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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나 가랑차 Elina Garanca |
Panis Angelicus 생명의 양식
오페라 가수라면 누구나
소프라노를 꿈꿉니다. 다들
화려한 최고가 되고 싶어 하죠.
하지만 오늘 소개해드리는
엘리나 가랑차(Elina Garanca)는
메조소프라노입니다.
1976년 라트비아 출생의
그녀는 합창단의 지휘자였던
아버지와, 성악을 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 음악을 시작
했지만, 가족이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돼지를 치고,
소젖을 짰습니다.
청년기의 방황을 거쳤지만,
역시 그녀는 오페라 가수의 길을
선택했죠. 오디션에서, 당시
최고의 가수였던 존 서덜랜드의
막강한 지원을 받으며 데뷔했죠.
여러분, 오페라는 말이죠,
소프라노 혼자서 하는 공연이
아닙니다. 조연이 있어야 주연도
빛나죠. 엘리나 가랑차는
메조소프라노에서 세계 최고입니다.
그녀는 오페라 공연이 있을 때마다
섭외 1순위이며, 오히려 언제나,
주연보다 더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Vincenzo Bellini의 오페라,
Adelson e Salvini 중에 나오는
Dopo loscro nembo라는 곡이죠.
데모 버전이지만, 정말 멋진
목소리라서 올렸습니다.
카르멘에 나온 곡이 아니고
Gypsy 테마의 다른 Habanera
입니다. 그녀의 멋진 카리스마를
느껴 보십시오.
금세기 최고의 메조소프라노 디바
엘리나 가란챠(Elina Garanca)
혜성과 같이 나타난
라트비아의 엘리나 가란챠
발트 3국 중의 하나인
라트비아 출신인 메조소프나로
엘리나 가란챠는
현재의 활동상황으로 보아서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와
콜로라투라 메조소프라노인
체칠리아 바르톨리를
훨씬 능가하는
세계적인 디바로서
부각될 인물이다.
엘리나 가란챠는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풍부하고도 매력적인 음성과
놀랄만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음성은 사랑스러우면서도
인스피레이션을 주는 힘이 있으며
그의 성악적 테크닉은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마치 천상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또한 뛰어난 연기력을 가지고 있어서
현대적인 새로운 이미지로서
오페라의 무대를 압도하고 있다.
그런 그는 어떤 배경을 지닌 성악가인가?
'장미의 기사'에서 옥타비안.
비엔나 슈타츠오퍼
엘리나 가란챠는
1976년 9월 16일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성악가인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합창단 지휘자였으며
어머니는 라트비아국립오페라단의
성악코치 겸
라트비아문화아카데미
(Latvian Academy of Culture)의
교수였다.
엘리나 가란챠는 어릴 때에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과 같은
세계적 스타들의 음반을
줄곧 들으면서
가수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자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공산주의
라트비아의 여건으로서는
어린 시절에 가수가 되기 위해
미국이나 영국으로
유학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엘리나는 뮤지컬 가수보다는
오페라 성악가가 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던차에
역사의 심판에 따라
공산 소련이 붕괴되었고
이에 따라 라트비아에도
비록 경제는 어려웠지만
훈훈한 봄기운이 감돌았다.
1996년,
라트비아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엘리나 가란챠는
비엔나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하기야 리가에서 비엔나는
비행기로 한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여자는 다 그래'에서 도라벨라.
액-상 프로방스
엘리나 가란챠는
비엔나에서 유명한 성악교육가인
이리나 가브릴로비츠
(Irina Gavrillovic)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엘리나 가란챠는 내친 김에
미국으로 건너가
당대의 소프라노인
버지니아 치니(Virginia Zeani)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모두들 그의 아름답고
중후한 메조소프라노 음성에 매료됐다.
엘리나 가란챠가
오페라 성악가로서 처음 데뷔한 것은
1998년 독일 마이닝겐(Meiningen)의
남튀링겐국립극장에서
조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그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오페라 성악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엘리나 가란챠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200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였다.
거장 니콜라우스 하르논쿠르트가
지휘하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에서
아니오(Annio)를 맡은 것이었다.
