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제가 어디선가 봤는데...10만양병설...이거 자체가 거짓일 가능성도 충분하다더군요....당시 이이 의 학파가 선조 실록을 만들때....없었는데 수정본에서 등장했다고 말하기도 하고....여튼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네요...-_-;; 전쟁후 살아남기 위해 만든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것이겠죠...;;;
솔직히 당시 조선 조정은 현실도피를 하고있었거등요-_-;; 선조랑 신하들이랑 옹기종기 모여앉아 [전쟁 않일어난다~ 뇌드썬-ㅂ-)~] 수준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속으로 캥겼는지 나름 남부지역에 성을 수축하고 조련을 하는등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만;; 침공의 수준을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 집어서 줄줄이 쓸려나갑니다-_-;;)
십만양병설 자체는 거짓이고 실제로는 군적 관련 정리문제입니다(나온다고 해도 선조 수정실록에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인 위주로 구성된 사람들이 쓴)그리고 병력 동원은 10만보다 훨씬 많게 동원할 수 있고 이미 전쟁 전부터 왜적 침공을 대비해 준비를 많이 해놓았고 인사 이동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몇년 전부터 왜적의 동향에 주시합니다 선조실록에도 이에 대한 의논이 있습니다 솔직히 실록이 아닌 류성룡이 쓴 서애집 같은 것에도 보면 이미 전쟁 준비는 열심히 했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 잘못?다고 자주 지적합니다 또 남부 지역에서 전쟁준비를 한 김수의 경우
문제는 전쟁준비를 과하게 했다고한 국가가 전쟁발발 보름이 조금 넘은 시일만에 도성까지 함락당하고 그 과정에서 전투다운 전투는 탄금대에서의 전투 1번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도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도 이렇다할 수성전도 벌어지지 않았고요. 게다가 피난길에 오른 국왕의 행차는 어찌나 초라하던가요. 호종행렬에는 도망자가 속출하고. 도대체 이게 과하다 싶을만큼 전쟁준비를 한 국가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요. 기록에야 지들이 뭐라고 끄적여놨던간에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아니었다 이거죠.
전쟁 준비를 했는데 원 뻘짓 *세상에 방패를 들 장정이 없어서 육십 노인네가 야비군 대리훈련 텨나오셨는데 성벽을 고쳐서 뭐합니까-_-;;;;*만 수없이 반복한데다 있는 가라는 가라대로 냅두고 온전한 놈만 갈아없은데다 인사들 낙하산 태워버리니 고니시가 아니라 제가 지휘해도 한성까지 뚫었겠습니다ㅇㅅㅇ;
병력은 제대로 모였고 부산성에서 모인 병력은 오히려 정발이 직책에 따라 모을 수 있는 병력의 두배가 모입니다만 ㅡ.ㅡ;;;그리고 대구에서 5만 병력이 모이고 경주(울산이었나?)에서 2만의 병력이 모입니다 문제는 이걸 지휘해야 할 이일이 내려오기 전에 지휘자가 없어서 흩어집니다 그리고 신립은 서울에 있는 병력을 지휘하는게 아니라(서울에 있는 병력 일부 가져갔지만)삼남지방의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직책인데 경상도 병력은 이일이 내려오기 전에 다 흩어지고 전라도 병력은 합류하기도 전에 신립이 무너집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삼남지방에 모인 병력수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전라도만 해도 이광 등이 이끄는 6만과 최원이 이끄는 4만을 합하면 10만 정도됩니다 물론 전투병만이 아니라 비전투병도 합한 거겠지만 그리고 탄금대의 병력도 기록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프로이스의 기록처럼 8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8천보다 더 