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테이블
최지안
원형 탁자가 흰 베일을 흘려보낸대. 물처럼
어떤 정물도 잡아주지 못해 쏟아지는 린넨 물보라들, 무엇이 태어나고 이곳에서 죽어 솨솨거리는 모를
바깥은 겨울, 레이스는 축농증 환자의 쏟아지는 훌쩍임으로, 훌쩍이다가 거꾸로 굳은 촛농으로, 나의 검은 불은 어디에 놓아 주어야 할까, 썩어버린 굴처럼 흐물거리는 오후. 사람은 이제 쏟아지도록, 너의 어떤 손바닥도 테이블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케케묵은 협탁보만 종이학처럼 접었고, 나는 등을 눌러도 납작해지지지 않는 손을 기도했다. 계절은 갔어. 너는 짓이기는 대신 불어 끄는 안온한 초를 기대했고 날숨을 안도하던 나는
오늘 아침부터 평평한 지구를 믿기 시작했다. 밖으로 떨어질 공간이 생겼다는 이유에 안도하면서 사과 심장에 과도를 꽂고 이제 이 비좁은 테이블을 나 떠날 텐데
사람이 없는 협탁 위에도, 물오리가 무릎을 낑깡 터뜨리는 소리가 놓여있으면 좋겠어. 잊었던 연서 따윈 없고, 구십 구도 씨에서 멈춰버린 티포트, 도시적이야? 안타깝지만
내가 없는 곳에도 조명은 두어야겠다. 검고도 흰 기물들을 경배하듯 사선으로, 항상 모던하게 빛나는 오브제들. 사람이 없는 곳마다 유칼리투스 인사가 있다면 좋겠어. 우리가 항복하던 계절에
검은 희잡처럼 모던 테이블, 겨우내 원형 탁자가 흰 베일을 흘러보냈다. 면사포는 없던 이것은 종교도 약속도 아닐 거야. 길몽과 일몰이 한끝 차이라는 너의 말처럼, 주술과 주사위 놀이, 빈 테이블을 위한 경배와 건배―처럼, 화병을 부수고 코르크 뽑고 아모르 안녕 현대적인 인사
사포로 튀어나올 정물을 갈아 없애도 우리의 탁자는 등껍질을 벗고 살아남을 것이다. 테이블보를 순식간에 당기는 탈피의 순간에, 모든 접시들은 모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늘 아침과 어울리지 않는 집시 하나, 홀짝이는 커피 둘. 그리고 여기 살아있는 미드 센추리 모던 테이블
―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1/겨울호)
다도茶道
사람은 얼마나 홀짝이는 정오에 속해 있는지 나는 모른다. 모르니까 묻는다. 히비스커스, 저 괴로운 연인은 양파를 까고서야 운다. 일렁이는 오후의 찻잔 적요로운 것은 윗입술만 담가도 향을 올려낸다. 여기 꽃은 없는데, 나더러 뜨거워지라는 봄의 전말은 악취다. 온몸의 혈관이, 아랫입술의 주름까지 모두 간밤에 네가 내린 뿌리라는 듯 히비스커스, 나는 이맘때쯤 꼭 붉어져야 했다. 다정해질 수도 있었고, 머그잔을 들어 올리면 내 입술은 찻잔에 반쯤 먹힌다. 저 루주를 추려가면서 했던 말은 거짓말. 쟁반에 놓인 마들렌 부서지는 소리가 유언 같다. 찻잔은 홀짝이는 것으로 긴 레퀴엠을 대신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있다. 붉은 뺨을 한 겹씩 덜어 히비스커스, 우리가 기뻐하던 봄이 마른 꽃잎처럼 바스락거린다. 네가 걸어간다. 물속의 잠, 전복되는 부유물의 몸. 이맘때쯤 잎을 누이던 육감의 끝이다. 찻잔은 설거지감이 되어있고 저건 트로피야. 히비스커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다도茶道. 티백 속 뭉개진 얼굴이 가라앉기를 택한다. 기워내는 물고기의 춤. 너의 상처 난 비늘에 죽은 잎을 달아주는 한낮에.
― 최지안 시집, 『이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천년의시작/2020)
최지안
2020년 시집 『이대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으로 작품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