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설교는 힘이 있다.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생명의 영도자를 죽인 백성들에게 무지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시어 백성들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시고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전한다(제1독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신다. 단순히 환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육신까지 부활하시어 우리 삶 한가운데 오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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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만일 돌아가신 조상이나, 부모님이 갑자기 나타나 어깨를 툭 치며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시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도 비신자들은 무당을 불러 굿을 할 것이고, 우리 신자들은 구마 기도를 하거나 성수(聖水)를 뿌리며 난리를 칠 것입니다. 더구나 잔소리 많던 시부모님이 다시 살아나신다면 이건 연옥보다 더한 형벌이라고 질색을 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구체적으로 살과 뼈를 가지신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식사까지 하십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았지만 곧 주님이심을 깨닫고, 꿈인지 생시인지 너무나 기뻐합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상식을 넘어서는 이 사건 앞에, 제자들은 어떻게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지요? 오늘날 우리는 유령들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영화, 소설, 인터넷 등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온통 유령들의 세상입니다. 현대의 환경이 이렇다 보니 예수님도 민담이나 설화에 나오는 실체가 없는 가상의 인물 정도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환시가 아닙니다. 만일 유령처럼 주님을 체험했다면, 부활 사건은 무의미하고 두려움만 더해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부활 사건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주님의 현존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의 세계가 저 멀리 우리 삶과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에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이런 충만한 부활의 세계를 경험하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의 깊은 곳에 부활이 있고, 충만한 부활의 세계는 우리 신앙의 삶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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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지식이 아닙니다. 부활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애정입니다. 사랑과 애정을 어떻게 이론으로 증명할 수 있을는지요?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스승님께서는 자꾸만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한계를 깨뜨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놀라느냐? ……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안타까움이 담긴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의 의구심은 여전합니다. 마침내 스승님께서는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잡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과 인내’로 다가가시는 모습입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화려하게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초라했습니다. 그런데도 스승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해석해 주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인데도 부활 사건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니 후대의 신앙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분의 개입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는 이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반드시 개입하십니다. 그리하여 ‘평범한 사건’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주십니다. ‘보통의 만남’을 통해서도 가르침을 남기십니다. 사건과 만남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부활은 전혀 예기치 못한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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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알게 되면 금방 성숙해집니다. 부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녀는 하늘이 보호합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부모의 정성과 사랑에 보답해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통과 연결된 인생만이 성숙한 삶을 가능케 합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렇게 자신들 곁에 계시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승님을 떠나보냈던 이별이 그들을 왜소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어린이를 대하듯 하시는 스승님의 말씀에는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읽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따듯함입니다. 제자들은 감동합니다. 그리하여 ‘수난과 죽음의 아픔’을 극복합니다. 스승님의 열정이 그들의 왜소함을 몰아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지식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차가운 이론으로는 설명에 한계를 느끼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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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제자들은 부활하신 스승을 보자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건 좀 심한 일입니다. 어쩌다 주님의 제자들이 이렇게 되었는지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스승이 떠나자 희망도 자신감도 함께 떠나 버렸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그들 앞에 스승이 나타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그들의 굳은 마음을 누그러뜨리시려는 배려였습니다.
생선을 잡수시는 예수님과 그분을 지켜보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놀람과 환희와 부끄러움이 교차되는 얼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생선 한 토막만을 달랑 드신 것이 아닙니다.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평소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부활하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던 겁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의도를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스승은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선포하십니다. 부활 사건의 깨달음은 지식으로 습득되는 이론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려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지, 지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리 해석만으로 이 위대한 진리에 접근하려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너무 기뻐서
-김종성 신부-
적어도 루카복음 사가가 판단하기에는 제자들이 아직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기뻐서’?였다. 믿지 못하는 이유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돌려 말하면 감정과 느낌이 믿음생활에 장해물이 된다는 것이다. 성지에 있어 보면 본당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주임신부의 말에 상처 받고, 수도자의 행동에, 단체장의 이중인격에 실망하고, 교우들 간의 갈등에…. 그래서 신앙이 흔들리고, 미사 안 나가고, 단체 활동을 중단한다는 얘기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은 엄밀히 말해 믿음생활이 아니라 성당생활 아닌가?? 성당생활은 믿음생활에 필요조건은 될지 모르겠지만, 충분조건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감정의 선은 고무줄과 같아서 이성과 믿음의 영역을 능히 침범하곤 한다.
어느 편에 설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럴 때 우리 신앙을 점검할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이는 내 신앙이 하느님 아닌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왔다는 것을, 또한 사소한 느낌이 믿음생활 전체를 흔들어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봉사하다가 상처 받으면 사실 그때부터가 참 봉사를 할 때다. 바로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봉사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나 좋아서 한 일이라는 게 증명된 셈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산을 넘어야 믿음의 강이 보이는가 보다. 어디쯤 가고 계시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양승국신부-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나무 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설명하기 정말 난해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런 제자들, 이런 우리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3단계 작업을 통한 특별과외를 실시하십니다.
첫 단계로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들을 안심시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배신에 따른 수치심, 어떻게 그분 얼굴을 뵙나, 하는 송구스러움으로 가득 찬 제자 공동체를 향해 던지신 첫마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입니다. 저 같았으면 너희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정말 실망스럽다, 내가 정말이지 헛고생했다며 엄청 야단쳤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마디 질책도 하지 않으시고 먼저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십니다.
두 번째 단계로 당신의 구멍 뚫린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더 강하게 당신의 부활을 증명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음은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음식을 청합니다.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마리를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맛있게 드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부활을 확신한 사람, 예수님 부활을 명확하게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체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참 사랑을 주변사람들에게 실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크게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자칭 ‘예수님의 애제자’라고 불렀던 사도 요한이 그랬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랬습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이 부활일 것입니다.
