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논의할 대상은 미국의 남북전쟁 (1861~65)이다. 흑인들이 미국으로 팔려온 이 후 이 시기 까지의 음악을 재즈라고 말하기는 어려울것이다. 힘든 노예생활 속에서의 노동 요나 소수의 교육받은크레올에 의한 렉타임의 연주가 알려져 있고 그나마 빈약한 자료때문 에 별 고려없이 지나치게 된다. 그러나 이 같 은 경솔함은 재즈발생에 관한 중요한 요인을 놓치는 것이다. 재즈의 구성악기를 살펴보면 군악에서 많이 쓰이는 브라스 악기들이나 드 럼등의 타악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흑인들이 특히 군악대에 많이 필 요했었다. 18C 유럽군대의 특색 가운데 하나 가 군악대의 관습이다. 군악대는 일반 군대와 대비되는 복장을 했는데 즉 병사들의 복장이 흰색바지에 붉은 모자라면 군악대는 붉은 바 지에 흰색 모자를 쓰는 식이다. 유럽의 전통 을 받아들인 미국에서 이런이유로 백인 병사 들과 반대색을 가진 흑인들이 주로 군악을 연주하게 된것이다. 전쟁이 끝난후 버려진 악 기들이나 고향으로 돌아간 흑인 군악대들은 재즈 형성에 있어 빼놓을수 없는 중요한 요인 이다.
그럼 피아노는 어떻게 된 것일까? 물론 피아 노는 이동성이 없기 때문에 군악에서 사용되 지는 않았다. 재즈에서의 피아노를 말하려면 크레올이라는 흑-백 혼혈을 말하지 않을수 없 다. 남북전쟁이전 뉴올리언즈에서의 크레올의 지위는 일반 노예흑인들과는 달리 백인들의 지위와 거의 비슷한 것이었다. 따라서 부를 축적하고 교육을 받았으며 문화적인 혜택또한 누렸다고 한다. 남북전쟁전인 1850년경에는 크레올의 번영은 절정에 달했으며 유럽의 음 악을 배운 이들은 랙타임이라는 형식을 만들 어 냈다. - 재즈 피아노는 브라스류와는 다른 뿌리를 가지고 출발했다고 말할수 있을것이 다.- 그러나 남북전쟁이후에 있은 노예해방령 은 흑인 노예의 지위를 향상시킨 반면 크레올 의 지위를 전락시키는 것이었다. 이 결과로 좋든 싫든 두 부류의 흑인 계층은 공통된 생 활을 하게 되었으며 브라스와 리듬악기가 주 된 노예흑인들의 음악과 피아노가 주된 크레 올의 음악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된다. 흔 히들 재즈를 유럽음악과 아프리카 음악의 만 남이라고 하는데 더 정확히 말한다면 노예 해 방령에 의해 지위가 올라간 노예와 지위가 내 려간 크레올이 만나 혼합 밴드를 편성한 데서 재즈의 유래가 있다고 하겠다.
또 하나의 요인을 1800년 중반의 흑인 교회 에서 찾을수 있겠다. 백인들에 의해 종교에서 마져 소외된 흑인들은 자연스럽게 그들만의 교회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물론 흑인들의 교 회에도 종교음악은 필요했다. 흑인만으로 이 루어진 이들 교회에서는 본래의 백인 찬송가 에 그들의 노동요나 교향에 대한 그리움등을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이런 교회음악은 자연스 럽게 미국 흑인 음악 발전의 근본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재즈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은 없었으나 매우 중요한 백인들에 의한 흑인 음 악의 연구를 말할수 있다. 남북전쟁 무렵에 는 전쟁이나 그 이후 여러가지 행사들로 인해 남부의 흑인들과 접촉하게 된 북부의 백인들 이 흑인음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 백 인들은 흑인 민요를 유럽음악 관점에서 파 악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들 의 연구가 아니었더라면 초기 재즈에 대한 상 당한 부분이 잊혀졌을것이다. 그중 몇개의 자료에는 William Francis Allen, Charles Pickard Ware, Lucy Mckim Garrisond 의 Slave Songs of the United States(1867) 와 Thomas P.Fenner 의 Cabin and Plantation Songs(1873) 등이 있다.
이상으로 간단하게 남북전쟁시기의 재즈에 대해 살펴보았다. 많은 의욕이 있었음에도 필 자의 짧은 솜씨는 언제나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 번에는 1차 대전 시기의 재즈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
2. 1차 대전을 전후한 재즈(1)
1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의 재즈를 말하려면 다시 뉴올 리언즈의 이야기를 꺼내야 하겠다. 주지 하디시피 뉴올 리언즈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음악적 분위기가 충만한 곳이었다. 1718년 건설된 이 도시는 온갖 인종들의 집합 소였다. 그런만큼 유럽의 음악을 비롯한 각종 민속음악 이 혼합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블루스, 랙타임, 오페 라, 행진곡, 군가, 노동요등 다양한 음악에 익숙한 몇몇 연주자들이 생겨나게 된다.
재즈가 언제 어디에서부터 발생되었는지 명확하게 말하 는 것은 아주 멍청한 짓이지만 1900년을 전후한 몇년사 이에 뉴올리언즈에서 재즈가 태동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하겠다. 1898년 스페인과 미국의 전쟁이 끝난후 각 부대에서 매각되어 쏟아져 나온 중고품 악기 들은 당시 깡통이나 빨래판, 통나무등으로 만들어진 조 잡한 악기를 다루던 흑인들에겐 그들의 본능을 충족시키 기에 더없이 좋은 것이었다. 항구도시인탓에 많은 부대 들이 뉴올리언즈를 드나들었으며 부근 악기상에는 코넷, 클라리넷, 드럼등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항구와 군대. 이 둘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묘한 공통점이 재즈 발전에 있어서 재미 있는 역할을 한다. 바로 남자들의 집합소라는 점이다. 이제 무슨 얘기를 하 려는지 짐작이 될것이다. 줄지어 늘어선 유흥가와 떠들 썩한 분위기. 항구이며 많은 군대가 주둔했던 뉴올리언 즈에서는 일찍부터 즐기는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런 분위기 속에서 음악이 발전하게 된것은 필연적이 고... 특히 1897년부터 설치된 스토리빌이라는 사창가 지역은 매춘, 도박, 술과 뱃사람, 군인, 떠돌이, 악사들 의 천국이었으며 업소에 고용된 악사들은 여러 연주 기 술을 개발하고 연마하게된다. 재즈가 대중음악이냐 아니 냐를 말할때 자주 거론되는것이 바로 이런 배경이다. 어 느 혹평가가 재즈는 각종 문화들의 찌꺼기가 모여 술과 마약을 통해 성장했다 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악의에 찬 비난이기는 하지만 부정할수 없는 면이기도 하다. 이러 한 문제는 몇번 더 등장하게 되는데 그때 그때 언급하기 로 하겠다.
