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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노트와 이런저런 이야기
이란이 인정하지 않는 이란
동시대적 디테일과 진실함으로 표현한다
2006년 베를린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오프사이드>는 2006년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 환영을 받았고, 6월 8일 국내에 정식 개봉될 예정이지만 정작 이란 내에서는 언제 개봉될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이란의 엄격한 검열 시스템을 거치지 않은 그의 영화는 아직 상영허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뷔 이래 지치지 않고 이란의 사회문제에 주목해 온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영화는 사실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한 데뷔작 <하얀 풍선>을 제외하고는 이란 내에서 개봉된 적이 없다. 개봉을 위해서 많은 부분을 잘라내야 한다는 검열제도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간섭을 시작하는 이란 내 검열제도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영화가 이란 내 사회문제를 효과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방법으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의 공감대형성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그가 택하는 방법은 가식적인 효과를 최대한 자제한 채 자연 그대로의 사람들의 모습,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잡아내는 것이다. 이번 <오프사이드>를 위해서 감독은 2주간에 걸쳐 약 삼천명의 소녀들을 오디션했다고 밝혔다. 등장인물의 각각의 성격과 어울리는 비전문배우들이 선정되고 나면 그는 그들이 미리 연습하지 못하도록, 가식적인 연기를 하거나 책을 읽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도록 대본을 미리 주지 않은 채 전체적인 이야기와 그 날 촬영할 분량의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덕분에 배우들 각각의 개성이 드러나는 실제 이란 여성들의 모습이 담길 수 있었다. 이렇듯 그의 영화는 실제현장에서 일어나는 분위기와 정서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오프사이드>에서 담아야 했던 것은, 이란 내에서 촬영허가가 날 수 없는, 경기장 내에 있는 소녀들의 모습이었다. 실재 장소와 실재 사건 속에 들어가 실재 캐릭터들을 담아낸 게릴라 방식의 촬영으로, 그는 이 불가능한 장면을 완성하고 세계를 놀래켰다.
이란은 논쟁 중:
이번 월드컵엔 축구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2006 월드컵 열기가 뜨거워지고 있는 요즘, 이란이 국내 여성들의 경기장 출입을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외신을 통해 꾸준히 들려온다. 이란 대통령이 월드컵 기간 동안 여성입장을 허용하는 방침을 발표하였으나 이에 보수세력으로부터 반발이 심해지고 있는 탓으로 확실한 허용 여부를 알 수 없게 된 탓이다. 이란국민들을 비롯한 세계의 사람들이 이란의 여성들이 함께 월드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 상황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오프사이드>를 구상하며 예상했던 효과다. 아직 결론이 어떻게 날지 예측할 수는 없지만 <오프사이드>가 세계인들에게 발 빠르게 이란 여성들의 현실을 보여줌으로써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만은 확실하다.
감독은 여성들이 축구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주 작은 문제에 불과하며, 단순히 그 소재에 대해서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자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영화는 축구장을 지키는 군인들과 그곳에 어떻게 해서라도 들어가고 싶어하는 여성들간의 실갱이를 다양한 에피소드와 함께 즐겁게 보여주고 있지만, 이 과정은 그들에게 이란 사회의 다양한 금기들을 동시에 드러낸다. 여성들에게는 남성들과 한 공간에 있는 것, 거친 말을 듣거나 보는 것, 차도르를 쓰지 않은 얼굴을 보이는 것, 여성의 옷을 입지 않는 것, 축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담배를 피우는 것 등이 관습적으로 금지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이란의 남녀노소가 각각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것들이 어떻게 대립하는 지를 보여준다. 영화가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아주 작은 자유가 제한된 사람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금지된 더 큰 자유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란의 관습법에 의하면 여성 혼자서는 어떤 사건의 증인도 될 수 없으며 두 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한다. 여성 두 명이 한 명의 남성과 동등하다는 사고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법적인 측면일 뿐이며, 관습적으로는 여성과 남성의 등가비율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문제이다. ‘여성은 축구장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도 이런 맥락의 사고방식에서 연유한다. <오프사이드>는 발랄하고 당찬 소녀들의 재치 넘치는 말과 행동을 빌려, “벌거벗은 임금님”의 주인공처럼 천진하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from 자파르 파나히
-제작동기 : 왜 여성은 축구장에 들어갈 수 없을까?