세계는 비로소 놀랄만한 스타를 발견했다.
곧이어 세계의 유명 오페라극장에서
출연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리하여 엘리나 가란챠는
2004년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베르테르'의 샬롯테와
'여자는 다 그래'의 도라벨라를,
2005년 패트리스 셰로
(Patrice Chereau)가 감독한
'여자는 다 그래'에서
역시 도라벨라를,
2006년에는 '티토의 자비'에서
이번에는 세스토를,
그리고 2008년 1월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를 맡아
만일들로부터 감탄과 찬사를 받았다.
엘리나 가란챠의
메트 데뷔에 대하여
뉴욕 타임스의 저명한 음악평론가인
버나드 홀랜드(Bernard Holland)는
'정말 놀라운 존재이다'라는
한마디로 그를 평가하였다.
'베르테르'에서 샬로테.
뮌헨
엘리나 가란챠는
30세가 되는 2006년에
지휘자 카렐 마크 치촌
(Karel Mark Chichon)과 결혼하였다.
이후 미국에 계속 머물면서
간혹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등에
출연하고 있는
그는 2010년 메트에서
현대적 감각의 '카르멘'에 출연하여
다시 한번 세계의 오페라 애호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는 한편 런던에서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레브코와 함께
벨리니의
'캬플레티가와 몬테키가'에 출연하여
모든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이로써 엘리나 가란챠는
벨칸토 메조소프라노 콜로라투라로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계의 오페라계는
엘리나 가란챠에 대하여
'차새대 오페라 무대의 새로운 주역'
이라면서 아무리 찬사를 늘어 놓아도
부족하다고 언급했다.
'카르멘'의 타이틀 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엘리나 가란챠의 DGG 음반 '하바네라'
Bellini Opera 'Adelson e Salvini' Act I : Dopo - L'oscuro nembo 와 Elina Garanca Album : Elina Garanca - Bel Canto(DG 2009) Track List 01. Donizetti : Lucrezia Borgia / Act 2 02. L'assedio di Calais / Act 1 03. Roberto Devereux / Act 1 04. Dom Sebastien, Roi de Portugal / Act 2 05. Bellini : Adelson e Salvini / Act 1 06~09. Donizetti : Maria Stuarda 10~12. Rossini : Tancredi 13. Maometto II / Act 2 14~17. Bellini : I Capuleti e I Montecchi 18~20. Donizetti : L'assedio di Calais '아델손과 살비니'는 34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간 빈센초 벨리니(이탈리아)가 남긴 열 개의 오페라 중에 나폴리 음악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대학 졸업 리사이틀(recital)용으로 그의 나이 스물 넷(1825년)에 처음으로 작곡한 오페라이다. 나폴리의 산 세바스티아노 국립음악원의 동료들에 의해 초연되었으며, 당시 여성들이 공연자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대본은 1816년 V.Fioravanti에 의해 만들어졌다.
(줄거리) 배경은 17세기 아일랜드 아델슨경과 넬리는 서로 결혼을 약속한 여인인 사이. 아델슨의 친구이자 화가인 살비니는 마음속으로 넬리를 사랑 하고 있었다. 넬리의 친척인 스투룰리는 정치인인 자신의 영향력으로 살비니를 억압해 살비니로 하여금 넬리를 납치해 오도록 사주한다. 어느 날 아델슨경은 살비니를 집으로 초대하게 되고 살비니는 넬리를 납치하게 되지만... 스투룰리의 악행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금 넬리를 아델슨 경에게 데려다 준다. 아델슨은 살비니를 용서하고 살비니는 아델슨의 비서인 패니와 결혼하여 이탈리아로 돌아 간다는 내용이다. 내용상 복잡함이 없는 단순한 오페라 코미크와 오페라 세리아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다.