어제 점심 식사 후 소화도 시킬 겸 해서 보좌신부와 볼링을 치러 갔습니다. 사실 얼마 전 볼링을 칠 때 무리를 해서인지 계속해서 손목이 좋지 않았지요. 그래서 제대로 볼링공을 던질 수 있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던지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볼링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요? 평소 평균 점수에서 30점 이상의 높은 점수가 나온 것입니다. 볼링장 주인 형제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신부님, 오늘은 자세가 아주 좋으세요. 몸에 힘도 많이 빠졌고요……. 이 정도 컨디션이면 국가대표가 와도 신부님께는 안 되겠는데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손목이 아프기에 컨디션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점수도 잘 나오고, 자세도 좋다고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아마 손목이 아파서 힘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힘을 주고 싶어도 손목 때문에 힘을 줄 수 없었고 그래서 부드럽게 공을 던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까지는 있는 힘껏 볼링공을 던졌고 그 결과 힘만 들뿐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떠한 운동경기든 다 그렇지요. 몸에 힘이 잔뜩 들어 있으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몸에 힘을 뺀 부드러운 자세를 가지라고 하지요.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습니다. 대신 내 몸의 힘을 쫙 빼고 하느님께 온전히 나의 모두를 내어 맡길 때 하느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우리 삶 안에서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제자들 모습이 바로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말을 통해 예수님 부활 소식을 미리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를 못하지요. 세속적인 생각과 의심으로 인해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과 함께 직접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면서 의심으로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믿고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 베드로 사도 믿음에 대해 역시 제1독서를 통해 말씀하시지요.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주님을 세상에 알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솜처럼 부드러운 마음, 스펀지처럼 주님을 쏙쏙 들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질투는 일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도 올바르게 보지 않는다.(유태 격언)
허물이 있기에 선택된 증인
-이영훈 신부-
제자들 중 가장 흠 많은 사람이라면 단연 베드로입니다. 순정파이지만 단순, 무식, 과격 그리고 팔랑귀에, 겁 많은 베드로!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고, 사도들의 사도로 인정하셨으며, 허물 많은 그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 또한 주십니다. 완벽한 지성과 삶을 지녀도 수행하기 어려운 ‘말씀의 증인’ 역할을 ‘허점투성이’에게 맡기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말씀의 증인’이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것만을 증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살면서 드러났던 자신의 허물도 함께 증언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예수님으로 인해 희망과 행복을 체험했던 자신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복음 선포는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성을 지닌 자가 부족한 이에게 ‘훈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살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 많은 이가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용서와 희망, 그리고 행복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빛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럼 말씀의 증인으로 충분합니다. 이때야말로 마음을 열어 주님께 향해야 할 때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전삼용신부-
세계 도처에 분원이 있는 어떤 한 수녀님께서 세우신 체나꼴로 (Cenacolo: 최후의 만찬을 했던 다락방, 성령강림이 있었던 방)라고 하는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마약에 중독되어 살던 사람들이 이 공동체에서 어떻게 마약중독을 극복하였는지 증언들을 하였습니다. 이태리 사람인데 매우 어려보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했던 문신이 팔과 온 몸에 있었지만 어린이와 같은 미소를 지니고 있었고 항상 손에 묵주를 쥐고 있었습니다. 함께 같던 신자의 말에 의하면 그가 열두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른세 살이었습니다.
그가 육년 전 그 공동체에 들어올 때는 마약에 찌들어 오십은 되어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약을 극복하고 기도와 노동 속에서 다시 젊은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정말 사람들의 마음 상태까지도 얼굴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말보다도 풍기는 외모에서 이미 마약중독을 극복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촛불이 타는 것을 보면 무엇이 있다는 증거입니까? 바로 산소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산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이 타고 있는 것을 보면 산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습에 기쁨과 젊음, 평화가 저절로 흘러나온다면 그 사람 안엔 반드시 좋은 것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 기쁨으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갑자기 나타나자 그들은 유령으로 생각하고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살과 뼈가 있는 인간이라고 하시며 믿지 못하겠거든 직접 만져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일면 기쁘지만 아직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비롭게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들이 물고기 한 마리를 가져다 드리자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그것을 먹어 보이십니다. 살아계신 뼈와 살이 있는 예수님임을 인내를 가지고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설명해 주시며 당신이 죽었다 살아나야 하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그들은 그제야 두려움을 이기고 기쁨에 넘칩니다.
그리고는 당신께서 그들에게 발현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즉, 예수님은 당신 부활이 부활한 당신을 체험한 이들을 통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오~ 아름다워라,,,’라고 시작되는 태양의 찬가는 성 프란치스코가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세상이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 어떤 역경도 꺾을 수 없는 성령님의 열매가 그 안에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부활의 증거는 바로 우리 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쁨입니다. 우리 삶이 기쁘지 않다면 그 사람에겐 아직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인상만 찡그리는 사람을 보며 어떻게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체험한 이들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울증 환자에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제자들은 기쁘고 무엇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동네방네 부활한 그리스도를 전하러 뛰쳐나갔습니다. 만약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그리스도를 만나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가득해서 주님을 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뵙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 있었기에 주님을 뵈었습니다. 토마 사도도 교회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뵙게 되었습니다. 결국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은, 그 분을 사랑하여 교회 안에서 성경 말씀을 더 알아가는 가운데서 가장 빠르게 만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도 빨리 그 분을 만나 우리의 평화와 기쁨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그 분을 증거하는 이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짧은 묵상
김연아 선수가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정신을 잇는 단체의 홍보대사가 되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어떤 골수 개신교 신자는, “윤아 킴, 너 지옥 가고 싶냐?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다.”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종교가 분열 되어 사람들이 그 분열된 종교에서 어떤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사도들이 모인 가운데 그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잘 모르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밥과 빨래를 하던 여인들이 그 분의 부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대표로서 이보다 창피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영성적으로 따지면 교회의 기둥인 사도들은 그들보다 뒤져있을 수 있습니다. 즉, 교황님이나 주교님이 되어야만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만약 특별한 체험이 있는 개개인이 교회의 영성이 자신들보다 뒤진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떠나 부활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전하고 다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는 분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체험한 이들은 먼저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소식을 듣던 중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이들은 부활 체험을 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사실은 교회가 거룩한 모습이건 그렇지 않은 모습이건 주님께서 뽑아 세우셨으니 자신이 아무리 위대한 신앙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교회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교회의 분열은 자신들의 영성을 교회 밖에서 실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잘못 되어간다고 생각하면 프란치스코나 다른 성인들처럼 교회 내에서 개혁을 해야 합니다. 또 다른 분열이 있지 않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모두 하나가 되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 잘 보여주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양승국신부-
<조바심과 설렘>
대희년을 마무리짓는 감사미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런 권고의 말씀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세 가지를 눈여겨보시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①그냥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②예수님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③그저 적당히 세월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부활"이라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기쁨과 은총의 선물들을 선사하십니다. 제자들을 뛸 듯이 기뻤습니다.
복음사가들은 당시 제자들이 "예수 부활"로 인해 받았던 감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볼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선물만 주고 기쁨만 주고 승천하신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 되풀이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너희가 본 것을 만방에 전하여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만방에 전해야할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주님은 죽은 예수님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메시지의 요점입니다.
우리의 사목 현장에서, 삶의 터전에서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요? 죽은 예수님, 미이라처럼 박제된 예수님은 아닌지요?
우리는 진정 살아나신 바로 그 부활 예수님을 전파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복음 선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복음선포를 전해들은 이웃들은 놀라며 기뻐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로 달려오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우리의 발걸음은 어떻습니까?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발걸음처럼 설렙니까? 사도 요한의 발걸음처럼 조바심이 납니까?