많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병돌격으로 일본군을 두번이나 돌파했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일본군의 수도만 노리고 진격하는데다 왜군 예상 진격 루트를 오판한 점(당시 전라도로 올거라 예상했습니다)지휘관들의 무능 더하여 전쟁 준비 부분에서 실수를 하고 선조가 무능한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로코님 조선도 사신 같은 걸 보내면서 첩보전을 한건 마찬가지입니다 세종때 일본과 대마도 류큐에 갔다온 신숙주 해동제국기를 보면 일본 각 지방의 정치세력의 강약과 지형에 대해서도 써있습니다 그리고 선조실록을 보면 명나라에서 일본 정벌 얘기를 꺼내지만 일본에 섬이 많고 지형이 험해 공략하기 어렵다고 반대합니다
선조 23권 22년 8월 1일 (병자) 002 / 석강에 《강목》을 강하고 북변과 왜적의 대비에 대해 의논하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의 사정을 저들이 죄다 알고 있으니 만약 우리 나라가 전라도에 주력하는 줄을 알고 딴 도(道)로 들어오면 어찌할 것인가?”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소적(小賊)이라면 천성(天城)·가덕(加德)이 염려되지만, 대적(大賊)이야 어느 곳엔들 들어오지 못하겠습니까.”결국 염려한되로 딴 도로 들어왔지만
그리고 그 신문이 도대체 어느 기록을 참고했는지 의문스러운게 선조 수정 실록에 보면 외모에 대해 논하는 것은 있어도 어떤 행동을 했다고 기록되 있지는 않습니다(사관들은 말만 기록하는게 아니라 행동까지 기록합니다)그리고 이게 나온 기록을 보면 확실히 서인 중심으로 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선조수정실록에만 10만 양병설이 나옵니다 현재 서인들이 자기들 합리화를 위해서 쓰느라 조작된거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제로 수정실록에보면 황윤길이 일본 침략 준비한다고 주장했는데 서인들이 분란 일으키는 거라며 동인들이 안 받아들였다며라는 식으로 말하고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반대했던 류성룡이 나중에 가서 이이의 지략에 감탄했다고 나오는 등 조선 왕조 실록 같지 않은 서술이 많이 나옵니다
더 정확히는 지휘관들의 문제가 더 크다고 봐야합니다 이일의 경우 초병도 안 세우고 전진했다가 된통당하기도 하고 원균은 초반에 빨리 대응했어야 하는데 자침시키는 뻘짓을 보였거든요 분명 전라도 위주로 대비는 했지만 경상도의 군사 움직임을 보면 경상도도 어느 정도 대비는 했지만 예상보다 일본군의 움직임이 빨랐고 또한 일본군이 얼마나 쎈지 모른게 문제였죠
십만양병설의 경우는 왜군보다는 윗동네의 여진을 의식해서라는말도 있는듯합니다. 아닐수도 있지만요 ;; 그리고 여기에 조선이 준비가 없어서 밀렸다는분들 많은데 그보다는 체계에 문제가 있는게 더 맞는거 같습니다. 2차대전당시에도 프랑스는 준비 잘하고 병력도 많았지많고 장비도 괜찮았으나 뒤쳐진 체계로 인하여 완전 박살났습니다.
첫댓글 당시 개념이랑 지금이랑 많이 달랐을거 같은..
사실...제가 어디선가 봤는데...10만양병설...이거 자체가 거짓일 가능성도 충분하다더군요....당시 이이 의 학파가 선조 실록을 만들때....없었는데 수정본에서 등장했다고 말하기도 하고....여튼 진위 여부가 불분명하다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나네요...-_-;; 전쟁후 살아남기 위해 만든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것이겠죠...;;;
예전에는 확실히 지금과 달리 '관상학'이나 '풍수지리', 같은 것이 통하는 시대였으니까요....어쩌면 지금과는 사고관같은 것이 달랐을수도....
그렇지만 분명 잘못된 태도임은 분명하지요. 한국인의 전통적 지리관념인 풍수지리도 지나치게 신변잡귀적으로 흘러간 측면이 문제점으로 지적되니까요. 여하튼 의자왕과 더불어 한국사 최고의 뻘짓을 보여준 왕과 신료들;;;
뭐든지 한국에 오면 기복적 인 요소가 강해 지더군요. 심지어 기독교 마저도 한국에선 다분히 기복적인 냄새를 풍기니까요.
동시대 베니스가 다른 국가를 상대로 첩보전을 할 때 해당 나라의 무역현황과 상인활동, 및 기타 정치적 정황을 살펴봤던 것에 비교하면 많이 대조적이죠.