뉴올리언즈 재즈의 일반적 특징은
(1) 행진곡 풍으 2박자 게열에서 4박자위주의 연주를 하게 되었으며
(2) 싱코페이션과 뮤트의 사용등으로 다양한 음색을 연구했으며
(3) 온음계 대신 블루노트를 많이 사용했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몇가지가 있으나 아직까지는 현대적인 의미 의 즉흥연주나 스윙감은 희박했다고 할수 있다. 대표적 인 연주자들로는 조 킹 올리버(Joe "King" Oliver), 버 디 볼든(Buddy Bolden), 벙크 존슨(Bunk Johnson),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키드 오리(Kid Ory) 그리 고 빼놓을수 없는 제리 롤 몰튼(Jelly Roll Morton)등이 있다. 어쨌든 전술한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 뉴올리언 즈에서의 재즈는 1차 대전 이전까지 순조롭게 발전하게 된다.
재즈의 확산이라는 점에서 1차 대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보통 1917년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고 스토 리빌이 폐쇄되면서 직장을 잃은 재즈맨들이 사방으로 흩 어지면서 재즈가 퍼지게 되었다고한다. 하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가장 큰 이유는 급속하게 발 전하고있는 미국의 경제조직과 산업구조에 있다고 할수 있겠다. 농업중심에서 공업중심으로 발전하면서 북부의 공업도시가 거대해졌으며 흑-백 가릴것 없이 많은 사람 들이 시카고나 디트로이트, 뉴욕같은 북부의 중심지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노동붐은 Exodus라 할만큼 대단 했다. 이주자들은 지리적 이동뿐만이 아니라 문화적 변 동을 격게 되며 북부 공업도시는 남부의 많은 흑인연주 자들과 그들의 음악을 배우려는 백인들로 넘치게 되었으 며 이들의 음악적 교류는 매우 중요하다.
한편 1차 대전기간중인 1917년 재즈역사에서 가장의미 있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밴드 (Original Dixieland Jazz Band)에 의한 재즈 레코드의 탄생이다. 1877년 에디슨에 의해서 발명된후 계속적인 발전을 해온 축음기는 빅터, 콜럼비아 두 회사가 특허에 투자하며 음악산업을 일으킨다. 가끔 문화상품의 무서운 구매력에 놀라곤한다. 한번 맛을 알게 되면 도저히 헤쳐 나오지 못하는...필자는 마약에 비유하기도 한다. (개 인적인 얘기지만 1917년이면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였을때인데 우리나라의 역사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태 평양 건너편 흑인들이 음악을 하건 미술을 하건 무슨 상 관이냐 하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미 재즈의 재미를 알 고난후라 체념하곤 한다. 흑흑~) 축음기와 함께 성장한 음반회사는 재즈의 상업화에 불을 붙였으며 재즈는 갑 자기 불티나는 상품이 되었다. 1914년에 약 2700만장의 레코드가 팔렸고 1921년에 와서는 1억장에 달하게 된다.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는 레코드야말로 재즈맨의 꿈 을갖고 있는 젊은이들에겐 더 없이좋은 교과서 였으며 노동에 지친 도시 근로자들에겐 편안한 휴식처가 되었 다.
앞에서 1차 대전을 통해 재즈의 확산을 말했다. 이것은 비단 미국내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재즈는 유럽으로 전해졌으며 유럽에서도 재즈가 주목받 기 시작한다. 가장 발달한 산업기술을 배경으로한 음악 산업의 성장, 승전국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획득한 우월 한 영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재즈 의 특성때문에 이제 재즈는-각종 문화들의 찌꺼기와 술 과 마약으로 이루어졌다는- 뉴올리언즈만의 음악이 아니 라 세계의 음악이 되는것이다.
다음에는 경제공황과 마피아와 재즈에 대해서 이야기하 겠다.
3. 1차 대전을 전후한 재즈(2)
1918년 1차 대전이 끝났다.
전후 미국은 에너지가 넘쳐 스스로 주체하지 못할정도 로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었다.온 나라 전체가 이상한 열 기에 휩싸였으며 스코트 피츠제랄드가 말한 재즈시대 또는 광란의 20년대 가 시작된 것이다.
미국은 전후 승전국이 되었지만 유럽국가들이 보여준 소외감에 냉담한 고립주의 정책을 시행하고 지구 반대편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노동운 동등 급진적경향이 들끓었으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정 부는 급진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이른바 빨갱이 소동(Red Scare)'이 발생한다. 인종문제역시 심각한 상태였다. 1 차 대전은 대다수 흑인들에게 있어서 사회적, 경제적 향 상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제공할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정적인면도 상당했다. 각 도시마다 급증한 흑인들과 이들에게 밀려난 백인들 사이에는 극도의 증오감이 있었 으며 가는 곳마다 혼란과 폭력이 난무했다. 아직까지 흑 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지 않은데다가 위기의식을 느낀 농민들과 노동자들을 배경으로하여 다시 등장한 KKK단 같은 집단의 영향력이 더욱 확대되어 가고있는 상황이었 다.
이러한 혼란스러움은 예술에도 곧바로 영향을 주어 잃 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 라는 반 이상주의 예술운 동이 전개되었다. 전쟁에 환멸을 느낀 젊은이들은 현실 을 위선으로보고 거역했으며 술(1920년 발효된 금주법으 로 술도 맘대로 마시지 못했지만...), 섹스, 음악으로 그들을 나타내려했다. 사회가 혼란스러울수록 성장하는 세력이 있다. 범죄집단이 그것이다. 1920~30년대는 밤의 대통령 알 카포네로 대표되는 갱의 시대였다. 이들은 뒷 골목의 작은 카페에서부터 정치이권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걸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재즈또한 이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당신이 혼란스런 사회속에서 억압받는 흑인 재즈맨이라 면 어떻게 하겠는가? 반항할것인가? 아니면 순응할것인 가? 결과적으로 말한다면 순응한 재즈맨은 살아남았다. 루이 암스트롱, 파츠 윌러등은 처세가 빠른 사람들이었 다. 지금 재즈역사에 한구석에나마 이름을 남기게 된 흑 인 재즈맨들의 대부분은 이시기 마피아의 등뒤에 숨어서 연주한 사람들이었다. 재즈 하면 일반적으로 가장먼저 떠올리는것이 카페의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중절모를 눌러쓴 마피아와 익살스럽게 연주하는 흑인 뮤지션과 무 대위의 섹시한 금발미녀를 생각하는것은 이 시기의 부정 적인 영향이 크기때문일것이다. 바로 이점이 시대의 흐 름에 크게의존하는 대중음악의 성격을 볼수있는 장면이 다. 광대노릇을 했던 흑인 음악인들의 인간적 고민과 어 려움은 동정이 가지만 이로 인해 재즈는 음악성이라는 면에서 또 한번 약점을 갖게 된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경제공황은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충격이었다. 당연한 결과로 재즈또한 크게 위축 되어 활동무대가 좁아진 많은 흑인 연주자들은 헐값에 백인 빅밴드로 입단하게 되었다. 연주한 음악들도 춤곡 이나 스위트한 것으로써 전형적인 대중음악이었다. 재즈 는 하드밥이라고 주장하는 골수 감상자들은 이시기의 음 악은 쳐다 보기도 싫을정도일 것이다. 듀크 엘링튼이 1 차 세계 대전이후로는 신통치 않았다. 그때는 백인 뮤지 션들이 많이 늘어났으므로 우리는 고생해야 했다 라고 했을 정도니 당시 흑인 재즈맨의 어려움을 짐작할수 있 다. 토미 라드니에(Tommy Ladnier)는 양복점을 했으며 시드니 베쳬는 구두닦이를 심지어 찰리그린(Charlie Green)같은 연주자는 할렘의 노상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발랄하고 스위트한 스타일은 1930년 중반 경기가 살아 나면서부터 스윙스타일로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10인 이상의 멤버에서 이루어지는 연주가 대부분이었기 때문 에 빅 밴드 시대 라고도 하며 희망을 갖기 시작한 사람 들에게 흥겨운 율동감을 느끼게 하는 빅밴드 음악이야 말로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재즈 발생에서부터 재즈는 춤을 위한 음악의 성격을 항상 지녀왔지만 빅 밴드 시기만큼 그러한 성격이 강조된 시대는 없었다. 사 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춤이 성행했으며 그 옆에는 항상 베니 굿맨이나 듀크 앨링튼의 음악이 있었 다. 1950~60년대의 재즈캄보나 1970~80년대의 퓨전재즈 도 많은 인기가 있었지만 이 스윙시대만큼 재즈가 사람 들로부터 사랑받지는 못한것 같다.
