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이트헤드 : 관념(觀念)의 모험(Adventures of Ideas) – 사상적 모험이 결여된 문명은 소멸한다.
지구촌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 인간만이 ‘관념(觀念)’이라는 것을 형성하고, 그 관념에 따라 행동을 규정짓고, 또한 때로는 그 관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하나의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관념(觀念)과 사상(思想)은, 그 문명(civilization)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어떠한 관념적 모험이나 철학적 성찰이 결핍된 문명이 지속된다면, 일시적인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를 누릴지는 몰라도, 긍국적으로는 올바르고 진보적인 정신성(mentality)의 결여로, 그 문명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어렵게 된다고 한다.
관념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다. 수 많은 관념과 사상이 오류를 낳고, 그 오류를 시대적 변화의 흐름에 따라 수정하여 진화시킴으로써 문명이 흥(興)하기도 하고, 또한 멸(滅)하기도 한다. 하나의 관념이 형성되기 까지 오랜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사회학적으로 인정된 어떤 악(惡)을 제거하기에 충분할 만큼 사회를 개조하자면, 그 사회조직과 그것에 의거해 있는 문명을 파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화이트헤드의 대표적 저서 중 하나다. 인간역사에서 문명이 나타난 후 ‘관념’ 이란 그 사회의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어왔다고 한다. 관념에 의한 인류의 모험이야 말로 새로운 완전성(完全性)에 대한 탐구라고 화이트헤드는 주장한다. 즉, 모험이 없는 정체된 문명은 쇠락(衰落)의 시간 속으로 매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고, 모험이야말로 문명을 지루하고 진부한 정통주의 또는 안정이라는 정체(停滯)로 부터 구출해준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의 관념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를 맞게되며, 이러한 사상관념의 생명력(vitality)은 모험에 있다고 한다. 인류문명에 까지 확대할 것 없이, 이미 인생의 의미 자제가 모험이다.(The meaning of life is adventure!)
화이트헤드가 이 책을 통해 전반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인류로 하여금 문명을 향해 서서히 나가도록 하는 어떤 관념의 영향”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이라고 보여진다. 플라톤에서 부터 계몽주의 사상가 및 근대에 이르기까지 관념의 형성과 진화의 과정을 잘 정리해 주고 있는 책이다. 또한 종교가 문명의 진보에 어떠한 역활을 했는지 특히 기독교의 사회적 역활을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역사적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사상 흐름의 전체를 파악하고, 종교적으로도 매우 균형감각 있는 분석을 하고 있다.
[제1부] ‘사회학적 관점’에서 : 어떤 초월적 목표가 없으면 문명은 쾌락에 빠져들거나, 그 강도가 시들어지면서 불모의 반복으로 서서히 빠져들어 소멸의 과정을 진행….....
고대와 중세사회를 타고 흘렀던 중추적 문명의 발전 요인이 되었던 관념으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들고 있다. 특히 기독교의 윤리는 중세문명을 형성하는 하나의 토대를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고대철학(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사상과 기독교의 발전과정이 유럽문명 형성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고 있는데,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연구>를 방불케 한다.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부터 고대 로마사회의 형성과 몰락, 그리고 중세를 지나 근대 계몽주의에 이르는 인류문명의 역사의 진행방향을 관념의 발전방향과 일치시키며 조명하고 있다.
기독교는 플라톤의 영원(이데아)에 대한 학설을 재빨리 흡수하여 동화시키므로써 서양문명이 진화해 오는데 기여한 한 요소였다고 한다. 초기 기독교의 윤리적 관념은 그 시대에 당연시되었던, 고대 로마의 노예제도를 벗어나는데, 사회적 변혁의 한 중요한 요소로 작용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네로에서 트라야누스 시대에 이르는 로마제국 내의 ‘초기 기독교인’을 현대의 미국사회의 ‘공산주의자’와 비슷한 상황으로 비교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다. 아울러 중세기의 기독교는 문명을 발전시키는 추진력으로 독보적인 영예를 오랜 세월 누렸왔지만, 세력이 확장되면서 권력과 관계함으로써 진보의 도구가 못되고, 결국은 보수화의 도구가 된 것을 역사의 흐름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중세시대 1000년을 관통하고 있었던 기독교의 관념을 전체적으로 놓고 본다면, 견고하게 확립된 종교적 제도들은 사회의 보수세력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어떤 초월적 목표가 없으면 문명은 쾌락에 빠져들거나, 그 강도가 시들어지면서 불모의 반복으로 서서히 빠져들어 소멸의 과정을 진행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한 문명이 유지하고 있는 관념의 형태는, 그 사회의 진보를 이를 수 있느냐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왔다고 언급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분석으로 미루어볼 때, 어떠한 신념이나 정신적 가치가 결여되어 있는 민족은 진보의 문명화를 이루기는 고사하고,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거나 결국은 소멸의 길을 가게 된다. 하나의 국가나 공동체 단위로 볼때, 역사적으로 문명이 나타나서 형성부터 발흥기를 거처 소멸하는데 일반적으로 약 5백년이 걸린다고 한다. 고대철학에 있어서 형상(形相)과 조화(調和)라는 플라톤의 개념은 19세기 이후에 와서는 개체성(個體性)과 경쟁(競爭)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제2부] ‘우주론적 관점’에서 : 어떤 형이상학에 대한 언급 없는 모든 추론은 불완전하다.