솔직히 당시 조선 조정은 현실도피를 하고있었거등요-_-;; 선조랑 신하들이랑 옹기종기 모여앉아 [전쟁 않일어난다~ 뇌드썬-ㅂ-)~] 수준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속으로 캥겼는지 나름 남부지역에 성을 수축하고 조련을 하는등 준비를 하기도 합니다만;; 침공의 수준을 잘못짚어도 한참 잘못 집어서 줄줄이 쓸려나갑니다-_-;;)
십만양병설 자체는 거짓이고 실제로는 군적 관련 정리문제입니다(나온다고 해도 선조 수정실록에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인 위주로 구성된 사람들이 쓴)그리고 병력 동원은 10만보다 훨씬 많게 동원할 수 있고 이미 전쟁 전부터 왜적 침공을 대비해 준비를 많이 해놓았고 인사 이동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미 몇년 전부터 왜적의 동향에 주시합니다 선조실록에도 이에 대한 의논이 있습니다 솔직히 실록이 아닌 류성룡이 쓴 서애집 같은 것에도 보면 이미 전쟁 준비는 열심히 했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 잘못?다고 자주 지적합니다 또 남부 지역에서 전쟁준비를 한 김수의 경우
너무 심하게 하는 바람에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군기 점검에 대한 기록을 봐도 선조시기 허술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입니다 심지어 의주에서 지나친 전쟁 준비에 대해 사과까지 하는 걸 보면 참 ㅡ.ㅡ;;;
문제는 전쟁준비를 과하게 했다고한 국가가 전쟁발발 보름이 조금 넘은 시일만에 도성까지 함락당하고 그 과정에서 전투다운 전투는 탄금대에서의 전투 1번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도성이 함락되는 과정에서도 이렇다할 수성전도 벌어지지 않았고요. 게다가 피난길에 오른 국왕의 행차는 어찌나 초라하던가요. 호종행렬에는 도망자가 속출하고. 도대체 이게 과하다 싶을만큼 전쟁준비를 한 국가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요. 기록에야 지들이 뭐라고 끄적여놨던간에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이건 아니었다 이거죠.
너무 어이없죠. 순식간에 도성까지 함락되는게... 그 준비가 요즘 군대에서 하는 말로 가라로 때운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열심히 준비한척 하고 기록은 허황되게 기록하듯이... 모둔 군부대가 그렇다는게 아니에요?^^ 제가 나온데는 좀 가라가 많았다는 ㅎㅎ
그거 뿐이면 다행이지요 게다가 불패신화 영웅인 이순신까지 못죽여서 안달을 했으니 얼마나 이순신 장군을 개갈굼 했으면 이순신장군의 마지막이 의문 투성이겠습니까?
고니시의 1만 5천명만으로 평양까지 쓸려나갔는데, 10만 단위의 병력들이 침략을 위해 대기 중이었다는 소릴 들었다면 선조 아니더라도 현실 도피를 하고 싶었을 겁니다. ㅡㅡ;;
그나마 대동강이랑 임진강에서 나름대로 싸웠으니 망정이지 거기까지 싸움없이 뚫렸으면 우리역사 최초로 동란중 하극상(-ㅂ-)이 벌어질뻔 했습니다;;;
전쟁 준비를 했는데 원 뻘짓 *세상에 방패를 들 장정이 없어서 육십 노인네가 야비군 대리훈련 텨나오셨는데 성벽을 고쳐서 뭐합니까-_-;;;;*만 수없이 반복한데다 있는 가라는 가라대로 냅두고 온전한 놈만 갈아없은데다 인사들 낙하산 태워버리니 고니시가 아니라 제가 지휘해도 한성까지 뚫었겠습니다ㅇㅅㅇ;
병력은 제대로 모였고 부산성에서 모인 병력은 오히려 정발이 직책에 따라 모을 수 있는 병력의 두배가 모입니다만 ㅡ.ㅡ;;;그리고 대구에서 5만 병력이 모이고 경주(울산이었나?)에서 2만의 병력이 모입니다 문제는 이걸 지휘해야 할 이일이 내려오기 전에 지휘자가 없어서 흩어집니다 그리고 신립은 서울에 있는 병력을 지휘하는게 아니라(서울에 있는 병력 일부 가져갔지만)삼남지방의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직책인데 경상도 병력은 이일이 내려오기 전에 다 흩어지고 전라도 병력은 합류하기도 전에 신립이 무너집니다
대구 5만과 울산 혹은 경주 2만은 실제 수치가 사료에 나와있는 건가요? 아니면 예상치인가요?
