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의 총재 당선과 YH 사건
1978년 하반기부터 한국경제는 급락하기 시작했다. 1978년 12월 개각에서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임명된 신현확 부총리는 성장위주에서 안정 위주로 정책 기조를 바꾸었다.
1979년 2월 19일 박정희 씨는 여권을 개편했다. 공화당 의장이던 이효상 의원을 당 총재 상임고문으로, 박준규 의원을 당 의장 서리로 임명했다.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 의장에는 태완선을 임명했고 국회의장 후보엔 예상을 뒤엎고 백두진(白斗鎭) 전 유신정우회 의장을 지명했다.
【유정회(유신정우회의 약칭)는 유신 체제하에서 대통령이 지명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승인하여 국회의원이 된 인사들의 교섭단체이다. 유신헌법에 따라 의원 총수의 3분의 1인 77명이었다. 정치 조직이면서도 정당도 사회단체도 아닌 특수 단체였다. 유신 이념을 구현하고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는 활동을 내세웠으나 박정희의 원내 전위대 기능을 하였다.】
국회의장에는 정일권 의장의 유임설과 김종필 의원의 지명설이 유력했었다. 백두진을 의장으로 민 것은 경호실장 차지철이었다(백두진은 국회의장이 되기 위해 경호실장 차지철을 ‘각하’라 부르면서 후원을 얻었다).
79년 3월 10대 국회 개원 벽두 이른바 백두진 파동이 일어나 ‘자유와 안보를 중도적으로 통합하자’는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는 이철승 신민당 대표체제의 본질이 드러났다.
신민당과 통일당은 백두진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할 때 퇴장하여 항의하는 뜻을 표현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영삼 의원이 주도한 야당의 반대이유는 간단했다. 백두진 의원은 국민이 뽑은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지명하는 유정회 국회의원이라는 것이다. 국회의장은 대통령 다음의 서열인데 대통령이 지명하여 의원이 된 사람을 이 자리에 임명한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그때까지 모든 국회의장은 국민이 직접 뽑은 의원 중에서 선출되었으므로 야당으로서는 반대할만한 일이었다.
야당의 퇴장 방침이 알려지자 박 정권은 매우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여당 의원들에게서 위협적인 언사가 튀어나왔다.
“국회가 술집이나 자기 집 안방처럼 마음대로 들어가고 나가는 곳이냐”(박준규 공화당 의당), “여당 총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다. 10대 국회의 해산론까지 제기되었다”(정재호 유정회 대변인)
야당의 결정이 변경되지 않는 한 10대 국회를 개원할 수 없다는 것이 여권의 방침이었다. 야당의 백두진에 대한 보이코트는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라는 논리였다.
여권의 초강경 방침에 박정희 씨를 극히 두려워하는, 따라서 알아서 기기를 잘하는 이철승은 신민당 의원 총회와 최고위원회의에서 ‘韓信이 가랑이 밑을 기었던 식의 전체이익과 장기적 고려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폈다. 김영삼 의원은 보이코트 강행을 역설했다. 결국 3월 17일 백두진을 국회의장으로 뽑는 의원 투표에서 신민당은 이철승을 비롯한 최고위원 6명과 송원영 원내총무만이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이철승은 크나큰 타격을 입었고 김영삼 의원의 선명성이 부각되었다.
신민당 당수를 선출하는 1979년 5월 30일 전당 대회가 다가오자 박 정권은 공작정치에 열을 올렸다.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이 앞장섰다.
김영삼은 유진산의 뒤를 이어 74년 8월 신민당 총재가 되었으나 76년 5월 박 정권의 공작정치로 총재직에서 축출되었다. 김영삼은 다시 총재 직에 도전했다. 이외에 이철승, 이기택(李基澤), 신도환(辛道煥), 이옥선 의원 등이 총재 경선에 나섰다. 김영삼 전 총재는 ‘선명야당’ ‘박 정권 타도’ ‘민주회복 등을 주창하였고 이철승 대표위원은 ’중도 통합론‘과 ’참여하의 개혁‘을 내걸었다. 겉보기에는 이철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신민당 내부에서는 유신 체제를 옹호하는 이철승에 대한 반감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박 정권은 김영삼 의원의 총재당선을 저지하려는 계획을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이해 4월 박정희 씨는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저녁식사를 같이하는 자리에서 술에 취하자 “김영삼이는 총재가 되어선 안돼!”라고 말하여 의중을 드러내었다.