자연의 법칙, 과학적 실증주의 및 종교적 관념 등과 함께 우주론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다. 현대에 있어서 점차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실증주의’ 만이 믿을 수 있는 사실로 인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과학적 학설을 다룰 때, 우리는 그 시대에 유포되어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에 의해서 통제를 받는다고 한다. "어떠한 과학도 그 과학이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무의식의 형이상학보다 더 확실한 것은 있을 수 없다. 개체적 사물은 필연적으로 그 환경의 한 변형(變形)이며, 그것과 분리시켜 이해될 수 없다. 어떤 형이상학에 대한 언급 없는 모든 추론은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확실성이란 일종의 망상이다."
과학적 실증주의는 관찰된 자료만 처리하므로써 일반적인 기술방식을 창출하는데, 이러한 방식만으로는 자연사물 속의 생동하는 움직임을 통찰하지 못하고 역사의 프로세스의 방향 조차 전망하기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실증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경험주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화이트헤드의 귀결이다.
제2부 마지막 부분에서는 플라톤의 사상과 기독교 관념의 형성과정을 비교하면서, 종교적 관념이 인류문명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하고 있다. 기독교는 최초 발생과정 부터 근대에 이르기 까지 유지되어온 유럽의 지적운동이 없었더라면, 이미 옛날에 불건전한 미신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문명화된 종교는, 인류역사의 위대한 시대에 강렬한 영향을 끼친 형이상학적 직관(直觀)의 문명화된 합리적 비판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정서의 훈련을 지향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기독교 신학자들은 기본적인 형이상학적 이론에 있어서 플라톤의 이론을 계승발전시킨 유일한 사상가들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그 신적 본성에 포섭함으로써 그것들에게 생명력을 부여했지만, 현실세계에서는 오직 다른 변형의 형태(모사, imitation)를 발견했을 뿐, 그 원형을 찾지 못했다. 플라톤은 그의 형이상학적 직관의 깊이를 보여주는 데에는 성공한 위대한 철학가가 틀림없으나, 사회적 관념을 체계화 하는 데는 실패한 사상가 라고 평하고 있다. 신(神)의 본성을 고찰했을 때, 파생적 이미지(심상)의 생각을 품고 있었던 ‘아리우스파(신적 본질성과 그리스도를 분리하고자했던 종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의 해결은 비록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폄하되었다 하드라도, 정통적인 플라톤주의을 계승하고 있는 것에 틀림없다고 한다. 반면에 기독교 신학자들은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인격체 속에 신이 직접 내재해 있다고 보았고, 삼위일체와 인격신앙의 모든 교리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은 진리와는 별개로 힘의 논리에 의해 도도히 변화해갈 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신학적 교리를 형이상학으로 까지는 발전시키지 못하므로써, 근현대를 관통해 갈 수록 시대논리를 수용할 수 없게 되었고,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퇴화의 길목에 가로막혀 있게 된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기존 종교와 신학에게 요구하는 것은, 변화해가는 삶 속에서도 우리의 유한한 본성에 고유한 완성을 표현하는 가운데, 불멸하는 그런 요소를 표현해 달라는 요구인 것이다.
[제3부] ‘철학적 관념’에서 : 소멸은 생성의 시작이다. 소멸한다는 것은 초월적 미래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확보하는 것이다.
철학적 방법에서는 빠지기 쉬운 두가지 오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언어의 충분성에 대한 무비판적인 신뢰이며, 또 하나는 인식론(認識論)의 기초로서 왜곡된 내관(內觀)의 태도에 대한 무비판적인 신뢰이다. 미래라는 것은 무(無)의 우연성으로 부터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의 계기(契機)를 통해 연결되는 하나의 시간흐름의 연속성 속에 존재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소멸은 즉, 생성의 시작이다. 과거가 어떻게 소멸하느냐 하는 것은 미래가 어떻게 생성되느냐 하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각각의 계기(契機)는 소멸할 때에 존재의 직접성으로부터 직접성의 비존재로 이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무(無)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플라톤의 명언처럼 '항상 생성하면서도 결코 참으로 존재하는 법이 없는' 것과도 같은 형이상학적 일반화를 의미한다. 인류역사의 일상적 표현에 있어서 우리는 과거의 3개의 양상 즉, 인과성, 기억, 경험을 가지고, 그것들의 변형된 형태로 현재의 기초역할을 하게함으로써 적극적 변화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래서 소멸한다는 것은 초월적 미래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확보하는 것이 된다. 계기의 비존재는 그것들의 '객체적 불멸성'이다. 순수한 물리적 파악이란 존재의 직접성에 있는 계기가 비존재의 객체적 불멸성으로 이행한 별개의 계기를 흡수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과거가 현재 속에서 살아 있게되는 통로이다.