믿음이라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양옥자 수녀-
인근의 자연환경이 아름다워 나는 고향에서 휴가 보내기를 좋아한다. 아버지께서 느티나무 아래 지어놓으신 정자에서 바라보면 드넓은 초록 들판과 그 뒤로 맞닿은 뭉게뭉게 다정한 산들, 그사이로 하얀 두루미들이 날아다니는 광경은 한마디로 천국이 따로 없다. 어느 날 읍내 성당에서 저녁미사를 마치고 동생에게 들렀다가 집에 가려고 나서니 밤 10시였다. 칠흑 같은 밤에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산길을 지나는데 근처에 인가도 없었다. 룸미러를 보면 뒷좌석에 누가 앉아 있을 것 같고, 당장이라도 앞에 뭐가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두려움으로 차를 급하게 몰다가 하마터면 논두렁에 빠질 뻔했다. 다음날, 밤이나 낮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지난밤 내가 느낀 두려움은 무엇인지 의문이 생겼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없는 것처럼 착각한 데서 기인한 어리석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밤에 그곳을 지나갈 때 두려움이 생기려고 하면 상향등을 켜 어둠에 덮인 산과 들을 보았다. 분명히 그들은 아름답게 그 자리에 있고, 어둠이 잠시 가린 것뿐임을 확인하고 나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두려움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사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절망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 것처럼. 잠시의 어둠에 가려 마음이 불안해지고 평화를 잃어버리거나 그 어둠이 전부인 양 착각할 때, 믿음의 전조등을 높이 켜보자. 아직 날이 새지 않아 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는 그 배려의 때, 희망의 때를 확신하며 갈 때 우리는 주님의 평화를 비는 인사 앞에 고개 끄덕이며 삶의 힘든 밤길을 기꺼이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새벽을 열며 -조명언신부-
아주 친밀한 관계는 0에서 40 또는 50Cm 거리로 앉아 있을 때 가장 편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거리를 가리켜서 ‘연인의 거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저 친한 정도의 친구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관계는 50에서 120Cm로 앉는 것이 편하다고 하네요.
또, 친하지는 않지만 안면이 있는 사이는 2미터에서 4미터의 거리로 앉아야 가장 편하다고 하지요.
그리고 공적인 거리는 4미터 이상 떨어져야 편하다고 합니다. 이 거리는 딴전을 피울 수 있는 거리이지요. 강의실에서 교수와 학생 사이의 거리일 수도 있고, 연설이나 강의에서 강사와 청중 사이의 거리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과 나의 거리는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를 생각하여 봅니다. 공적인 거리? 아니면 친하지는 않지만 안면이 있는 거리? 또 그저 친한 정도의 거리? 중요한 것은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거리는 0에서 50Cm 정도의 거리를 가리키는 아주 친밀한 연인의 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때 주님과 나의 거리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주님께서 제 곁을 떠나신 것 같고 그래서 그 거리가 4미터 이상 떨어진 공적인 거리처럼 느껴집니다. 이 느낌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대하는 제자들도 간직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인 줄로 알았으며, 엠마오까지 함께 걸어가면서도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곁에 계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노력을 하실까요? 2천 년 전에도 그러한 노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굳이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 직접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직접 음식을 잡수심으로 인해 성경 말씀대로 직접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해주십니다.
문제는 이렇게 가까이 오시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지려는 우리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간격을 가까이 할 수가 있을까요?
그 예를 공 던지기 놀이에서 찾아봅니다. 한 사람이 공을 던졌는데 다른 사람이 무시를 하고 공을 받지 않으면 어떨까요? 놀이가 되지 않겠지요. 상대방이 공을 던졌을 때 온몸으로 가서 받고, 또 상대방에서 힘껏 던지면서 공 던지기 놀이는 재미있는 놀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이를 통해 더욱 더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랑이라는 공을 던져주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온몸을 던져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사랑을 힘껏 던져야 하겠지요. 그래야 주님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공을 던져주셨는데도 본체만체 한다면 어떨까요? 놀이가 유지될 수 없으며, 가까운 관계로의 진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 이제는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과 우리의 거리가 연인의 거리가 될 수 있도록 사랑을 실천합시다.
식탁의 빈 의자
-조성풍 신부-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매우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못 자국이 선명한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그리고 나를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라고 하십니다. 또한 구운 물고기를 직접 잡수시는 것을 통해 당신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일깨워주십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일상의 삶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특히 식탁을 중심으로 함께 먹고 마시는 삶 안에서 당신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싶어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 중에 가끔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식탁의 빈 의자 이야기’입니다. 어느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의 일입니다. 그 가정의 식탁에는 항상 식구 수보다도 한 개 더 빈 의자를 마련해두었습니다. 항상 비워 있는 이 자리는 바로 이 가정에 함께하는 ‘예수님의 자리’였습니다.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행복을 나누는 그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자리를 우리 가정에, 우리의 마음에 마련해드리면 좋겠습니다.
평화
- 이동훈 신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의혹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혹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골방 속에 꼭꼭 숨어서 지냈다. 마음의 평화가 사라졌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곳에서는 마음의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삶은 현세에 집착하게 한다. 현실의 물질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마음의 평화는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빼앗는다. 빼앗은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높은 담을 쳐놓고 경보기며 보안 시스템을 해보지만 마음의 평화가 생기지 않는다. 평화(平和)란 쌀(禾)을 나누어 먹되(口) 공평(平)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적 장애인(정신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배우는 것이 참 많다. 이들에게는 담이 없다. 누구를 보더라도 똑같이 대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돈이 많든 적든, 남녀노소,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사람들은 불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지능이 떨어져 자기 것도 챙기지 못하고, 상처 받을 줄도 모르고 마냥 마음을 열어주는 그들이 왠지 불안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장애인들의 마음이 더 평화롭다.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주기 때문이다. 누구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으며 모두를 평등하게 대해 주는 데 평화가 있음을 함께 사는 가족이 삶으로 가르쳐 준다.
너무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도다!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던 적이 있습니까? 정말로 보고 싶은 사람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보게 되었을 때,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닥쳤을 때, 감동과 감격의 눈물이 핑 돌게 될 정도로 그렇게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던 적이 있습니까?
제자들은 바로 주님을 뵙고 그러하였습니다. 죽었던 주님을 뵙다니요. 나의 온전한 희망이었던 그분을 이제는 영영 못뵈오리라고 생각하고 체념하였던 그분을 뵙게 된 심정은 짐작할 만합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게 되면 하루가 지겹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하루가 싱그럽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 사람 안에서도 어떤 날은 살아있음이 이렇게 해맑고 싱그러울 수가 없어서 내면적인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삶의 무게 때문에 짓눌려 살아갈 의욕조차 느끼지 못할 때는 하루의 눈뜸이 지옥같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제자들은 지옥체험과 부활체험을 동시에 하였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 여정을 걷는 동안 끊임없이 이러한 지옥체험과 부활체험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상이지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지옥같은 날만이 있지 않고 그 어떤 사람에게도 부활체험만 매일같이 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부활체험은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그 기쁨을 맛뵈기로 체험할 뿐이지요.
