑을 주님께 두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함께 노력합시다.
주님을 가슴 깊이 간직한 성모성심 -경규봉 신부-
성모신심에 대한 끝없는 논쟁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은총과 신비』, 심종혁 역(서울: 김영사, 1997), 41-43. -.......◆
<아버지의 것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윤경재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 파스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루카 2,41-51) 루카복음 저자는 참으로 용의주도하고 뛰어난 이야기꾼입니다. 소년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루카복음서에서만 나오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들을 미리 서곡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서 시메온 예언자가 예언했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는 내용이 들어맞는다는 것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혜와 권능이 있는 분으로 묘사하기 위해, 그 당시 위인들을 찬양할 때 흔히 쓰였던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는 어법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비범한 분이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아울러 성모님의 모범적인 성덕도 같이 드러내줍니다. 유대 율법에 의하면 남자는 13세 되는 해부터 축제 때 성전순례를 의무적으로 해야 되었습니다. 여기서 루카저자가 어린 예수의 나이가 12살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성전과 율법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말해 줍니다. 아마도 어린 예수가 성전 방문을 한 것은 이번이 첫 방문이었을 것입니다. 첫 방문 때부터 성전에서 사람들을 놀래게 만드는 지혜와 의외성을 드러내 보입니다. 나자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20Km쯤 떨어졌는데 걸어서 3일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 부모가 예수와 헤어져 하룻길을 걸어간 것은 그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예수와 인간 사이의 거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을 잃고서 정신없이 제 길만 걸어가는 인간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과 인간의 집 사이를 오가는 인간적 한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고 말하는 어린 예수의 대답은 지금 우리에게도 상당히 놀랍고 어색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의 것”에 있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리스어 본문의 뉘앙스로는 아버지께서 현존하시는 집인 성전은 물론이고 무엇에서든지 하느님께 속하여야만 한다는 그의 확고한 의지가 드러납니다. 영어로도 “must be 또는 would be”로 번역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도 무엇인가 깨닫고 알아듣도록 요청하고 계십니다. 당장은 알아듣기 힘들어도 앞으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하느님께서 가리키시는 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게 될 것입니다. 루카 저자는 그 모범을 성모님을 통해서 보여 줍니다. 예수의 부모는 어린 자식을 잃고 말할 수 없는 괴로움과 당황한 심정을 경험하셨습니다. 또 일평생 가슴 졸이며 사셨으며 칼로 찌르는 고통을 당하실 것이라는 예언대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묵묵히 참아 내시고 마음에 새겨두시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자세를 닮으라는 요구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여정에서 흔히 겪게 되는 “신앙의 어두운 밤”체험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예수님의 부재는 만사를 하느님께 속한 것에서 찾아야 하는데 인간에게 속한 것에서 찾으려할 때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여러 성인들께서 말씀하는 어둔밤의 경지는 이와는 다릅니다. 그 경지는 주님께 온전히 속하기를 원하는 단계가 완성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주님께서 이끄시는 은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신 성모님과 요셉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나아가는 순례의 길에 있습니다. 그 길에서 주님을 잃고 방황할 때 우선 하느님께 속한 것으로 방향을 틀어야만 주님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인간적인 것을 찾아 나서다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았는지 반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성모 성심 -이수철신부- 어진 어머니에 착한 아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어진 어머니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 역할의 중요성이 암시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여자들에게는 살아갈수록 아내보다는 어머니 역할이 증대되기 마련입니다. 어진 어머니,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지혜로운 어머니를 뜻합니다.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지혜로우신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은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1969년 전례 개혁 때 의무 기념으로 한 등급 낮춰졌다 합니다. 어제 자료를 보다가 재미있는, 의미심장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모님 공경을 강조하여 성모 축일이 제정됐던 시대는 교회가 세속의 격렬한 도전을 받던 위기의 시대였다 합니다. 종교개혁에 이어 17-18세기 계몽주의, 불란서 혁명, 공산주의, 무신론, 세속화 등, 온갖 도전에 직면해 있던 위기의 시대에 교회는 성모님의 품을 찾았고 성모 마리아님은 교회를 보호해 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와 인류의 어머니, 은총의 중개자라 부르며 공경합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의 마음, 그대로 예수 성심의 마음입니다. 평생 아드님 곁에서 동고동락 함께 하셨던 성모님이셨습니다. 복음 말미에 성모님의 모습이 한 구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사흘 동안 실종됐던 12세의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아냈을 때의 예수님의 납득 못할 현실에 당황하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했던 참 어질고 신중한 성모님이셨습니다. 이해 못할 일들은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던 관상가 성모님이셨습니다.
무엇보다 성모님, ‘찬미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이사야의 말씀, 그대로 성모님의 마니피캇을 연상시킵니다.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터져 나오는 이런 찬미의 삶이 온갖 고통을 극복하며 티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늘 주님과 함께 살게 했음을 봅니다. 주님의 십자가 밑에는 성모님과 함께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합니다.
이 미사 중에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예수 성심, 성모 성심으로 살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아멘.