5․30 전당대회를 며칠 앞두고 롯데호텔에서 김재규 정보부장과 김영삼 의원이 만났다. 면담을 주선한 이는 김녕 김씨 문중 사람이었다. 김재규는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고 말했다. 동성동본임을 강조한 말이다. 김재규는 총재후보 사퇴를 끈질기게 간청했다.
“대통령 각하의 생각이 확고합니다. 김 총재도 생각해보십시오. 정권에 도전하는 사람을 그분이 가만두겠습니까” 그러면서 김재규는 “만약 총재 경선을 강행하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위협하기도 했고, 반대급부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모든 제안을 거부했다.
1979년 5월 30일 치러진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박 정권의 치열한 공작을 뚫고 김영삼 후보는 총재로 선출되었다. 일반의 예상을 뒤엎는 이변이었다.
1차 투표에서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 이기택 92표, 신도환 87표, 김옥선 11표로 결과가 나타났다. 과반수 득표자가 없으므로 2차 투표에 들어가야 했다. 막후에서 후보 진영 간에 협상이 벌어졌는데 이기택은 김영삼을, 신도환은 이철승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면서 사퇴했다. 그 결과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대의원 751명 중 378표를 얻어 367표를 얻은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에 당선되었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김대중은 당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신민당은 그동안 대표위원제로 운영되어 오면서 기회주의 노선의 이철승이 이끌어 왔으나 이 전당대회에서 당헌을 개정, 강력한 단일 지도체제인 총재로 바꾸었기 때문에 김영삼의 총재 당선은 정국에 큰 파장을 일으키리라는 전망이 나돌았다.
김영삼 총재 체제는 박 정권의 탄압뿐 아니라 이철승․신도환을 중심으로 하는 비당권파의 도전도 감당해야 했다. 전당대회 바로 다음날 비당권파는 ‘김 총재가 재야(在野) 세력과 손을 잡고 재야와 같은 길을 가려 한다면 우리는 궤도를 같이 할 수 없다’라고 말해 박 정권에 기생하는 세력임을 자백하였다.
박 정권은 김영삼의 총재 당선을 매우 경계하는 반응을 보였다. 오유방 공화당 대변인은 총재 당선축하 논평에서 다음과 같이 협박했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신민당이 국가적 현실을 망각하고 변칙․탈법․기만 등의 전근대적 방법으로 정국 안정을 헤치고 국리민복에 어긋나는 처사를 단행할 때는 단호하게 대처할 것임을 밝혀둔다.
박 정권의 정치 공작에 의해 1976년 전당대회에서 총재직에서 축출되었던 김영삼은 3년 만에 야당총재로 복귀하자 박 정권 타도를 목표로 비타협적으로 투쟁했다.
김영삼이 총재로 당선된 지 1주일도 안된 시점에서 여․야는 무소속 의원 영입으로 한차례 대결했다. 김영삼은 무소속의 김현규․박찬․손주환․오세응․예춘호․이상민․한병채 의원 등을 설득하여 신민당에 입당하게 했다(6월 4일).
다급해진 공화당은 중앙정보부의 도움을 받아 한때 신민당에 입당하려는 의향을 보이던 변정일과 임호 두 의원을 회유하는 등 나머지 무소속 의원들 15명을 입당시켰다(6월 6일).
1979년 6월 말 어렵게 한미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동경에서 열렸던 서방 7개국 경제정상회담에 참석한 다음 카터 미국 대통령은 6월 29일 귀로에 한국을 방문했다.