이 지상에서 느끼는 부활체험, 생명체험이 우리를 기쁨에 겨워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만든다면 저 세상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그 행복체험은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가끔씩 다가오는 지옥체험조차도 그 영원한 부활체험을 생각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요.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 참으로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고 그러면서도 해야할 일은 많이 밀려 있고... 아,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도 했습니다. 이것이 지옥체험이겠지요.
그러나 내일은 맑게 밝게 눈을 뜰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이 기쁨에 겨워 어찌할 수 없었듯이, 나도 주님을 뵙고야 말겠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을 뵙는 길만이 내가 부활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은 창가의 따스한 햇살처럼 나에게 오십니다. 연두빛 나뭇잎들의 싱그러움으로 나에게 오십니다. 살랑대는 수양버들 나무를 통해서도 오십니다. 오늘 해야만 하는 강의 속에서도 그분은 나에게 오실 겁니다. 또 준비해야 하는 회의 자료 마련 시에도 나에게 오실 겁니다. 형제, 자매들과의 만남 속에서도 오실 겁니다. 식사 시간에는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도 오실 겁니다.
오늘 특별히 새록새록 그분을 여기저기서 만나 뵈오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그 기쁨에 나도 어쩔 줄 몰라하며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보렵니다.
아, 주님!
영원한 Here and Now
-김찬선신부-
어제와 오늘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제자들이 주님이 깨우쳐주심으로 알아보게 됨을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이 얘기들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함께 걸으시고 빵을 나누시고 같이 얘기를 나누시는데도 우리는 거기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고 한탄하시듯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우리로 하여금 부활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굼뜨고 닫힌 마음이고 어떤 편견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은 거룩한 곳, 성전에만 계시고 주님은 긴 머리를 하고 계시고 주님은 무엇을 잡수지도 않고 주님은 화장실에도 안 가시는 분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더 이상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습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영원한 “지금, 여기(Here and Now)"이십니다. 우리가 빵을 나눌 때 거기에 계시고, 우리가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카바레에서 춤을 출 때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바닷가 횟집에서 회를 안주로 술을 마실 때에도 오늘 제자들과 생선 한 토막 같이 잡수듯 거기 계십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님이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셨습니다. 평소 금슬이 좋았던 분이기에 그 슬픔이 얼마나 클지 걱정하는 마음으로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매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 늘 자기와 함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남편이 회사 가거나, 특히 출장을 가면 혼자 있을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늘 자기와 함께 함께 있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더 이상 살아계실 때의 모습도 아니십니다. 그래서 생전의 모습을 생각하는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으로, 땀 흘려 일하는 농부의 모습으로, 이 봄 피어나는 꽃들의 모습으로 심지어 바위의 모습, 구더기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구더기에서 구더기이신 예수님을 보았고 바위에서 바위이신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사 안에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려면 우리도 열린 마음과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다른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듯 우리의 마음과 눈도 열어주시길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양승국신부-
<땡잡은 사람들>
과거 의료수준이 많이 낙후되어있던 시절, 의료사고가 꽤 많았습니다. 오진도 많았습니다.
담당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던 한 형제가 생각납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웠습니다. 아직 때가 아닌데, 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 그렇게 불안했습니다.
현실을 도저히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한없이 슬펐고 또 아쉬웠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슬슬 증상이 나타나야 되는 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생활하는데 별 지장도 없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끝에 당시 제일 큰 병원으로 가서 재검사를 받았습니다.
오진임이 드러났습니다. 지속적인 과로와 소화불량으로 인한 탈진상태였으며, 몇 달간 잘 쉬었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노라고, 앞으로 건강관리 잘 하라는 말을 듣고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그 형제, 당시 엄청 화가 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몇 달 뒤에 죽겠다고 선고를 내렸는데, 그래서 죽음의 강을 건너가기 시작했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살겠다는 말을 들으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스승께서 그리도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시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시는데, 이제 영영 작별이로구나, 곧 우리도 같은 처지가 되겠구나, 이제 우리 인생도 여기서 종 쳤구나 했었는데...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냥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살아나셨습니다. 적당히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확증시켜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발과 발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청하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 앞에 제자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행복했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얼마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더 들고, 병들고, 그렇게 끝이려니 생각했었는데, 또 다른 생이 있다니, 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이번 세상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끝나려니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늘 불안하게 살아갔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의 바다 저 건너편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죽음 끝에 더 행복한 삶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덕분에 ‘땡’잡은 사람들입니다. 정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운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독서> :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별인 기적 - 경규봉 신부-
사도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치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였지만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했던 고통 받는 종(이사 42,1-9; 49,1-13; 53,1-12)처럼 세상으로부터 배척과 모욕을 당하시며 십자가위에서 죽기까지 수난 당하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셨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유의 주님으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필립 2,5-11).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죽이는 잘못을 저지른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까지도 구원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라.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뿐만 아니라 위로해주실 것이며 복을 내리실 것이다. 땅에서 모든 죄와 불의를 없애시고(1고린 15,24-28),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본래의 목적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상태에 이르며(에페 1,10)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된 상태(묵시 21,1)가 올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이미 시작되었으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
앉은뱅이가 치유된 것은 사도들 자신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거나 경건해서 그를 치유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죽인 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를 치유하셨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그를 치유한 것이다.
40년이 넘도록 고통당하던 앉은뱅이가 치유된 것은 대단한 기적이다. 그러나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적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다. 이 치유의 기적은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을 행하신 분을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앉은뱅이가 치유된 기적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사도들 앞에 모이게 했고,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도들은 기적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오직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돌렸다. 자신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이며 도구로서 유다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도록 하는데 관심을 집중하였다. 기적의 목적은 이처럼 우리의 관심을 하느님께 돌려 회개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도록 하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며, 기적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일상의 지루함이나 따분함, 무의미함이나 무미건조함 등을 기적을 통해서 벗어나고자 한다. 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변하여 행복과 만족을 누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기적을 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구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하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사도 바울로는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고린 1,23-24) 하고 말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종교이다. 기적을 통하여 현실의 고통이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종교가 아니라,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가면서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종교이다.
물론 우리 삶에 기적이 필요하고, 기적은 일어난다. 그러나 기적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별빛이요 종소리일 따름이다. 기적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주는 표징일 따름이다. 따라서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지 못하고 기적 자체에 얽매인다면 기적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되어 우리를 병들게 하고 만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처럼 기적을 바라고 살지 말고,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고, 회개하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기적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 하지 말고, 하느님을 드러내고 전파하는 신앙인이 되자..........◆
열린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던 제자들의 모습 - 신기현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먼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선생님 댁에 강도가 들어와 칼을 목에 들이대며 돈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이 때 선생님께서는 당당하게 일어나 서랍에서 그 때 당시 돈 390환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돈을 받아 들고는 바쁘게 자취를 감추려고 하였는데, 선생님이 그를 불러 세워 놓고 "여보시오, 돈을 가져가면서 고맙다고나 하고 가져가야 하지 않소?"라고 말하였습니다. 강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그래! 고맙다."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새벽녘에 경찰이 그 강도를 붙들어 선생님 댁으로 찾아왔습니다. 경찰이 "이 사람이 선생님 돈을 빼앗았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선생님은 오히려 깜짝 놀라는 태도를 보이면서 "아니요, 나는 이 사람에게 돈을 뺏긴 일이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경찰도, 강도도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경찰이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아니, 이 사람이 자기가 이 댁에서 돈을 390환이나 빼앗았다고 하는데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강도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아이구 이 사람아! 아니 내가 390환을 주니까 당신이 고맙다고 하지 않았소? 빼앗았다면 고맙다고 했을 리가 있겠소?"
