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50413. 묵상글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 - 나의 구원이신 분? 나의 도움이신 분?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17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7:05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7:05 추가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4.13 05:12
- 나의 구원이신 분? 나의 도움이신 분?
성지주일 복음만 읽으면 저는 제 오래전 그러니까 첫 미사 때 강론이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앞으로 저의 사제 생활이 어린 나귀의 삶이 되게 하겠노라고 말했지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을 보고서
어린 나귀가 혹시 자기를 보고 환호하는 줄 착각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제 등에 태운 주님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저도 사람들이 저를 반기고 사랑해줄 때 제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 등에 태운 주님 때문에 그런 것이니 내가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오히려 주님을 태우기에는 힘도 경험도 없는 어린 나귀이니 겸손해야 한다고.
더욱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광 받으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수치스럽고 참혹한 형벌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서
주님이 들어가시는 것이니 그런 주님께 어울리는 어린 나귀여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과 떼어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인데 사람들은 자주 자기 좋을 대로 착각합니다.
오늘 입성 때 예루살렘 사람들은 주님을 “호산나, 다윗의 후손”하며 찬양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호산나란 ‘구원하소서.’라는 뜻과 ‘만세’의 뜻이 같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니 구원해주시는 분 만세라고 환영함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 구원이 그때도 지금도, 어제도 오늘도 늘 문제입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출하시어
다윗의 왕조를 재건하시는 분으로 착각하고 ‘만세’ 하며 환영하였는데
그러나 주님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고,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잖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시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착각은 우리 인간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저도 구원 착각을 자주 하는데
주님의 구원 사업에 함께하는 가운데서 자주 착각이란 것을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제가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면서 합니다.
그런데 시작은 그런 마음으로 하지만 중간에 하느님 일이 제 일로 바뀌면서
제가 하느님 일의 도구가 아니라 자주 하느님이 제 일의 도움이 되십니다.
북한 사업을 할 때 처음에는 그저 인도적인 사업을 하다가 수도자가 그저 인도적인
사업만 해서 안 되지 않는가, 복음화 사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자각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평양에 종합 복지관 건립을 저와 형제들의 상주 조건으로 추진했는데
당연히 어려움이 많았고 마지막에는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하느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고 일을 완전히 접었습니다.
그런데 한 보름 지나서 다시 타협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너무 기뻐 서둘러 경당으로 가 감사기도를 드렸는데,
그때 감사하는 저를 보면서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하느님께 감사하는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진 것 때문에 감사하는가?
아니면 나의 뜻이 이루어져서 감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느님 사업이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고,
이것이 이루어지도록 내가 하느님 도구로 애쓴 것일 뿐이라면
하느님께서 내게 감사할 일이지 왜 내가 하느님께 감사하는가?
내 일을 하느님께서 도와주시어 감사하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성찰과 반성이 되면서 저는 또 하느님의 일을 제 일로 만들었음을 봤고,
저의 구원이시어야 할 하느님을 저의 도움이신 분으로 만들었음을 또 봤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의 일을 도와주러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나를 빼내 저세상으로 데려가려고 오시어
당신 죽음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주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
나의 도움이신 분인지, 나의 구원이신 분인지 깊이 성찰하며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이 아니라 골고타를 향한 십자가 길을 가야겠습니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 열다섯 번째 주간 실천
하느님의 숨
2025.04.12. 17:04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4월 12일 토요일 (호명환 번역) 열다섯 번째 주간: 사막의 지혜
생각에 집착하는 정신을 내려놓고 받아들임의 공간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어느 수도승이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Basil of Caesarea)을 찾아가 말했다. "사부님, 한 말씀 해 주십시오." 그러자 바실리오가 대답했다. "그대는 마음을 다해 주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자 그 수도승이 즉시 떠나갔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수도승이 다시 와서 말했다. "사부님, 저는 사부님의 말씀을 지키느라 고군분투하였습니다; 이제 다른 말씀을 한 마디 해 주십시오." 그러자 바실리오가 말했다. "그대는 그대의 이웃을 그대 자신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자 그 수도승은 다시 순종하여 그 말씀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수방(혹은 암자: cell)으로 물러갔다.
- 사막의 교부들의 금언집(Sayings of Desert Fathers), 베네딕다 워드(Benedicta Ward)
영성 관련 저술가 크리스틴 발터스 페인터(Christine Valters Painter)는 우리도 사막 수도승들이 했던 "말씀" 한 마디를 청하는(asking for a word) 수양을 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금언집에서 종종 반복되는 한 가지 전통이 있습니다.... 한 마디의 말씀을 청하는 전통인데, 이 전통은 며칠간이나 몇 주간, 몇 달간, 아니면 때로는 인생 전체에 걸쳐 깊이 숙고할 그 무언가를 찾는 길이었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는 대개 그 말을 듣는 이를 성장시켜 주고 도전을 던져 주는 짧은 문구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 내용을 따르기 위해 수도승이 내면의 씨름을 하여 자신을 점차로 성장시켜 가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한 마디 덕담이 몇 년씩이나 한 수도승에게 작용할 수 있었는지를 잘 드러내 줍니다. 꾸준히 추구된 한 마디 말씀은 신학적인 설명이나 조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연장자와 견습자 사이에 발전된 관계의 일부였기에, 이 한 마디 말씀을 제자가 받으면 그 말씀이 그 제자에게는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의 지혜를 구한다면, 여러분은 생각에 집착하는 정신을 내려놓고 받아들임의 공간으로 들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 이야기 안에 여러분이 있다고 상상해 보고 생명을 주는 말씀을 청해 보십시오. 그 말씀은 아마도 어떤 글로부터 여러분이 받은 어떤 영감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대개 여러분이 고요함 속에 있을 때 올 수 있는데, 그런 고요함의 시간 이후 며칠이나 지나서 시의 한 문장처럼 오기도 할 것이고, 그것이 별로 기대치 않았던 어떤 자료에서 받은 지혜일 수도 있으며, 꿈속에서 받은 어떤 메시지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상상을 사로잡아 곰곰이 되새기는 이미지 같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매일 산책을 하면서 종종 이 한 말씀을 청하곤 합니다. 그리고 저는 나무들과 비둘기들이 저에게 해 주는 말이 무언지를 귀여겨 듣곤 합니다. 한 말씀이 들려오면 그 말씀이 대개 저에게 계속해서 동시적으로 들려오기에 이것이 제가 청한 한 마디 말씀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씀의 목적은 그 말씀을 마음에 단순하게 간직하되, 그 말씀을 분석하지 말고, 다시, 또다시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내면에 그러한 말씀이 들릴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입니다.
References
Christine Valters Paintner, Desert Fathers and Mothers: Early Christian Wisdom Sayings (Skylight Paths Publishing, 2012), 2, 4, 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Krn Kwatra, Untitled (detail), 2022, photo, Om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위 사진은 사막의 교모들과 교부들처럼 어떤 사람이 독거(solitude)와 영감(inspiration)을 찾기 위해 사막으로 걸어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
숨영성 묵상글
이 성주간이 엄청난 은총의 시간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숨
2025.04.13. 06:07
1983년에 Def Leppard라는 락 그룹이 발표한 "Rock of Ages"(영원한 반석)라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Nothing in my hand I bring,(내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아요.)
Simply to thy cross I cling.(그저 당신의 십자가만을 부여잡기 위해서요.)
그런데... 만일 우리가 '내'가 성취해낸 것이나 명성, 자랑거리 등에 매달려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꼭 붙든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아니 어려운 일이라기보다는 아예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우리의 힘이 완전히 바닥날 때에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심장부가 되는 상징입니다. 사실 십자가의 의미는 대개 우리가 원치 않는 시련을 겪을 때 발견되는 것이지 편안한 삶에서는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는 어떤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에디스 시트웰(Edith Sitwell)의 [아직도 비가 내린다(Still Falls The Rain)]라는 시에도 이런 싯구가 나옵니다.
