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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귀리(下貴里) 上
이승만 대통령의 불법적인 계엄령이 선포돼 중산간마을에 대한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이 막 시작될 무렵인 1948년 11월 중순경, 애월면 하귀리에서는 청년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청년들은 저마다 은신처를 만들어 꼭꼭 숨어 있었다.
하귀리는 1구와 2구로 나뉘어져 있는데 속칭 '군냉이'라 불린 하귀1구는 마을구조가 단순했지만, 하귀2구는 미수동(味水洞)·가문동(可文洞)·개수동(蓋水洞, 후에 학원동으로 개명)·답동(畓洞) 등의 자연마을들로 이뤄진 꽤 큰 마을이었다. 이중 하귀2구의 개수동만이 산 쪽으로 약간 올라간 위치에 있었고 나머지 마을들은 모두 일주도로변이나 또는 해안 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4·3 때 일반적으로 일주도로변 마을은 중산간마을에 비해 인명피해가 적었다. 그러나 하귀리는 사태 내내 참으로 처절한 희생을 치렀다.
어느 마을에서나 '4·3 때 요망진(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었다'거나 '청년이 센 마을은 희생이 컸다'는 말은 정설로 굳어져 있다. 큰 희생을 치른 마을일수록 '우리마을은 청년들이 싱싱했었다'는 자랑을 빠뜨리지 않는다. 하귀리는 '요망진 사람이 많고 청년들이 싱싱한' 바로 그런 마을이었다. 이로 인해 4·3의 모든 전개과정은 물론 배경까지도 살필 수 있는 상징적인 마을이다. 그러면 초토화작전 때의 상황을 다루기에 앞서 그간의 하귀리 역사를 먼저 살펴보자.
일제 때 하귀리는 항일운동의 온상지였다. 한 증언자는 "일제 때 일본인들은 반일감정이 큰 마을임을 들어 '동쪽에는 조천, 서쪽에는 하귀'라는 말을 했었다"고 전했다. 김귀영(金貴榮) 강문일(康文一) 박영순(朴榮淳) 김홍규(金弘奎) 배두봉(裵斗鳳) 김용해(金容海) 등이 일제의 주목을 받는 이른바 '요시찰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 오사카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그로인해 김귀영은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돼 1934년 대판지방재판소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나이 25세였던 그는 메이지(明治)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알려져 있다. 그는 해방 후에도 고향에 돌아오진 않았지만 일본에 온 고향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배두봉 역시 일본에 있을 때인 1933년에 징역6개월을 복역했다. 배두봉은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사건에 연루되는데 1935년에 발생한 이른바 '야학(夜學)사건'이 그것이다. 야학사건이란 1934년 하귀리에 야학소를 개설해 문맹을 타파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 청년들이 1935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해 항일시위를 벌이다 50여명의 검거선풍을 불러일으킨 큰 사건이었다.
당시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에 의하면, 일제 경찰은 야학사건을 다루면서 위에 언급한 강문일 박영순 김홍규를 핵심 주모자로 지목했다.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던 강문일이 경찰서 안에 있던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하는 등 극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일제 경찰도 질겁을 했다는 이야기는 주민들이 그를 기억할 때 빠뜨리지 않는 내용이다. 결국 1935년 10월 열린 재판에서 강문일(당시 25세) 김홍규(21) 박영순(20)이 징역1년 집행유예4년의 유죄판결을 받았고, 강경생(康庚生, 26) 강창선(康昌善, 21) 배두봉(裵斗鳳, 22) 고붕익(高鵬益, 22) 김을봉(金乙鳳, 21세) 양군칠(梁君七, 20) 양군삼(梁君三, 27)은 기소유예됐다. 이와 관련 정부는 1995년 강문일·박영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 했다.
일제 때 일부 마을에서는 구장이나 연맹이사장을 맡은 사람들이 징용과 징병 그리고 공출에 앞장서는 등 친일행위를 했다. 이들은 자기 마을의 공출이 1등임을 자랑으로 여겼고 심지어 할당량 보다 많은 양을 공출해 착복하기도 했다. 몇몇 마을에서는 해방 직후 청년들이 이들의 집을 덮쳤을 때 공출을 빌미로 착복했던 놋그릇이 많이 발견되는 바람에 뭇매를 맞거나 마을에서 쫓겨난 사례도 많았다.