[제4부] ‘문명론적 관점’에서 : 순수하게 보수적(保守的)인 것은 우주의 본질에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은 완전성(完全性)에 대한 추구라고 화이트헤드는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완전성 조차도 끝없는 반복의 지루함에는 견딜 수 없다고 한다. 문명을 그 최초의 강렬한 열정(熱情)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게 된다. 바로 모험, 즉 새로운 완전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가 문명발전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해석에 의하면, 순수하게 보수적인 것은 우주의 본질에 역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태적(靜態的) 존재가 바로 현실태(現實態)가 되는 그러한 정지(停止) 같은 것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에서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진리를 부분적으로 안다는 것은 우주를 왜곡하는 것이 된다.
형이상학의 사변적 방법은 위험하고 곡해되기 쉽다. 모험이라는 것은 모두 그렇다. 그러나 모험은 문명의 본질에 속한다. 현실적인 존재는 물리적인 것에 의해 한정되면서 반듯이 다른 한편에서는 정신적인 것을 통해서 새로움을 창조해 가야 한다. 인간의 행위는 정신성을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 현대의 인간은 신의 추종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율적 이성적 존재도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4부 마지막 부분에서 ‘청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너무나도 감명깊게 가슴에 와 닿았다. 사물의 본성의 핵심에는 항상 청춘의 꿈과 비극의 결실이 있다고 한다. 우주의 모험은 바로 그런 꿈에서 출발하며,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거두어 들인다고 한다.
<청춘(靑春)>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견해
“청춘에 관한 가장 심오한 정의는 아직 비극에 접해본 적이 없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청춘은 개인적 향유와 개인적 불쾌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민감한 쾌락과 민감한 고통, 민감한 웃음과 민감한 눈물, 민감한 배려의 부재와 민감한 사양, 민감한 용기와 민감한 두려움 등은 모두 청춘의 특징이다. 다시 말하면, 청춘은 그 자신의 일에 즉시즉시 열중한다. 이러한 측면의 청춘은 너무나 변화무쌍하여 행복한 시기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 시기는 행복하기 보다 생기 발랄하다고 해야 한다. 청춘을 기억하면서 사는 것이 청춘 그 자체보다 더 좋다.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기억은 즐거웠던 날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청춘은 일상적인 의미로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청춘에서는 절망이 압도적이다. 거기에는 내일이 없으며, 남아 있는 재난의 기억도 없다. 청춘의 근시안적인 안목은 빈약한 경험과 맞물려 있다. 그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느냐하는 것은 그의 시야 밖에 있다. 아마도도 그때 문학은 기만적인 의미의 지식을 제공할 것이다. 그래서 관대함과 잔혹함은 그것들의 충분한 결과가 예상권 밖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똑같이 자연스럽다. 청춘은 그 자신의 열정 속에서 자신을 잊는다.”
https://naver.me/5BvO4KlN
관념의 모험 / 화이트헤드
20세기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지적 모험이 담겨있는 이 책은 관념이 인간성을 향상시켜왔다는 관점에서 인류문명의 역사를 해석한다. 문명론, 사회.역사 철학뿐만이 아니라 과학론.미학, 형이상학이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화이트헤드의 사상이 담겨있다.
ㆍ활기차고 혁명적인 관념의 변천이 인간 사회의 현실적인 기본 조건들을 변화시킨다.
ㆍ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3부작
1) 과학과 근대세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 1989
2) 과정과 실제 - 유기체적 세계관의 구상, Process and Reality, An Essay in Cosmology, 1991
3) 관념의 모험, Adeventures of Ideas, 1993
3부작은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기술하려는 시도인 동시에 인간 경험의 유위전변을 개관함으로써, 어떻게 이와 같은 해석방식이 예시되는지를 지적해보려는 시도이다.
ㆍ화이트헤드 생애의 마지막 저작은 <사고와 양태, Modes of Thought, 1938>dlek.