아직도 비가 내린다.
인간의 세상처럼 어두운, 우리의 상실(喪失)처럼 검은,
십자가에 박힌 천구백사십 개의 쇠못처럼 맹목적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장식이나 우리의 신원을 드러내 주는 외적인 배지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우리의 아픔과 몸부림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이 십자가는 우리가 가장 힘들어하는 순간에도 희망이 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우리의 최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알기 위해 당신을 응시하라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용하게(?) 외치십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이 무한한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라고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엄청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우리 삶에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고통도 있고, 우리 삶에서 피치 못하게 겪어야 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는 고통이 우리가 만들어내는 고통이 아닐까요?!
몽키-트랩(monkey-trap)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몽키-트랩은 원숭이를 잡을 때 쓰는 도구라고 합니다. 손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 목이 짤쭉한 큰항아리를 원숭이가 다니는 길에 가져다 놓고 그 안에 바나나와 같은 맛난 과일을 넣어 놓는답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와서 그 항아리에 든 과일을 빼내기 위해 손을 집어넣어 과일을 잡고 손을 빼내려 하는데, 과일을 쥔 손이 항아리에서 빠지지 않겠지요?! 손에 쥔 과일을 놓아야만 손을 뺄 수 있는데 계속 과일을 쥔 채로 과일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사람한테 잡히게끔 하는 것입니다. 원숭이의 욕심을 이용한 올가미인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몽키-트랩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욕심,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게으른 습관들, 중독들, 화와 분노 등, 우리가 웅켜쥐고 있는 모든 것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삶을 몽키-트랩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아요. 그저 당신의 십자가만을 부여잡기 위해서요."라는 노래 가사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인 오늘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인 피치 못할 고통도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고통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내맡기려는 노력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말씀으로 우리를 확신시켜 주고자 합니다. "그분(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또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게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 도움이 되게 합시다."(히브 4,14-16).
사도 바오로도 우리에게 이런 믿음의 확신을 가지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의로눈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5; 7-8).
그러니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주간 동안 어떤 것이든, 그것이 우리가 만들어낸 고통이든, 우리 생각이 만들어내는 복잡함이든, 우리가 피치 못하게 당해야 하는 시련이든, 우리가 꼭 쥐고 놓지 않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하느님 사랑을 깊이 응시하고 숙고하고 관상하는 시간이 되게 합시다!
그러면 이 한 주간이 우리에게는 엄청난 은총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4.13 06:02
한 수도승이 우연히 길 구석에서 여자와 간음하는 수도승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수도승이 저럴 수가 있냐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소리를 지르며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수도승과 여자가 아니라 한 무더기의 곡식더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자와 성적 관계를 하는 자기 환상을 곡식더미에 투사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뒤, 이 수도승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게 될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거울삼아 자기 자신을 다시금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먹으면서 점차 죄를 멀리하고 선을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남의 죄를 잘 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그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자기 관심사가 더 눈에 잘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에서 자기가 찾는 어떤 물건이 있으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그것만 보이지 않습니까? 저도 어느 집을 방문하게 되면, 제 눈에 제일 잘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나 성모상과 같은 성물일까요? 아닙니다. 아닙니다. 주로 책장에 있는 책만 보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관심사가 책에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죄가 그렇게 잘 보였던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관심사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남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죄 짓는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버리고, 선을 행하는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온 백성은 올리브 나뭇가지를 흔들며 길에 자기 옷을 깔고 그분을 환영합니다. 이 순간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이렇게 열렬하게 환영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과 며칠 만에 180도 바뀌고 맙니다.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고함지르고 있으며, 침을 뱉고 발로 차면서 모욕하고 조롱합니다. 그들의 관심사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모욕과 조롱을 받아야 할 사람은 우리입니다. 너무나 많은 죄를 짓고 있으며, 또 그 죄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그 죄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분이시지만, 죄로 가득 찬 상태에서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죽어 마땅한 죄인으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누군가의 죄가 보일 때, 자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간직해야 했습니다. 그때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주님께 커다란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됩니다.
---------------------
오늘의 명언: 내가 나에게 예의를 갖춘 시간이 모여 내 가치가 소중해지고 빛나는 것이구나(밀라논나).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주님 성지 주일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주님 수난 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징적 행위로 성지가지를 축성하여 성당에 들고 들어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들었습니다.
오늘 <전례> 역시,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호하고 환영하던 행렬은 배척과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뀌고, 하늘높이 흔들던 영광과 축복의 성지가지는 저주와 모욕의 채찍으로 바뀝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바로 그들이, 이제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위에 오르셨던 바로 그분은 이제 십자가 위에 매달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왕으로 성 안으로 모셔진 바로 그분이, 죄인으로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일을 <제1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미리 예언하고 있고,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찬미노래로 부릅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는 부활성야 때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일은 우선 사랑을 거절한 까닭이 아닐 까요!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까닭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아드님이 왔건만, 그 사랑도, 그분도 거절된 까닭이 아닐 까요! 결국,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고통 받으신 것이 아닐 까요! 그리고 오늘도 어쩌면, 당신 사랑이 나의 거절 때문에 고통 받고 있지는 않을 까요!
그렇지만, 당신의 사랑은 너무도 커서, 거절당해도 멈출 수가 없는 사랑인가 봅니다. 하도 커서, 배신을 당해도 그칠 수가 없는, ‘죽기까지’ 해도 다하지 못할 사랑인가 봅니다. 그렇게 사랑에는 자신을 죽이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인가 봅니다.
이처럼,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고,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루카 23,34)하고 간청하십니다.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끝까지 용서하시는 충실하시고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이렇게, 그분의 수난과 죽음이 빚어진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거절 때문이지만, 실상 드러난 것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 ‘신실하시고 충실하신 사랑’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고통 받으셨고, 고통 받으면서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셨고, 상처 받으면서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셨으니, 그런 사랑을 먹은 우리 또한 이미 받은 그 사랑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걸까요? 왜 예수님을 거절한 것일까요? 종교지도자들과 원로들은 왜 예수님을 반대한 걸까요? 왜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걸까요? 또 유다스와 베드로, 그분의 제자들은 왜 걸려 넘어진 걸까요?
그것은 그들이 작아져서 못해 섬기려 하지 않은 까닭이 아닐 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배와 권세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옥신각신 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내세우다 꾸중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옆자리를 요구하다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화를 내다가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작아져서 섬기려 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의 왕들과 기득권자들은 가진 자로서 권세와 횡포를 부리고, 지배하고 군림하고자 합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작은 자들에게서 빼앗고, 힘없는 이들을 때리고 억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것을 다스림의 기준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하십니다. 아버지를 섬기고, 제자들을 섬기고,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마저도 섬기십니다. 참으로, 작아지고 낮아져서 남을 섬기며,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종으로 자처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뒤따르는 우리의 삶도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호사스런 영광을 취하기보다, 작아져서 섬기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오늘, 혹 우리 역시 당시의 제자들처럼, 작아져서 섬기려하지 않으려다 자칫 예수님을 거절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고통을 사랑으로, 거부와 배척을 용서로 응답해 가며, 우리에 대한 충실하심과 신심하심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께 대한 의탁과 희망을 결코 저버리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참으로 그분의 충실과 신실하심이 그침이 없으시니, 우리는 그분 안에서 행복을 얻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랑를 찬미하며 경배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루카 23,34)
주님!
그 어떤 모든 일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이게 하소서.
그 어떤 저의 거절 때문이라도 드러난 것은
당신의 크신 사랑이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시고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그 사랑을
결코 잊지 말게 하소서.
상처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게 하소서.