8년 전, 이란은 오스트레일리아 팀을 이기고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그들이 경기에서 이기고 돌아왔을 때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그들을 환영했다. 원래 이란에서 여성들은 운동경기장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하지만 이 때만큼은 ?승전한 그들을 환영하는 행사에만큼은-여성들 또한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날 오천여 명의 이란 여성이 경기장에 입장했고, 어째서 이들이 처음부터, 경기할 때부터는 입장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어느 스포츠 기자가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여성들은 이러한 문제를 맞닥뜨려야 했다고 쓴 글을 기억한다. 기원 전 400년 전 여성들은 경기에 참여한 자식들을 응원하기 위해 변장하지 않고는 경기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이 사건은 이러한 주제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4년 전, 나는 국가대표팀이 훈련하는 경기장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그들을 보러 가려하자, 내 딸도 함께 하고 싶어했다. 나는 그녀가 나와 함께 들어갈 수 없음을 설명했으나, 딸은 그래도 시도라도 해보고 싶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딸이 입장을 거부당했을 경우, 어머니와 함께 집에 돌아올 수 있기 위해서, 우리 가족 모두가 경기장에 가보기로 했다. 우리가 스타디움에 도착하자, 예상했다시피, 내 딸의 입장이 거부당했다. 나는 그녀더러 어머니와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그 애는 놀랍게도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다른 입구를 찾아내어 나와 합류했다. 이 사건 또한 내 마음에 계속 남아, 영화를 찍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올해, 이란이 다시 한 번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되자, 나는 드디어 이 영화를 찍을 때가 다시 왔다고 생각했다.
-촬영 : 사회의 금기를 다룬 영화 촬영이 이란에서 가능할까?
촬영 중간에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점에 봉착했다. 이란에서 축구 경기 중에 촬영 허가를 받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경기장 안의 “소녀들”을 찍는 거라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게다가 촬영초기부터 문제가 되리라 생각했던, 이란 내 감독으로서의 나의 평판(이란 내 상영허가를 받은 적이 없는 감독으로서)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우리는 가능한 비밀리에, 언론으로 노출되는 일이 없도록 일을 진행했지만, 촬영이 끝나기 5일전, 한 일간지가 내가 새로운 영화를 찍고 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군에서는 바로 촬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바로 이란정부의 영화부서에 이것은 비상식적이며, 촬영 마지막까지 단 한 명의 군인도 현장에 나타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다행스럽게도, 촬영은 미니버스 내부 씬을 포함해서 얼마 안 남았었기 때문에 우리는 군사지역을 떠나 테헤란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외곽에서 촬영을 계속할 수 있었다.
Tip : 영화 뒷 이야기
일본 대 이란전
이 게임을 보기 위해 약 11만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경기가 끝나자, 군중들이 가까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헬리콥터와 군인들이 스타디움 출구에 배치되었다. 군인들은 군중을 밀쳐내기 시작했고 이 혼란의 와중에 사상자가 발생했다. 7명의 사람들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으나, 이란정부는 7명 중 오직 6명의 시체만을 공개했다. 7번째 사망자는 다름아닌 소녀라는 루머가 돌았다. 이에 대해 명백한 증거는 없지만, 우리는 부상자 중에는 남장을 한 소녀가 포함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엔딩곡
영화 마지막에 쓴 곡은 일종의 국가와 같다. 60년 전, 이란이 외세에 지배당할 때, 골래골럽이라는 한 시인은 그들에 의해 박해 당하는 이란 대중을 보고 고통을 느끼던 그는 이 곡을 쓰기로 결심했다. 이 노래는 특정 정권이 아닌, 이 나라의 땅과 그 곳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이 날이 갈수록 이 곡이 점점 더 사랑 받고 있는 이유이고, 그래서 많은 가수들이 이 곡을 불러왔다. 영화의 엔딩으로, 그 중 내게 가장 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골랐다.
세대 간 충돌
이란의 청년들도 한국처럼 강제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인들은 소명의식을 가진 직업군인이 아니라, 다른 모두와 같은 평범한 가정의 청년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자신이 속한 세대의 욕구와 필요에 동감하게 된다. 군인들은 제제를 가하도록 되어있지만, 그들은 또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그리 편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은 좀 더 전통적인 관점을 가진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란 인구의 10%를 차지하며, 그러므로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진다. 그리고 또한 이 두 그룹 간에는 충돌이 있다.
모든 제약은 다른 많은 제약들의 결과다. 우리가 한 가지 제약을 결정한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많은 제약 또한 고려하도록 만든다. 내 영화도 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나는 많은 다른 사회적 주제들이 연관될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주제 하나를 선택했다. 이 작은 문제는 결국 사회 전체가 갖고 있는 커다란 문제를 드러내며 끝난다. 월드컵은 국제적인 이벤트다. 이란이든 일본이든 인류는 동일한 가치를 중시하며 그래서 억압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 속 이란 소녀들 또한 세계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표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 영화의 메시지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객들은 무엇이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가면 된다.