-김효성수녀-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는 나는 수녀회 입회 전에 같이 놀아주었던 어린 조카의 기억이 늘 새롭다. 이따금 명절에 부모님께 갔다가 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 조카를 만나면 꼬마 녀석이 언제 이렇게 큰 어른이 되었는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짝을 찾지 못한 것 같아 지난 조카 생일에는 작고 예쁜 케이크를 들고 갔더니 여간 반가워하지 않았다. 고모, 조카 사이에도 이렇듯 정이 기우는데 하물며 부모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싶다.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 -조욱현신부-
예수의 성심에 자신의 마음을 묶은 어머니 마리아 -박상대신부- "너희들은 불쌍한 죄인들이 가야 할 지옥을 보았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나의 티없는 성심에 대한 신심을 이 세상에 불러일으키려고 하신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을 행하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 또한 평화가 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계속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린다면, 머지않아 더 참혹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어느 날 밤 이상한 빛을 보게 되거든 이것이 세상의 많은 죄악에 대한 징벌 곧 전쟁, 기근, 교회와 교황에 대한 박해가 다가왔다는 하느님으로부터의 징표인 줄 알아라. 이를 막기 위하여 내가 오리니 사람들은 이 세상을 나의 티없는 성심에 의탁하고 매월 첫 토요일에 보속의 영성체를 하도록 하라. 만일 내 청이 이루어지면, 소련은 회개할 것이며, 평화가 이루어지리라. 그렇지 않을 경우 소련은 그 오류를 온 세계에 전파하고 전쟁과 교회에 대한 박해를 유발할 것이며, 착한 많은 사람들이 치명할 것이며, 또 교황은 많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고, 여러 민족들이 멸망하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나의 티없는 성심의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다."(7월 13일 메시지) 이는 성모 마리아의 파티마 발현 메시지 중의 하나이다.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달 13일에 세 명의 어린 목동, 루치아나, 히야친타, 프란치스코에게 총 6차례 발현하신 성모님께서는 매번 메시지를 통하여 죄로 인해 상처받은 하느님의 성심과 이를 또한 아파하는 마리아의 성심과 사랑을 드러내 보여 주셨다.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이다. 예수성심대축일 다음 날인 오늘 교회는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을 마음을 공경하고 경축한다. 전례개혁이 있기 전에는 8월 22일을 그 기념일로 지냈지만, 1970년에 개혁된 로마전례에서 예수성심대축일 다음 날로 이 축일을 결정하였다. 일찍이 많은 교부들이 성모성심에 대한 신심을 예수성심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서 묵상하여 왔다. 교황 비오 7세(1800-1823)께서 성모성심에 대한 신심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을 시작으로 비오 12세(1939-1958)는 1944년 전세계 교회에 이를 선포하였다. 이는 1942년 10월 31일 파티마에서 거행되었던 "티없이 깨끗하신 마리아의 성심에 인간성을 봉헌하는 행사"를 계기로 선포된 것이었다. 이로써 교회는 인간마음의 상징적 의미에 따라 하느님과 아들에게 봉헌한 마리아의 사랑을 전인간을 위한 모성적 사랑으로 공경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성심과 더불어 성모성심을 공경하는 이유는 성모의 마음이 천주성을 지닌 예수의 마음에 전적으로 매어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루가 2,41-51)은 예수의 유년시절에 관한 보도이다. 이 보도의 배경에는 "눈을 감은 채, 그러나 미소를 머금은 밝은 얼굴로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무엇인가를 간직하려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려 주고 있다. 그녀가 간직하려 하는 것이 당장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예수의 성장과 함께 하나씩 밝혀질 것이며, 마지막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그녀의 마음 전부를 채울 것이다. 12살의 예수는 과월절 축제를 지내기 위해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 상경 길에 올랐다. 축제기간이 끝나고 사람들은 제각기 고향으로 향했지만, 예수는 의도적으로 가야할 고향 길을 접어버렸다. 3일 동안 예수는 "아버지의 집"(49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 랍비 등의 학자들과 함께 말이다. 예수는 그들 사이에서 듣고, 묻고, 피력하는 가운데 자신의 기지(奇智)를 모두 발휘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지능과 그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였다고 한다. 예수는 서서히 부모와 선생들과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유대교를 벗어나 다른 의식(意識)에로 커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자기의 때는 오지 않았다. 아직 메시아로서의 결정적인 도래는 멀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자의식(自意識) 속에 메시아로서의 의식이 아직 충만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흔히 방금 태어난 "아기 예수" 안에 온전한 하느님의 신성(神性)과 인간으로서의 인간성(人間性)이 내재(內在)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만약에 그렇다면 "아기"일 수 없다. 아기 예수 안에는 아기로서의 신성과 인간성이 내재할 뿐이며, 이 두 가지 본성(本性)은 온전하고 충만한 신성과 인간성을 향한 잠재력이다. 어린 소년 예수는 바로 그 완성을 향하여 매일 노력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나자렛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이 순종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기 삶 전체를 세상에 내어놓을 그런 순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은 아직 오늘 일어난 사건과 소년 예수의 말을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 이성의 능력이나 통찰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예수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머리 속이 아니라 마음속에 간직하시는 것이다. 이 점은 하느님의 신비가 머릿속에서 파악되기보다는 마음 안에서 충만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찾아 헤맨 "3일간"(46절)은 나중에 "파스카 신비의 3일" 안에서 그 참 뜻이 밝혀질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