30일 열린 한미정상회담은 겉보기와 달리 파국이었다. 박정희씨는 45분간에 걸쳐 한국의 안보 상황을 설명하면서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카터 대통령은 지루한 ‘안보 강연’을 듣다가 참지 못하고 배석한 사이러스 밴스(Cyrus Vance) 국무장관과 해럴드 브라운(Harold Brown) 국방장관에게 “그가 더 길게 계속하면 한국에서 미군을 전부 철수시키겠다”는 내용의 메모를 건네주었다.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H. Gleysteen, Jr) 주한 미국대사는 훗날 “과거에 수많은 정상회담에 참석해 보았지만 카터와 박정희가 그날 아침에 한 것처럼 지도자들이 무지막지하게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회고했다.
그래도 한국의 인권 개선을 요구하는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카터 대통령은 김영삼 총재와 만나기도 했다.
7월 10일 정부는 석유제품가격을 평균 50%, 전기요금을 35% 인상했다. 1979년 2월 일어난 이란 혁명의 여파로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원유가격이 2배로 뛰었기 때문이었다. 이 조치로 물가고가 극심해졌다(1979년 인플레이션은 정부 억제목표인 10%를 크게 넘는 21%나 되었다). 기업의 도산, 해고, 실업사태가 연일 신문에 났다. 여기에 국민들을 크게 자극한 것은 부가가치세 도입에 의한 세금의 과중한 징수였다. 부산의 경우, 79년에 국민들이 낸 세금은 약 3,880억 원으로 78년 보다 32%가 늘어났다. 세금과중으로 보수적인 부산 중심지 상인들마저도 정부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7월 23일 제 102회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긴장이 감돌았다. 김영삼 총재는 대표질문을 통해 유신헌법의 개정을 촉구하면서 또한 박정희 씨에게 평화적 정권 교체의 길을 열라고 요구했다.
나는 여기에서 내가 평소에 일관되게 주장해 온 권고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하고자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진실로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그리고 박대통령 스스로를 위해서 조속한 시일 내에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할 준비를 갖추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에 다시는 4․19와 같은 유혈의 비극이 없어야 되겠으며…
7월 31일 신민당 기관지인「민주전선(民主戰線)」의 문부식(文富植) 주간이 구속되었다. 미 국무성은 이를 공개적으로 강력히 비난했다.
8월 초 김영삼의 신민당과 박 정권은 YH 무역사건으로 정면대결을 벌였다.
봉제합섬 제조업체인 YH 무역은 1966년 자본금 1백만 원으로 출발했다. 1970년대의 수출금융지원과 수출제일주의 붐에 편성,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미국 시민권자인 악덕 기업주 장용호가 한국본사에서 물건을 가져가고 대금결재를 하지 않는 방법으로 재산을 빼돌리고 미국으로 도주했다. 결국 YH 무역은 1979년 8월 6일 폐업 공고를 내고 문을 닫았다.
그러나 YH 무역의 폐업으로 직장을 잃은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밀린 임금해결과 회사 정상화를 위해 집단행동에 나섰다. 이들은 은행부채, 이자 등으로 더 이상 회사경영을 할 수 없어 폐업은 불가피하다면서 회사측이 직장을 떠날 것을 강요하자 8월 7일부터 회사 기숙사에서 항의농성을 시작하였다.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자 이들 중 172명이 8월 9일 오전 서울 마포의 신민당사에 몰려와 4층 대회의실에서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날 아침 문동환 목사, 고은 시인, 이문영 전 고려대 교수는 상도동 김영삼 총재 자택을 찾아가 YH 여성 노동자들의 사정을 얘기했다. 김 총재는 신민당사를 농성 장소로 제공하는데 동의했고 여공들의 호소를 듣겠다고 말했다.
다음은 농성 중 여공들이 발표한 호소문의 일부이다.
호소문
정부와 은행은 근대화의 역군을 윤락가로 내몰지 말라
눈물이 흐릅니다. 가슴이 메어지게 아파옵니다. 목이 터져라 우리의 정당한 주장을 외치곤 쉬어버린 목으로 악을 쓰며 노래를 부릅니다.「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유행가에 우리가 작 사를 붙인 노래입니다. 함께 힘차게 불러보시지 않겠습니까?