월드컵 16강 진출을 결정짓는 이란과 바레인의 예선 마지막 경기. 이란의 모든 축구팬들의 이목이 이번 경기에 쏠려 있기에, 경기장으로 향하는 길목부터 승리를 외치는 열기는 뜨겁다. 하지만 정작 경기를 응원하지 못하고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이란의 여자 축구팬들. 여느 남자들 못지않게 그녀들의 축구사랑은 뜨겁지만, 여성은 경기장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이란에서 소녀들의 축구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다. 남장을 하는 등 나름의 묘수를 동원해 경기장에 잠입하기 위해 애를 쓰던 소녀들은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군인들에게 잡히고 만다. 그렇게 끌려온 소녀들은 경기장 밖에 임시로 만들어진 약식 구치소에 감금된다. 잠시라도 경기를 보게 해달라고 애원의 목소리를 높여보지만 군인들은 그녀들의 바람을 주제넘은 것으로 치부한다. 아쉬운 대로 한 병사의 어설픈 중계(?)에 귀 기울이며 경기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워보지만, 그럴수록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한 열망은 더욱 달아오를 뿐. 포기를 모르는 열혈소녀들은 새로운 작전으로 탈출을 시도하는데, 과연 그녀들은 축구를 볼 수 있을까?!!
자파르 파나히 감독
<오프사이드>를 연출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 등으로 국내 영화팬들에게 친숙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연출부 출신이다. 데뷔작 <하얀 풍선>으로 어린아이의 티없이 순수한 세계를 그려냈던 그는 이후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화법으로 이란 사회의 모순을 고발해왔다. 그의 작품들은 국제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지만, 안타깝게도 엄격한 검열제도가 존재하는 이란에서는 대부분 상영조차 금지되어 있는 것이 현실. 얼마 전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된 <오프사이드>로 한국을 찾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아주 작은 자유마저도 제한된 사람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금지된 더 큰 자유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오프사이드를 아시나요
슛, 골~~~!! 환호와 열광도 잠시. 주심이 깃발을 들어올리면 사람들은 김빠진 한숨을 쉬게 마련이다. “오프사이드래.” 관객들에게 극도의 허탈감을 안겨주기도, 때론 안도감을 선사하기도 하는 오프사이드. 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오프사이드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선 오프사이드는 공격하는 팀의 공격수가 상대방 진영에서 최종수비수보다 골대 쪽에 가까이 있을 때 선언된다. 공격수가 공을 직접 다룰 때뿐 아니라, 주심의 ‘견해’에 따라 플레이에 간섭하거나, 상대편을 방해하거나, 그 위치에서 이득을 얻을 때도 오프사이드가 적용됐었다. 하지만 이번 독일 월드컵부터는 까다롭던 오프사이드 규정이 대폭 완화! 오프사이드 위치에서 패스를 받거나 플레이된 공을 잡을 때만 오프사이드가 선언된다. 즉 볼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어느 위치에 있건 간에 오프사이드가 아닌 것. 좀 더 공격적인 축구를 지향하는 FIFA의 선택이라는데, 이 변화가 한국 대표팀에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듯. 글 최하나 2006-06-08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각본을 쓴 <하얀 풍선>(1995)으로 데뷔한 자파르 파나히는 점진적인 이행의 과정을 거쳐 <오프사이드>를 통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처럼 되돌아온 영화적 세계가 원래의 그것과 같을 리 없다. <오프사이드>의 파나히는, 두 번째로 키아로스타미의 각본을 영화화한 작품이자 <택시 드라이버>(마틴 스코시즈, 1976)나 <의식>(클로드 샤브롤, 1995)을 연상케 하는 어두운 범죄극인 <붉은 황금>(2003)을 내놓은 뒤의 파나히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일상의 나른한 모험 속에 빠져든 아이들의 세계에서 정처없는 배회와 무망한 탈주의 시도로 특징되는 어른들의 세계로 이행해갔던 파나히의 경력은 좀더 간단히는 ‘낮의 영화’에서 ‘밤의 영화’로의 이행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이와 어른의 중간쯤에 자리한 십대 소녀들이 (이란 내에서는) 금녀(禁女)의 구역인 축구경기장 안으로 몰래 숨어들어가려다 겪게 되는 사건들을 코믹한 터치로 그려낸 <오프사이드>는 낮과 밤, 성공과 실패, 희극과 비극으로 확연히 갈렸던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파나히 스스로가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로 여겨진다. 즉 이 작품은 <써클>(2000)과 <붉은 황금>처럼 제도와 규칙이 강요되는 체제로부터의 탈주가 얼마나 힘든지 역설하는 영화이지만 앞선 두 영화의 음울한 결론에 기대기보다는 <하얀 풍선>이나 <거울>(1997)과 같은 초기작의 낙천성을 다시 한번 끌어안고 또한 이들 영화의 형식적 장치들을 두드러지게 차용하고 있다.