ㆍ20세기 초엽에 화이트헤드와 B. 러셀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공저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수학원리)는 어떤 의미로는 1920년대 후반에 비에나 학단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논리실증주의 운동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들은 기호논리학을 철학언어 분석에 응용하면서 형이상학의 무의미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ㆍ순수한 역사라는 것은 기껏해야 공상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을 진짜로 믿게 되는 원인은 자기 자신의 한계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추측만으로 '객관적인 사실'이나 '순수한 역사' 같은 것을 믿는 데 있다고 보면서,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정신성을 가리켜 '편협 근성'에 깊이 빠져 있는 정신이라고 강하게 비판을 하고 있다.
ㆍ화이트헤드가 '전체적 전망'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인간이나 자연의 모든 사물에는 고립해서 존재하는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상호간에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깊은 형이상학적 통찰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ㆍ화이트헤드는 인류의 역사를 '맹목적인 충동'과 '자각된 열망'과의 치열한 대립 내지 협력의 역사로 보면서 후자의 힘이 전자의 힘을 압도하는 상태를 가리켜 '문명의 진보'라 부른다.
ㆍ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문명이란 관념들의 조화 있는 유기적 관계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 유기적 조화는 어디까지나 '관념의 모험'에 의해서만 달성된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일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모험이란 새로운 완전성의 탐구이며, 모험이 없는 문명은 쇠퇴한다. Adeventure is the search for new perfections.
ㆍ한 사회가 진리, 아름다움, 예술, 모험, 평화의 다섯 개념으로 성격지워질 때, 이러한 사회는 문명화되어 있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문명화는 신과 유한한 온갖 현실적 존재와의 협동으로 만들어가는, 세계의 자기 형성 작용의 궁극 형태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세계에 놓여 있으면서 한정되고 능한정적으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그때마다 경험 속에서 실현된다.
ㆍ진리란 존재와 인식 간의, 실재와 현상 간의 일치를 말한다. 진리는 자연적 사물의 지식과 관계된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은 통상적으로 'S는 P이다.'라는 명제로 표현한다. S는 표기되는 자연적 산물은 자신을 P로 한정한다. 실재 쪽의 이러한 상태와 주관 쪽의 인지적 효과와 현시적 직접태라는 두 가지 방식의 조합을 통해서 받아들일 때 그리고 현상과 실재가 일치할 때 거기에 진리가 성립된다.
ㆍ예술에는 자신을 위해 아름다움을 향유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측면이 있다. 우리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한정되는 즉시로 능한정적 방식으로 자신을 예술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만들어간다. 그래서 그러한 자신의 제작을 끝냈을 때, 자신을 초월하여, 후속하는 것에서 스스로를 객체화한다. 그것이 곧 '모험'이다. 모험이라는 것은 나를 죽여 타자 속에 사는 것이다.
1. 사회학적 관점에서
1) 서설
ㆍ관념의 역사를 고찰할 때 '단순한 지식'이라는 관념은, 우리가 떨쳐버려야 할 고도의 추상이다. 지식에는 언제나 정서라든가 목적과 같은 장식물이 따라다닌다. 그리고 관념의 일반성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 인간의 영혼
ㆍ기독교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플라톤의 학설을 재빨리 흡수하여 동화시켰다. 플라톤의 철학과 기독교는 가르침에 있어 아주 유사한 것이다.
ㆍ인간의 삶은 기존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일반적인 개념을 막연히 감지하는 가운데 그 추진력을 얻는다. 이러한 일반적 관념들은 상호연관을 떠나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사물들의 일반적 본성을 파악함으로써 서로 해명되는 관념들의 체계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전진해갈 필요가 있다.
ㆍ세계 - 즉 문명적 질서의 세계 -의 창조는 힘에 대한 설득의 승리이다.
3) 인도주의의 이상
ㆍ노예제의 필요성을 감소시켰던 가장 큰 부수적 원인은 기술의 발달이다.
ㆍ유감스럽게도 맬서스의 인구론은 통속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연의 법칙으로서 대규모 인류집단은 결코 고도의 복지 상태에 이를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생물과학은 개체의 파괴가 보다 고등한 유형의 종으로 나아가는 방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다윈의 자연도태설).
ㆍ두 가지 지적운동, 하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원리'에 기초한 제러미 벤담의 법률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오귀스트 콩트의 인도교 혹은, 즉 '실증주의'이다. 제러미 벤담과 오귀스트 콩트는 이 일반화된 정서를 궁극적인 도덕적 직관으로서, 즉 어떠한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고 또 정서와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관한 궁극적 이해도 필요로 하지 않는, 명백한 사실로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들은 형이상학을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민주주의적 자유주의를 위해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
ㆍ자연과학이 다루는 주제의 4가지 항목
1) 존속하는, 진정한 실재적 사물
2) 생겨나는, 진정한 실재적 사물
3) 반복되는, 추상적 사물
4) 자연과학의 틀을 넘어선 - 인간 존재의 개체성
4) 자유의 양상.