일부 마을에서는 해방 후 숨죽이고 있던 이런 친일파들이 미군정의 재등용 정책 등에 힘입어 다시 득세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주로 이승만이 주도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에 가담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를 고문취조하던 고등계 형사는 미군정 경찰로 옷을 갈아 입었다.
그러나 하귀리의 상황은 달랐다. 해방이 됐을 때 하귀리 주민들은 독립운동가의 마을, 또는 가장 진보적인 마을이라는 큰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의 활동이 활발히 벌어졌고 1946년에는 하귀중학원이란 중등교육기관도 세웠다. 해방 직후에는 그 환희의 분위기 속에서 축구대회가 유행을 했는데 하귀리 청년들은 이에도 뒤지지 않았다. 이처럼 '싱싱한' 청년들은 마을의 자랑거리였다.
이런 마을의 분위기는 당연히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주도했다. 20대 때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렀던 사람들은 이제 30대 혹은 40대의 여론주도층이 돼 있었다.
위에 언급한 인물들 중 김귀영은 제주에 돌아오지 않았고 배두봉은 제주읍내에서 살았지만, 박영순은 하귀중학원 교사가 돼 마을에 영향력을 끼쳤다. 김용해는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산업부장, 애월면 인민위원장,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의장을 맡았고 남로당에서도 중요 역할을 하는 등 전도적인 인물이 됐다.
이들 외에도 서울 휘문고보 출신으로 하귀중학원 원장을 맡은 고창옥(高昌玉), 하귀2구 구장 강봉희(康奉熙), 양군옥(梁君玉) 등이 마을을 주도했다. 또한 하귀출신은 아니지만 하귀국교 교장인 김용관(金龍寬)이 함께 어울렸다.
미군정 경찰은 이런 하귀리를 진작부터 '좌익마을'로 분류해 주목했다. 그런데 마을 상황이 급변하게 되는 분기점은 역시 1947년 발생한 '3·1절 발포사건'이었다.
3·1사건 직후 벌어진 검거선풍에 걸려 하귀국교 교장 김용관은 체형6개월을 복역했다. 이북 출신 교장이 새로 부임해 오자 국교생들이 열흘간 동맹휴학을 하기도 했지만, 서북청년단과 응원경찰을 앞세운 미군정 경찰의 탄압은 계속됐고 '쟁쟁했던' 청년들은 곧 쫓기는 신세가 됐다.
특히 경찰은 여론주도층인 하귀중학원 교사와 학생들에게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중학원 학생들은 3·1사건 전날에 마을을 지나던 응원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바도 있어서 더욱 주목받고 있던 터였다. 1947년 여름에는 학생들이 제주경찰서까지 끌려가 10여일간 감금당하기도 했다. 교사들도 하나 둘씩 피해 버리자 학교는 1·2학년생만을 배출한 채 폐교됐다.
그런데 1948년 4·3발발 직전 단국중학교가 세워지자 하귀중학원 학생들은 흩어지지 않고 다시 모일 수 있었다. 증언에 따르면, 조병옥 경무부장과 5촌 숙질간이라는 조정구라는 사람이 나타나 '5년제 학교로 정식 인가 받을 수 있다'며 이를 위해 주민들이 재단을 설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다. 어쨌든 단국중학교가 세워져 하귀중학원에서 1·2학년을 마친 학생들이 한 학년씩 진급하고 새로 신입생을 뽑으니 비로소 3개 학년이 다 갖춰졌다. 그러나 단국중학교도 4·3이 발발해 교사와 학생들이 잡혀가 수업이 이뤄질 수 없게 되자 1948년 10월경 폐교됐다.