기록마다 다릅니다 대구의 경우 최소 2만으로 보기도 하고 최대 10만으로 보기도 하는데 기록마다 의견이 다릅니다 문제는 이 병력이 손가락 쪽쪽 빨고 흩어져 버립니다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삼남지방에 모인 병력수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전라도만 해도 이광 등이 이끄는 6만과 최원이 이끄는 4만을 합하면 10만 정도됩니다 물론 전투병만이 아니라 비전투병도 합한 거겠지만 그리고 탄금대의 병력도 기록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프로이스의 기록처럼 8만까지는 아니더라도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8천보다 더 많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병돌격으로 일본군을 두번이나 돌파했다고도 하고요 하지만 일본군의 수도만 노리고 진격하는데다 왜군 예상 진격 루트를 오판한 점(당시 전라도로 올거라 예상했습니다)지휘관들의 무능 더하여 전쟁 준비 부분에서 실수를 하고 선조가 무능한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 로코님 조선도 사신 같은 걸 보내면서 첩보전을 한건 마찬가지입니다 세종때 일본과 대마도 류큐에 갔다온 신숙주 해동제국기를 보면 일본 각 지방의 정치세력의 강약과 지형에 대해서도 써있습니다 그리고 선조실록을 보면 명나라에서 일본 정벌 얘기를 꺼내지만 일본에 섬이 많고 지형이 험해 공략하기 어렵다고 반대합니다
선조 23권 22년 8월 1일 (병자) 002 / 석강에 《강목》을 강하고 북변과 왜적의 대비에 대해 의논하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의 사정을 저들이 죄다 알고 있으니 만약 우리 나라가 전라도에 주력하는 줄을 알고 딴 도(道)로 들어오면 어찌할 것인가?”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소적(小賊)이라면 천성(天城)·가덕(加德)이 염려되지만, 대적(大賊)이야 어느 곳엔들 들어오지 못하겠습니까.”결국 염려한되로 딴 도로 들어왔지만
또 위에 중략된 부분에 “왜선(倭船)은 그다지 크지 아니하여 중국 배에 미치지 못하므로 한 척에 1백 명밖에 실을 수 없습니다. 1백 척이면 1만 명이니 1만 명밖에는 더 나오기가 어려울 듯합니다.”이게 전 병력으로 예상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근데말입니다....종묘제례악에 선조를 찬양하는 노래가 있지 않나요???(-_-;;좀 썡뚱맞지만....망국의 군주가 찬양을 받아서.... 신기해서 하는소리;;;)
실록을 보면 욕하는 기록도 많습니다 선조가 새로운 조총을 개발한 부분에서는 선조가 나설 분야가 아닌데 괜히 나서서 욕먹습니다 사실 연산군이나 광해군 처럼 중간에 물러난 경우 아니면 대놓고 욕을 못하죠 ㅡ.ㅡ;;실록으로는 사관이 논하면서 욕할 수 있지만
그리고 그 신문이 도대체 어느 기록을 참고했는지 의문스러운게 선조 수정 실록에 보면 외모에 대해 논하는 것은 있어도 어떤 행동을 했다고 기록되 있지는 않습니다(사관들은 말만 기록하는게 아니라 행동까지 기록합니다)그리고 이게 나온 기록을 보면 확실히 서인 중심으로 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이가 신하들과 지나가는 말로 10만 양병설을 하면 좋겠다 라고 한것을 지금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전폭적으로 주장했다라고 나오더군요....
선조수정실록에만 10만 양병설이 나옵니다 현재 서인들이 자기들 합리화를 위해서 쓰느라 조작된거 아닌가 생각됩니다 실제로 수정실록에보면 황윤길이 일본 침략 준비한다고 주장했는데 서인들이 분란 일으키는 거라며 동인들이 안 받아들였다며라는 식으로 말하고 이이의 10만 양병설을 반대했던 류성룡이 나중에 가서 이이의 지략에 감탄했다고 나오는 등 조선 왕조 실록 같지 않은 서술이 많이 나옵니다
음......그렇다면 조선 조정은 오판(규모)으로 인한 탁상공론식의 준비(숫자만 채우는)를 했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더 정확히는 지휘관들의 문제가 더 크다고 봐야합니다 이일의 경우 초병도 안 세우고 전진했다가 된통당하기도 하고 원균은 초반에 빨리 대응했어야 하는데 자침시키는 뻘짓을 보였거든요 분명 전라도 위주로 대비는 했지만 경상도의 군사 움직임을 보면 경상도도 어느 정도 대비는 했지만 예상보다 일본군의 움직임이 빨랐고 또한 일본군이 얼마나 쎈지 모른게 문제였죠
십만양병설의 경우는 왜군보다는 윗동네의 여진을 의식해서라는말도 있는듯합니다. 아닐수도 있지만요 ;; 그리고 여기에 조선이 준비가 없어서 밀렸다는분들 많은데 그보다는 체계에 문제가 있는게 더 맞는거 같습니다. 2차대전당시에도 프랑스는 준비 잘하고 병력도 많았지많고 장비도 괜찮았으나 뒤쳐진 체계로 인하여 완전 박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