(중간 생략)
우리는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저희들의 애끓는 호소와 주장을 들으시는 정부당국 그리고 옳은 일을 위해 사회 각 계층에서 수고하시는 여러분! 저희들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읍니다. 이제 회사는 극악한 방법으로 우리를 길거리로 내몰아내려고 하고 있읍니다.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인 전화마저 끊어버리고 말았읍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현재 기숙사에서 농성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오늘부터는 회사에서 식사공급이 끊어지는 날입니다. 저희들은 배가 고파 쓰러져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버티고 싸울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투쟁을 해오면서 이 투쟁이 결코 작은 투쟁이 아니며 우리만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는 확신을 합니다.
악덕기업주가 기업과 노동자를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외화도피를 했다는 말을 주변에서 많이 들었읍니다. 그리고 외국으로 도망간 사람은 물론 돈도 찾아올 수 없다고 합니다. 관계당국이나 은행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돈이 어떤 돈인가 저희는 생각을 해봅니다. 진정 우리의 피와 땀을 짜내고 우리의 청춘을 불살라 얻어진 귀한 돈이 아닙니까? 그 돈이 기업의 발전에 쓰이고 노동자가 취업하며 그래서 조국의 발전에 쓰여져야 할 귀중한 우리 전체의 돈이 아닙니까? 기필코 장용호는 우리의 피와 땀을 혼자 가로채서 먼 나라 미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업주도 버리고 은행도 정부도 가망이 없다고 팽개치는 이 기업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바쳐온 피와 땀의 몇 배를 들여서라도 일으켜 세우겠다고 다짐합니다. 또 저희들은 투쟁을 통하여 우리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노동조합을 지켜야 할 것도 깊이 배웠읍니다.
노동조합이 없었다면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을 YH에서 벌써 우리도 떠나 이 불황의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저희들은 이겨서 우리의 생존권을 되찾고 이 사회에 정의를 심어 조국의 발전에 힘차게 참여하는 역군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너무 어렵고 벅찬 과제임을 고백합니다. 존경하는 당국자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의를 위해 힘쓰시는 여러분! 저희들의 호소를 들으시고 아낌없는 지원을 보내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존경하는 정부당국 및 각계각층에서 수고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싸움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투쟁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당하고도 정의로운 주장과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는 죽기까지 싸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1. 정부당국은 YH무역의 정상화를 실현시켜 우리가 안심하고 생업에 전념할 수 있게 하라! 1. 미국은 악덕기업주 장용호를 소환하라! 1. 조흥은행은 이 모든 사태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고용승계 및 금품청산 등의 제권리를 보장하고 기업을 인수시켜라. 1. 사용자는 직장폐쇄로 위장된 불법적 폐업조치를 즉각 철회하고 책임의식을 회복하여 자신과 성의로써 회사정상화에 대처하라. 1. 노동청은 우리 노동자들의 생존권, 근로권, 고용승계권 및 일체의 권리를 보장하라.
김 총재는 오전 10시쯤 당사에 나왔다. 총재단 회의에서 이 문제를 간단히 보고한 다음 다섯 명의 여성 노동자 대표를 불러 호소를 들었다. 김 총재는 대회의실로 들어가서, 농성하는 여공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사를 찾아준 것은 눈물겹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경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신민당은 억울하고 약한 사람의 편에 서서 끝까지 투쟁할 것입니다.
김영삼 총재는 박한상 사무총장에게 “보사부 장관과 노동청장을 불러 해결책을 강구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박 사무총장은 홍성철 보건사회부장관에게 문제 해결을 부탁했으나 홍 장관은 해결 능력이 없다며 거부했다.
8월 10일 낮 국회에서 열린 여야 원내총무회담에서 황낙주 신민당 총무는 보사위를 열 것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신민당은 이날 사회노동문제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대책위는 YH사건 해결을 위한 4가지 기본원칙을 정했다.