처음에는 전체 3막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후 2막으로 개정하였다. 프랑스의 'opera-comique'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며, 아름다운 선율과 레치타티보를 선보이고 있다. 초연 당시 대 성공을 거두었고 그 이후로 1년 내내 매주 일요일마다 재상연되었다. 벨리니가 거의 학업을 마칠 무렵 이름없는 대본작가에게 이 작품을 의뢰해서 수정 작업을 거쳤다. 레치타티보를 다른 형식으로 바꾸고 반주없는 레치타티보(recitativo secco)를 사용하였다. 보니파쵸를 위한 나폴리의 사투리 대사 채택 등의 수정작업도 거쳤다. 더 이상 무대에 올려 지지 않지만 1985년 카타니아에서 한번 공연된 적이 있었다. Nelly의 아름다운 아리아만큼은 뭇 남성의 가슴을 찢어 놓을 듯 너무나 아름다운 아리아이다. Bellini는 그의 '카풀레티家와 몬테키家 (I Capuleti ed i Montecchi 1830)'에서 Giulietta의 아리아 '아 몇번인가!(Oh quante volte)'로 다시 사용하였다.
Dopo L'oscuro nembo Il Ciel sperai seren, E al mio tesoro in sen Goder la calma.
Ma cosi bella speme va rapida a sparir! E al primo suo martir Ritrna L'alma! Parte, e poi riede il sol Di luce a sfavillar... E a me non sa tornar L'amato oggetto!
Vincenzo Bellini(1801~1835 이탈리아)
빈첸초 살바토레 카르멜로 벨리니(Vincenzo Salvatore Carmelo Francesco Bellini, 1801년11월 3일~1835년 9월 23일)는 34살의 짧은 인생을 살다간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그는 유려한 선율로 유명하며, 도니체티, 로시니와 함께 벨칸토 오페라의 중심적인 작곡가로 평가된다. 벨리니는 시칠리아의 카타니아에서 출생하였다. 어릴때부터 교회 음악가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지도로 일찍부터 작곡가의 재능을 발휘하여 6살 때 첫번째 작품을 작곡했다. 이후 가족들의 권유로 18세의 벨리니는 나폴리 왕립음악원(Real Collegio di Musica)에 입학하여 칭가렐리에게 작곡을 배웠다. 재학중인 1825년에《아델손과 살비니(Adelson e Salvini)》를 작곡하였고, 이 작품의 완벽한 형식으로 이탈리아를 떠나버린 롯시니의 후계자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1826년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의 의뢰로《비앙카와 페르난도(Bianca e Fernando)-후에 이 작품의 제목은 "비앙카와 헤르난도(Bianca e Gernando)"로 다시 붙여지게 된다.》를 작곡하였다. 그는 1827년에는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의뢰로 그 당시 가장 유명했던 이탈리아의 대본 작가 펠리체 로마니의 시에 의한《해적》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둔 첫번째 작품이 되었다. 이후, 1829년 《이국의 여인》와 《차이라》, 1830년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를 《카플렛가와 몬테규가》라는 오페라로 작곡하였고 1831년에는 《몽유병 여인》와 《노르마》 각각 발표하였다. 1833년에는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상연 후, 파리로 이주하여 1835년에 최후의 오페라 《청교도》를 파리의 이탈리아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벨리니는 19세기 초 이태리 오페라의 가장 중요한 작곡자로 도니체티와 더불어 당대의 거장으로 꼽힌다. 벨리니의 기품, 우수에 찬 선율의 아름다움은 19세기 많은 작곡가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의 창조적인 선율에 영향을 받은 쇼팽은 임종시 그의 아리아를 듣기를 원했고, 바그너, 고티에 등도 벨리니의 작품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트라빈스키는 벨리니를 베토벤과 함께 '2대 B'로 올려 놓기까지 했다. 오페라의 아리아뿐만 아니라 그의 아름다운 선율은 그의 오보에 협주곡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기도 하다. 10개의 오페라 중에 M.Callas의 폭발적인 아리아를 잊을 수 없게 한 '정결한 여신이여 (Casta Diva)'의 'Norma'와 '광란의 아리아'로 유명한 '몽유병의 여인(La Sonnambula)'이 가장 대표작이다.
