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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이 보여준 비교할 수 없는 삶
이종록 교수(한일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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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인적 선교사 서서평
서서평(E.J.Shepping, 1880.9.26.-1934.6.26. 한국 사역 : 1912-1934)은 1921년 선교사역을 보고하면서, 자신이 했던 사역을 다섯 분야, 즉 전도, 교육, 간호와 의료, 번역, 구조로 구분해서 보고한다. “서평 양은 타고난 조직의 귀재로 24시간 내에 모든 회중이 원활하게 성경공부를 할 수 있도록 다섯 반으로 나누었고, 개인들의 신상에 관한 모든 것-즉 그들 간의 관계, 개인적 취향들, 예전의 신분상태, 그리고 공동체 내에서의 처지 등-을 알아냈습니다.” 성경공부와 사경회를 통해서 서서평은 교회조직을 체계화하는 데도 기여하는데, 성경공부모임을 통해서 부인조력회, 즉 오늘날 여전도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모임을 조직한다. “오늘날 전도의 사명을 띈 교회도 부인들의 조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서평 양은 사경회에 모인 부인들을 기반으로 각 교회에 부인조력회를 조직할 것을 결심했다.”
부인조력회에 대해서 송인동은 이렇게 말한다. “당시 자기 이름도 제대로 없고 인권이 무시당하던 여성들을 위하여 서서평은 2년간의 순회방문과 각고의 노력 끝에 1922년에 부인조력회(현재의 여전회의 발전에 기여)를 조직하고 전국화하였으며, 각 지역 부인조력회의 원주별 모임을 통해 성경 공부, 기도와 간증, 좀도리 운동(성미운동) 곧 청지기운동 따위를 전개하여 실천적으로 교회를 도왔으며, 교회 안팎에 여성 지도자들이 대거 배출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여 주었다.”
2. 고아와 과부의 어머니 서서평
그는 1928년 5월 조선간호부회 총회에서 이렇게 설교했다.“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의 종교에서 구제를 제해버린다면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구제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제 아무리 십자가를 드높이 치켜들고 목이 질 만큼 예수를 부르짖고 기독교 신자가 자처한다 할지라도 구제가 없다면 그것은 참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1929년 5월 조선간호부회 제 7차 총회에서 서서평은 "예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강조한 성경구절은 다음과 같다.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니라(롬 12: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눅 18:18-25)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케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 10:8)
서서평의 현실인식은 매우 실제적이었다. 세상을 현실 그대로 바라보고, 거기에 신앙적으로 적극 대처하는 삶을 살았으며, 선교도 그런 방식으로 했다. 성장과정에서 여러 가지로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현실에 대해 부정적이고 회피적인 자세를 가질 수도 있었지만, 그는 세상에 대해 회의를 품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버림받은 고아와 가난한 과부에 머물렀다. 서평은 고아의 어머니였다. 자신의 월급을 아껴 조선 여성들을 가르치는 데 썼을 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버려진 고아들을 거두었다. 어머니를 잃은 유아들은 각별히 살폈다. 고아들을 친 자식처럼 아껴주었고, 가난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여성들은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그리고 서서평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을 찾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아이디어가 많은 창의적인 성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서평은 가난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방식으로 성미 제도를 활용했는데, 이것은 한국교회 역사에서 대단히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서평은 가난한 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 차원에서 성미를 모아 구제하는 일에 사용했다. 매일 먹는 밥상에서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모아 성미제도를 시행하도록 했다. 이 제도는 머지않아 조선 예수교장로회의 공식사업으로 채택되었다. 개인 차원의 긍휼이 교회차원의 긍휼사업으로 승화된 것이다.”
3. 사회 개혁자 서서평
이렇게 현실 자체에 대한 냉철한 실존적 인식 그리고 적극적이고 실천적 참여가 서서평에게서 두드러지는데, 이것은 의외로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그가 조선의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배경에도 어린 시절에 경험한 고독과 상실감이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홀로 모든 것을 경험하고 결정해야 했던 환경적 요인이 그의 삶에서 강인한 정신력을 갖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자세는 서서평이 한국에 도착해서 한국사회를 파악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한국사회가 사회구조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판단한 서서평은 여성이 권리의식을 갖고 사회적인 직업을 가져야 함을 가르쳤다.
그는 개화기 여성계몽을 위해 몸을 바쳤고, 여성교육에 앞장섰다. 갇혀있는 여성을 해방시키는 데도, 복음을 전하는 데도 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서평은 이렇게 교육을 통해 조선의 기독교 여성들로 하여금 주체의식을 갖도록 했다. “당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사역을 하면서 가난한 민중의 삶에 깊숙이 들어갔다. 포사잇과 오원, 고라복, 서평과 유화례 등이 보여준 사회사역은 예수님이 어떻게 성육신하였는가를 깊이 돌아보게 만든다.”