ㆍ의식에 미리 전제되어 있는 원초적 진행을 나는 '본능'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것은 개인적, 환경적 계승이라는 충동에서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경험양태이다. 한편 본능과 지성의 발효작용이 끝난 뒤에, 본능과 지성의 합성양태를 결정하는 것으로 결단이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요인을 나는 '지혜'라 부르고자 한다. 주어진 조건에서 자기 결정적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지성의 발효에 변화를 가하는 작인으로 기능하는 것이 곧 지혜이다. 사회 제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인간의 본성을 이처럼 '본능', '지성', '지혜'의 세 계층으로 대충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가지는 각기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통합되고 반응하고, 용해되면서 혼성적인 요인이 된다.
ㆍ무제한의 자유란 어떠한 강제적 조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강제도 없는 인간사회는 개인의 정서, 목적, 애정, 행위 등의 운좋은 조정을 신뢰하고 있는 사회이다. 문명은 이처럼 복받은 상호적응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집단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소수의 역행하는 개개의 사례들이 억제되지 않을 때, 사회구조를 전복시킬 수 있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성격 구성 전체에 있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일부 행동에 있어, 그 시대에 가능한 어떤 독특한 유형의 사회와 관련하여 반사회적이다. 강제가 필요하며, 강제는 자유의 제한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회피할 수 없다.
ㆍ제도가 갖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개인의 전문적 능력과 전문적인 실천 표준을 관리하는 일일 것이다.
ㆍ관념이 효력을 갖는 곳에는 언제나 자유가 있기 마련이다.
5) 힘에서 설득으로
ㆍ실제로 경제학의 발전은 그것과 주로 관계되는 계층이 갖는 도덕적 경향에 의해 좌우되었따.
ㆍ상업은 상업의 확대, 기술의 개선, 공한 지역의 이용 - 세 조건을 망라하고 있다. 상업은 문명이 번영하기 위한 필수적인 핵심요인 중의 하나이다.
6)예견
ㆍ예견의 훈련은 이해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예견은 통찰의 선물이다.
ㆍ철학이란 고귀한 정서의 단순한 집합이 아니다. 그러한 정서의 범람은 좋은 것이기보다 해로운 것이다. 철학은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구체적이며 직접적 직관에 대해 비판적이면서 동시에 우호적이다.
ㆍ오늘날 인류는 사물을 보는 자신의 관점을 변화시켜보려는 보기 드문 분위기 속에 있다. 전통에 의한 단순한 강요는 그 힘을 잃었다. 사회를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위엄과 질서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굴의 합리성이 철저하게 깃들어 있는 하나의 세계관을 재창조하고 재가동시키는 것이, 우리 즉 철학자, 학생, 기업가들의 책무인 것이다.
에필로그
ㆍ개선은 상호간의 존경, 공감, 일반적인 친절 등의 점차적인 성장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느낌들은 최소한의 지성과 공존할 수 있다. 이들의 기초는 정서적인 것이며, 인간성은 자연의 추이 속에서 생각 없이 행동함으로써 이러한 정서를 획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신성은 그것이 조절된 활동 속에 나타날 때, 선택하고, 강조하고, 분해하는 데 눈부신 능력을 발휘한다.
ㆍ관념들은 자신의 모태인 활동을 변화시켜가는 힘을 갖는다.
2. 우주론적 관점에서
7) 자연의 법칙
ㆍ서로마제국에서는 헬레니즘의 사상으로 무장한 그리스도 교회가 승리에 들뜬 야만족의 지성을 사로잡았으며, 서구를 문명화하여 북극해까지 이르게 하였다. 마호메트교의 정복자들은 지중해의 남단을 따라, 아라비아인, 유태인, 페르시아니의 정신성에 의해 물들여진 헬레니즘 사상을 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까지 전하였다. 스페인에서, 마호메트교적인 알렉산드리아 문화와 유태적인 알렉산드리아 문화는 그리스도교적 알렉산드리아 문화와 접촉하였다. 이 융합이 13세기에 그리스도교적 스콜라 철학이라는 눈부신 결실을 낳았을 뿐 아니라 17세이의 스피노자를 낳았다.
ㆍ헬레니즘의 기조는 기쁨, 사색, 담론조의 문학이며, 헬레니즘적 알렉산드리아의 기조는 주의집중, 철저, 특수한 논제에 관계되는 특수한 유형의 질서에 관한 연구이다.
ㆍ관념의 모험의 학 측면은 이 사색과 학문의 상호작용의 역사, 즉 진보의 시대들을 통해서 계속되어온 갈등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위대함이 절정에 달하고 있는 시기에 달성된 사변과 학문 사이의 운좋은 균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그와 같은 달성의 모든 정점에 있는 과도함의 색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역사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최고의 순간이 비극적으로 짧은 것이 되는 이유를 제시해주고 있다.