1. YH를 소생시키는 노력을 계속하되 부득이 폐업할 때는 종업원들을 모두 같은 업종의 다른 회사에 취업시킨다. 2. 취업은 임시방편책인 다른 기업체로의 전업 알선이 되어선 안 된다. 3. 종업원들의 집단행동은 법에 걸리기 때문에 이들의 신변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4. YH가 소생하는 경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종업원을 해고시켜서는 안 된다.
한편 공화당은 “노사문제의 정치적 이용은 위험하며 이를 정치권으로 끌어들이는 움직임이 있었다면 중대한 일이다”고 말했다.
이 날 오후 박 정권은 김재규 정보부장의 주재로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유혁인 대통령 정무 제1 수석 비서관, 고건(1999년 현재 서울 시장) 정무 제2 수석 비서관, 김정섭 정보부 제2 차장보 등이 참석한 가운데 YH문제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강제해산 결정이 내려졌다.
8월 10일 밤 10시 40분 경 경찰이 쳐들어 올 것이란 소문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인 여공들 사이에 퍼졌다. 이들은 경찰이 강제해산을 시키려 하면 모두 투신자살하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172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졌다. 이때 2층 총재실에 앉아 있던 김 총재는 신민당원들과 함께 4층으로 뛰어왔다.
“경찰이 신민당사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한다. 나와 서른 명의 신민당원들이 여러분을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설득했다. 이들은 밤 11시 30분께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김 총재는 여성 노동자들이 가라앉자 당사 밖으로 나와 경찰관들을 향해 “여공들이 흥분하니 모두 물러나라”고 했다. 김 총재는 마포서 보안과장 김준기 경정이 서성대는 것을 보고 뺨을 때렸다. 김 총재는 이어 당사 정문 앞에서 황용하 정보 1과장과 마주치자 멱살을 잡고 따귀를 때리고 발로 차는 등 활극을 벌였다.
밤 12시가 넘어 8월 11일로 접어들자 신민당사 주변에 경찰병력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000여 명으로 늘어난 정․사복 경찰관들은 신민당사 주변에 매트리스를 깔아 투신자살에 대비했다. 11일 새벽 1시 55분 이순구 서울 시경국장이 박한상 신민당 사무총장에게 여성 노동자들을 내보내라는 최후통첩 전화를 걸었다. 이순구는 “총재를 바꾸라”고 했으나 김영삼 총재는 “건방지다”면서 이를 묵살했다.
곧 이어 철제방패와 방망이로 무장한 기동경찰 1,000여명이 신민당사에 난입했다. 이들은 모두 헬멧에다 안면 보호망을 썼다. 신민당원들은 현관 셔터를 내려 경찰 진입을 막으려 했다. 한 무리의 경찰은 2층 유리창을 부수고 2층 복도로 뛰어들었다. 신민당원들과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청년 당원들은 무수히 얻어맞고 경찰버스에 끌려갔다.
경찰들은 2개조로 나뉘어 한 무리는 4층 농성장소로, 다른 무리는 2층 총재실로 몰려왔다. 총재실에는 김영삼 총재, 20명 정도의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당원, 기자 등 50여 명이 있었다. 경찰은 의자, 책상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방어하던 신민당 사무처 직원, 국회의원, 신문기자들을 철제방패와 방망이, 벽돌로 마구 구타했으며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들을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어내었다. 이로 인해 부상당한 다수의 국회의원과 기자 12명이 병원에 입원했다. 박권흠 대변인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박용만 의원은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경찰의 총재실 습격 때 사람이 안 죽은 것이 신기하다고 기자들이 회고할 정도로 경찰은 폭력적이었다. 김 총재는 경찰 승용차에 실려 상도동 집으로 옮겨졌다.