이들 가운데 서서평은 그 누구보다 구제를 통한 실천적 신앙을 강조했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는 삶을 살았다. 서서평은 이렇게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전력했을 뿐 아니라, 사회개혁운동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한글 사용을 강조했으며, 삼일운동에도 적극 관여하고,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다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다. 금주 금연 폐창 운동에 앞장섰고, 공창 폐지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돈을 들여 빼내온 윤락여성들을 공부시켰다. “인신매매 반대, 축첩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 등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한 서평은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 자신들도 눈여겨 챙기지 않았던 여성 인권에도 참여했던 증거가 된다. 윤락여성들이 새 삶을 살기 원하면 대신 그 빚을 갚아줬다. 나아가 그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를 시켜 새 삶을 개척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의 무게를 귀하 여기며, 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서서평은 삼일 운동에도 가담했다고 한다. 이렇게 사회적인 불의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서서평은 구약성경의 예언자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서평은 탈식민주의적인 자세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자신이 철저히 한국에 동화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비판하고, 대다수 서양선교사들이 보여주는 그릇된 행태를 비판했다. 백춘성은 “서평은 한국과 결혼한 이상 한국 윤리에 따르는 법이라 하여 그 정신의 투철하기가 기독교 신앙만큼이나 철저했다”고 말한다. 동양과 한국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통해서, 뿌리깊은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조선에서 보낸 17년 6개월을 돌이켜 볼 때, 동양 생활의 높은 이상과 방식들을 과소평가하는 큰 실수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비기독교인인 조선인들의 생활상태가 얼마나 잘 사는가 비천한가와는 상관없이, 서구문명을 나름대로 이상화한 까닭에 과거에는 조선인들의 삶을 제 관점에서 바라보고 저평가한 게 사실이지만 사실 조선에는 서양인들이 지나치기 쉬운 아름다운 전통과 사랑, 문화적으로 탁월하거나 훌륭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사회적 정신을 거의 잃어버렸기에 조만간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듯 서서평은 그릇된 사회적 구조에 의해서 고통당하는 구체적인 인간들을 돌봄으로써 불의한 사회체제에 저항하는 전형적인 예언자의 모습을 보였다.
4. 금욕적 실천자 서서평
서서평은 당시 중산층 선교사들, 특히 문물수입으로 부와 영광을 누린 선교사들과는 달리,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헌신하는 선교사로 살았다. 이것은 서서평이 서양보다는 동양에 더 심취(하려)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서서평은 그 어느 선교사들보다 철저히 한국사회에 동화하려 했다. 그는 1928년 5월 10일 평양에서 열린 한국간호협회 6회 총회에서 사도행전 20장 17-35절을 본문으로 “바울의 모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질문명이 발달한 서양 태생이면서도 동양의 청빈 사상을 더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두 벌 옷도 갖지 않으셨을 만큼 청빈하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서평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 쓰는 비용을 최대한 줄였다. 여러 가지 비용 가운데 식비를 줄이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래서 다른 선교사들이 하루 식대로 3원을 쓸 때, 서서평은 10전으로 하루를 버티면서 돈을 모았고, 그렇게 모인 선교비를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이러다보니 결국 서서평은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중병에 걸렸을 때도 과부 35명의 생활비를 서서평 혼자 부담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서평은 가난한 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서로득 부인과 버지니아 밴스 부인의 도움을 받아서 학생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수공예품을 만들게 하고 그것을 미국으로 수출했다. 백춘성은 이것이 미국으로 수공예품을 수출한 최초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서서평은 개인적으로 매우 엄격한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일체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성경읽기와 기도 이외에 다른 데에는 전혀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안일이나 쾌락은 말할 것도 없고, 건전한 여가활동 또는 오락과 취미에 속하는 소풍, 등산, 낚시, 영화감상도 아예 하지 않았다. 노름으로 여기진 트럼프, 화투, 윷놀이는 두말 할 것도 없었다. 이렇게 모범을 보이면서,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스스로 절제에 앞장섰다. 조선 농촌여성과 같이 무명베 옷에 검정 고무신을 신었고,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으며 검소와 절제를 몸으로 실천했다. 선교비 대부분을 어려운 학교 유지비에 쓰다 보니 서평의 생활은 극도로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무너지던 주택을 고칠 여유조차 없었다. 서평은 절제운동을 부인조력회 사업의 하나로 전개했다. 그는 사경회에 강사로 설 때마다 금주와 생활개선을 호소했다.”