ㆍ법칙의 개념, 말하자면 어느 정도 규칙성이나 지속성 또는 반복과 같은 개념은, 기술, 방법론, 학문, 사변 등을 향하는 충동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이다. 사물의 본성에 있어서 어떤 유연성을 떠나서는 지식도 유용한 방법도 지적 목적도 결코 존재할 수 없다.
ㆍ문명은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사회계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최초의 노력은 이미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여러 가지 행동양식이나 정서표출들을 설명하는 관념들을 서서히 이끌어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확실히 관념은 실천을 변경시킨다. 그러나 대체로 실천이 사상에 앞서며, 사상은 주로 기존 상황을 정당화하거나 변경시키는 데 관여한다.
ㆍ법칙을 내재하는 것으로 보아 학설에 의하면 자연의 질서는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존재자를 공동으로 구성하고 있는 현실적 사물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사물들의 본질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이들 사물의 상호관계를 알게 된다. 따라서 그들 사물의 다양한 성격에 공통요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부응하여, 이들 사물들 사이의 상호관계에도 그에 상응하는 동일성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 사물의 다양한 성격에 있어서 어떤 패턴의 부분적인 동일성은 결과적으로 그 사물들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패턴의 부분적인 동일성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관계에 있어서 패턴의 동일성이 곧 '자연의 법칙'이다.
8) 우주론
ㆍ나는 있음 being의 정의는 단적으로 힘 power 이라고 생각한다. - 플라톤이 말하고 있는 것은 힘을 행사하고 힘의 작용을 받는 것이 있음의 정의라는 것이다. 이것은 있음의 본질이 다른 있음에의 원인작용 속에 포함되고 있음을 뜻한다.
ㆍ흄이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확신이 없이는 인간의 생활이 영위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오늘날의 '실증주의 학설'은 어떤 형태이든 원자론에 그 기초를 두고서, 과학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관찰된 사물을 단순한 형식으로 잘 기술해내는 데 있다고 결론한다.
9) 과학과 철학
ㆍ어떤 의미에서 '과학'과 '철학'은 인간 정신의 위대한 하나의 기도에 있어 서로 다른 두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 과학과 철학은 서로 비판하며, 서로 상상적 소재를 제공한다. 철학세계는 과학이 추상화하는 구체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과학은 철학체계가 제시하는 구체적 사실들 속에서 자신의 원리를 발견하도록 해야 한다. 사상의 역사란 결국 이러한 공동작업에서의 실패와 성공의 정도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ㆍ과학의 확실성이란 일종의 망성이다. 그러한 것들은 전인미답의 한계에 둘러싸여 있다. 과학적인 학설을 다룰 때 우리는 우리 시대에 유포되어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에 의해서 통제받는다. 그렇게 하더라도 우리는 늘 잘못된 기대로 이끌려간다. 그리고 어떤 새로운 방식으로 관찰되는 경험이 획득될 때면 언제나 기존의 낡은 학설은 부정확성의 안개 속으로 흩어지고 만다.
ㆍ우리의 조정된 지식은 두 가지 경험 질서의 만남으로 형성된다. 이들은 '관찰적 질서' (Observational Order)와 '개념적 질서' (Conceptual Order)로 불리게 될 것이다.
10) 새로운 종교개혁
ㆍ종교는 우주의 궁극적 신비로 향하는 직관의 개인적 정도에 따르는 목적과 정서에 대한 우리의 반응과 관계되는 것이다. 단순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ㆍ문명은 오로지 문명화된 사람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문명을 이해하는 가운데 문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우리 자신의 본성에 관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특성을 가지게 된다.
ㆍ성서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은 기독교적 직관을 원상복구하기 위해 유지되어온 야만적인 요소를 예증하고 있다.
ㆍ문명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1) 행동의 패턴
2) 정서의 패턴
3) 신앙의 패턴
4) 기술
3. 철학적 관점에서
11) 객체와 주체
ㆍ경험의 계기란 하나의 활동이며, 그 생성과정을 연대적으로 구성하는 기능양태로 분석될 수 있다. 각 양태는 활동적 주체로서의 경험 전체와 그 특수활동과 관계되는 사물 내지 객체로 분석될 수 있다. 이 사물은 하나의 여건, 즉 그 계기 속에 영입된 것과는 무관하게 기술될 수 있는 것이다. 객체란, 문제되고 있는 계기의 어떤 특수한 활동성을 유발하는, 이러한 여견의 기능을 수행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주체와 객체는 상대적인 용어이다. 계기는 객체에 대한 특수 활동성이라는 점에서 주체이다. 또한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주체 내의 특수한 활동성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객체이다.