스윙의 대중적인 인기는 음악 외적인 면도 있었다. 대 부분의 밴드는 잘생기고 깔끔한 외모의 전속가수들을 가 지고 있었으며 사랑과 연애를 주제로한 가사와 대규모 공연장에서의 빅밴드의 웅장한 효과또한 대중들의 관심 을 끌었다. 대부분 정해진 악보를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 에 즉흥연주는 매우 제약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록 짧은 부분이지만 곡 중간중간 각 파트별로 연주기량을 뽐낼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클라리넷, 색소폰, 트럼 펫등이 높이 평가되었다.
재즈에 있어서 스윙시대의 가장 큰 공헌은 무엇보다도 재즈의 대중화에 있다고 하겠다. 사실 음악적인 관점에 서 볼때 빅 밴드 전성기 동안 만들어진 수천장의 레코드 들 중에서 기억할만한 것들은 얼마되지 않는다. 암스트 롱, 굿맨, 엘링튼, 베이시 같은 거물중의 거물들의 작품 과 그와 견줄만한 몇몇의 음반을 빼고는 대부분의 곡들 이 천편일률적인 사운드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형화된 스윙 스타일은 그 쇠퇴가 이미 예고 되었던 것이다. 그 러나 빅밴드는 피아노, 클라리넷에서부터 벤조, 심지어 는 하프까지 사용될 정도로 다양한 악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전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발전을 이루게 되며 인기가 높아진 보컬또한 독자적인 길을 가게된다. 잘 팔리는 음악이 되었기 때문에 재즈를 하려는 많은 사 람들이 생겨났으며 이런 두터운 연주층이야말로 음악발 전에 필수적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 으며 연주실력을 향상시켜나갔다. 밥 시대의 화려하고 독창적인 연주는 이시기의 틀에 박힌 연주속에서 형성 되었다고 할수있을것이다.
재즈에 대한 학문적 연구또한 빼놓을수 없다. 음악적 연구는 물론이고 재즈를 사회학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 으며 유럽에서 부터 시작된 재즈 비평은 재즈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프랑스의 위그 파니시에, 샤를르 드로네, 독일의 베렌트, 미국의 레너드 페사같은 전문 비평가가 생겼으며 다운비트같은 전문지가 발간되 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가장 사연 많았던 1920~30년대의 재즈를 살펴보았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는데(유행가 가사던가?) 갱들의 비호를 받기도 하고 댄스위주의 음악 을 하기도 하면서 우여곡절을 겪은 재즈는 빅밴드 시절 을 거치면서 점점 예술성을 획득하게 된다. 중간에 재즈 를 대중음악이라고 말한데 대해서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재즈가 대중적이냐 예술적이냐 하는 문제는 많이 논의되어 왔지만 어는 한쪽이다라고 말할수 는 없을것이다. 둘 사이의 중간에 있다고 얼버무리는 경 우가 많은데 아무래도 대중적인 면이 강한것 같다. 언젠 가 이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보겠다.
다음에는 2차 대전을 전후한 재즈의 흐름에 대해서 말 해 보겠다.
4. 2차 대전을 전후한 재즈 (1)
제목을 2차 대전을 전후한 재즈의 흐름이라고 적고난후 막막함을 느꼈다. 전세계 음악계는 전쟁의 타격만큼이나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던 만큼 어디서 부터 이야기를 꺼 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재즈만 하더라도 스윙 시대 이후 40년대 부터를 이전의 재즈와 구분하여 모던 재즈라고 분류하는데 그만큼 2차 대전을 전후하여 커다 란 변화가 있음을 알수있다. 하나하나 자세하게 거론하 다 보면 40년대를 전후한 세계사를 모두 얘기할만큼 복 잡하고 지루하니 다음 두개로 크게 분류하여 이야기 하 겠다.
(1)찰리파커로 대표되는 밥(Bop) 스타일
(2)'Brith of Cool'이 시초로 여겨지는 쿨 스타일.
필자는 이렇게 단정적으로 구분하는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대비되는 표현 방법도 그렇고 대부분의 재즈서 적도 밥과 쿨로 크게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 는 것이 혼란스런 설명을 정리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것 같다.
(1)밥(Bop)의 시대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부터 사회의 변화는 스윙 빅 밴 드에게 있어서 하나같이 기분나쁜것 이었다. 10년이 넘 게 계속되는 댄스풍의 재즈는 이제 팬들에게 이제 팬들 에게 식상한 탓도있지만 커질대로 커진 빅 밴드의 규모 도 약점으로 작용했다.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실 력을 갈고 닦은 연주자들의 창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에슨 거대한 빅밴드는 너무 경직된 곳이었다. 서로 자신 들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정치적인 요소가 쇠퇴기에 들어선 빅 밴드 스윙 에 치명타를 입혔다. 1941년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 쟁이 일어난 후 강행된 시책을 보면 빅 밴드의 속 아픈 사정을 잘알수 있다. 전쟁의 영향으로 외국 공연이 모두 중지된 빅 밴드는 모두 국내 순회 공연으로 날을 보냈는 데 가솔린의 배급제 실시로 이내 빅 밴드는 발이 묶이게 된다. 또 열차의 좌석제 폐지또한 끔찍한 일이었다. 설 상가상으로 신품악기의 발매가 금지되어 재즈는 물론이 고 전 음악계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다음 사건에 비하면 그나마 좋은 편이었다. 최악의 시나리오 가 빅 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춤이 과세의 대상이 된 것이다. 카페나 댄스홀은 물론이고 심지어 쥬크 박스를 틀고 춤을 추어도 음식물의 20~30%가 되는 세금이 따르 게 된것이다. 춤을 위한 재즈인 스윙이 쇠퇴하는건 당연 하였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단원들의 군 소집영장은 속 타는 리더들에게 쉴틈을 주지 않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상황이 이러니 재즈계는 춤 보다는 감 상에 적합하고 소규모인 캄보밴드에 눈을 돌리게 되었 다. 이렇게 되자 모든 유행이 그렇듯이 스윙의 열풍도 간단하게 사라져갔다. 카운트 베시 악단같은 몇몇은 계 속해서 명맥을 유지하지만 1946년에 와서는 굿맨, 도르 시, 티가든등 대부분의 스윙 빅 밴드가 해체되었다. 빅 밴드 스윙의 흥겨로움을 좋아하느 사람들에겐 아쉬운 일 이었지만 크게 보면 댄스음악과의 결별을 재즈의 음악성 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즉 예술성을 갖추어가는, 감 상을 할수 있는 음악이 되어가는것이다. 만약 재즈가 계 속해서 춤에 매달렸다면 전쟁이란 요인이 없었더라도 스 스로 소멸해 갔을것이다.