당시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 가운데 이렇게 엄격하게 금욕적인 생활을 한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서서평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후,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면서 현금 7전을 남긴 것이 전부였다는 사실로 보면, 서서평의 청빈함과 금욕적인 삶을 따라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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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1880∼1934) 선교사의 삶과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책 ‘서서평 선교사의 섬김과 삶’(도서출판 케노시스)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지난해 2회에 걸쳐 한일장신대가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 7편을 담은 것이다. 한일장신대 유태주·임희모·이종록 교수(신학부)와 양국주 선교사(Serving the people선교회 국제대표), 소향숙 교수(전남대 전 간호대학장, 서서평기념사업회 전 공동회장)가 참여했다 |
서서평은 최흥종 목사가 설립한 나병환자 수용소를 틈나는 대로 찾아 나병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치료에 전념하기도 했다. 이때 양림 거리에서는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에 남자용 검정고무신을 신고 고아를 등에 업은 단발머리 독일계 미국 처녀인 그녀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평 생을 처녀로 마친 그녀는 당시 선교 활동의 일환으로 금주⦁금연 운동을 전개했는데 직접 금주 동맹을 만들어 상가가 밀집한 지금의 충장로와 시장에서 계몽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와 아울러 인신매매 반대, 축첩 금지, 공창제도 폐지 운동의 선봉에 서서 윤락여성 선도 사업을 주도하였다. 때로는 만주의 홍등가에 팔려갈 뻔한 19세 처녀를 돈을 주고 구해오기도 하고, 많은 창녀들의 빚을 갚아주고 새 삶을 찾게 했으며, 그가 설립한 이일학교에 이들을 입학시켜 공부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는 1921년 백운동에 현 백운동 교회의 전신인 진다리 교회와 봉선리 교회를 세웠으며 1922년에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제일교회의 전신인 금정교회에 부인조력회(여신도회)를 조직하여 신앙 수련과 협동사업을 벌이는 한편으로 교회의 봉사활동에 앞장서게 했다. 그 는 또 자비로 3년제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의 문맹 퇴치와 계몽에 나섰다. 그녀의 미국인 친구인 니일(Lois Neel)의 원조를 받아 양림 뒷동산에 붉은 벽돌로 3층 교사를 짓고 "니일"양 이름자의 발음을 따서 한자로 ‘이일(李一)’학교라 했다. 서 서평은 또 여학생들의 자활능력을 기르기 위해 명주, 모시, 마포, 무명베 따위 천에다 자수를 놓아 책상보, 손수건 등의 수예품을 만들게 했다.
이 물건을 미국에 수출했으며 미국에서는 버지니아주의 벤스(R.G..Vence)부인이 팔아 대금을 송금해 왔고, 이 돈은 이일학교 여학생들의 학비로 쓰였다. 그녀는 양림동에 뽕나무밭과 잠실을 두어 양잠, 제사, 직포 기술을 보급하면서 자립을 꾀하게 하여 배우고 일하는 즐거움 속에서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이일학교는 이 지방 여성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했다. 그 졸업생 가운데 간호사나 산파, 교사, 유치원 보모, 여전도사로서 계몽사업과 신여성 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한 사람이 많다.
서서평은 1923년 조선간호협회 결성을 주도하여 초대회장에 선임되었고, 그로부터 11년동안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협회 발전을 위해 발 벗고 나섰으며 그의 외교적인 노력으로 조선간호협회를 만국간호협회(ICN)와 일본 적십자 간호협회에 가입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우리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간호 교과서>, <실용 간호학>, <간호요강>, <간이 위생법>등 4권과 <간호사업사>를 비롯한 많은 번역서를 책으로 냈다. 서서평은 1934년 6월26일 새벽 4시, 54세를 일기로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언에 따라 몸안의 장기는 모두 의학 실험용으로 기증되었다. 장례식은 광주의 유지인 김신석, 최원순, 김용환, 정상호, 정광호(광주시장 제헌 국회의원) 최경식 등 계유구락부 회원들을 비롯한 비기독교인들의 주장에 의하여 광주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렀다.
당시 동아일보는 ‘자선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빈민의 어머니 서서평양 서거’라는 제목과 ‘재생한 예수’라는 부재로 그의 죽음을 대서특필했다. 그녀는 지금도 양림 뒷동산에 묻혀 있으며 그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으로 남아있다. 서서평이 별세한 뒤 이일학교는 1941년 9월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폐교되었으며 해방 후인 1948년 9월 구애라 선교사에 의해 이일학교가 복교되었고, 1961년 3월31일 전주 한일여자신학대학(韓日女子神學大學)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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