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마태오 7,1-5
내 안에서 이웃에 관한 판단이 멈추지 않는 이유
오늘 복음도 산상설교의 내용 중 하나입니다.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집약체입니다.
처음 ‘하늘 나라의 행복’에 대해 말씀하시고 그 행복에 이르려면 ‘사랑의 계명’일 지켜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계명은 당신께 대한 믿음 없이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심판하지 않게 될까요?
우선 그리스도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율법이든 그리스도 없이는 지켜질 수 없습니다.
영화 ‘세븐’(1995)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임신한 당신의 아내를 질투라는 이름으로 죽인 그 사람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는데 당신은 그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살인범은 ‘칠죄종’의 순서대로 사람들을 죽이며 세상의 죄가 만연해 있음을 경고하려 합니다.
돈만 아는 변호사를 죽이고 게으르고 교만하고 먹기만 하는 사람도 죽입니다.
범인은 형사와 그 아내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고 ‘질투’를 느낍니다.
그리고 마지막 ‘분노’를 느끼는 사람에게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범인은 아내의 머리만 박스에 넣어서 형사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아기까지 있었다고 말합니다.
형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법을 어기고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 영화를 보며 느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판단하지 않고 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판단하며 미워하며 살고 싶겠습니까? 판단을 멈추는 것이 안 되고 용서하는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렇다면 남을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에서의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바로 남을 심판하는 마음인 들보에 피를 발라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 출입문 들보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집 안에서 먹던 파스카 예식을 떠오르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용서를 넘어서 판단 자체가 되지 않게 하려면 판단을 하는 마음에 그리스도의 피가 발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죽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판단하지 않으려면 내 마음이 죽어 봉헌돼야 합니다.
진정으로 남을 심판하는 마음을 버리고 싶다면 그리스도께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아 그분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1코린 2,15-16)
요한은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예수님의 마음은 구원하는 마음이시지 심판하는 마음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누구도 심판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심판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성체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나에게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들보에 피가 발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자신의 마음을 봉헌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자기 마음을 지키려는 자에게 주면 돼지 목의 진주처럼 성체를 모독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립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오면서 특별히 누구를 미워해 본 적이 없는 어떤 마음 착한 분이 자신의 그런 마음을 이용하는 한 자매에 대해 미운 사람이 생겼을 때 도저히 용서가 안 되어 힘들었다고 합니다.
매일 미사에 나가면 계속 용서하라는 복음만 나와서 더 미칠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하루는 성체를 영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용서하기 싫어요. 예수님이 아무리 저한테 용서하라고 해도 전 죽어도 용서 안 할 거니까
저의 이 마음 드릴게요. 예수님께서 제 마음 받으시고 예수님이 용서하세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다음 날부터 그 자매와 마주쳤는데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화도 안 나고 분노도 안 생기고 ‘용서해야 하는데’ 하는 분심도 안 생기고 그냥 평화롭고 그 자매가 싫지도 않고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다고 합니다.
‘아! 용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거구나!’
예수님 마음은 심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용서하려고 한다는 말은 이미 심판했다는 말입니다.
이미 심판을 내려놓고 무슨 용서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마음을 지니고 심판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뱀이 무슨 용서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죄를 짓게 하고 그 죄를 감추고 합리화하기 위해 타인을 심판하게 만듭니다.
나의 본래 마음은 하느님보다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본성상 심판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마음을 봉헌하고 그분의 마음을 장착하지 않는 한 내가 용서하려고 하는 노력은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심장을 찾아 나선 양철나무꾼이 저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항상 저의 차가운 마음을 따듯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양철나무꾼은 오즈에게 이미 따듯한 심장이 생겼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 사랑의 심장이 이미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피로 우리 마음을 죽이시고 성체로 들어오셔 우리 마음이 되십니다.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유일한 길은 판단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하고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따듯한 마음을 장착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구원하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20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마태오 7장 1-5절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화가 날 때면 산책을 나가십시오
고령의 노인이 의사에게 건강 진단을 받았는데 아주 건강했습니다.
의사가 노인에게 건강하게 산 비결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대답 했습니다.
“50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는데, 결혼 초에 아내와 이런 약속을 했지요.
‘내가 화나면 당신이 부엌으로 비켜주고, 당신이 화가 나면 내가 산책을 나가겠소’ 라는 거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정말 산책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건강해진 거지요. 하하.”
(‘부부로 산다는 것’, 이즈덤 하우스 참조)
신혼 초에 내렸던 두 분의 결정, 참으로 지혜롭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이지만 결혼은 현실입니다.
보통 현실이 아니라 쓰디쓴 현실입니다.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스파크가 번쩍 번쩍 튀는 꿈같은 나날은 한 순간이지요.
결혼은 매일같이 ‘사랑에 밥 말아서’ 먹고 사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저는 믿습니다.
일 년, 이년, 삼년이 지나가면 아무리 외면하려고 기를 써도 배우자의 결함이 슬슬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그 결함은 주로 어떤 것들입니까?
돌아보면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어서 웃음이 나옵니다.
마음 크게 먹으면 참아 넘길 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전쟁의 원인이 됩니다.
한두 번 조용히 말로 이야기할 때 마음에 안 드는 버릇 좀 고쳐주면 좋을 텐데, 죽어도 협조를 안 합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속상하게 하니 더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속으로 판단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한심합니다.
한 평생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답답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마다 상대방을 마음속으로 심판하고, 단죄하고,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밖으로 나가보십시오.
근처 공원을 거니십시오. 가까운 야산을 오르십시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자연과 접하십시오.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려보십시오.
옹졸했던 마음이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상대방을 판단하고, 미워하고, 단죄한 일이 떠오르면서 웃음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부분은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습득해온 버릇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에는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인내와 기도로만이 해결 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어떤 부분은 내 판단이 100% 잘못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심판, 단죄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어쩔 수 없는가봅니다.
우리는. 자기 코가 석자면서도 늘 상대방에 신경 엄청 씁니다.
자기 정리도 안 되는 사람이 이웃에 대해서는 어찌 그리 날카로운 비판의 잣대를 들이대는지 모릅니다.
상대방이란 존재를 잘 견뎌내는 것, 이웃을 잘 참아내는 것은 덕 중에서 큰 덕입니다.
어쩔 수 없이 한 평생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입니다.
때로 상대방도 나를 순교자적 인내로 참아가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하느님께서 배우자를, 가족을, 동료를, 형제를 우리에게 보내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완전함과 거룩함에로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존심 강하고 콧대 높은 우리의 스승으로 배우자, 가족, 동료, 형제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나날이 아무리 형편없어도, 우리의 생활이 아무리 부끄러워도 하느님께서는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끝없이 용서하십니다. 자비를 베푸십니다.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할 일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을 단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없이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한없는 자비를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런 것이다>
2022. 06. 20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마태오 7,1-5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것이다>
산이
나무를
보듬고
바다가
파도를
품으며
사람이
사람을
안는다
나무가
산에
깃들고
파도가
바다에
스미며
사람이
사람에
안긴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