당시 대부분의 중학교 학생들이 그렇듯이 단국중 학생들도 4·3 때 큰 희생을 치렀다. 강태중 씨는 4·3이 발발했을 때 단국중학교 3학년이었다. 일찍 학교에 들어가는 바람에 자신보다 서너살 위인 동창들과 함께 공부했다는 강씨는 동창들 대부분이 희생된 4·3의 와중에서도 나이가 어린 덕분에 무사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당시 학생들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우리마을은 독립운동가가 많아 이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린 아직 남로당에 들어갈 나이는 아니었고 주로 학생 민애청에 가입했지요. 농업학교에 다니는 선배들로부터 사상교육을 받기도 했는데 '8시간 노동' '집회·결사의 자유' '공평세상' '남로당 지지' 등의 교육내용이 생각납니다. 1947년 여름철에 제주경찰서에 끌려갔다 온 후로는 마을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빌레텍동산'에 올라 빗개를 서기도 했습니다. 흰 광목을 매단 왕대로 신호를 보내 경찰의 움직임을 주민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5·10선거 때는 노인을 제외하곤 모두가 산으로 올랐지요. 이승만이 강행하려던 단독선거는 조국을 분단시키는 것이니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들을 했습니다. 당시 남로당 뿐아니라 김구 선생도 단독선거를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5·10선거 직후 토벌이 심해지자 너도나도 은신처를 만들어 여차하면 숨었습니다.
한편 4·3 발발을 전후해 탄압이 계속되자 그간 마을을 주도하던 30∼40대 인물들 중 일부는 육지나 일본으로 피신했고, 일부는 산으로 올랐다. 단국중학교 학생을 비롯해 청년들도 다수가 산으로 올라 무장대가 됐다.
4·3발발부터 5·10선거 때까지 한 달여 동안은 무장대의 공세가 치열하게 벌어진 기간이었다. 미군 보고서에 언급된 것만도 교량파괴(1948년 4월 7일) 도로차단(4월 28일) 전화선 절단(4월 28일, 5월 1일) 경찰 공격(5월 8일, 5월 12일)등 잇단 사건들이 하귀리에서 벌어졌다. 5·10선거 때는 주민들이 대거 산에 올라 이를 보이코트했다. 무장대는 또한 우익이라 하여 주목하던 구장 출신 강시중(康時中)이 피신하자 그의 아내 조영아(趙瓔兒, 41)를 학살했다.
한 달여 동안 벌어진 무장대의 공세는 5·10선거가 무산된 이후 강력하게 전개된 토벌작전으로 인해 주춤해졌다. 대신 토벌대의 학살극이 곧 뒤를 이었다.
당시 하귀리에는 경찰지서가 없었지만(하귀지서는 1949년 1월 29일 신설), 마을 바로 서쪽에는 신엄지서가, 동쪽으로 이웃한 외도리에는 외도지서가 있어서 양쪽으로 경찰에게 포위된 형국이었다. 외도리에는 군인들도 주둔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토벌대가 온다 하면 부리나케 도망쳤다. 그러나 밤에 마을을 포위했다가 새벽녘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경찰을 매번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무렵 경찰에 희생된 사람들은 산에 오른 무장대거나 20대 청년들이 아니었다. 재빨리 도망칠 수 없었던 노인과 산에도 오르지 못한 채 여기저기 숨어 있던 주민들이 붙잡혀 즉결 총살됐다. 1948년 5월에 벌어진 사건을 일별 하면 다음과 같다.