4층에 있었던 여성 노동자 강제해산 과정에서 김경숙양이 사망하여 정치문제화되었다. 이후 경찰은 여공들을 귀향시키고 농성 주동 여성 노동자 3명과 문익환 목사, 고은, 인명진 목사, 서경석 선교협의회 총무를 배후 조정혐의로 구속했다. 이와 함께 신민당원 26명도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8월 11일 신민당은 정무회의와 의원총회를 열었고 항의 농성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김영삼 총재는 여공들을 강제해산시키고 야당의원을 구타, 중상을 입힌 것은 “야당의 존재를 무시한 정당정치를 부인하는 일종의 쿠데타적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이후에 발생하는 모든 정치적 사태의 책임은 박 정권이 져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8월 14일 미 국무성 대변인 토마스 레스턴(Thomas Reston)은 한국 경찰을 비난하고 책임자의 징계를 요구하는 강경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은 전례가 없는 내정간섭적인 코멘트였다.
YH사건으로 한국정부를 비난한 미국
U. S. Says Police Action By Seoul Was 'Brutal'
Washington, Aug. 14(Reuters) -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today condemned what it termed excessive and brutal action by the South Korea police in a raid on an opposition party headquarters Saturday in which a woman died and scores of people were injured.
Thomas Reston, a State Department spokesman, told reporters that the events leading up to the raid, aimed at removing a group of women textile workers staging a sit-in at the offices of the New Democratic Party to protest layoffs, were unclear.
"However, it is clear beyond any doubt that there was excessive and brutal action by the Korean national police in forcibly entering the opposition party headquarters in the middle of the night to break up the sit-in by workers," he said.
"We hope that the Korean Government authorities will take appropriate disciplinary action in the case of those responsible for excessive and brutal police action," he added.
U. S. Says Police Action By Seoul Was 'Brutal'
워싱턴, 8월 14일 (로이터) - 오늘 미국 정부는 한 여성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한 토요일의 한국 경찰의 야당본부 습격을 정도를 넘어선 야만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였다.
미 국무성 대변인 토마스 레스턴은, 신민당사에서 해고에 항의농성 중이었던 여성 섬유 노동자들을 끌어내려고 습격하게 되기까지의 사건 경위는 불확실하다고 기자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한국 경찰이 노동자들의 농성을 해산하려고 한밤 중에 폭력적으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정도를 넘어선 야만적인 행위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확하다.”라고 레스턴 대변인은 말했다. “우리는 한국 정부 당국이 지나치게 야만적인 경찰 행동의 책임자들에게, 적절한 징계조치를 취할 것을 희망한다.”고 레스턴은 덧붙였다.
미국 정부의 비난에 대해 한국 내무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을 비난하였고 외무부장관 박동진은 17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불러 공식 항의하였다.
그러나 국무성의 잭 케넌 동아시아국 대변인은 16일의 뉴스 브리핑에서 “미국은 한국경찰의 신민당사 투입사건에 대한 앞서의 국무성 논평이 타국에 대한 심각한 침해로 보지 않는다”면서 “미국은 한국 당국이 관련자를 징계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고 말해 더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기자들이 미국의 징계조치 요구가 타국에 대한 내정 간섭이 아니냐고 질문한 데 대해 케넌 대변인은 “미국은 소련이 자국 내의 유태인을 투옥했을 때도 여러 차례 항의 성명을 낸 바 있고 그때마다 그 같은 행동을 중지하기 바란다는 희망을 표명했었다”고 말함으로써 내정간섭이라는 지적을 일축했다.
한편 신민당은 김경숙 양의 사인규명과 경찰책임자의 문책을 요구하면서 의원들이 18일간농성을 벌였다.
8월 28일 의원총회와 김경숙 양 추도식을 가진 다음 농성을 해제하면서 신민당은 의원총회의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신민당은 8․11 폭거의 책임을 끝까지 추궁할 것이며 그 행위가 민족과 역사 앞에 단죄되는 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일부 기독교계에서는 ‘근로자들의 생존권 투쟁에 대한 폭력적 억압으로 인해 일어난 YH 사건은 현 정권의 폭력적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각종 집회․성명 등을 통해 박 정권에 대항했다.
YH 사건은 생존권 확보를 위한 노동자들의 자구(自救)노력이 경직된 정치권 안에 들어서서 접목될 때 얼마나 커다란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충격을 던질 수 있지는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