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슬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핸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
♣어휘풀이
-프란시스 잼 : 프랑스 상징파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 프라하 출신의 독일 시인
♣작품해설
아름다운 이상에 대한 동경을 주제로 한 이 작품(1941.11.5.)은 난해함이 없는
산문체의 질서적 표현기법으로 친근감과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이 시는, 가을
하늘과 별과 시인의 고향이 되어 버린 북간도(北間島)의 이국정조(異國情調)와
망국(亡國)의 민족적 비애가 함께 어울려 애잔한 감동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별’은 이 작품의 중심 소재로서 윤동주가 즐겨 사용하는 이상적 세계의 이미지
이다. 윤동주는 이상과 순수, 구원의 상징인 별을 헤면서 여러 상념에 젖고 시를
떠올리며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그가 별을 다 헬 수 없는 것은 그가 꿈꾸는 것이
많기도 한 탓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밤이 빨리 지나가기 때문이며, 번민과
고뇌로 상징되는 젊은 날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별을 헤며 불러보는
아름다운 말들은 ‘추억’(소학교 때 –이국 소녀들의 이름), ‘사랑’(벌써 –계집애들의
이름), ‘쓸쓸함’(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 ‘동경’(비둘기, 누루), ‘시’(프란시스 잼-
시인의 이름)로 상세화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시인이 추구하는 별(이상)처럼
멀리 존재할 뿐이다.
그리움과 쓸쓸함의 근원인 어머니는 북간도까지 쫓겨 간 윤동주의 어머미이자
그 곳에 살고 있던 수 많은 우리 민족의 어머니들이요, 일제에게 수탈당한 한국인
의 상징적 어머니 상(像)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곧 모국(母國)의 표상인 셈이다.
이제 그는 극도의 순결 의식을 가지고, 지나칠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가 되어 어머니를 부르며 ‘흙으로 덮어버린’ 자신의 이름에 절망
한다. 그 ‘부끄러운 이름’은 창씨개명(創氏改名)으로 더렵혀진 한국인 모두의 이름
이자, 이상에 충족하지 못하는 제 자신의 삶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금은 비록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으로 살고 있지만, 먼 훗날 이 땅에 다시 봄이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가 꿈꾸던 이상은 마침내 실현되고,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
나듯’ 그의 무기력했던 삶도 소생, 부활할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작가소개]
윤동주(尹東柱)
1917년 북간도 명동촌(明東村) 출생
1925년 명동소학교 입학
1929년 송몽규(宋夢奎) 등과 문예지 『새 명동』발간
1932년 용정(龍井)의 은진중학교 입학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
1936년 숭실중학 폐교 후 용정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전입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
1942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 입학, 가을에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전학
1943년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 16일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유고시집, 1948), 『별을 헤는 밤』(1977),
『윤동주 시집』(1984), 『윤동주자필시고전집』(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