ㆍ모든 지식은 경험된 객체를 의식적으로 식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적 식별이 지식이기는 하지만 주체와 객체 간 상호작용의 주체적 형식에 있어서 추가적인 요인에 불과하다. 이 상호작용이야말로 유일한 '우주'의 실재성을 만들어내는 개체적 사물들을 구성하는 소재이다. 이러한 개체적 사물들이 경험의 개체적 계기이며, 현실적 존재들이다.
ㆍ우리는 지식을 그렇게 쉽게 제거하지 못한다. 결국 철학자들이 탐구하고 있는 것은 지식이다. 모든 지식은 직접적인 직관적 관찰에서 도출되고 그것에 의해 검증된다. 나는 이처럼 일반적 형식으로 진술된 경험론의 공리를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에서 그 윤곽을 잡았던 경험구조가 어떻게 직접 관찰되느냐 하는 것이다.
ㆍ경험의 과정은, 그 과정에 선행하고 있는 존재들을, 그 과정 자신인 복합적 사실 속으로 수용함으로써 구성된다. 하나의 존재가 경험의 과정에서 객체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1) 이 존재는 선행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 (2) 이 존재는 그 선행성 덕택으로 되는 것이어야 하며, 그것은 반드시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객체는 수용된 것이어야 하며, 수용의 방식이거나 그 계기 속에서 산출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경험의 과정은 객체들을, 과정 그 자체인 복합적 계기의 동일성 속으로 수용함으로써 구성된다. 일반적으로 과정은 스스로를 창조한다. 그러나 과정은 그 자신의 본성에 있어서 그것이 요인으로서 수용하는 객체를 창조하지 않는다.
ㆍ우주는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무상하면서 영원적이기 때문에 이원적이다. 우주는 각 궁극적 현실태가 물리적이면서 정신적이기 때문에 이원적이다. 우주의 각 현실태가 추상적 성격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원적이다. 우주는 각 계기가 그 형식적 직접성을 객체적 타자성과 결합하기 때문에 이원적이다. 우주는 많은 최종적 현실태 - 혹은 데카르트의 용어로 말하면, 많은 진정한 사물 - 로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분석될 수 있기 때문에 다자이다. 우주는 그 우주적 내재성에 이원론이 있다. 우주 전체에 걸쳐 이원론의 근거가 되는 대립물의 결합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12) 과거 현재 미래
ㆍ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현재에 있어서 관념적 설득이 전부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기적인 과거나 장기적인 미래를 깊이 생각한다는 문학적인 습관의 결과이다. 문학은 인류의 지혜를 보존해준다. 하지만 문학은 이러한 방식으로 직접적 직관의 강조를 약화시킨다. 과거나 미래의 직접적 관찰을 고찰하는 데에 우리는 1초라든지 1초의 몇 분의 몇이라는 크기의 시간대에 국한시켜야 한다.
ㆍ그 어느 경우에도 개념적 새로움의 있음, 없음과는 상관없이 개념적 파악의 주체적 형식은 우주의 충동을 구성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각 계기는 자신을 미래 속으로 몰고같다.
ㆍ현재는 그 본질 속에 미래가 순응하지 않으면 안될 모든 필연성을 포함하고 있다. 미래가 현재 속에 있게 된다는 것은 사물의 본성에 속하는 일반적 사실이다. 그리고 미래는 후속하지 않으면 안될 특정한 미래에 부과되는 특정한 현재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한정된 것으로 존재한다.
ㆍ우주의 현실태는 경험의 과정이며, 각 과정은 하나의 개체적 사실이다. 우주 전체는 이러한 과정들의 전진하는 집합체이다.
ㆍ'자연의 법칙'을 동반한 영역이라는 말은 '본질적 성격'을 동반한, 존속하는 실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13) 계기들의 군집
ㆍ'계기들의 군집'은 지각적 경험에 있어서 계기들이 수행하는 공통적 기능의 소산이다. 군집된 계기들은 통일성을 획득한다. 그것들은 지각자의 경험을 위해서 많은 계기들로, 또는 많은 종속적인 그룹의 계기들로 분할 가능하기 때문에 복합적인 하나의 사물이 된다.
ㆍ그러나 동물적 유기체가 다소간의 인격성을 갖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그것은 단지 영혼을 소유하느냐, 소유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만일 영혼이 있다면 그것이 어느 만큼이냐 하는 것이다. 고도의 다중적인 인격성으로 흐르는 경향은 상이한 목적들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자멸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다중적인 인격성은 목적에 순응한다는 생명의 본질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4) 현상과 실재
ㆍ경험의 한 계기 속에 객관적 내용은 두 가지 대조적인 성격 - 현상과 실재 - 으로 구분된다.
ㆍ현상은 정신적 극의 활동의 결과이며, 이로 말미암아 주어진 물리적 세계의 성질들과 조정은 변형을 거치게 된다. 그것은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융합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15) 철학적 방법
ㆍ방법이라는 것은 모두 교묘한 단순화이다.