죽기까지 그침이 없이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성서는 우리에게 크게 다섯 가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서의 모든 내용은 이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끌어낸 주 하느님 외에는 어떤 신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외에는 다른 어떤 신도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어 그들보다 더 크고 강한 민족들을 내쫓으시고 약속의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셋째, 이스라엘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분만을 사랑하고 섬기며 그분이 내리시는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넷째, 주님의 말씀을 몸과 마음에 깊이 새길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거듭 들려주고 집안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 놓아 식구들 모두에게 알려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해야 하고, 신앙인은 자손들에게 전해 받은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 다섯째,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분의 모든 계명을 실천하면 이스라엘은 축복받아 그 땅에서 번성할 것이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들 위에 저주가 내려 그 땅에서 쫓겨나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입니다. 마치 길가에 뿌려진 씨와 같았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곧 말라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유혹이 다가오자 쉽게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곧 냉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욕심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입니다. 마치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와 같았습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앗은 뿌리는 내리지만, 가시에 찔려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서 제자가 되었지만, 고난의 시간이 다가오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던 베드로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안다면 천벌이라도 받겠다며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군중들입니다. 가난하고, 굶주리고, 헐벗은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 곁에는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시는 어머니 성모님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성모님은 예수님 고난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에 넘어지셨던 예수님은 잠시 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드렸던 베로니카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슬픔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 예수님의 ‘일어나라’라는 말씀으로 죽었다 살아났던 소녀의 어머니, 예수님께 믿음을 칭찬받았던 이방인이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고 새 삶을 찾았던 여인,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던 십자가 위의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성서는 이들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속에 있었는지,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와 함께 있었는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처럼 나 역시 예수님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모함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갈 수 있다면,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처럼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의 편에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나의 신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유다와 베드로의 삶이었다면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과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의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너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라고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네. 하느님은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십니다. 3년 동안 그렇게 많은 이들을 만나고 많은 말씀을 들려주신 주님께서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생각나십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던 그 사람들 지금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와 제자들…….지금 어디 있습니까? 주님께서 손을 얹어 병을 낫게 해주신 사람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어려울 때, 내가 아플 때, 내가 외로울 때 주님을 찾았던 나는 지금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증언해야 할 때, 주님이 우리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야 할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침묵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못 본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도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침묵과는 다릅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침묵의 외침이 더욱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이 어디입니까? 사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찰나의 감동이 아닌 말씀을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십시오. 사랑과 용서의 길을 걸으십시오. 이해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고집을 버리려 노력하고, 웃어주려 노력하고, 쓰러지면 일어나려 노력하십시오. 그 끝에 기쁨이 있고, 그 끝에 용서가 있고, 마침내는 부활이라는 선물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그 길을 가길 희망합니다.
⭐그거면 된다.
얼마전 방영했던 ‘스터디 그룹’이라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다고 합니다.
자신감을 되찾는 데 필요한 건
100점짜리 시험지가 아니야.
그저 동그라미 하나로 충분하거든.
맞습니다.
자신감을 되찾는 데 필요한 건 그리 큰 것도 거창한 것도 아닙니다.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가는 것이 큰 어려움이 아닐 수 있습니다.
작은 응원과 격려로도 우리는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마세요.
작은 것. 그거 하나면 충분합니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키엣 대주교님.
https://cafe.daum.net/bbadaking/LLVy/554 25.04.14 04:18
선택의 순간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영광에 이르는 순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는 죄 없으심에도 온갖 비난과 핍박 속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 형벌을 받으시는 고통스러운 예수님의 모습만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그 순간을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하셨습니까?
비판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명백한 패배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본다면 그 죽음이야 말로 엄청난 승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수난의 순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위대하게 드러내는 순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극한의 절망으로 치닫는 고난 중에서도 여전히 넘치는 사랑과 자비, 평정을 유지하셨습니다. 불공정한 판결에도, 군중들의 아우성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변함없는 평정심과 용서와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증오를 관대한 사랑으로 증명한 승리입니다.
생명이 있는 인간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신 예수님 또한 그 고통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으셨지만 당신의 죽음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이기에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평정의 마음으로 치욕과 고난의 길에 들어서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한 제자의 양심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는 자애롭지만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담고 있는 예수님의 눈빛에서 비난이 아닌 나약한 제자를 용서하는 관대한 사랑의 모습을 깨닫고 깊은 참회의 슬픔에 잠겼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의 고통이 골수에 스며들고 마지막 남은 힘이 모두 다 소진되는 순간에도 죄 지은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하느님께 청하셨습니다.
주님의 용서의 사랑은 세상의 모든 분노를 산산이 조각 내어버렸습니다. 주님 사랑의 빛은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 속을 더욱 더 밝게 비춰주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진흙 속에 피는 연꽃과 같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온전한 사랑은 분노와 잔인함, 비겁함 등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고귀한 사랑입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순명의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명의 마음으로 그 어려운 고통을 견디셨고 치욕스러운 고난 속에서 승리하였기에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셨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유혹과 선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였는지 돌아보십시오. 힘들고 고통스런 선택이지만 그 길이 바른 길이기에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는 지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고통은 주님의 십자가 고통에 견줄 수 없는 아주 작은 고통입니다. 그럼에도 그 고통을 피하고자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전에, 아니 주님의 뜻을 외면하고 현실과 타협해 버리지는 않는 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겸손하시고 인자하신 주님, 저희가 주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지혜를 주시고 고통을 견디고 바른 길, 주님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는 항상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 지 생각해보십시오.
2. 변화하는 세상에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휩쓸려 가고 있지는 않는 지 돌아보십시오.
3. 주님 사랑의 승리, 그 의미는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짜 예수님은 누구인가?
“참사람의 모범”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10일 대선 캐치프레이즈로 “진짜 대한민국”을 내 걸었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말씀을 토대로 “진짜 예수님은 누구인가?”를 밝혀 영원한 참 사람의 모범으로 삼고자 합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진짜 예수님을 닮는 일이야 말로 믿는 이들 누구나의 필생의 과제입니다. 잠시 나누는 옛 현자의 지혜입니다.
“재물 앞에서 구차하면 비굴한 삶을 산다. 고난을 두려워하면 실패조차 하지 못한다.”<다산>
“재물 앞에서 구차하게 구하지 말고, 고난 앞에서 구차하게 피하지 마라.”<예기>
재물 앞에서 참으로 초연했고 오늘 수난기에서 보다시피 고난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겪어내신 참사람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평생 닮아야 할 분, 진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말씀 배치대로 자연스럽게 밝히려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참 임금”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시 환히 드러난 예수님의 진면목인 참 임금입니다. 겸손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인간 품위의 전형 참 임금 예수님입니다. 우리 역시 참 왕답게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평화와 영광의 예수님이심을 고백하는 제자들을 꾸짖으라는 바리사이들이 경박한 조언에 예수님의 즉각적 반격이 참 통쾌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참 임금이신 예수님을 소리 높여, 마음을 다해 고백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들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우선 하느님의 제자직에 충실한 분이었습니다. 이사야서 주님의 종은 고백은 그대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열어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잘 귀기울여 듣기 위한 침묵입니다. 주님 말씀을 잘 듣는 경청 역시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비움의 사람”이었습니다.