5월 12일=경찰, 미수동에서 조정하(趙丁夏, 42) 강계효(康癸孝, 39) 김중봉(金中鳳, 37) 김상호의 부친 등 4명을 붙잡아 외도지서에 감금했다가 며칠 후 총살
5월 22일=방목하러 나갔던 강종수(姜宗洙, 32)가 경찰에 붙잡혀 수산봉 부근에서 총살
5월 25일=경찰과 대동청년단이 가문동을 포위해 주민들을 모여 놓고 서로 뺨때리기 등을 시키거나 총 개머리판으로 마구 구타를 하다 이중 현을호(玄乙浩, 55) 임석부(任錫富, 44) 문수택(文銖澤, 30) 등 3명을 골라내 속칭 '원벵듸' 벌판에서 총살
5월 26일=경찰, 주민들이 미리 피할까 봐 날이 밝기 전에 개수동을 포위해 붙잡은 양사봉(梁仕鳳, 70) 고형희(高瀅禧, 61) 강상돈(康相敦, 23) 등을 총살
이쯤 되자 주민들은 더욱 꼭꼭 숨었다. 그리고 여름철이 되면서 토벌대와 무장대의 공방전이 다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한동안 큰 인명희생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시 총살이 벌어진 것은 1948년 11월 11일이었다. 이날 새벽 무장대가 이웃마을 신엄리를 덮쳐 우익가족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토벌대가 보복 총살극을 벌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도 희생자들은 양자성(梁子星, 여, 71) 강인홍(姜仁弘, 50대) 홍장생(洪長生, 여, 48) 등 노인과 부녀자들이었다. 청년들의 피신생활은 이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잘 숨어 지내던 청년들이 왜 초토화작전이 벌어질 무렵에는 나타나 집단총살을 당했을까
하귀리(下貴里) 下
1948년 12월 5일경, 하귀리 주민들에게 외도지서의 동원령이 내려졌다. 월동용 장작을 마련해야 한다며 톱과 도끼 등을 갖고 지서 앞으로 모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마을에는 청년들이 없었다. 토벌작전이 강화된 1948년 5월 이후 수개월 째 피신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외도지서의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간 숨어 지낸 청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선뜻 나서지도 못할 난처한 처지에 놓였다. 고민 끝에 주로 노인과 부녀자들이 연장을 들고 나왔고, 스스로 토벌대에게 주목받을 만한 것이 없다고 자신한 일부 청년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당초 '장작 마련' 운운한 것은 함정이었다. 외도지서에서는 나무 베러 갈 생각은 않고, 다짜고짜 '너 도로차단했지!' '전봇대 끊었지!' 하며 마구잡이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청년들을 골라내 차에 태웠다. 이때 김용식(金容植, 37) 강창하(康昌夏, 29) 강상언(康相彦, 28) 김기전(金琪全, 26) 김용언(金容彦, 24) 고창만(高昌萬, 21) 등 많은 청년들이 차에 태워졌고 이들은 영원히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한때 이들이 살아 있음을 알려준 것은 끌려간지 1년 가량 지난 후 대구형무소에서 보내 온 엽서였다. 희생자 중 강창하의 늙은 어머니는 1960년 4·19혁명 직후 국회 양민학살조사반에게 이렇게 신고했다.
외도지서에서 화목(火木)하여 오라 하여 출두한 바 그대로 수감하여 대구형무소에 보내여 버려서 대구형무소에서 편지까지 왔으나 행방불명. 어머니 신정모(申貞慕, 77), 딸 강구자(康九子, 19)
형무소 수감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게 밀리던 국군에 의해 집단학살됐다. 유족들은 희생날짜도 몰라 주로 생일에 맞춰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일주도로변 마을인 하귀리에 대한 초토화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후 이듬해 봄까지 하귀리에서 벌어진 학살극은 차마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우며 그 처절함은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그 많은 사건과 희생자 이름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데, 큰 사건만을 정리하면 1948년 12월 5일경 '외도지서 장작사건' 12월 10일 '비학동산 학살사건' 12월 12일 '미수동주민 자수사건' 12월 28일 '자운당사건' 등이 있다.
취재반이 오랫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해변마을에 내려진 '노력동원령'과 '자수공작'은 비단 하귀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초토화작전 초기에 숨어 있는 청년들을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제주도 전역에서 펼친 토벌대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이 점은 이같은 '함정 토벌' 방침이 외도지서 차원의 전술이 아니라 훨씬 높은 수준에서 수립된 작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쨌든 '노력동원령'으로 일부 청년들을 잡아들인 외도지서에서는 뒤이어 '자수공작'을 펼쳤다. 첫 자수공작은 개수동(蓋水洞, 후에 학원동으로 개명)을 대상으로 벌어졌다.
일주도로에서 5백m 가량 산 쪽으로 올라간 곳에 위치한 개수동은 규모는 작아도 뛰어난 인물들이 많아 하귀리의 다른 마을들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한 마을이었다. 일제 때 제주농업학교를 나온 사람이 애월면 전체에서 겨우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던 시절에도 개수동 청년들은 농업학교는 물론 서울에 까지 유학가기도 했다. 해방 직후 하귀리를 주도하던 김용해(金容海) 고창옥(高昌玉) 강봉희(康奉熙)가 바로 개수동 주민이었다. 일제 때 대구사범학교 교장이었고 해방 후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던 김용하(金容河), 제주도 교육계에서 활약하고 있던 김원중(金元中)도 개수동 출신이었다.