그래서 경찰은 하는 수 없이 그를 묶었던 수갑을 풀어 주고 가버렸습니다. 강도는 너무도 고맙고, 감격하여 그 후 선생님 댁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을 감화시키는 데에는 진정한 사랑이 담긴 용서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키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는 발현사화입니다. 복음 전반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본 제자들의 표정과 반응을 살펴보면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왜 그들은 기뻐하지 않고, 무서워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 죽음에 처한 자기들의 스승을 배반하였기에 주님을 만났을 때 죄책감에 너무나도 시달렸던 상황에서 드러난 현상입니다. 너무나도 미안하고 혹시나 벌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들의 앞을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벌도, 질책도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들에게 평화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유령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께서 부활하시어 살아 계심을 몸소 손과 발을 보여주심으로 증명해 보이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살아 생전에나, 부활하신 뒤에나 똑같이 그들에게 참된 사랑과 평화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어떤 죄도 묻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을 전제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들은 그들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 말씀을 충실히 수행해 나아갑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 솔로몬 행각에서 자신 있게 설교합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던 자가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변화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주님의 끝없는 용서에서 비롯되었고, 이것을 열린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던 제자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세례성사와 고백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전의 그릇된 삶에 대해 죽었고, 다시 새롭게 변모된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존재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은총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깨끗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진정 용서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라면 우리 또한 또 다른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이유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희망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라
-이인주신부-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와 자유를 주셨어도 방종하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착각하여 오해를 마치 정석인 냥 사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기에 다음과 같은 부활의 참모습을 나누려 한다.
부활의 진수를 알려면 그분과의 만남의 뿌리가 든든하여야 한다. 제자들도 한때 그 뿌리가 흔들렸기에 우왕좌왕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기도 했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고 간 사람이 없었기에 말이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 잠시 산 상태로 누워 있다 가는 경우는 있어도 평소 때와 같이 활동을 했던 그런 모델은 없었기에 사람들이 그 부활이라는 새로운 양식에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아주 조용하게 가져 오셨고, 놀라 자지러지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을 더 부드럽게 만드시면서 그들에게 마음의 위로와 평화를 선물로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메시지는 바로 평화가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혼란과 공포를 만들고 싶지 않으셨다. 가뜩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상처받고 무서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어려움을 안기기 싫으셨을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더 이상 예루살렘을 공포와 두려움의 도시로 만들기도 싫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아주 더 조용히 제자들에게 다가가셨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확신시키는 그런 방법으로 다가가셨다. 즉 조용한 가운데 말씀으로 다가가셨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당신을 사람들에게 전하셨듯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음성으로 다가가셨다. 같이 대화를 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음성을 제대로 들려주시고 듣는 순간에 그분임을 알아채는 제자들이었다. 여기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관상과 묵상을 할 때 오관을 동원해서 하느님과 통교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고 계신다. 우리는 하루 이틀 훈련을 해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착각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그분과의 대화하려는 강력한 의지 안에서 그분의 은총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산에 가시어 기도하시는 중에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셨으면 땀샘을 통해 피가 흘러나오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 차원의 기도를 할 때 그분의 음성이나 오관으로 맛 볼 수 있는 그런 차원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적어도 그런 훈련과 영적으로 깨어 있는 나의 청각기능과 마음의 기능이 제대로 있어야만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예를 들어본다.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다 마쳐갈 무렵 참으로 이상한 마음이 생겼다. 더 이상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 것이었다. 공부를 해야 할 수사가 공부가 싫다니 말이 되는가? 그러나 어쩌겠는가? 싫은 건 싫은 것이지. 그래 한 삼일 고민하며 기도 해 보다가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아 원장신부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적인 변화를 소상히 알리니, 우선 그런 마음까지 나눠주어 고맙다는 것이었고, 그럼 뭘 어쩌면 좋겠느냐고 묻기에, 한 일주일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했더니, 그냥 그러라는 것이었다. 학교 일주일 안 가는 것이 뭐 대수냐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래서 공식 허가를 받고, 새벽미사 후 조용히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고 물병 하나를 챙겨가지고 동경근처의 높은 산을 일주일 동안 아무 말 없이 홀로 오르고 또 올랐다. 대화란? 그냥 자연과의 대화였다. 나무와 새와 시냇물과 하늘의 맑은 공기와 흐느적거리며 흘러가는 구름들과 대화를 하며 그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숨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살아온 생을 다 되짚어 보았다. 틀이 없는 그 상태에서의 성찰이자 죄 묵상도 동시에 이뤄진 그런 시간이었다. 만 일주일이 지나갈 무렵, 꿈이 나의 무의식 상태를 찾아들었고, 그 꿈 안에서 나는 부활하신 나의 어머니를 만났다.
하얀 소복이지만 너무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꿈에 오셔서 나를 명동 성당의 성모동산으로 데려가셨고, 이미 그 마당엔 큰 아름다운 상이 하나 차려 있었다. ‘아들아 이 상이 너를 위해 준비된 상이란다. 그래 이상을 받고 싶지 않으냐?’ 상도 상이지만 예쁜 어머니를 생시처럼 만나니 얼마나 기뻤던지, ‘어머니 제가 왜 이 상을 안 받겠습니까? 어머니 사랑합니다.’ 하는데 이미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 귓전을 건드리는 것 아닌가. 감사합니다. 성모님! 예수님! 저의 어머니를 당신나라에 받아 주셨군요. 이렇게 저를 초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부활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암울하고 괴로운 시간이 온다 해도 그 안에 반드시 그분의 부활의 신비의 모습이 있음을 믿어야한다. 그러면 그 분 안에서 생경한 부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신이자 인간이신 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홀연히 제자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에 나타나십니다. 이 모습에 모두 놀라 유령을 보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받지 않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부활 사건에 관한 많은 주장들이 나타납니다. 즉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너무 그리워하다보니 헛것을 본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본래 인간이 아닌 신이셨다. 인간처럼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다. 신은 죽을 수 없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은 척한 것뿐이다’라는 등 많은 이설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이설들이 근거 없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24,39). 예수님은 신이자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의 메시아이십니다. 끝으로 메시아로서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24,47-48).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양승국신부-
<우리 기쁨의 원천, 부활>
병자성사를 집전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가끔씩 튀어나오는 말입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느님, 너무 하십니다. 이 젊디젊은 사람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언젠가 한창 인생이 꽃 피어나야할 자매, 아직 시집도 안간 어린 자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가 났지만, 정말 간절히 기도 바치며 병원으로 갔습니다.