일상에서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모두 비움의 계기, 겸손의 계기, 순종의 계기로 삼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 덕으로 나가는 첩경의 지름길입니다. 필리피서 찬가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니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를 그대로 보여 주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수난기를 시작하면서 참 좋은 영원한 선물인 성찬례를 남겨 주셨습니다. 공동체 건설에 영원한 평화와 일치를 위한 사랑의 선물로 성체성사 미사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는 너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평생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의 힘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즉 주님의 미사은총으로 주님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군림하거나 권세를 부리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가장 낮은 섬김의 중심 자리에 바로 예수님께서 섬기는 사람으로 계십니다. 참 영성의 영원한 표지가 “섬김”이요, “섬김의 여정”을 살아갈 때 그대로 예수님을 닮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왕다운 삶의 품위의 기반은 하느님과 사랑과 생명의 소통인 기도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항구히, 절실히, 바치는 기도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기도로 요약됩니다. 기도에서 들음도 사랑도 비움도 섬김도 나옵니다. 예수님의 감동적인 기도 사례들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진짜 참사람 의인 예수님이심을 고백한 백인대장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수난 현장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거울에 “있는 그대로” 반사되어 드러나는 모습들 같습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무수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군상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남은 생애 진짜 예수님을 닮아 왕다운 품위의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한결같이, 끝까지,
영원한 청춘으로, 영원한 현역으로,
들음의 사람, 섬김의 사람, 사랑의 사람, 비움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부족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아멘.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2025년 4월 13일 오후 6:29
<나의 마지막 길에 함께 하는 사람들>
올리브 산에서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전경은
참으로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던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쉼 없이 걸어왔던 힘겨운 길이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결코 포기하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맞아주고 있다
겉옷을 길에 펴놓고
환성을 지르며 나를 반기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나의 길을 모른다
자신의 기대와 감정에 이끌려 기뻐할 뿐
나의 길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최후의 만찬을 거행한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제자들
얼마나 사랑했던가
나의 모든 것을 내 주었다
아무런 대가없이
그러나
이들은 나를 버리고
살고자 자신의 길을 간다
배신의 입맞춤 하며
나를 팔아넘긴 가련한 제자 유다
초주검으로 피땀 흘리는 나와 함께
한시도 깨어 있지 못하고
피곤에 지쳐 쓰러진 제자들
힘없이 붙잡힌 나를 두고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완강히 버티다
슬픔에 젖은 나의 믿음 가득한 눈빛 마주하고
가슴 찢으며 슬피 우는 베드로
더 많은 이들이
나의 마지막 길에 함께 한다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병사들
두 눈을 부릅뜨고
잡아먹을 듯이 외쳐대는
스스로 의로움에 사로잡힌
대사제들과 원로들
자신을 군중에 묻어버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않으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대는 사람들
정의와 불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흔들거리며
지도자의 권위를 스스로 내팽개치고
제 책임 떠넘기는 추한 빌라도
소문과 흥미에 놀아나는
천박한 정치꾼 헤로데
가진 자들에게 삶을 저당 잡혀
채찍질하고 못 질하는
힘없고 불쌍한 하수인들
영문도 모른 체 끌려나와
십자가 여정의 귀한 벗이 되어준
고마운 키레네 사람 시몬
짓이겨진 나를 지켜보며
아무 것 할 수 없는 자괴감에
피눈물 흐느끼는 여인들
저주와 모독 가득한 절망으로
참회와 속죄에 담긴 희망으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들
처연한 평화 깃든
내 가쁜 생의 마지막 호흡에
함께 한 백인대장과 가슴을 치던 군중들
추악한 음모를 획책하는 의회 의원들 가운데
단 하나 의롭게 빛났던
내 주검을 곱게 감싸 따뜻하게 묻어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처참한 내 주검마저
곱게 보듬어 마음에 새기려는
갈릴래아에서부터 함께 했던
착하고 고운 여인들
나는 혼자이다
그러나 결코 혼자가 아니다
내 삶의 순간순간에 그러했듯
내 삶의 마지막 죽음의 길에도
무수히 많은 이들이 나와 함께 있다
어떤 이는 나를 따르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배척하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살리기 위해
어떤 이는 나를 죽이기 위해
이제 그대를 나의 이 길에 초대한다
바로 지금여기 그대 곁에서 내가 걷고 있다
과연 그대는 어떻게 이 길에 함께 하겠는가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성주간이 시작이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성주간은 사순시기 마지막 주간, 즉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 부활 전 한 주간을 말합니다. 그 중에 주님 만찬 성목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 3일을 성삼일(聖三日)이라하여 일년중 가장 거룩한 기간입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교회는 예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한 사건을 기념합니다. 성주간을 시작하는 주님 성지수난 성지 주일은 우리 또한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영혼의 예루살렘에 들어가 주님 수난의 마음자리에 함께 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유다인과 무슬림들의 공통적인 영적 성지입니다. 최초의 종교개혁이 단행된 곳인(2열왕 18,1-4; 2역대 29-31장 참조) 종교적 중심지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희망에 있어 핵심적 역할을 한 장소입니다. 또한 역사적 변천의 파도에 휩쓸리기도 하고 하느님의 은총과 분노를 번갈아 가며 체험한 희망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불충실이 장소이자 심판의 장소입니다.
예루살렘은 마르코복음서에서 시작하여 요한복음에서 이르기까지 중요한 위치로 묘사된 장소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배척한 장소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가장 지독한 적대자들을 낸 곳도 예루살렘입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생애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귀착점이요 목적지입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회개하여 그분의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한 바오로는 옛 예루살렘을 떠나 하늘에 기반을 둔 새 예루살렘인 천상 예루살렘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인 천상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처소이며 그곳에서는 그리스도의 파견이 완성되는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전이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 또한 영혼의 천상 예루살렘에 들어가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이 곳은 하느님의 수난, 다시말해서 박해와 모욕을 사랑으로 견뎌내어 하느님 사랑으로 일치된 영혼의 천상 예루살렘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수난 없이는 영혼의 예루살렘에 들어가 참된 평화와 사랑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그분의 다섯 상처를 바라보십시오. 그 예루살렘의 마음자리에 들어갈 때 고통중에 많은 위로와 힘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배척한다 하더라도 그 고통을 이겨낸 사랑으로 인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모욕과 비난의 말을 들을 지라도 잘 참고 견디게 됩니다.
주님 수난을 되새기는 성 주간에 우리는 오로지 자신의 위안만을 얻고 고통없는 무사안일적인 도피적 신앙보다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의 생생한 십자가의 현장에 들어갈 때 우리는 이미 영혼의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분이 겪으셨던 수난의 고통에 담겨진 참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조롱하도록 놓아 두시지 않는다
성탄절이 되기 얼마 전인 12월 17일에 게르트루트 양은 자신의 학교에 전파되고 있는 믿음의 은총에 대해 일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끔찍한 놀이 하나를 고안해냈다. 이 놀이는 학교에서 진행하기에 충분했다. 안젤라는 스스로 문답놀이에 관계했다.
“만약 너의 부모님이 너를 부르시면 어떻게 하겠니?" “제가 가지요.”’ 안젤라는 수줍어하면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매우 좋아요. 아이들이 으례 그렇듯이 너도 부모님이 부르시면 얼른 가겠지. 그렇다면 너의 부모님이 굴뚝 청소부를 부르면 어떻게 될까?" “그가 오지요.” 안젤라가 말했다. 그녀의 가슴은 거칠게 뛰었고 함정에 빠져들고 있었지만 이를 알지는 못했다. 게르트루트 양은 눈을 번뜩이면서 계속해서 물었다. 한 어린 목격자가 후에 나에게 말해 주었었다. “그녀는 정말 심술궂게 보였어요,’---“좋아요, 굴뚝 청소부는 살아 있고 또 존재하고 있으니까 올 수 있겠지요.”---한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다시 여선생은 계속했다. “너는 살아 있기 때문에 온다고 할 수 있었지. 그러나 만약 너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할머니를 부른다고 가정해 보자. 그녀가 올까?" “안오시죠,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안젤라가 대답했다. “훌륭해요. 그리고 너의 부모님이 푸른 수염의 기사를 부르거나 빨간모자 소녀를 부른다면 어떻게 되지?” " 아무도 오지 않아요, 그건 동화일 뿐이 잖아요.” 안젤라는 시선을 들었다가 곧 내렸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상대자의 번뜩이는 눈을 쳐다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우 훌륭해요.” 여선생은 의기양양해졌다. “넌 오늘 매우 영리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여러분들도 살아 있고 또 존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부르면 온다는 것을 알겠지요. 그러나 존재하지 않거나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은 사람을 부르면 아무도 오지 않아요. 분명히 맞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네” 학생들이 합창했다. “그럼 이제 실험을 한번 해보도록 합시다.”(335)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2,46)
매일 매일은 다 거룩한 날들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한 해 가운데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를 성주간이라 지정하고, 성 주간 가운데 성목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를 성삼일이라고 해서 거룩하게 거행합니다. 가장 거룩하고 신비로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동참하는 전례를 장엄하게 거행합니다.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수난기를 봉독하면서 성주간 내내 교차하는 하느님과 인간의 대조 곧 환희로 넘친 환영과 우울한 배반과 배신, 희망에 넘친 밝음과 절망에 찌든 어둠의 순간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임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인간의 무지와 죄를 진솔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제자들이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올라타시게 하였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루19,35~36) 그러자 많은 사람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따름노래2)라고 예수님을 왕처럼 열렬하게 환호하며 환영하였지만, 주님에게는 사실, 이 순간과 이날은 참으로 힘든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환호하며 환영의 노래를 불렀던 이들이 머지않아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23,21)라고 외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낌새는 이미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우시는 가운데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면...!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19,42)라는 말씀에 잘 드러납니다. 물론 성지 주일의 의미는 우리에게 참된 구원의 평화를 가져다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고 환영하고 환호의 노래를 불러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의 수난기(22,14~23.56)입니다. 복음엔 많은 인물이 등장하며 그들은 어쩜 우리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들입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가운데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우유부단한 베드로, 자신의 이상과 배치된다고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무지한 군중들, 자신들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은 채 지키려고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내몰리게 한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그리고 최고 의회 의원들, 알량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소신과 양심을 저버린 빌라도와 헤로데 그리고 그들의 부하들 그리고 함께 못 박힌 좌도의 모습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 부끄럽고 죄스러운 어둠을 보면서 아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예수님의 고통을 보고 애통해 우는 예루살렘 부인들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간 키레네 사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자비를 청한 우도 그리고 십자가 밑에서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하고 고백한 백인대장의 선한 마음과 아름다운 마음은 우리를 분발하게 하며 인간에 대한 희망을 엿보게 합니다.