토벌대는 일단 개수동 청년들에게 자수하라는 통보를 보냈다. 개수동에도 무장대로 입산해 활동하던 청년들이 일부 있었다. 그런데 토벌대는 무슨 근거인지 마을에 있는 청년 10명의 이름을 지목했다. 이들이 나타나 자수하면 모두가 무사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크게 당할 것이라는 통보였다.
이에 마을에서는 이들 청년과 유지들이 모여 긴급대책회의가 열렸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목 받은 청년들이 출두하긴 해야겠는데, 엊그제 외도지서의 동원령에 나갔던 청년들이 돌아오지 못한 채 제주읍내로 끌려갔기 때문에 토벌대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설왕설래하던 중 지목된 10명 중 한 명인 김호중(金鎬中, 20대 중반)이 앞으로 나섰다. 김호중은 "일단 내가 먼저 출두하겠다. 내가 무사하면 경찰의 약속이 증명되는 것이니 그 때에 뒤이어 자수하라."며 홀로 외도지서로 갔다. 그러나 경찰은 김호중이 나타나자 12월 7일 총살했다.
12월 10일 이른 아침, 외도지서 경찰과 대동청년단원들이 개수동에 들이닥쳤을 때 사태를 직감한 어른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마음으로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김호중 씨가 총살되자 마을은 발칵 뒤집혔고 지목된 나머지 9명 등 청년들은 산으로 도망쳐 버렸어요. 그러자 어른들은 '야, 이거 진짜 큰일났다'며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토벌대가 마을에 오기 전날 밤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모두 피신하라'는 정보가 외도리 쪽에서 이미 들어왔어요. 그러나 어디 갈 데가 있어야지요. 사태가 심각함을 느낀 어른들은 집집마다 가족들을 모아 놓고 대책회의가 열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집안의 부채관계는 어떻고, 현금은 어디에 숨겼으니 후에 살아남은 사람이 사용하라. 이후 집안 일은 아무개 어른의 말씀을 따르라'는 둥 마치 유언을 하듯 말씀하셨습니다.
개수동에 들이닥친 토벌대는 집집마다 수색하며 주민들을 속칭 '비해기(飛鶴)동산'으로 집결시켰다. 그리고는 피신한 청년들의 부모와 자식 등 이른바 '도피자가족'을 골라내 집단학살했다. 이때 김낙준(金樂俊, 여, 69) 고희전(65) 김재봉(金在奉, 65) 고영삼(高英三, 62) 고두주(高斗柱, 60대) 백용흥(白龍興, 여, 60대) 현귀덕(玄歸德, 여, 60대) 강화순(姜和順, 여, 61) 강승학(姜承鶴, 50대) 김지수(金智洙, 50대) 강기유(康基有, 49) 고정규의 아내(高丁奎, 30) 김계생(金季生, 여, 29) 강두중(姜斗中, 16) 등이 희생됐다. 이들 외에도 장전리와 광령리에서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 내려온 사람들도 함께 총살당했다.
이 '비학동산 학살사건'은 임산부를 발가벗겨 팽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과 철창으로 찔러 학살하는 등 그 잔혹함으로 인해 주변에서 널리 입에 오르내리는 사건이다. 임산부는 고정규의 아내였다. 고정규의 조카인 고남보 씨는 "숙부가 피신했다 하여 그날 할아버지(고희전)와 숙모가 돌아가셨다. 난 그때 급히 숨었는데 토벌대가 물러간 후 달려가 보니 숙모는 옷이 홀딱 벗겨진 채 창에 마구 찔려 있었다. 숙모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대정면 출신 김씨라고 했다"고 말했다.