“주님, 지금 병환 중에 있는 이 자매가 당신의 은총을 간절히 애원하며 주님의 종을 불렀나이다. 당신은 고통 중에 있는 일들의 청원을 기꺼이 들어주셨으니, 저의 성사집행을 친지 주제하시어 이 교우에게 필요한 은총을 하락하옵소서. 아멘.”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았던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 병자성사에 임하는 자매, 그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성체를 모신 후 그분 얼굴에 얼핏 스치는 희미한 미소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부활이란 것이 이런 것이겠지. 예수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순간이 부활하는 순간이겠구나.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인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바로 그 순간, 죽음조차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겠구나. 그 진리를 깨닫는 순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는 것이로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몸소 보여주시는데, 그 절정은 당신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도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방법으로 “봐라, 이렇게 너희들과 똑같이 먹기까지 하지 않느냐? 그래도 안 믿겠느냐?”며 음식까지 드시는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그간 지니고 있었던 의혹과 의심, 두려움을 떨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시공의 조건에 구애를 받지 않으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는 언약을 완수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어느 순간에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임재(臨在)’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앉거나 서거나, 집밖으로 나서거나 자리에 들거나 우리와 함께 온전히 현존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발현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뵌 제자들의 반응은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그들은 너무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고동락했던 스승님, 이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전에 두고 유령으로 착각하는 제자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직도 지난 성금요일의 끔찍한 환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부활을 내면화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습니다. 당연히 부활하신
주님을 인지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나무라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이렇게 까지 말씀하시는데도 긴가민가 하는 제자들을 향해 마지막 수단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당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 이르게 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단단히 닫힌 우리들의 눈과 귀, 마음을 열기 위해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간절한 염원에 따라 우리 영혼의 눈이 활짝 열리길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건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그분의 향기에 취해 살아가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은 두려움의 대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역시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우리 기쁨의 원천입니다.
우리 행복의 원천입니다.
복음 선포
-김훈일 신부-
오늘 우리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땅에 내려 오셔서 사랑과 진리와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사신 예수님을 만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합리적 사고로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의 신앙 고백이다, 예수님 정신의 부활이다, 민중의 부활이다 등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는가, 아니면 단지 신앙 고백인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따져도 해결이 나지 않는 문제입니다. 다만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하셨고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활하지 않았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이 자신의 삶에서 목격되고 현실이 되기 전까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 사실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뛰어나가 전한 것도 바로 이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문호영 신부-
◆부활 팔일 축제 4일째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부활을 향한, 또 부활의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인 회개를 또다시 촉구받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유다인들의 무지가 구세주를 죽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지내면서 그분을 보고 만지고, 수없는 기적을 체험하고, 또 “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수차례 들었음에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즉시 그 부활을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유다인들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즉시 믿지 못한 사도들이나 공통점은 바로 마음의 완고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완고함 때문에 자신의 선입견과 지식에 얽매여 새로운 지식, 새로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회개는 바로 이런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자기의 선입견, 지식, 자기가 믿고 있었던 생각과 관념을 옆으로 제쳐놓고 대신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말씀, 새롭게 다가오는 진리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고, 남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도 없다.’ 이 말은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받아야 할 것이 있고, 또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마음이 완고함과 반대되는 열린 마음입니다. 삼위의 하느님은 서로를 전적으로 주시고, 또 서로를 전적으로 받으십니다. 인간들끼리도 이런 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무지·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활이 동굴의 어둠을 뚫는 것,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의 무지와 완고함을 뚫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이고 부활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회개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하여라, 마리아. 무엇을 보았는지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사도 3,11-26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복 음 : 루카 24,35-48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안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더군다나 그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확신이 클수록 부활에 대한 확신은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빈 무덤을 통해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또 제자들에게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셨고, 스승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이 살아 계심을 직접 보여주시고 그 사건의 의미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부활이라는 믿을 수 없는 초유의 사건을 접하면서 이제 사람들은 서서히 예수 그리스도 부활을 믿기 시작합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렇고 베드로가 그렇고 요한이 그렇고 엠마오의 두 제자가 그렇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감격해서 모여듭니다. 그리고 정말 부활하신 것 같다고 자신들의 체험을 나누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증언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렇게 의심하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제자 공동체에 모여서 그 때의 생생했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더더군다나 죽었던 사람이 여기저기 나타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하고 설왕설래할 뿐 확신에 차지 못하지요.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가24,36)
놀란 제자들은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시지요.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살아난 그 당사자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손과 발의 상처는 분명한 죽음의 표지이지만 동시에 부활의 표지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겁에 질려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음식을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24,41)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시며 그들의 불신을 확신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당신의 부활이 어떤 상상에 의한 부활이 아니라 실제 부활임을 드러내주시지요.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교육시키십니다. 구약성경 모세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며 당신의 생애와 활동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를 하고 믿음의 삶을 살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눈과 마음이 열려 영원한 세상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사명을 내려주시지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8)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확신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방으로 나가서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한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증언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온 몸으로 전하는 제자들의 활동과 그 활동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드러낸 기록서입니다. 열심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했던 기록이고, 그들이 죽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믿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전했던 역사가 바로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이지요. 믿을 수 없고 또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예수의 부활을 확신한 제자들이 지금의 그리스도교 역사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 천주교 신자는 11억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믿지 못하고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은 한 사건의 시작이 이천 년 역사를 이끌어 왔음을 알 수 있지요. 그 세계사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천 년 인류의 역사는 부활을 믿는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깨우쳐 줍니다. 바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8)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19-20)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이끌어내는 미사, 즉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를 통해서 예수님을 모시고 체험한 우리에게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하고 파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명을 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첫 번째 사명이 바로 복음 선포임은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의 역사가 이천 년 그리스도교의 역사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나흘이 지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강론 때마다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이웃에게 전하고 계시는지요? 많은 사람들이 입을 봉한 채 닫힌 무덤처럼 지내고 있지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이, 또 다른 여러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인 양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면 과연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퍼져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것을 전하는 그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도행전은 아주 명확하게 이를 전하고 있지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여실히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은총을 입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은총은 서서히 사그러들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놀라고 감동한 나머지 인생 자체가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유다교 신자였던 그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를 변절자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박해자로 그를 냉대하자 33년경부터 44년경까지 큰 업적 없이 지내게 됩니다. 물론 성경학자들도 그 10여 년 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뚜렷이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오로 사도는 고향 다르소에 은둔하며 지내게 됩니다. 불타오르던 바오로의 신앙은 성숙하기보다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바오로 사도를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바르나바가 불러들여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삶으로 바뀌어가고 예수님을 전하는 그의 행보에 성령께서 함께 하고 계셨음을 우리는 사도행전과 여러 서간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15,10)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계속 성장시켜 가려면 한 자리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성숙될 수 있고 그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드러내시고 우리의 사명이 바로 당신의 부활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신앙이 성숙된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 이천 년 역사의 교훈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이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하며 더욱 깊은 신앙을 키워갔듯이 복음을 전하며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김태균 신부-
오늘 루가 복음을 보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증인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그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체험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셨을 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차례에 걸쳐 말씀하셨건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희망을 두었지만, 예수님의 철저한 실패와 죽음 이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결과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시어 살아 계신 당신의 육체와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어떤 결과가 빨리 일어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쉽게 실망하고 믿음을 놓아버리지는 않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봅니다.