이와 대조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의 배반과 모욕과 조롱 그리고 엄청난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굳건하며, 침착하고 담대한 모습을 유지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예고한 대로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으며,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습니다.”(50,5.6) 또한 사도 바오로가 선포하였듯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2,6~8) 이렇게 주님은 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시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려고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치열했지만 엄숙하게, 처절했지만 평온하게 죽어 가시면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라고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로써 하느님 앞에 그리고 역사 앞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심으로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이로써 아버지께서 이루고자 하신 구원 사업을 성취하셨기에, 아버지께 모든 것을 다 봉헌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반면에 제자들은 배신과 배반의 끝까지, 군중들은 무지와 무모함의 끝까지, 지도자들은 잔인함과 이기심의 끝까지 떨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죽음 후의 부활을 깨닫는 성주간 /
박윤식 [big-llight] 2025-04-12 ㅣNo.181444
법정에 선 한 살인자가 있다. 최종 선고 직전에 주위의 시각을 보자. 첫 번째는 검사일 게다. 그는 살인자의 잘못한 점만을 뚫어지게 본다. 두 번째는 변호사이다. 검사와 대조적으로 그자의 좋은 면만을 직업상으로 한정해 부각시키리라. 다음은 판사이다. 그는 법 기준을 적용해서 판단만 한다. 마지막으로 일반인들이다. ‘이들의 시선’은 제삼자로 그저 참석하였기에 호기심과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다면 우리 하느님은 그 살인자에 어떤 시선일까?
그분은 네 부류와는 다른 시선을 지닐게다. 그것은 마치 그자의 어머니가 지닌 마음과도 같으리라. 그녀는 자식의 잘못은 알지만, 그것을 따질 틈도 없다. 그녀에게는 자식이 당장 죽지 않게 하는 것만이 중요하리라. 아들이 죽는 것 보다는 차라리 대신 죽고 싶은 심정뿐일 게다. 그리하여 죽어야 할 죄인들을 살리시고자, 죄도 없으신 당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말했다. 이렇게 그들이 당신을 조롱했을 때, 차라리 영광스러운 변모하셨다면 그때 어땠을까? 그 시각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는데, 왜 무력한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을까? 이는 모든 이의 고통을 안으시고자, 몸소 그 힘든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신 것이다.
오늘 우리도 그날의 그 예루살렘 군중과 같을 게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우리다. 그 몹쓸 군중은 자신의 생각과 이해관계에 맞으면 예수님을 환호했고, 그러지 않으면 옳고 그름을 떠나 등을 돌렸다.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들과 군중에게 철저히 배반당하시어 홀로 십자가의 길을 더없는 괴로움으로 가셨으리라. 지금 우리도 골고타 그 길의 예수님을 환호하면서, 끝내 그분에게 십자가를 지게 만든 그 못난 군중과 무엇이 다르랴? 그들이 지금 우리의 ‘자화상’이다.
우리도 상대방이 내 뜻과 맞지 않으면 너 언제 봤냐며 등 돌린다. 그리고 내게 걸림돌이면 누구나 하루아침에 원수가 된다. 폭력과 죽음의 문화는 내가 관여할 게 아니란다. 사회적 약자는 생각조차 귀찮다. 그러면서 ‘나는 그 때의 그 유다가 아니겠지?’ 라는 마음을 겁 없이 가진다. 그래서 사순기간 우리가 행했던 회개와 보속이 오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아진다.
예수님의 수난은 영원한 죽음이 아닌 당당한 부활로 온 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리고 영광된 재림도 앞으로 반드시 있으리라고 이미 공지되었다. 그래서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아버지의 계획을 받아들이셨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랑으로 가득 찬 온전한 자유로 자신을 바치신 것이다. 십자가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 같지만, 그 십자가의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드러낸 것이다.
성주간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로, 교회 전례에서 가장 정점을 이룬다. 전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생애의 사건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부활을 맞도록 이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성지 축복과 행렬로 성전에 입장하여 미사를 봉헌한다. 오늘 우리는 그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고자 예루살렘 입성과 그분의 수난, 죽음을 동시에 기념하면서, 당신 자신을 완전히 낮추신 수난과 죽음을 묵상한다. 나아가 헤아릴 수 없는 그 깊은 사랑을 되돌아보는 은총의 성주간이 되길 간절하게 바라면서.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 수난기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바라보며 동정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느끼며 감사드립시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루카 23,4).
빌라도가 말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죄인인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자 자신을 내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늘 그러하셨듯이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당신보다 우리를 더 생각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23,28).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백인대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죄와 죽음을 이기는 승리의 사건입니다.
가장 짙은 어둠의 순간을 은총으로 비추며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건너게 하는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납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희망을 품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신 승리를 믿으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도록, 오늘의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품도록, 주님께서 주신 생명에 감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하느님 사랑의 숭고한 계시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겸손과 희생 그리고 구원의 승리에 감사드리며 삶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한 사랑의 십자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8:05)
==========================================================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예수님 양쪽으로 두 사람이 함께 못 박힙니다.
마태오와 마르코는 그들을 강도라고 표현하는데
루카는 죄수라고 표현합니다.
두 사람을 강도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도 강도 가운데 한 명으로 본다는 것이며
죄수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죄수 가운데 한 명으로 본다는 것을 뜻합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수 취급을 받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신문하면서
아무런 죄목을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줍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의로운 분이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유다인이 아니었기에
어쩌면 이 사건을 중립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예수님의 죽음은
죄수의 죽음이 아니라 의인의 죽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죽음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너희를 위한' 죽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 파스카 음식을 드시면서
당신의 죽음이 사도들을 위한 죽음임을 암시하십니다.
비록 사람들이 당신을 죄수로 만들어 죽일지라도
그것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위한 죽음임을 암시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
즉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 죄수 취급을 받으시는 것도 받아들이십니다.
죽음까지 받아들이시는 것을 보면
우리를 위해서 못 하실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만큼 하느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신다는 것이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분의 죽음은
그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임을 우리 각자가 받아들일 때
더 이상 헛된 죽음이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이번 한 주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온 무리가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 앞으로 끌고 갔다.'(루카 23, 1)
거룩한
나뭇가지를
적시는 눈물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수난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십자가에서
만나는 거룩한
성주간입니다.