작품 : 오페라 《아델손과 살비니》 (1825년 2월 12일, 산 세바스티아노 음악원의 극장, 나폴리) 《비앙카와 페르난도》 (1826년 5월 30일,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해적》 (1827년 10월 27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비앙카와 페르난도》 (1828년 4월 7일, 제노바, 카를로 펠리체 극장) [개정판] 《이국의 여인》 (1829년 2월 14일, 밀라노라 스칼라 극장) 《차이라》 (1829년 5월 16일, 파르마, 두칼레 극장) 《카풀렛가와 몬테규가》 (1830년 3월 11일, 베네치아, 라 페니체 극장) 《몽유병 여인》 (1831년 3월 6일, 밀라노, 카르카노 극장) 《노르마》 (1831년 12월 26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텐다의 베아트리체》 (1833년 3월 16일, 피렌체, 라 페니체 극장) 《청교도》 (1835년 1월 24일, 파리 시, 이탈리아 극장)
Oh! quante volte ti chiedo(아! 몇 번인가)
벨리니의 '카풀레티家와 몬테키家(I Capuletti ed I Montecchi)'의 'the Capulets and the Montagues' 중에서 쥴리에타의 romanza이다.
Oh! quante volte, Oh! quante ti chiedo Al ciel piangendo Con quale ardor t'attendo, E inganno il mio desir! Raggio del tuo sembiante Parmi il brillar del giorno L'aura che spira intorno Mi sembra un tuo respir.
아! 얼마나 더 몇 번이나 더 애원해야 하나!
하늘조차도 나의 이 기다림과 함께 울고 나의 이 열망을 속이려드는구나.
내게는 한낮의 햇살마저도 마치 그대 존재의 섬광처럼 느껴온다.
아! 허공에 떠도는 바람 같은 나의 이 열망이여!
Elina Garanca(1976년 9월 16일 출생 라트비아)
발트 3국 중의 하나인 라트비아 출신인 메조소프나로 엘리나 가란챠는 현재의 활동상황으로 보아서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와 콜로라투라 메조소프라노인 체칠리아 바르톨리를 훨씬 능가하는 세계적인 디바로서 부각될 인물이다. 엘리나 가란챠는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는데다가 풍부하고도 매력적인 음성과 놀랄만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 그의 음성은 사랑스러우면서도 인스피레이션을 주는 힘이 있으며 그의 성악적 테크닉은 완벽에 완벽을 기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듣고 마치 천상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또한 뛰어난 연기력을 가지고 있어서 현대적인 새로운 이미지로서 오페라의 무대를 압도하고 있다. 그런 그는 어떤 배경을 지닌 성악가인가? 엘리나 가란챠는 1976년 9월 16일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성악가인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합창단 지휘자였으며 어머니는 라트비아국립오페라단의 성악코치 겸 라트비아 문화아카데미(Latvian Academy of Culture)의 교수였다. 엘리나 가란챠는 어릴 때에 뮤지컬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머라이어 캐리나 휘트니 휴스턴과 같은 세계적 스타들의 음반을 줄곧 들으면서 가수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자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공산주의 라트비아의 여건으로서는 어린 시절에 가수가 되기 위해 미국이나 영국으로 유학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엘리나는 뮤지컬 가수보다는 오페라 성악가가 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던차에 역사의 심판에 따라 공산 소련이 붕괴되었고 이에 따라 라트비아에도 비록 경제는 어려웠지만 훈훈한 봄기운이 감돌았다. 1996년, 라트비아음악원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엘리나 가란챠는 비엔나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엘리나 가란챠는 비엔나에서 유명한 성악교육가인 이리나 가브릴로비츠(Irina Gavrillovic)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엘리나 가란챠는 내친 김에 미국으로 건너가 당대의 소프라노인 버지니아 치니(Virginia Zeani)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모두들 그의 아름답고 중후한 메조소프라노 음성에 매료했다. 엘리나 가란챠가 오페라 성악가로서 처음 데뷔한 것은 1998년 독일 마이닝겐(Meiningen)의 남튀링겐국립극장에서 조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그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오페라 성악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하기야 리가에서 비엔나는 비행기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엘리나 가란챠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200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였다. 거장 니콜라우스 하르논쿠르트가 지휘하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에서 아니오(Annio)를 맡은 것이었다. 세계는 비로소 놀랄만한 스타를 발견했다. 