한편 이 학살극 때 어머니가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자식을 감싸안은 덕분에 그 아이만 살았다는 이야기도 회자되고 있었다. 총살 대상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그 소년을 수소문했더니, 그는 당시 14살이던 안인행(安仁行)이었다. 장전리가 고향인 안인행의 가족들은 소개령에 따라 개수동으로 내려와 살던 중이었다. 안인행의 부친 안태룡(安太龍, 33)은 이미 5일 전에 벌어진 '외도지서 장작사건' 으로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닷새 간격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안인행 씨는 취재반에게 처절했던 그날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토벌대는 주민들이 비학동산에 모이자마자 먼저 한 여인을 끌어내더니 옷을 홀딱 벗겼습니다. 배가 많이 나온 임산부였습니다. 남편이 산에 오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들은 그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아 마구 찔렀습니다. 차라리 총으로 쏠 것이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모두들 고개를 돌리자 경찰은 '잘 구경하라'며 소리쳤습니다. 또 광령리에서 소개온 한 사람은 집결하지 않았다가 수색에 걸려 끌려나왔는데 이 분은 엄청나게 매를 맞았습니다. 이에 70대 가량의 그의 부친이 만류하자 부자를 함께 죽였습니다. 이어 토벌대는 주민들을 선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폭도가족'을 가리는 것인데 우리는 아버지가 '외도지서 장작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끌려나오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소개민이라서 당초 외도지서의 동원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개온 우리에게 집과 밭을 빌려준 주인집 노인이 톱과 도끼를 들고 외도지서로 가려 하자 그 분에게 고마움을 표하려고 대신 갔던 것입니다.
우린 4형제였는데 14살이던 내가 장남이고 밑으로 11살, 7살, 그리고 젖먹이 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머니(姜仁八, 34)는 죽음을 직감하고 젖먹이를 억지로 떼어 냈습니다. 그러나 나와 11살난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묶였지요.
어머니의 눈물어린 호소로 11살난 동생은 풀려났지만 내게는 '눈망울이 둥글둥글한 게 폭도들에게 연락함직한 놈'이라며 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3명이 함께 묶여 30m 가량 떨어진 밭으로 끌려가게 됐지요. 경찰들은 '칼로 찔러 죽이자',
'시간 없으니 총으로 쏘자'며 자기들끼리 잠시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그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합니다. 그때 내 머리 속에는 '칼에 찔리면 고통이 오랠 것이니 총에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순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나자 바로 옆에 나란히 묶인 어머니가 나를 덮치며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은 어머니의 몸이 요동치자 내 몸은 온통 어머니의 피로 범벅이 됐습니다. 경찰들이 '총에 덜 맞은 놈이 있을지 모른다'면서 일일이 대검으로 찔렀으나 그때도 난 어머니 밑에 깔려 무사했습니다.
이렇게해서 우리 4형제는 졸지에 고아가 됐는데 7살난 동생은 홍역으로, 젖먹이 막내는 젖을 못 먹어 곧 죽었습니다. 만일 영화나 연극으로 만든다면 난 그날의 모습들을 똑같이 재연할 수 있을 정도로 너무도 눈에 선합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2월 31일에는 무장대가 내려와 고승천(高承天, 53)·문무생(文戊生, 여, 50) 부부를 지목해 학살했다.
개수동 주민에 대한 토벌대의 학살극은 계속 이어졌다. 토벌대는 수시로 마을에 와서 '도피자가족'을 찾아내 학살했다. 그 중 1949년 1월 24일은 가장 큰 희생을 치른 날이다. 이날 저녁 무렵 고대규(高大奎)의 아내인 김산춘(金山春, 28)은 외도지서의 출두명령을 받았다. 김산춘은 앞서 비학동산 학살사건 때 팽나무에 매달린채 학살당한 여인과 동서 사이이다. 그때는 경찰이 김산춘의 가족관계를 몰랐기 때문에 무사했지만 지서에서 뒤늦게 남편 고대규의 도피 사실을 파악한 것이었다. 세살난 아기를 업고 나간 김산춘은 외도리 입구에서 아기와 함께 총살됐다. 그날 외도리에서는 이들 모자 외에도 강선(康宣, 여, 60대) 강계효(康繼孝, 50대) 신이신(申以信, 여, 50대) 김정복(金正福, 여, 37) 강재생(姜在生, 여, 30대) 김정(金貞, 여, 30대) 강선행(姜善行, 여) 강경수(康京洙, 20대) 등이 함께 희생됐다.