재즈와 관련된 사건들이란 글의 맨 처음에 음악은 사회 를 반영한다고 말했는데 밥(Bop)처럼 사회적 세력의 영 향을 보여준 경우는 별로 없었다. 전술한 빅 밴드의 쇠 퇴외에도 달라진 흑인들의 가치관도 밥의 형성에 중요하 다. 찰리파커와 디지 길레스피로 대표되는 밥은 전적으 로 흑인들의 음악인점을 명심해야 겠다.(얼마의 백인 연 주자도 있었지만 밥은 절대적으로 흑인들의 감성이었 다.) 모던 흑인 재즈맨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주장했으며 더이상 어떤 흑인 뮤지션들도 그들의 선배같이 광대취급 받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흑인들은 열등감을 떨쳐버리려 고 노력했으며 현실을 직시하고 분개하며 냉소적으로 행 동했다. 1차 대전이후에는 이런 움직임이 미약했지만 2 차 대전후는 달랐다.찰리 파커는 백인 관객들에게 침을 뱉었으며 마일즈 데이비스는 냉담하게 등을 돌리며 무식 한 백인 관객들을 비웃었다. 밥의 시기는 미국에서 자신 감을 가지고 흑인 자아가 표출된 첫번째 시기라고 할수 있다.
이런 깨달음은 자연히 그들의 음악속에 반영되었으며 이런 연주자들이 ? 포크등이 있었으며 전선으로 보내진 V-Disc는 여러 경로를 통해 민간인들에게 전해진다. V-Disc는 전후 복각작업이 이우어져 그 빛을 더하고 있 다. 이 외에도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직접 군 위문 공연 을 가지면서 지친 병사들을 달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대중음악 전파에 있어서도 한국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전쟁과 음악은 보이지 않는 미묘한 관계 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다가 음악을 이해 하려면 군사학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한국전쟁과 재즈와의 연관은 쿨 재즈에서 좀더 이야기 해 보겠다.
5. 2차 대전을 전후한 재즈(2)
1945년 원자탄의 사용으로 전 세계를 경악시키며 승전 국이 된 미국은 소련과 더불어 모든 면에서 우월한 자리 를 차지했다. 그 것은 음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유럽의 예술가들은 전쟁의 직접적 영향이 없는 미 국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 영향으로 문화 후진국이던 미국은 이제 세계 예술의 중심지로 등장하게 된다.
음악에 있어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으며 미국으로 이 주하게 된 음악가들은 자연스럽게 미국의 재즈에도 관심 을 보였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아 놀드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벨라 바르톡(Belar Bartok) 같은 현대음악가들이 그들이다. 봄의 제전으로 유명한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이 민간 후 랙타임 , 덤바턴 오크스 협주곡(Dumbarton Oaks Concero) 등의 재즈의 영향을 받은 곡을 작곡하기 도 했으며 특별히 우디 허맨악단을 위해 에보니 협주곡 (Ebony Concerto) 를 작곡하였다. 주로 쿨 재즈 계열의 피아노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준 미요도 재즈적 요소가 보이는 우주창조 를 작곡했으며 베니굿맨은 헝가리 출 신의 바르톡에게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을 위한 랩소디 라는 곡을 받기도 했다.
초장부터 되지도 않은 클래식 얘기를 꺼낸것은 쿨 재즈 의 성격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확실히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나보다. 동부 흑인위주의 끈끈한 밥이 극성 이자 그에 대조적인 지적이며 매우 자제된 형식의 클래 식한 재즈가 나타나게 된다. 보통 1949년 마일즈의 쿨 의 탄생 을 쿨 재즈의 시초로 보고 있으나 실제로는 (주 로 백인들 취향인) 재즈의 클래식화는 이전부터 일관되 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쿨 스타일의 등장은 전부터 존재 했던 경향이 종전 후 고상하고 깨끗함을 찾는 시대 감정 과 일치한 것이지 밥에 대한 반반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생긴대로 논다고 백인이나 백인 교육을 받은 흑인들은 유럽식 음악에 매력을 느낀것 같다. 스코트 조플린, 제 임스 P 존슨, 폴 화이트맨의 음악은 축소된 관현악이었 고 실제로 거쉬인은 이를 실현하기도 했다. 스윙의 안정 감은 백인들의 감성에 가까웠으며 굿맨이나 켄튼은 최고 의 밴드로 인정받았다. 마일즈의 쿨의 탄생 이 쿨 스타 일의 유행에 촉매역할을 했다고 볼때 그 이전의 쿨한 연 주자를 떠올리면 먼저 빅스 바이더벡 이라는 트럼펫 주자를 말해야겠다. 그는 암스트롱과 함께 20년대 말과 30년대를 그의 시대로 만들었는데 암스트롱 보다는 차가 운 사운드와 부드러운 효과, 수수한 리듬은 그를 쿨 스 타일로 분류하는데 무리가 없을것 같다.
쿨 재즈의 선구자를 꼽으라면 무엇보다도 레스터 영 (Lester Young)일 것이다. 워낙 뛰어난 연주자라 프레스 (pres), 프레즈(prez), 프레지던트(president) 라고 불 린 그는 어떤 연주자보다 신선하고 매끄럽게 음을 연주 했다. 호킨스의 풍부하고 장식음이 많은 스타일에 비해 느리고 나른했다. 가벼운 톤, 느린 비브라토, 쾌활하지 만 자기 절제적인 프레이징은 바로 쿨 스타일의 특징과 일치하는 것이다. 어떤 비평가는 마일즈의 차가운 음색 은 레스터의 색소폰을 트럼펫에 옮긴것에 불과 하다고 할 정도니 쿨 재즈에서의 레스터의 중요성을 쉽게 짐작 할수 있다.
또 하나 빼놓을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작곡분야에 서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 레니 트리스타 노(Lennie Tristano)이다. 1940년대 중반에 있어서 그는 재즈에서 가장 철저하게 정규 음악교육을 받은 뮤지션중 한명이었다. 방대한 피아노 테크닉, 작곡에의 철저한 이 론, 재즈에서의 단단한 배경, 게다가 괴팍한 그의 성격 은 밥과 다른 시도를 하기에 충분했다. 클래식 교육을 철저히 받은지라 그는 코드 변화의 복잡한 체계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독창적인 멜로디 라인에 관심을 가졌 다. 그는 윈 마쉬, 리 코니츠 같은 제자를 두며 이후 쿨 을 지향하는 많은 뮤지션들에게 영향을 준다.