곧이어 세계의 유명 오페라극장에서 출연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리하여 엘리나 가란챠는 2004년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베르테르'의 샬롯테와 '여자는 다 그래'의 도라벨라를, 2005년 패트리스 셰로(Patrice Chereau)가 감독한 '여자는 다 그래'에서 역시 도라벨라를, 2006년에는 '티토의 자비'에서 이번에는 세스토를, 그리고 2008년 1월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를 맡아 만일들로부터 감탄과 찬사를 받았다. 엘리나 가란챠의 메트 데뷔에 대하여 뉴욕 타임스의 저명한 음악평론가인 버나드 홀랜드 (Bernard Holland)는 '정말 놀라운 존재이다'라는 한마디로 그를 평가하였다. 엘리나 가란챠는 30세가 되는 2006년에 지휘자 카렐 마크 치촌(Karel Mark Chichon)과 결혼하였다. 이후 미국에 계속 머물면서 간혹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 등에 출연하고 있는 그는 2010년 메트에서 현대적 감각의 '카르멘'에 출연하여 다시 한 번 세계의 오페라 애호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는 한편 런던에서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레브코와 함께 벨리니의 '캬플레티가와 몬테키가'에 출연하여 모든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이로써 엘리나 가란챠는 벨칸토 메조소프라노 콜로라투라로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계의 오페라계는 엘리나 가란챠에 대하여 차세대 오페라 무대의 새로운 주역'이라면서 아무리 찬사를 늘어놓아도 부족하다고 언급했다.
Bellini Opera 'Adelson e Salvini' Act I : Dopo - L'oscuro nembo(Elina Garanca)
Donizetti: Lucrezia Borgia / Act 2 - "Il segreto per esser felici" Donizetti: L'assedio di Calais / Act 1 - "Al mio core" Donizetti: Roberto Devereux / Act 1 - "All'afflitto è dolce il pianto" Donizetti: Dom Sébastien, Roi de Portugal / Act 2 - "Que faire" - "Sol adoré de la patrie" Donizetti: Maria Stuarda / Act 1 - "Si, vuol di Francia il Rege" Donizetti: Maria Stuarda / Act 1 - "Ah! quando all'ara scorgemi" Donizetti: Maria Stuarda / Act 1 - "In tal giorno di contento" Donizetti: Maria Stuarda / Act 1 - "Ah! dal ciel discenda un raggio" Rossini: Tancredi / Act 1 - Andante Rossini: Tancredi / Act 1 - "O patria! dolce, e ingrata patria" Rossini: Tancredi / Act 1 - "Di tanti palpiti" Rossini: Maometto II / Act 2 - "In questi estremi istanti" Bellini: I Capuleti e i Montecchi / Act 1 - "Lieto del dolce incarco" Bellini: I Capuleti e i Montecchi / Act 1 - "Ascolta, se Romeo t'uccise" Bellini: I Capuleti e i Montecchi / Act 1 - "Riedi al campo" Bellini: I Capuleti e i Montecchi / Act 1 - "La tremenda ultrice spada" Donizetti: L'assedio di Calais / Act 2 - "Lo l'udia chiarmarmi a nome" Donizetti: L'assedio di Calais / Act 2 - "Suon tremendo!" Donizetti: L'assedio di Calais / Act 2 - "La speme un dolce palpito" with Ekaterina Siurina |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나는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
Sop. 조수미 & 연주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나는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 - Sop. 조수미 & photo by 김순용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 (나는 대리석 궁전에 사는 꿈을 꾸었네) 발페 (M W Balfe) & photo by 모모수계 이 노래는 원래 아일랜드의 전통 민요인데 마이클 윌리엄 발프(Michael William Balfe)가 1843년에 초연된 오페라 ‘Bohemian girl’에 멜로디를 사용함으로써 더욱 널리 알려진 곡이다. 아일랜드의 작곡가 Michael William Balfe(1808-1870)가 작곡한 오페라 발페(Balfe, William Micheal 1808-1870)는 1808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나 다채로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처음에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다음엔 가수로, 마지막엔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했다. |
********* 보석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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