여기저기 숨어 있던 청년들도 결국엔 모두 잡혀 총살되는 등 개수동은 내내 큰 피해를 당했다. 개수동의 희생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호적과 족보를 일일이 대조했다는 고창선 씨는 "당시 43가호 56세대가 살던 마을에서 63명이 희생됐다."고 말했다.
한편 1948년 12월 10일 개수동 비학동산에서 학살극을 벌인 토벌대는 이튿날 미수동에도 들이닥쳤다. 일주도로변에 위치한 미수동은 하귀리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마을이었다. 토벌대는 '청년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 이제까지의 잘못을 자수하면 살려준다. 그러나 이날 이후에도 계속 숨는다면 입산자로 간주할 것이며 가족들까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일주도로변 '여관집' 앞으로 50명 가량의 청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마을 냇가의 굴에 숨어 있던 강태중 씨도 이때 '자수'를 했다.
더 이상 숨을 수도 없는 데다 앞서 개수동에서 피신자 가족들이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토벌대는 죄를 자백하라며 무지막지한 구타를 했습니다. 난 단국중학교 학생이라 특히 '민애청 가담 여부'를 추궁 받았습니다. 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시위에 한번 가담한 것밖에 없다'며 일관된 진술로 우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매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총살된 겁니다. 그날 토벌대는 13명을 추려 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취조를 멈추고 돌아가면서 '내일 외도지서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정도 매맞는 것으로 끝난 줄 알았지요. 그러나 토벌대는 다음날 외도지서로 찾아간 13명을 속칭 '붉은질'에서 학살했습니다.
1948년 12월 12일 청년 13명이 희생됐지만, 그 자수사건 때 모습을 드러낸 나머지 청년들은 목숨을 보장받은 듯했다. 그 후 청년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순응하며 마을 보초를 섰다. 더 이상의 희생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곧 더 큰 사건이 닥쳐왔다. 12월 20일께 토벌대는 소개민을 포함해 모든 사람들을 하귀국민학교에 집결시켰다. 토벌대는 주민들의 눈을 감게 한 후 산에서 붙잡아 온 아무개를 데려와 '네가 아는 사람을 가리키라'고 했다. 한참 후 눈을 떴을 때 많은 사람들이 불려 나가 있었다. 이들은 곧 차에 태워져 제주읍내로 끌려갔다.
이들이 학살당하는 총소리를 주민들이 들은 것은 일주일 가량 지났을 때인 12월 28일이었다. 이른바 '자운당 대학살'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때 자신의 형 강태신(姜太臣, 31)을 잃은 강태중 씨는 "제주읍내에서 자운당으로 향하던 차가 하귀리를 지날 무렵, 조군하(趙君夏)라는 분이 자기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웃옷을 벗어 던졌는데 그로부터 한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곧 그곳에 갈 수 없었다. 이듬해 봄 토벌대의 통행 허락을 받았을 때 시신은 이미 구별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고 유족들은 주로 옷을 통해 시신을 구분했다. 그 날 자운당에서는 모두 72명이 사망했는데 하귀1리에서만 26명이 희생됐다. 장갑순 씨 등 유족들은 1960년 국회조사반에게 희생신고서를 제출하면서 가해자를 '2연대와 수도경찰'이라고 기록했다.
한편 산에서 잡혀 내려와 하귀국교에서 희생자들을 지목했던 그 사람은 정작 사태가 완화되자 목숨을 구했는데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어찌하여 토벌대는 이토록 무모한 학살극을 벌였을까. 이는 초토화작전이라는 그 시대적 상황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같다. 그날 자운당에서는 하귀리 주민 뿐아니라 애월리로 소개 간 납읍리 주민들도 대거 희생됐는데, 애월리에서는 소개민을 눈감게 한 후 누가 지목한 것이 아니었다.
이처럼 자수를 했다거나 하귀국교에서 지목이 있었다는 것은 총살극의 구실일 뿐 청년들의 희생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이것이 죄를 따지기보다는 총살자의 머릿수를 늘리는데 광분했던 1948년 겨울의 악몽 같은 상황이었다.