이렇게 믿음이 가볍고 나약한 제자들에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하시며 인사하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을 없애주시려고 무척 애쓰신 듯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도시, 평화의 도시라는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느님을 죽인 도시, 하느님의 평화를 깨트려버린 도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예루살렘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 구약의 예언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된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 해 주시며, 당신의 이름으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 말씀을 따라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하신 당신자신의 협조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한 증인들은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하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르고자하는 우리 모두는 세상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 몸소 희생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복음을, 2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했듯이, 이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네 삶 속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살아간다면 바로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자,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증인들이신 여러분께 저도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를 가득 담아 인사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말씀으로 사는 삶
-강영구신부-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하시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말씀하셨다.
그대에게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공생활을 준비하시던 때에, 악마가 이렇게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예수님의 응답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마태4,3-4)
빵으로만 사는 사람에게 부활(復活)은 없습니다. 빵은 부활의 바탕이 아니라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요한6,27). 하느님의 말씀이 부활(復活-Pascha-過越)의 바탕입니다. 빵으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죽겠지만(요한6,49),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요한6,68) 죽더라도 부활(復活)합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서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허깨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려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십니다. 하느님께 귀의하여 하늘의 뜻(天命)을 따라 사는 사람이 허깨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고 빵으로만 사는 사람은 손과 발과 뼈가 있어도 사실은 허깨비입니다. 빵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그의 삶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활 팔일 축제기간입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살고 있습니까?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가시려고 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 삶의 양식이 된다면 당신은 허깨비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一明)
부활예수와 지상예수의 동일성 -박상대 신부- 오늘 전례에서는 루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부활사화(24장)의 내용 중 세 번째 단락이 봉독된다. 24장 마지막에 기록된 예수승천 부분(50-53절)을 뺀다면, 부활에 관한 기록은 이 단락으로 끝난다. 따라서 루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부활에 관한 기록은 '빈 무덤확인'(1-12), '엠마오 제자들의 부활체험'(13-35), 그리고 오늘 복음이 구체적으로 전하는 '제자들 앞에서의 부활예수 발현'(36-49)이 전부다.
오늘 복음이 루가가 전하는 마지막 부활기록이라면, 이 복음을 통해서 루가가 심중(心中)에 두고 있는 의도(意圖)가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의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확고한 믿음이다. 루가는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부활 당일(當日)에, 즉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채 넘어가기 전에, 예수부활사건과 부활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확고한 믿음을 목적으로 부활사화를 기록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부활에 대한 믿음은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더 이상 죽은 이들 가운데 있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부활예수에 대한 믿음은 죽음직전 지상에서의 예수와 죽음직후 부활한 예수의 동일성(同一性)에 대한 믿음이다.
하루만에 이 엄청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무리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생각할 거리가 이미 주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① 새벽녘에 여인들이(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마리아) 들이닥쳐 열 한 제자들과 그 동료들에게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고, 시체가 없어졌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여인들은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갈릴래아에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 보라.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 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6-7절) 라는 천사의 메시지도 전해 주었다. 물론 사도들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 ② 베드로는 달랐다. 단숨에 무덤으로 뛰어간 베드로는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돌아와서 다른 동료들에게 "주님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나에게(시몬) 나타나셨다"(34절) 라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 ③ 엠마오의 제자들이 귀경(歸京)하여 자신들의 부활체험을 들려준다.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제자들은 적어도 이런 세 가지 일로 인해 머리가 복잡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그리고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제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36절) 예수께서 우선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신다. 그 동안 잘 있었느냐는 안부(安否)이기도 하겠지만, 이 평화는 복잡한 머릿속의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말씀이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의심을(38절) 버리고 믿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아울러 단편적인 성서의 지식들을 가지고 복잡해 하지 말고 성서의 모든 기록들을 예수님 자신을 향하여 해석함으로써 실마리를 풀라는 것이다.
루가복음사가는 자신의 특유한 문체와 문체의 세심함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록에서도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문체로 표현하였듯이 여기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심한 문체로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아직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 모든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신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거의 반나절을 함께 걸어가시기도 하셨고, 오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의 상처를 만져볼 수 있도록 내어 보여주신다. 뼈와 살이 있으니 유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까지 잡수셨다.