어쨌든 재즈의 유럽화는 1949년 이름그대로 쿨의 탄 생 이래 일련의 레코드들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절정에 달하였다. 쿨의 특징을 보면 쿨 스타일의 음악은 정적이 면 극적인 면이 없다. 밥 연주자들이 보여준 극단적인 빠름이나 느림 또한 없이 템포도 일정하고 대체로 안정 적이며 내성적이다. 쿨은 50년 대에 들어서면서 밥과 함 께 재즈는 감상하는 음악이다 라는 인식을 심어 놓았 다. 백인 중심의 쿨 스타일을 웨스트 코스트 재즈라고도 하는데 주로 서부 해안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웨스트 코스트 재즈의 형성 또한 전쟁에 의한 효과가 크다.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성장한 서부의 산업도시는 미국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1차 대전 이후 북부의 공업도시가 그랬던 것처럼 로스앤젤리스를 비롯한 주변 도시들은 산업뿐만아니라 한층영향이 커진 영화와 음악 의 본거지였다. 녹음기술면에 있어서도 낡은 동부를 훨 씬 능가했다. 같은 시기의 동부와 서부의 음악을 들어보 면 쿨스타일의 음악이 깨끗하게 들리는데 그것은 쿨의 특성때문만이 아니라 이같은 기술적인 이유도 있다고 하 겠다. 게다가 1950년 발생한 한국전쟁은 서부 산업기지 의 중요성을 더욱 증가시켰다. 많은 군수물자들이 샌프 란시스코나 로스앤젤리스를 통해서 태평양 건너편으로 전해졌으며 전후 호황으로 인한 넉넉한 생활과 여유로움 을 즐길수 있는 백인들에게 쿨 스타일은 아주 적당한 것 이었다.
( 한국전쟁때에 오스카 페티포드나 J.J 존슨등 몇몇 재 즈맨들이 위문공연을 왔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대중음 악이 들어온것이 6.25전쟁을 통해서이며 그 발전또한 미 군 부대의 밴드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고 하는건 음악 이 면에 숨어 있는 사회적 역학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과정이야 어떻든 쿨 스타일은 스윙감이 없다, 즉흥연주 가 없다는등의 비난속에서도 꾸준히 인기를 누려 빌 에 반스, 쳇 베이커, 데이브 브루벡, 게리 멀리건등으로 이 어지며 MJQ처럼 적극적으로 클래식을 도입하기도 한다. 크로스 오버현상이라는 말이 나온것도 이러한 분위기 속 에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밥 보다는 접근하기 쉽기 때문에 재즈를 처음 듣기에도 무리가 없으며 클래 식 음악가들도 이런 스타일로 재즈에 참여하기도 한다. 쿨의 부드러운 선율은 복잡한 리듬의 밥 스타일보다는 아무래도 우리의 정서에 어울리는것 같다.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쿨이나 밥으로 분류한건 어디까 지나 편의를 위한것임을 다시 한번 말해둔다. 둘 사이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고 스탄게츠나 마일즈같이 양쪽에 걸 쳐 활동한 뮤지션들이 많기 때문이다. 필자가 자꾸 흑 인, 백인 이야기하여 인종주의자 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배경을 얘기하다 그렇게 된것이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음에는 혼돈의 60년대와 프리재즈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
6. 1960년대의 재즈
1960년대는 확실히 혼돈의 시기였다.
1960년 최초의 피임약 <에노비드>가 나오면서 기존의 성에 대한 관념을 바꾸기 시작하면서 <60년대>란 책은 음울하고 광란적인 내용으로 가득찼다.냉전체제로 인한 전 세계의 극심한 대립, 3차 대전으로 치달을뻔 했던 쿠 바사태, 베타 프리에란의 여성의 신비성 이후 재등장한 여성운동, 마틴 루터 킹의 흑인민권운동, 케네디의 암 살, 최악으로 치닫는 월남전......얼마나 더 많은 말을 적어야 광란의 60년대가 묘사가 될까? 현 체제는 너무 도 위선적이고 인위적이다 라고 전제한 대중은 정부, 종 교, 사회의 각 분야에서 체제 정통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시했다. 지성인들은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르크 시즘과 마오이즘(Maoism)의 좌익 사상에 관심을 가졌으 며 그 한쪽에서는 모든 사람은 스스로 자유로워야 한다 는 히피문화가 등장했다.
<피터,폴, & 메리>, 밥 딜런등의 대중가요와 로큰롤을 통해 숱한 반문화가 TV와 라디오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 것은 진지한 참여이기도 했지만 어쨋든 상업적으로도 신 나는 비지니스였으며 레코드 장사들은 매일 반전음악과 히피음악을 만들어 내고 그러한 반문화는 곧 주류를 형 성해갔다. 1964년 로버트 무그에 의해 신디사이저가 발 명되어 대중음악은 관능성과 환각성을 추구했으며 히피 문화의 산물인 사이키델릭(Psychedelic)은 월남전에 대 한 문화적 반항이었다.
음악의 발전은 음악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의 사회 현상이 힘을 합하며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재즈를 듣는데 있어서 프리재즈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데 이것은 프리재즈으 개인적이고 혁명적인 스타일 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60년대의 치열한 몸부림과 히피의 열정을 느끼지 못하는 한 그 음악을 이 해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울것이다. 그렇게 볼때 60년대의 프리재즈야 말로 그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개인적, 배 타적 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미시시피 버닝 를 본적이 있 는가? 가스펠풍의 음악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진 헤크 먼과 윌럼 데포가 주연한 것으로 당시 최악이었던 흑백 간의 인종문제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해준다. 흑인 뮤지션들은 흑인들 중에서도 선택받은 희망이었다. 재즈 는 흑인들이 미국문화에 끼친 중대한 공로로 여겨졌으며 흑인 뮤지션들은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흑인들의 민 권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런만큼 그들은 무언가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것이 오넷 콜맨(Ornette Coleman) 을 필두로 한 프리 재즈였다.
물론 재즈 자체에도 새로운 음악을 필요로 했다. 많은 흑인 재즈맨들은 쿨 스타일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음악 에의 접근이 너무 지성적이라 재즈의 정신과 거리가 있 다고 생각하고, 특히 쿨 재즈는 백인의 감정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밥 스타일또한 에드립과 코드 나열에 한계에 와 있다고 할수 있었다. 필요한 것은 힘과 활기 를 새롭게 하기 위한 재래식 흑인들의 자유로움으롤 돌 아가는 것이었다.(찢어지는 듯한 콜트렌의 색소폰 소리 를 과거 원시로의 복귀 하고 했다.)