ㆍ여기서 말하는 해석이란 각 요소가 일반적 도식의 특수한 사례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ㆍ철학은 독단의 오류로 말미암아 피해를 입어왔다. 이 오류란 작업 가설의 원리는 명석 판명하고 개혁 불가능하다는 신념에 있다. 그래서 철학은 이러한 오류에 대한 반발로서, 방법을 포기하는 오류라는 별개의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철학자들은 그들이 내세울 체계가 없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그들의 과학이 극복하고자 목적하는 분리된 표현들의 허망한 명석성 같은 것의 포로가 되어 있다. 또 다른 유형의 반발은 어떤 지적 분석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포기된 어떤 독단적 방법에 따라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종종 암암리에 가정하고 이로부터 지성이란 것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허구와 결부되어 있다고 결론을 내리는 일이다.
ㆍ방법이란 여건, 즉 증거를 다루는 방식이다.
ㆍ어떤 것에 관해서 말을 한다는 것은 바로 그 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그 경험 행위의 구성요소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의미에서, 그것은 그로 인해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ㆍ말의 어떤 의미가 어떤 의미에서 직접 경험되지 않는 한, 전달되는 의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무를 지시하는 것은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ㆍ흄의 물음을, "우리는 대체 무엇을 경험하는가"로부터 "우리는 대체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가"로 바꾸어 놓을 때, 모든 것이 달라지게 된다.
ㆍ논리학의 과제는 일반성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그것들의 혼합에 대한 분석이다.
4. 문명론적 관점에서
16) 진리
ㆍ진리와 아름다움은 위대한 규제적 특질이며, 그것에 의해서 현상은 경험 주체의 직접적 결단에 대해서 정당화된다. 이 정당화는 직접적 계기에 있어서 현상의 지위를 결정한다.
ㆍ진리는 현상에만 규정되는 규정이다. 실재는 바로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것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리란 현상의 실재에의 순응이다.
ㆍ명제라는 것은 현실태에 관한 관념이며, 사물에 대한 시사이며, 이론이고, 가정이다. 그것을 경험 속으로 영입하면 많은 목적에 도움이 된다.
ㆍ관념과 그 표현 간의 연결고리를 위해서 '해석'이라고 기술했다.
17) 아름다움
ㆍ아름다움이란 경험의 계기 속에서 여러 요인들 사이의 상호 적응을 말한다.
ㆍ적응은 목적을 함의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적응의 목표가 분석되었을 때에만 정의될 수 있다.
18) 진리와 아름다움
ㆍ진리는 그 범위, 그 양태, 그리고 그 관련성에 있어서 각양각색이다.
ㆍ아름다움에 봉사하는 진리의 기능에 의하여 진리 실현은 그 자신에 있어 느낌의 아름다움을 증진하는 요소가 된다.
ㆍ예술은 실재에 대한 현상의 목적론적 적응이다. 그런데 목적론적 적응은 다소간 성공리에 획득된 목적을 함의한다. 예술이 지향하는 이러한 목적은 두 가지, 즉 진리와 아름다움이다. 예술의 완성은 진실한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갖는다. 그러나 진리나 아름다움이 획득된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성공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진리가 없는 경우라면 아름다움은 중후함을 결여한 저차원에 있게 된다. 아름다움이 없는 경우에 진리는 사소성으로 전락한다. 진리가 중요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 때문이다.
ㆍ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 속의 요인은 의식이다. 의식이란 어떤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가정의 결합의 결과로서 객체적 내용 속에 출현하는 성질이다.
ㆍ인간의 신체란 인간 영혼의 생명 속에 예술을 낳기 위한 도구다.
ㆍ과학과 예술은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한 단호한 의식적 추구이다.
18) 모험
ㆍ문명화된 사회는 진리, 아름다움, 모험, 예술, 평화라는 다섯 가지 성질을 보여 주고 있다.
ㆍ때때로 모험은 한계 내에서 작용한다. 그때 모험은 그 목표를 계산하고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모험은 한 유형의 문명 내부에서 변화의 잔물결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유형의 시대는 그 신선함을 유지한다.
ㆍ살아 있는 문명은 학습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학습을 넘어선 곳에 있다.
19) 평화
ㆍ평화는 마비라는 소극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에 있어 생명과 운동의 왕관인 긍정적 느낌이다.
ㆍ평화의 경험은 대개 목적의 제어를 넘어선다. 그것은 일종의 선물로서 도래한다.
ㆍ평화의 의미는 사물의 본성에 있어서 본질적인 비극적 결과와의 관계 속에서 평화를 고찰할 때 가장 명확하게 이해할 수있다. 평화는 비극에 대한 이해인 동시에 그것의 보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