경기장에 남장을 하고 숨어들어가려던 소녀들은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임시로 마련된 울타리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이 울타리는 어느새 소녀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며, 권리를 요구하고, 급기야 그들을 감시하는 군인들까지 포용하게 되는 연대의 공간으로 화한다. 동시대 이란 여성들을 둘러싼 상황에 대한 명백한 은유임이 분명한 이 울타리는 <써클>의 ‘원환구조’의 플롯을 통한 형식적 은유를 좀더 명료하게 시각화한 것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파나히는 데이비드 월시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일종의 원환 안에서 살고 있다”고 지적하며 “원환의 반경을 확장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영화가 지향하는 바이자 사람들이 노력해야 할 바라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신중한 발언은 경솔하게 ‘탈주’와 ‘위반’을 역설하는 그 어떤 이의 말보다도 (파나히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프사이드>의 코믹한 외양 뒤에 감춰진 엄연한 현실을 간과해버리기 십상이다. 제목 ‘오프사이드’는 제도의 원환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위반을 뜻함과 동시에 일시적인 환희를 가져다줄 뿐인 위반을 뜻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적절하게 중의적이다. 즉 ‘오프사이드’는 월경(越境)인 동시에 반칙이다.
영화 내에서 소녀들이 범하는 위반의 중의성은 시청각적 장치들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여기서 파나히는 (실제 축구경기 장면은 거의 보여주지 않는 대신) 경기장 관중의 함성과 라디오 중계방송 등의 외화면 사운드를 우리에게 계속해서 들려주는데 경기 종료와 더불어 영화도 끝난다. 플롯과 모호한 평행관계에 놓인 외화면 사운드를 통해 시간의 추이를 가늠케 하는 이러한 방식은 파나히가 낙천적인 결론을 지닌 초기작들- <하얀 풍선>에서의 새해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을 알리는 방송, <거울>에서 이란 대 한국의 축구경기 중계방송- 에서 활용한 뒤로 <써클> 이후로는 자제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음울한 결말을 예감케하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파나히의 전작에 익숙한 관객에게라면) 이러한 외화면 사운드는 그러한 섣부른 예감을 반박케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승리를 자축하는 군중으로 가득한 밤거리의 풍경으로 끝나는 결말 또한 ‘낮과 밤’과 관련된 파나히 특유의 가치체계를 상기한다면 단순한 해피엔딩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군중 속에 섞여든 소녀들은 언제라도 다시 호송차에 태워져 <써클>의 (마지막 에피소드의) 여인들처럼 유치장에 감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나히 자신도 <오프사이드>가 이와 같은 음울한 결론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이란 대 바레인의 월드컵 예선전이 이란의 승리로 끝난 것이 지금의 결말을 만들었음을 밝힌 바 있다. 덕분에 <오프사이드>는 파나히의 영화 가운데 가장 모호하고 다양한 해석에 열린 결말을 지니게 되었다.
파나히가 동시대 이란 감독들 가운데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줄기차게 테헤란(의 사람들)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많은 이란영화들이 오지와 변방으로 향해 낯선 이미지들을 건져올리는 동안 그는 테헤란의 구석구석을 뒤져왔던 것이다. 특히 <붉은 황금>은 지금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테헤란 사람들의 ‘현대적인’ 라이프스타일을 화면에 옮긴 ‘도시영화’의 걸작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하다(여기에 좀더 제한적이고 미니멀한 스타일로 만들어진 키아로스타미의 ‘테헤란 영화’ <텐>(2002)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보다 한결 무게를 덜어낸 <오프사이드>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인 편견들을 공박하면서 세계 여느 곳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관심과 열정, 고민을 갖고 살아가는 이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이란영화’라는 상투적 범주를 넘어선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 축구에 열광하는 이란인들, 특히 그녀들의 함성소리는 테헤란의 공기를 진동시키는 수많은 소리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 또한 우리의 동시대인임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표상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오프사이드>는 그 사소한 결점들을 지적하기에 앞서 우선 힘껏 응원하고픈 영화이다. 글 유운성(영화평론가) 2006-06-06
출처: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