주님의 수난은
인간의
갈채(喝采)와
함께
시작됩니다.
오늘은
고발당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성주간의
첫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위선과
불충실을 결코
고발하지
않으십니다.
너무 쉽게
하느님께
등 돌리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수난의
구경꾼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진실한
사랑이었습니다.
환영의 가지는
너무 빨리
하느님을
모욕하는
나쁜
손가락질로
바뀝니다.
나쁜 마음에만
몰두하는
우리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하느님께서는
떠나지
않으십니다.
비로소
사랑을 알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무엇이 진정
사랑인지를
알게 됩니다.
잊을 수 없고
잊혀지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이며
수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으로
우리의 죄를
덮어주십니다.
우리가
붙잡고
흔드는 것이
흔하디 흔한
나뭇가지만이
아니라
수난과 함께하는
소중한 마음이길
기도드립니다.
주님께로
돌아가야할
주님의
수난입니다.
성주간은
수난을 통한
우리의
구원을 만나는
새롭고도
뜨거운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앞에
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이 길을
걷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오는
수난입니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아무런 저항도 없이 끝까지 자기 비하의 길, 극단적 겸손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
전례 지침에 따르면, 긴 수난 복음을 봉독한 후에는 반드시 다음의 권고를 덧붙입니다.
“주님의 수난기를 봉독한 다음, 경우에 따라 짧은 강론을 한다. 또한 잠깐 침묵할 수 있다.”
주님의 수난기가 길고, 따라서 봉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강론을 짧게 하거나
생략하라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의 수난기 내용 그 자체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기에, 수난기 자체가 가장 좋은 강론이기에, 강론을 생략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겟세마니 동산으로부터 시작되어 골고타 언덕에서 종료된 예수님 수난 여정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배반자 유다, 겁쟁이 헤로데, 애매한 총독 빌라도, 대사제 가야파, 겁쟁이 베드로, 그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 손수건으로 그분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결박된 그분을 채찍질하고 침 뱉고 조롱하던 군사들, 끝까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지킨 성모님과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애제자 사도 요한...
하늘이 울고 땅이 우는 성주간 우리는 그 옛날 예수님 수난 여정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깊이 성찰해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긴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연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에 어떤 모습으로 참여했는지 곰곰이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길을 바로 내 삶으로,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나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런 부활의 적극적인 증인입니까?
아니면 그분 수난 여정의 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는 변두리 관찰자입니까?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끌려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모욕과 수치심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총독의 병사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을 갖고 놀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장무도회라도 벌인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긴 그들은 주황색 망토를 걸치게 했습니다.
주황색 망토는 로마 황제의 신하들이 입던 옷이었습니다.
그분의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워드렸습니다.
오른손에는 갈대를 하나 들려드렸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만든 후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의 왕 만세!”하고 외쳤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존귀하신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들고 계시던 갈대를 빼앗아 거룩하신 그분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뱃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과 수치심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을 것입니다.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에 가슴이 벌렁거렸을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으로 내 말 한마디면 저따위 한갓 말단 병사들 순식간에 쓸어 엎어버릴 수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기적의 능력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결박을 풀어버리고 둘러서 있는 적대자들 한 방에 다 날려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끝내 침묵하셨습니다. 잔혹한 폭력 앞에 결코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경멸과 조롱을 깊은 침묵 속에 묵묵히 견뎌내셨습니다.
일말의 저항도 없이 끝까지 자기 비하의 길, 극단적 겸손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죄인인 인간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조롱 앞에서도 끝까지 침묵하시고 인내하시는 수난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 왕직의 참된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느님의 왕직은 인간이 저지른 잔혹한 악 앞에서도 침묵으로 견뎌내시는 왕직입니다.
그분의 왕직은 해도 해도 너무한 인간의 조롱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며 봉사로써 인간을 다스리시는 사랑의 왕직입니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성지주일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축제 기분에 들뜬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고 있다. 이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의 짓누르는 고통을 먼저 거쳐야만 하는 야훼의 종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언적 전조와도 같다. 이사야서는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의 셋째 노래를 전하고 있다. 이 종은 하느님의 고통당하는 종이다. 이 종은 주님께 대한 충실성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이사 50,7).
복음: 루카 22,14-23,56: 주님의 수난
예수께서는 당신을 휩쓸어버리려는 그 파괴적인 공격을 맞이할 채비를 하신다. 루카 복음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무엇보다도 그 예루살렘에서의 사명과 당신의 마지막 공적 가르침과 이후 직접적으로 계속되는 사건들, 즉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재판, 십자가, 부활과 그 후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일치시키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파스카를 거행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22,15). 이 파스카는 확실히 죽음을 통한 봉헌의 표지로서 식탁에 놓였던 최후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분의 생명을 통한 희생적 봉헌의 예표이며 동시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22,19.20).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당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걱정을 하신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 십자가를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23,28.31). 그러나 애석하게 생각하고 울어야 하는 사람은 패배당한 것같이 보이고 천시당한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죽음에 처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 여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도, 다른 공관복음의 절망적 외침인,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편 21,2)가 아니라, 아버지께 평온히 의탁하는 태도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0,6).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루가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사를 과장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 가지셨던 ‘고뇌’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22,44). 이 표현은 예수께서 ‘수난’을 능히 극복하고 지배하실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 한계와 번민에서 그를 제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위대하신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만 절망의 공포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2,42).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처지에 처하게 되는 바로 그때 참으로 신성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신비, 즉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많은 사람이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태도와는 달리 적개심보다는 호기심과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 마음에는 후회의 감정이 있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23,48).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 이는 마르 15,39에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되도록 한다. 오른쪽 강도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못 박힌 다른 강도의 예수에 대한 조롱에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0-43).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은 그 강도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인간의 모든 비열한 행위와 배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만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셨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립 2,9-11). 이렇게 파스카의 빛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온 땅을 뒤덮었던 그 무서운 어두움을 이미 벗겨내고 있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장이란? 부모의 희생을 가슴에 새기는 과정
어떤 사람들은 회개가 잘 안된다고 말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로는 아는데 잘 안 됩니다.
회개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내가 결심하는 것과 다릅니다.
회개는 그리스도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결과입니다.
잃어버린 양이 혼자 돌아갈 수 없고 목자가 와서 목에 메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희생이 양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은 목자의 희생입니다.
그 희생을 마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내 맘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아무리 목자가 와도 그 상처가 자신과 무관한 것처럼 느껴지면 회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관계의 준비가 안 된 사람입니다.
자라기를 원치 않는 피터 팬과 같습니다.
『피터 팬』은 제임스 매튜 배리(J.M. Barrie)의 유명한 동화로,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모험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피터 팬이 중심이 됩니다. 피터팬은 ‘네버랜드’라는 환상적인 섬에서 살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고, 누구도 나이를 먹지 않습니다.
피터는 자유롭고 모험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성장을 거부하며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기를 원합니다.
그는 모험을 통해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습니다.
피터는 웬디라는 여자아이와 두 동생을 데리고 네버랜드로 와서 함께 즐기자고 합니다.
그들은 네버랜드에서 자신들을 걱정하며 기다리는 엄마를 생각합니다.
웬디는 피터를 데리고 집으로 와서 엄마에게 소개해줍니다.
엄마는 피터도 키워주겠다고 하지만, 피터는 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피터가 웬디를 찾아왔는데, 웬디는 벌써 어른이 되어 아기를 낳았습니다.
피터는 어른이 된 웬디에게 실망하여 웬디의 딸을 데리고 네버랜드로 갑니다.
그리고 그의 딸을 데리고 갑니다.
시간이 이렇게 흘러 다른 사람은 다 성장하지만,
피터만 영원히 어린이로 남는다는 동화입니다.
성장하는 아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엄마의 감정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피터는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으로 산 작가의 모습입니다.