오네트 콜맨은 확실히 논쟁이 많은 뮤지션인것 같다. 한 아티스트에 대한 평가는 당시에는 논란이 있다하더라 도 대개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오네트 처럼 평가가 엇 갈리는 경우는 없었다. 추악하고 지리한 음들의 비 화 음적인 조합 이란 평가가 있었는가 하면 새로운 재즈 스타일의 창조자 란 칭찬도 있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재즈 필드에서의 오네트의 중요성을 공감하고 있을만큼 그의 등장은 참으로 의미있다 하겠다. 프리재즈 하면 곧 바로 오네트 콜맨을 연결시키는데 그것은 그의 영향이 가장 큰 탓도 있겠지만 재즈 특유의 과장이 약간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그 보다 먼저 프리 재즈 스타일을 시도 한 연주자가 있었으며 오네트의 음악속에도 아름다운 멜 로디가 있었다. Congeniality, Angel voice 같은 곡은 밝고 활기차며 그를 최상의 짧은 멜로디의 작곡가라는 별명으로 칭하기도 한다.
피아니스트인 세실 테일러(Cecil Taylor)는 스윙 빅 밴 드에서 부터 데이브 브루벡, 트리스타노, 호레이스 실버 와 프랑스의 표현주의자들과 스트라빈스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심을 발전시켜 갔다. 1957년 그는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프리 재즈의 첫 징조를 보였는데 결과는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햐하지 못 했을 뿐더러 기존 연주자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등장으로 인한 자신의 입지 약화를 두려워하여 그를 비난했다. 그 덕택으로 그는 한동안 끼니 걱정을 하며 생활하게 되었 다.
발라드에서 부터 시작하여 마일즈 밴드를 거치면서 누 구보다도 자유로워진 존 콜트렌 또한 주목할만 하다.파 커 같은 천재성이나 오네트 같은 독창성, 마일즈 같은 순발력도 없으면서도 마치 종교인 처럼 뭔가를 찾는듯한 그의 자세는 많은 천재들 속에서도 그를 돋보이게 한다. 임펄스에서 나온 일련의 음반들은 말년 그의 프리 스타 일을 나타내주고 있다. 세실 테일러나 오네트, 콜트렌 외에도 에릭 돌피(Eric Dolphy), 돈 체리(Don Cherry), 아치 셰프(Archie Shepp) 등의 음악도 감상자의 인내를 요구하는 것들이다.
60년대의 히피문화 중에서도 특이한게 동양사상의 유행 이다. 기존으 가치관을 부정한 60년대는 자연스럽게 반 서구적인 정신문화에 매혹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대학에 서는 마오이즘 이 불길처럼 퍼졌으며 불교, 힌두교, 이 슬람교를 믿는 서양인들이 많아졌다. 다소 애매하고 낭 만적인 종교적 열정이 유행했으며 이것은 하나의 시대 사조였다. 음악에서도 너나 할것없이 인도 음악과 이슬 람 문화를 연구하였으며 이들의 음악을 채용하였다. 재 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콜트렌은 인도 음악까 라비 상 카르와 교류를 가졌고 많은 뮤지션들이 이슬람식 이름이 로 개명하기도 하였으며 자칭 태양신이라는 사이코 선 라(Sun Ra)처럼 재즈를 종교의 부속물로 사용한 경우도 있다. 한 걸음 더나아가 아프리카나 인도 음악뿐만이 아 니라 전 세계의 민속음악이 재즈에 영감을 주었다.
이것은 재즈를 전위 예술의 한 분야로 만들었다. 유럽 에서의 아방가르드 재즈운동 역시 재미있는 현상이다. 프리재즈 콘서트가 1965년에 베를린, 1966년에 런던에서 열렸는데 고전음악의 영향이 강한 유럽에서 스윙감 없는 프리재즈는 전위예술의 하나로 더욱 발전하며 유능한 연 주인들을 배출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960년대의 프리재즈 운동은 기존 스타일의 한계, 개인주의와 집단행동, 상호교류와 반 사 회적인 강렬한 이념들 속에서 탄생했다고 볼수 있다. 많 은 사람들이 프리재즈를 듣기에는 너무나 불규칙적이고 난해하다는 말들을 한다. 프리재즈가 규칙이 없는건 아 니지만 사실상 많은 부분이 되는 대로 만들어졌다. 프리 재즈가 재즈의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를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뮤지션들은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 로 연주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콜맨이나 콜트렌등은 이 를 잘 실천하고 다른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가 음악을 듣는 방법에 있어서도 어 떤 규칙에 매달릴 필요는 절대로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아주 개인적인 프리재즈야 말로 가장 듣기 쉬운 음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는 퓨전 락 재즈와 마일즈를 이야기 하겠다.
7. 1970년대의 재즈
70년대 재즈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소위 퓨전-락-재즈 또는 재르-락(이름이야 어떻든...)의 등장이라 하겠다. 1960년대 중반에 락(ROCK)은 단순한 음악 만이 아니었 다. 우드스톡 세대(The Woodstock Generation)라는 신 조어를 만들며 하나의 문화,사회적 경향이었다. 하드 밥 과 프리의 지루한 연주는 이제 젊은이들의 관심에서 밀 려났으며 젊은이들은 화려한 조명과 거친 사운드, 집단 최면적인 락의 강렬함에 도취되었다. 재즈의 위기는 퓨전재즈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나 당시의 상황은 일 렉트릭 사운드의 강렬함을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는 지경 이었다.
락 재즈는 전자 악기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락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추구하는 실험정신은 프리재즈의 연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두음 악의 특징을 따르려다 보니 리듬에 있어서는 많이 단순 해졌으며 자세히 들어보면 세련된 스윙스타일로 연주하 고있음을 알수 있다. 복잡하고 난해한 프리재즈의 영향 탓인지 선율에 있어서도 전위적인 불협화음 보다는 귀 에 익숙한 몇개의 음계를 바탕으로 협화음적인 경향을 띠고있다. 선법적인 락을 채용함으로써 재즈는 양적인 면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지고 왔다. 70년대에 들 어서면 락 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퓨전-락-재즈는 많은 팬들을 확보했으며 속속 발표되는 마일즈나 허비행콕, 칙 코리아의 앨범들은 계속적으로 재즈 음반 판매기록을 깨나갔다.
락 재즈를 이야기함에 있어 마일즈 데이비스를 빼 놓을 수 없다. 확실히 마일즈는 재즈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 는 사람이다. 그는 1950년대에서 70년대 까지 거의 20년 동안 재즈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밥과 쿨 스타일의 성립에도 영향을 끼쳤으며 다시 락 재즈란 분야를 형성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재즈란 하나의 모험이고 자기 실현의 과정이었다.