토벌대의 광기는 사태가 완화된 뒤에도 그치지 않았다. 특히 한 처녀의 희생은 주민들의 가슴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하귀1구가 친정인 김계순 씨는 참으로 힘든 증언을 했다.
4·3발발 이듬해 봄으로 기억되는데, 금덕리에서 소개온 한 처녀가 하귀지서에 끌려와 매일 전기고문을 받았어요. 그녀의 오빠가 육지형무소로 갔다는 게 빌미였지요. 그녀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몰래 도망쳐 바닷가에 숨었습니다. 9일간이나 바닷가에 숨어 '너패'를 뜯어먹으며 버텼지만 결국 경찰에 붙잡혔지요. 경찰들은 하귀국교 동녘 밭에 남녀 대한청년단을 모두 집합시킨 후 그녀를 끌고 왔습니다. 그땐 너나 할것없이 대한청년단원이 돼야만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앞에 끌려왔을 때 그녀는 이미 초주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그녀를 홀딱 벗긴 후 '여자니까 대한청년단 여자대원들이 나서서 철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린 기겁을 했지요. 누가 나서서 찌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찌르지 않으면 너희들이 대신 죽을 것'이라고 협박하는 바람에 단장인 한 여자가 나서서 먼저 찔렀어요. 경찰은 모두들 한번씩 찌르라고 했습니다.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어요. 난 본래 눈물이 많았지만 울면 책 잡힐까 봐 억지로 참았어요. 그러나 집에 돌아온 후 토하고 난리가 났어요. 그 일로 한동안 몹시 앓았습니다.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모두들 나처럼 앓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일을 겪었으니 앓는 것이 당연하지요. 내가 죽어서야 잊혀질 일입이다. 그런데 경찰들은 그녀에게 몹쓸짓을 하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 친구는 '몸을 줬으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라며 안타까와 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강조순(姜朝順)으로, 예쁘다고 소문났던 당시 18살의 꽃다운 처녀였다. 한편 강조순이 희생당한 구실이 됐던 그녀의 오빠는 4·3 발발 초기 끌려가 광주형무소까지 갔었으나 무죄가 입증돼 풀려났다.
그런데 왜 토벌대는 자신들의 손으로 쉽게 총살시키지 않고 굳이 주민들에게 창으로 찌를 것을 강요했을까. 이같은 사례는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발견되는데 왜 그랬을까. 이는 자신들의 학살극에 끌어들여 도민들을 분열시키고 공범의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토벌작전을 원활히 추진하려는 사악한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강조순의 희생 사례에서 보여준 토벌대의 광기는 이해하기 어렵다. 인간이 과연 그토록 잔혹한 존재란 말인가. 그런데 위의 증언자 김계순 씨는 당시 하귀지서에 근무하던 한 '착한 경찰'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금덕리 처녀가 학살당할 무렵, 하귀지서에는 착한 순경이 한 명 있었어요. 그는 대한청년단으로서 보초서던 우리에게 와서 희생된 그 처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는 '너무 가혹해 눈 뜨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내 차례가 됐을 때는 고문하는 척만 했다. 불쌍해서 몰래 빵도 사다 주었다'며 한탄했습니다. 그는 육지출신이지만 특별히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금덕리 처녀가 묶여서 고문받던 상황임에도 일시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순경이 몰래 문을 열어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그 순경은 금덕리 처녀가 죽은 직후 사표를 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착한 경찰'이 아니라 '악한 경찰'의 뜻대로 진행됐다. 이는 악행을 해도 아무런 제재가 없고 오히려 조장되는 시대 상황 때문이었다. 누가 이런 광기의 시대를 만들었는가.
43가호 56세대가 살던 마을에서 63명이 학살당함............죄다 몰살,거기다 어린아이를 똘망똘망하니 나중에 폭도연락병이다고 대검으로 찔러죽이자고 모의(근데 아기들을 칼로 찔러죽인 서청경찰 이윤도를 볼때 이것마저 양호하다)
[출처] 1948년 5월-12월 제주도 하귀리 학살사건 "상상력을 뛰어넘는 학살극" (『역개루』 네이버 역사 커뮤니티) | 작성자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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