매튜 배리에게 어머니는 형만 좋아하고 자신은 사랑하지 않는 분처럼 보였고 그래서 어른이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방법이란 부모와의 감정의 단절입니다.
부모의 아픔을 보기를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피터 팬의 공감의 결여로 초래한 자기 고립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것처럼 는 피터가 감정적으로 성장하고, 어른의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피터는 그런 제안을 거부하며, 자유롭고 모험적인 삶을 고집합니다.
그는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런 삶에 대해 공감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어린아이로 남기를 고집하며, 감정적인 연결과 책임을 피하려 합니다.
인간의 성장은 공감 능력의 성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공감 능력은 부모의 감정을 느끼면서 시작됩니다. 아이가 자라서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와 같은 시를 쓸 수 있게 된다면 엄마처럼 성장한 것입니다.
부모의 자녀를 위한 희생은 결국 자녀가 부모의 감정을 공유하며 성장하게 만드는 사다리와
같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자녀는 부모의 수준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유튜브 ‘포크포크’에서 ‘가족을 위해 포르쉐를 포기한 새아빠’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데이브는 젊은 시절, 포르쉐 914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차였고, 젊은 날의 추억을 모두 함께 한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딸아이를 가진 미혼모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포르쉐를 끝내 포기하고 팔게 됩니다.
이 모습을 지켜봐 온 의붓딸 러셀은 성장하여 아빠에게 그 차를 다시 찾아주기로 합니다.
갖은 고생 끝에 그 차를 샀고 수리까지 해서 아빠에게 깜짝 선물로 선물한 것입니다.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버린 아버지는 오열을 합니다.
여기에서 진짜 성장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딸입니다.
딸은 아버지가 자신들을 위해 흘린 피의 가치를 직접 느껴보았습니다.
그만큼 당시의 새아빠만큼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고통은 고통으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제가 단식하며, 또 나의 것을 포기하며 신학교에 들어와 있지 않았다면, 다 주셨다는 그분의 고통을 느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만나 그 아픔을 느껴야 회개가 됩니다.
내가 변화됩니다.
그것을 느끼려면 나도 그 고통에 동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통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우리가 일부러라도 느끼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하늘나라로 가는 사다리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지신 십자가를 나도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질 때, 우리는 그분처럼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올리브산이라고 불리는 곳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왜 푸는 거요?‵ 하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분부를 받은 이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들이 어린 나귀를 푸는데 그 주인이,
‘왜 그 어린 나귀를 푸는 거요?’ 하고 물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예수님께서 어느덧 올리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의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28-40)”
1)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였다.
‘딸 시온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4ㄴ-16).”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구약성경 즈카르야서 9장에 있는 예언이 실현된 일이라는 것이 요한 사도의 해석입니다.
즈카르야서를 보면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즈카 9,9-10).”
<이 예언은 메시아께서 ‘승리자’로, 또는 ‘정복자’로 오신다는 예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승리자의 개선행진’과 같은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루살렘 입성’의 의미를 몰랐다는 것인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왜 그런 식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지 이해하지 못했거나, 또는 예수님께서 당장 당신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시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루카 19,11).
그랬다가 나중에(예수님 부활 뒤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이고, ‘패배의 길’이 아니라 ‘승리의 길’입니다.
<‘예루살렘 입성’은 그 결과를, 즉 그 길의 끝을 미리 보여 주신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길도 죽음을 향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생명을 향해서 가는 길입니다.
<죽으려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3)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하는 생활이고, 그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고 그 생명을 얻기 위해서 거치는 과정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또 인생을 살다 보면, 십자가는 눈앞의 현실인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너무 멀고 막연하게 생각될 때가 많고, 평생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그냥 그렇게 인생을 마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난 때문이든지, 어떤 병 때문이든지, 또는 어떤 불행한 일 때문이든지 간에......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긴 한데, 어떻든 그런 상황은 신앙인들에게는 헤쳐 나가야 할 숙제가 되기도 하고, 극복해야 할 ‘위기’나 ‘고비’가 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최종 목적지를 알고 있고, 믿고 있어도, ‘지금’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에 무슨 특별한 비결 같은 것은 없습니다.
더 굳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더욱 더 인내하는 것,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끊임없이 하는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앞장서서’ 걸어가시는 분인데(28절),
이 말은, 뒤를 따르는 신앙인들을 안 보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을 따르는 신앙인들을 세심하게 인도하시면서 ‘앞에서 먼저’ 걸어가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22,14-23,56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인류 구원이라는 당신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지’주일입니다. 동시에 우리를 위해 기꺼이 ‘고통의 잔’을 받아들이시고 죽으신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기억하는 ‘수난’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의 전례독서에서는 주님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급격하게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호산나”라고 환호하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고 뒤따르던 축하 행렬은 자기들 기대를 저버린 ‘무능한 그리스도’에 대한 비난과 배척의 십자가 행렬로 바뀝니다. 양손 높이 들고 흔들던 영광과 축복의 팔마가지는 예수님의 등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기는 모욕과 고통의 채찍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겉옷마저 벗어 기꺼이 내놓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분의 하나 남은 속옷까지 벗겨가고, 결국엔 자기들의 ‘왕’으로 모셔들인 예수님께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어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에 이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까 싶지만 바로 그런 게 사람입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판이하게 다르고, 욕망의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부는가에 따라 갈대처럼 이리저리 심하게 흔들리지요.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기분과 상황에 따라 주님께 대한 환호와 찬미, 원망과 배척 사이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왔다갔다 하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를 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언제나 한결 같습니다. 고통과 시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마주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비와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것이지요. 그분은 고통과 시련을 담담히 받아들이시면서도 무력하시지 않았고, 당신을 향한 비난과 배척에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은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를 향한 지극하고 완전한 사랑에서 우러나왔지요. 그런 예수님의 사랑을 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두 장면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고 심문 당하시는 장면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폭행을 당하시고 있는데도 그분의 수제자라는 베드로는 제 한 목숨 살리겠다고 그분과의 관계를 부정하기에 바빴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예고하셨던대로 그분과의 관계를 세번이나 부정하고 난 후, 베드로는 자기를 바라보시는 예수님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지요. 그분의 눈빛에는 당신을 배반한 제자에 대한 비난과 원망이 아니라,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베드로의 부족함과 약함을 헤아리시는 용서와 자비가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언젠가 당신과 같은 길을 걷게 될 제자에 대한 안쓰러움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 베드로는 깊은 슬픔 속에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지요. 두번째 장면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부분입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도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모릅니다. 죄 없는 분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으로도 모자라 조롱하고 모욕까지 하는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그들은 자기들이 지금 하는 일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르는 철부지들일 뿐이니 탓하려면 차라리 당신을 탓하시라고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시지요. 그런 주님의 가슴 절절한 사랑을 뼈저리게 느낀 이는 베드로처럼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주님의 사랑을 나몰라라 하는 이는 잘못된 길을 고집스럽게 걸으며 멸망을 향해 나아갈 겁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나는 주님의 수난기에 등장하는 여러 등장인물들 중 누구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돌아봅니다. 무엇이 하느님 뜻에 맞는 옳은 일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 눈치를 보며 분위기에 휩쓸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의 모습인지,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뜻은 생각하지 않고 그분을 통해 내 뜻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의 모습인지 돌아봅니다. 자기 혼자 살기 위해 체포당하시는 주님을 내버려두고 도망쳤던 제자들처럼 내 안위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작고 약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을 모른 척 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도 체포당하고 죽임당할까 두려워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 척 했던 베드로처럼, 살면서 주님 때문에 작은 불이익이나 희생도 감당하기 싫어서 자신이 그리스도 신앙인임을 꽁꽁 감추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갑작스레 찾아오는 십자가라도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는 내가 되기를,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며 통곡하던 여인들처럼 그분의 수난과 고통에 진정으로 마음 아파하며 온전히 동참하는 내가 되기를,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처럼 사람들의 시선과 세속적인 불이익을 무릅쓰고 주님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하는 용기있는 내가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참으로 의미있게 만들고 완성하는 길일 테니까요.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살면 주님께서는 우도(성 라트로)에게 그러셨듯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겁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
예수님의 파스카의 신비의 완성을 위해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사실을 기념하는
주님의 성지 주일입니다.