필자는 그를 천재 뮤지션이라기 보다는 탁월한 전략가 라고 생각한다. 재즈가 전환기에 섰을때 마다 그는 그가 가야할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것 같다. 그는 음악의 발전이라는 책임감이라기 보다는 자신과의 싸움과 자유 롭고 새로운 시도속에서 재즈에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의 자유로운 시도는 오네트 처럼 충격적이지 않으며 새로운 음악을 기대하던 대중들의 입맛에 잘 맞는 것이 었다. 마일즈는 대중적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그러 면서도 천박하지 않은것은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다. 이런 이유로 그는 재즈 뮤지션 답지 않게 많은 부를 얻었는데 이 점은 괴팍한 성격과 함께 동료 연주자들로 부터 시기를 받는 원인이었다. 마일즈가 락으로의 증세 가 심해지자 그가 롤링스톤즈와 경쟁한다는 말도 있었는 데 거기에는 당시 소속회사이던 콜럼비아사의 입김도 작 용했다. 마일즈가 이런 종류의 음악을 시작한것이 상업 적인 이유는 아니겠지만 음반회사 입장에서 락 재즈는 확실히 짤짤한 장사였고 사장인 클리브 데이비스는 마일 즈를 계속 부추겼다.
마일즈의 락의 접근은 그의 멤버들을 보아도 알수 있 다. 드러머인 토니 윌리엄스, 베이시스트인 론 카터, 피 아노에 허비 행콕과 칙 코리아, 그리고 누구보다도 더 바위 같은 웨인 쇼터. 하나 같이 일렉트릭에 감전된 연 주자들이었다. Nefertiti 에서의 쇼터의 연주는 들쑥 날 쑥이며 Filles de Kilimanjaro 에서의 토니 윌리엄스는 어떠한 락 드러머보다도 인상적인 연주를 하고있다. In a Silent Way를 지나고 문제작 Bitches Brew를 내 놓으 면서 아예 재즈보다는 락에 가까운 기타리스트 존 메크 러플린(John McLauphlin)을 포함시켰다. 이 앨범은 발매 첫 해 50만장 이상 팔리며 락 재즈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리며 황제 마일즈의 재임기간을 다시 늘리게 된다.
60년대 중반 이후 70년대를 락 문화라고 할 정도로 락 의 영향이 대단하여 마일즈가 처음으로 락 재즈를 시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리 버튼이나 빌리 코브햄도 비 슷한 시도를 했으며 록으로 음악을 시작한 많은 젊은 뮤 지션들도 다양함을 찾아 재즈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전 술한 바와 같이 마일즈는 야심많은 지략가였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하기 보다는 흩어져 있는 조각들을 조합 시킬수 있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마일즈 이전에 파커와 길레스피가 밥을 만들었으며 이름만 쿨의 탄생 이지 실 은 그 이전에도 쿨 스타일은 있었다. 모드 주법은 클래 식 교육을 받으면서 얻어온 것이고 락 재즈또한 웨인 쇼 터등 동료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일즈를 돋보이게 하는 것일까? 그 는 상황파악의 대가 였다. 그는 자신이 부족함을 잘 알 고 주변 멤버들을 통해 보강했으며 그들의 장점을 잘 끌 어낼줄 알았다. 약한 음색을 보강하기 위해 그 옆에는 언제나 소니 롤린스나 존 콜트렌 처럼 힘있는 연주자가 있었고 길 에반스처럼 뛰어난 편곡자도 있었다. 그의 음악속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다. 마일즈 자신의 힘없이 훌쩍이는 듯한 차가운 트럼펫과 맥스 로치,아트 블래키, 필리 조 존스,지미,토니 윌리엄스로 이어지는 드럼. 또 토미 플라나겐, 레드 갈란드, 윈튼 캘리, 허비 행콕 등 으로 연결되는 피아노는 차가움과 따뜻함, 부드러움과 강렬함을 무리없이 조화시키고 있다. 특히 50년대 중반 에 발표된 일련의 앨범들 - COOKING, STEAMING, RELAXING, WORKING, ROUND ABOUT MIDNIGHT - 등은 이러 한 긴장감과 조화를 잘 나타내주는 명작들이라 할 수 있 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대중화 하는것도 그의 탁월한 재능이다. 이런 재 창조를 통해 그는 계속적으 로 재즈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으며 이것은 부족한 음 량과 연주실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근 20년간 황제의 자 리에 있게 했다.
70년대에도 기존의 재즈 스타일은 있었으나 락 재즈가 부각되는 것은 여러 연주자들의 왕성한 활동때문일 것이 다. 마일즈 외에도 칙 코리아, 허비 행콕, 웨인 쇼터, 죠 자비눌등이 각자 독립해서 그들의 팀을 이끌며 락 재 즈의 붐을 만들었다. 3대 락 재즈 그룹이라는 Return to Forever, Weather Report, Mahavishnu Orchestra는 모두 71년에 결성되었으며 많은 아류 그룹들을 만들며 인기를 얻었다. 이들의 음악을 들으면 당시의 흐름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락 재즈는 현재까지도 유행하면서 재즈 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부류의 음악은 스윙 감이나 즉흥연주는 덜 하지만 전자음향의 강력함이 부족 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
락 재즈의 부작용은 뭐니 뭐니 해도 재즈의 상업화를 들수 있겠다. 상업화가 꼭 음악성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 은 아니지만 락 재즈가 팬들을 넓힌 이상 연주자들은 그 들의 귀를 의식하지 않을수 없으며 그들의 취향에 맞추 어야 했다. 터부시 했던 재즈에서의 전자악기 사용에 다 수의 재즈 연주자들은 반발했지만 청중들은 환호했으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연주자들이 그 시대를 대표하게 된것 이다. 앰프에 의지한 탓인지 연주 기량면에서도 별 진전 이 없는것 같다. 비트가 강해진만큼 드럼이나 베이스의 연주자들은 실력이 향상되었으나 관악기에서는 호킨스나 파커, 오네트 같은 연주자들은 찾아보기 힘들어 졌으며 앞으로도 어려울것 같다.
다음에는 80년대 이후의 재즈에 대해서 말해 볼까 한다.
8. 포스트모던재즈
이제는 80년대 이후의 재즈를 이야기 할 차례이건만 갑자기 말문이 막혀오는걸 느낀다. 뚜렷하게 내세울만한 주제도 없고 짧은 앎에도 이책 저책 뒤져가며 허풍을 떨어 이제는 별로 할말이 남지 않은것이 솔직한 이유이 다. 그러나 기왕에 설쳐댄김에 펜 가는대로 더 적어보 겠다.