오늘 전례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참여하는 성주간 시작을 알립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을 미사 전에 행렬이나 또는 간단한 입당식으로 합니다.
성대한 입성 기념의 전례에서 사제는 다음과 같은 권고문을 읽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다하고 열성을 다하여 주님의 입성을 기념하고, 은총을 통하여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며, 주님의 부활과 그 생명에 동참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사제는 마태오 21,1-11 복음을 읽고 짧은 강론을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올리브 산 벳파게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맞은 편 동네에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암나귀와 그 곁의 새끼 나귀를 끌고
오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환호합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에는 두 가지가 교차됩니다. 기쁨과 슬픔이지요.
특히 나귀를 타신 주님은 그야말로 메시아이며 그 옛날 다윗을 연상케 합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예루살렘으로 왔을 때 ‘사울은 수천을 쳤고
다윗은 수만을 쳤네’하며 환호하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느 예언자가 주님처럼 이렇게 환호를 받았을까요?
사람들은 길에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며 주님을 환호 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언자의 말(즈카 9,9; 이사 62,11)을 인용하며 기쁨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마태 21,5)
구약의 다윗은 필리스티아의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고 사울과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옵니다.(1사무 18,6)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나와 손북을 치고 환성을 올리며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추며 사울과 다윗을 맞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인들이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7절)라는
노래 때문에 사울에게 시기를 받아 죽을 고비를 몇 차례 갖습니다.
다윗이 기쁘게 돌아 온 것이 결국 수난과 죽음의 위험으로 내 몰리게 되는 장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늠름한 장군으로 돌아오지만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신 모습으로 예루살렘을 입성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모습을 즈카리야의 예언을 인용합니다.
“딸 시온아, 한 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울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예수님께서 바로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마태오는 즈카리야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음 시사합니다. 나귀를 타신 모습이
늠름한 개선 장군의 모습과는 다르게 어떻게 보면 우수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즈카리야가
설명한대로 겸손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생전에 당신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십니다. 당신의 때가 왔기 때문이지요. 예루살렘의 입성에 당나귀를
준비하라고 하신 것(마태 21,2)과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고 하신 것(마태 26,18)을 보면
주님께서 다 당신을 위해서 마련하신 것으로 이해 될 수 있습니다.
구원사에서 중요한 순간을 준비하셨지만 바로 주님께서 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내일이 바로 수난의 순간이시지만 주님께서는 오늘 입성과 잔치를 주관하십니다.
예루살렘 입성에 이어서 미사 전례의 는 바로 주님의 수난으로 바뀝니다.
이사야의 셋째 노래가 울려퍼집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 서지도 않았다.
나는매질하는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이사 50,5-6)
이어서 사도 바오로이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필리 2,6-7)
마태오 수난 복음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환영과 열광으로 차 있던 군중은 바로 주님의 고발자로 변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 형과 수난과 죽음으로 나아가십니다.
우리는 이 성주간에 제자들과 주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아픔과 혼란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믿었던 제자들 중에 하나는 대사제에게 스승이신 주님을 은전 삼십량에 팔아 넘깁니다.
또 하나는 자신이 생명까지 바치겠다던 사도 베드로는 주님께서 무참히 무너지시는 것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곳 사람들에게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그리고 군중은 환호에서 고발자로 급변합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면서 약한 인간성을 갖는 데에서 오는 갈등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이 나약과 혼란스러움을 구원과 부활로
이끌어 나가십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리는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그분이 겪으셨던 고통에 참여하고 그분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의 죄를 뉘우치는 복되고 은총이 넘치는 사순시기의 마감인
성주간 전례에 참여하며 기쁜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도록 합시다.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
250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더 중요한 가치를 놓치지 않는 삶
<2025.4.13> 아침을 여는 묵상 (눅 22:1~23절)
❝더 중요한 가치를 놓치지 않는 삶❞
❚ 예수님 안에서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중요한 가치를 붙잡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 종교적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1~6절).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1절)..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으로 사건의 긴박함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찬양해야 할 날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2절). 유다의 별명은 ‘거짓된 자’를 뜻하는 ‘가룟인’이었습니다.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습니다(3절). 이는 예수님을 배반하고자 하는 유다의 배후에 사탄의 영향력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유다로 하여금 예수님을 어떻게 넘겨 줄지를 의논(4절)하매, 예수를 잡아 죽일 기회가 드디어 눈앞에 다가왔음에 그들은 기뻐(5절)했습니다. 돈을 받기로 동의한 유다는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6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를 대표한 자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정적을 제거할 생각에 여념이 없었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는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하나님 나라보다는 세상을 더 추구함으로써 사탄의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영적 소경으로 간주하셨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최고의 가치보다는 당장 자신들이 입게 될 손해에만 눈이 어두웠고, 탐욕을 버리지 못해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진짜가 아닙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겸손과 긍휼 그리고 희생과 사랑등의 마음으로 채워야만 거짓되고, 위선적인 신앙을 버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위선과 기득권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물질의 탐욕 앞에서 비굴하고, 비겁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도록 하여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순종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7~13절).
유월절 양을 잡아야 하는 무교절 날이 왔습니다(7절).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유월절 저녁 만찬을 준비하도록 장소를 섭외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장소에 대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질문을 하자(9절) 예수님은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날 것이고, 그가 들어가는 집에 있는 큰 다락방에서 준비하라(10~12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시는 마지막 친교의 식사였으며, 이를 위해 예수님은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13절).
예수님은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반드시 그 길을 걸어야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강력한 순종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길을 예수님은 결코 거부하지 않으시고, 순종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순종의 삶은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 길을 냅니다. 순종의 삶은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상황에서도 단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순종의 삶은 쉴새 없이 날아드는 대적들의 화살에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공간을 찾게 됩니다. 불순종이 주님이 제시하신 길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님을 반역하는 길로 나아가도록 할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져,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놀라운 사랑을 새겨야 합니다(14~23절).
‘때가 이르매...’ 니산월 14일 저녁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위해 사도들과 함께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마지막 유월절을 간절히 원하셨던 이유는 곧 맞이하실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심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15절). 구원받은 성도들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서 함께 맞이하는 잔치야말로 유월절 만찬의 완전한 성취입니다. 그리고 잔을 받아서 감사 기도를 하신 후에 제자들로 하여금 나누도록 하신 후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8절)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잔도 그와 같이 하여... 내 피로 세운 새 언약...’(19~20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수시로 깨뜨렸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을 선포하셨습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렘 31:31)... 새 언약은 사람의 죄나 연약함으로 깨어지지 않는 영원한 구원의 언약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스승을 배신하여 돈과 권력을 얻었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도 그를 초대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지만, 그는 끝까지 그 기회마저 날려 버렸습니다(21~23절).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원토록 지속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사람답게 하늘 양식을 먹고 살아가야 합니다. 즉 날마다 말씀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우고, 그리스도의 임재로 가득 채우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구원의 확신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장벽과 맞닥뜨린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그런 상황을 대처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나와 맺으신 영원한 약속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나 한 사람의 생명을 결코 포기하실 수 없어서 친히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을 약속하신 그 약속과 참 사랑을 기억하기에 어떤 상황과 현실의 문제 앞에서도 절망하고 낙심하고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없는 주님의 사랑과 놀라운 그 사랑을 마음 깊이 새겨 은혜의 복음을 부지런히 전하는 참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므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님을 부정하는 일을 결단코 행하지 않으며, 주님의 말씀 앞에 서 있음이 인생에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달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함께 걷고, 함께 최종 목적지에 이를 수 있도록 구원의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눅 22:1~23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