생각해보면 재즈는 그 발생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양적 질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소수 흑인들의 음악 에서 이제는 현대 사회인이라면 누구나 알아두어야 할 음악이 되었으니 참 대단한 일이다. 필자가 생각할때 재즈에 있어서의 큰 변화는 대략 10년 주기로 있어왔다 고 본다. 20년대의 뉴올리언즈 재즈 - 30년대 스윙 - 40 년대 밥 - 50년대 쿨과 하드밥 - 60년대 프리재즈 - 70 년대 퓨전 재즈 락. 억지가 있는것 같으니 꼭 나누자면 대충 맞을것도 같다. 그럼 70년의 10년 뒤인 80년대는 어떤 재즈가 발전했을까 생각해 보면 처음의 답답함으로 다시 돌아온다. 80년에서 다시 10년이 지나 90년대에 들 어섰는데오 앞에 나눈것처럼 대표할수 있는 재즈 스타일 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재즈의 변화가 진행중이라 는 것이다. 70년대 까지의 재즈는 많은 연구와 논란속에 서 어느 정도 체계적인 이론을 만들어 왔으나 80년대 이후의 음악은 아직 정리가 부족한 감이 있다는 것이다. 시중에 나와있는 대부분의 자료를 보더라도 퓨전 락 재 즈 까지는 세세한 일화까지 나와있어 이해를 도와주지만 80년대나 미래의 모습을 설명한것은 찾아보기 힘들뿐더 러 그나마 매우 조심스럽게 나타내고 있다. 하긴 동시 대의 사건들을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단편적일수 밖에 없을것이다. 재즈에 관한 정기 간행물이 하나도 없는 우리 현실에선 더욱 그러할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80년대 이후의 재즈의 흐름을 주관적으로 파 악하는것도 좋을것 같다. 필자가 생각하건데 시간이 흐 른 뒤에라도 평론가들이 80년대의 재즈를 묘사한다는건 꽤 부담되는 일이 될것이라 본다. 그 첫번째 이유로는 이전의 재즈에서 처럼 대두되는 재즈맨이 드물다는 것 이다. 암스트롱, 앨링턴, 파커, 마일즈, 콜트렌, 오네트 콜맨...처럼 시대를 대표할 만한 연주자가 눈에 띄지 않 는다. 윈튼 마샬리스가 신 고전주의라는 이름으로 무섭 게 활동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지난 곡들을 재해석 하 는데 치중하고 있으며 ECM을 중심으로 조용하면서도 빠 르게 확산되고 있는 음악들도 프리스타일이나 메인까지 다루고 있으나 어쩐지 지적이고 깔끔한 소리를 중시하여 흔히들 얘기하는 재즈특유의 끈끈함이 부족함을 느낀다. 케니 지나 헤리 코닉 쥬니어 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경우도 있으나 그렇게 된것은 서정적인 멜로디나 잘생 긴 외모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의 재즈 에 있어서의 유일하면서도 중대한 공은 많은 음반을 팔 았다는 것이다.(실제로 이들의 소속 음반회사에서도 이 들을 재즈뮤지션이 아니라 팝아티스트로 분류하고 있 다.)
이런 판단은 앞에서 말한것처럼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생각이며 과장이 지나친듯 싶지만 또 워낙 과장이 심한 음악이 재즈이다 보니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아마 이런점도 있을것같다. 직접 아프리카에서 건너온 흑인 1세대와, 재즈를 예술의 한 분야로 승화시 키고 발전시킨 2세대 재즈뮤지션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 지는 상황에서 지금의 신진 3세대 음악인들은 당분간 그 진로를 찾는데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필자 임의로 80년대 재즈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크게 나눌수 있을것이다. 우선 퓨전-크로스 오버란 말은 많이 쓰기도 하지만-음악의 계속적인 발전이 있 다. 데이브 그루신을 비롯한 GRP의 일련의 연주자들과, 앞서말한 ECM같은 음악들. 또 많은 재즈인들의 곱지않은 시선을 받고 있는 케니 지 같은 경우가 이 부류에 포함 될것같다. 세련되고 깨끗한 음악으로 많은 팬들을 확보 했지만 그 층을 넓게 한 만큼 깊이는 얕아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누가 알수 있겠는가? 미래에 케니 지가 콜트렌의 뒤를 잇는 색서폰의 명인으로 평가 받게 될지...
두번째는 앞에와는 대조적인 신 고전주의 움직임이다. 아트 블래키와 활동한 재즈의 전도사들이 그들인데 그 맨앞에는 윈튼 마샬리스가 있고 전기의 울림에 식상한 많은 신진 연주자들이 힘을 더하고 있는것이 대단한 기 세다. 제 2의 프랭크 시내트라 라고 불리는 헤리 코닉 쥬니어도 이 쪽에 포함될것 같다. 빅밴드 음악과 랙 연 주까지 대시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이런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다.
세번째는 앞의 둘을 섞어 놓은것 같은경우인데 GRP나 ECM등의 멜로딕 재즈가 백인 취향이라면 이번 경우는 소울풀한 흑인 감정이라는 것이, 신 고전주의가 어쿠어 스틱 음악을 한다면 이 세번째의 경우는 전자악기를 상 용한다는 것이 그렇다. 퀸시존스의 음악이나 브랜포드 마샬리스 같은 경우를 들수 있겠다. 뉴 재즈 스윙, 또는 애시드 재즈(Acid jazz)라고도 하는 펑키한 이들의 음악 은 랩과 힙합 같은 댄스음악과 유사한 점을 느낄수 있 다. 댄스홀 DJ나 랩퍼들이 만든 재즈풍의 댄스 음악들은 펑키한 최근의 경향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각국의 민속음악과 재즈의 결합이 더욱 심화 되었다는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보사노바 음악, 인도음악의 이용등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재즈의 볼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에서도 국악과 접목을 시도한하거나 대규모 연 주회를 준비한다는것은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매우 반 가운 일이다. 이건 여담이지만 현대사회를 정보사회란 말들을 많이 하는데 재즈에 있어서도 그런것 같다. 못 배운 흑인들의 천박한 음악이더 재즈가 이제는 학문으로 되어 재즈연주자들의 고학력은 당연한것이 되었다. 마일 즈는 줄리어드에서 수학했고 웨인쇼터는 뉴욕대학에서 음악교육을 전공했으며 윈튼은 줄리어드에, 최근의 죠 슈아 레드먼(Joshua Redman)은 우등으로 하버드를 졸업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음악인들이 유학하는 경우가 많 은것도 이런 이유인것 같다.-요즘 우리 가요에서도 많이 배우고 외국물먹은 사람들을 막 밀어준다니 이제는 정말 배워야 음악을 할 수 있나 보다.
이렇게 해서 대충 또 사설을 늘어 놓았다. 80년대 이후 재즈가 침체 되었다고 하나 어쩌면 우리가 아직 듣지 못 한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오네트 콜맨이 차고에서 혼 자 연습하는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실제 로 이전의 재즈에 귀를 길들여 놓은 대개의 재즈 매니 아라면 새로운 형태의 음악에 무디고 보수적일수도 있을 것이다. 너무나 방대해진 재즈의 영역은 어떤 대표적인 장르나 뛰어난 스타일리스트의 탄생을 어렵게 할지도 모 른다. 정리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시도 또한 긍정적인 기 대를 하게한다. 지금도 많은 빅 밴드들이 활동하고 있으 며 같은곡을 연주하고 있더라도 그 감정이나 연주는 과 거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많은 교육과 다양한 시 도와 새로운 감성으로 몇 년 후에는 이것이 재즈다 라 고 하며 재즈의 역사를 또 다시 펼칠것이다.
이상으로 8번에 걸쳐 나누어 시대별로 재즈를 분류해 보았다. 시대별로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분이 빠져있다. 아쉬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가 장아쉬운 점은 재즈의 수용에 있어서 일방적으로 받아들 이기만 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의 정서에 어울리면 서도 재즈 본래의 자유로움이 우러나오는 그런 음악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여러가지 어려움과 문제점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재즈의 매력에 다시한번 놀라면 서 이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