오늘 복음에 대한 성찰(省察)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신학적 지식을 얻는다. 그것은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① 예수님의 부활은 영(靈)적으로만 부활이 아니라 영과 육신의 부활이다. ②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시다. 즉, 지상예수와 부활예수는 동일한 분이시다. ③ 성서의 모든 기록(이미 기록된 구약성서, 앞으로 기록될 신약성서)을 해석하는 기준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④ 예루살렘에서의 구체적인 십자가사건은 세상을 향한 보편적 구원사건이 될 것이다. ⑤ 여기에 증인(證人)인 사도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물론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할 것이다)...........◆
베드로의 설교는 힘이 있다.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생명의 영도자를 죽인 백성들에게 무지를 깨닫고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한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시어 백성들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시고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전한다(제1독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신다. 단순히 환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육신까지 부활하시어 우리 삶 한가운데 오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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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만일 돌아가신 조상이나, 부모님이 갑자기 나타나 어깨를 툭 치며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시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도 비신자들은 무당을 불러 굿을 할 것이고, 우리 신자들은 구마 기도를 하거나 성수(聖水)를 뿌리며 난리를 칠 것입니다. 더구나 잔소리 많던 시부모님이 다시 살아나신다면 이건 연옥보다 더한 형벌이라고 질색을 하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구체적으로 살과 뼈를 가지신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식사까지 하십니다. 제자들은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았지만 곧 주님이심을 깨닫고, 꿈인지 생시인지 너무나 기뻐합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상식을 넘어서는 이 사건 앞에, 제자들은 어떻게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지요? 오늘날 우리는 유령들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영화, 소설, 인터넷 등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 온통 유령들의 세상입니다. 현대의 환경이 이렇다 보니 예수님도 민담이나 설화에 나오는 실체가 없는 가상의 인물 정도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진 환시가 아닙니다. 만일 유령처럼 주님을 체험했다면, 부활 사건은 무의미하고 두려움만 더해 주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부활 사건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주님의 현존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의 세계가 저 멀리 우리 삶과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에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이런 충만한 부활의 세계를 경험하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의 깊은 곳에 부활이 있고, 충만한 부활의 세계는 우리 신앙의 삶으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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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지식이 아닙니다. 부활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애정입니다. 사랑과 애정을 어떻게 이론으로 증명할 수 있을는지요?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스승님께서는 자꾸만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한계를 깨뜨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왜 놀라느냐? ……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안타까움이 담긴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의 의구심은 여전합니다. 마침내 스승님께서는 음식을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잡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과 인내’로 다가가시는 모습입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화려하게 나타나셨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초라했습니다. 그런데도 스승님께서는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습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해석해 주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인데도 부활 사건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니 후대의 신앙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분의 개입을 기다려야 합니다. 믿는 이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반드시 개입하십니다. 그리하여 ‘평범한 사건’을 통해서도 깨달음을 주십니다. ‘보통의 만남’을 통해서도 가르침을 남기십니다. 사건과 만남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날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부활은 전혀 예기치 못한 깨달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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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알게 되면 금방 성숙해집니다. 부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녀는 하늘이 보호합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부모의 정성과 사랑에 보답해 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통과 연결된 인생만이 성숙한 삶을 가능케 합니다. 복음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에서 너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이렇게 자신들 곁에 계시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승님을 떠나보냈던 이별이 그들을 왜소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어린이를 대하듯 하시는 스승님의 말씀에는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읽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따듯함입니다. 제자들은 감동합니다. 그리하여 ‘수난과 죽음의 아픔’을 극복합니다. 스승님의 열정이 그들의 왜소함을 몰아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지식이 아닙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차가운 이론으로는 설명에 한계를 느끼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제자들은 부활하신 스승을 보자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건 좀 심한 일입니다. 어쩌다 주님의 제자들이 이렇게 되었는지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스승이 떠나자 희망도 자신감도 함께 떠나 버렸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그들 앞에 스승이 나타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그들의 굳은 마음을 누그러뜨리시려는 배려였습니다.
생선을 잡수시는 예수님과 그분을 지켜보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놀람과 환희와 부끄러움이 교차되는 얼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생선 한 토막만을 달랑 드신 것이 아닙니다.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평소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부활하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셨던 겁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의도를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스승은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선포하십니다. 부활 사건의 깨달음은 지식으로 습득되는 이론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내려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자세가 중요한 것이지, 지식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교리 해석만으로 이 위대한 진리에 접근하려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너무 기뻐서
-김종성 신부-
적어도 루카복음 사가가 판단하기에는 제자들이 아직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기뻐서’?였다. 믿지 못하는 이유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돌려 말하면 감정과 느낌이 믿음생활에 장해물이 된다는 것이다. 성지에 있어 보면 본당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주임신부의 말에 상처 받고, 수도자의 행동에, 단체장의 이중인격에 실망하고, 교우들 간의 갈등에…. 그래서 신앙이 흔들리고, 미사 안 나가고, 단체 활동을 중단한다는 얘기들이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은 엄밀히 말해 믿음생활이 아니라 성당생활 아닌가?? 성당생활은 믿음생활에 필요조건은 될지 모르겠지만, 충분조건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감정의 선은 고무줄과 같아서 이성과 믿음의 영역을 능히 침범하곤 한다.
어느 편에 설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이럴 때 우리 신앙을 점검할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 이는 내 신앙이 하느님 아닌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왔다는 것을, 또한 사소한 느낌이 믿음생활 전체를 흔들어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봉사하다가 상처 받으면 사실 그때부터가 참 봉사를 할 때다. 바로 그런 이유로 사람들이 봉사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나 좋아서 한 일이라는 게 증명된 셈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산을 넘어야 믿음의 강이 보이는가 보다. 어디쯤 가고 계시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
-양승국신부-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나무 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설명하기 정말 난해한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런 제자들, 이런 우리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3단계 작업을 통한 특별과외를 실시하십니다.
첫 단계로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들을 안심시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배신에 따른 수치심, 어떻게 그분 얼굴을 뵙나, 하는 송구스러움으로 가득 찬 제자 공동체를 향해 던지신 첫마디가 “평화가 너희와 함께!”입니다. 저 같았으면 너희들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정말 실망스럽다, 내가 정말이지 헛고생했다며 엄청 야단쳤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단 한마디 질책도 하지 않으시고 먼저 평화를 빌어주십니다.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십니다.
두 번째 단계로 당신의 구멍 뚫린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더 강하게 당신의 부활을 증명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음은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음식을 청합니다. 제자들이 구운 물고기 한 마리를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맛있게 드십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부활을 확신한 사람, 예수님 부활을 명확하게 체험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체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참 사랑을 주변사람들에게 실천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크게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자칭 ‘예수님의 애제자’라고 불렀던 사도 요한이 그랬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랬습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이 부활일 것입니다.
어제 점심 식사 후 소화도 시킬 겸 해서 보좌신부와 볼링을 치러 갔습니다. 사실 얼마 전 볼링을 칠 때 무리를 해서인지 계속해서 손목이 좋지 않았지요. 그래서 제대로 볼링공을 던질 수 있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던지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볼링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요? 평소 평균 점수에서 30점 이상의 높은 점수가 나온 것입니다. 볼링장 주인 형제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신부님, 오늘은 자세가 아주 좋으세요. 몸에 힘도 많이 빠졌고요……. 이 정도 컨디션이면 국가대표가 와도 신부님께는 안 되겠는데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손목이 아프기에 컨디션이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점수도 잘 나오고, 자세도 좋다고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아마 손목이 아파서 힘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힘을 주고 싶어도 손목 때문에 힘을 줄 수 없었고 그래서 부드럽게 공을 던질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제까지는 있는 힘껏 볼링공을 던졌고 그 결과 힘만 들뿐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떠한 운동경기든 다 그렇지요. 몸에 힘이 잔뜩 들어 있으면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몸에 힘을 뺀 부드러운 자세를 가지라고 하지요. 이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습니다. 대신 내 몸의 힘을 쫙 빼고 하느님께 온전히 나의 모두를 내어 맡길 때 하느님의 그 뜨거운 사랑을 우리 삶 안에서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제자들 모습이 바로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말을 통해 예수님 부활 소식을 미리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를 못하지요. 세속적인 생각과 의심으로 인해 주님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씀과 함께 직접 등장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면서 의심으로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믿고 따를 것을 명하십니다. 베드로 사도 믿음에 대해 역시 제1독서를 통해 말씀하시지요.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주님을 세상에 알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솜처럼 부드러운 마음, 스펀지처럼 주님을 쏙쏙 들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질투는 일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도 올바르게 보지 않는다.(유태 격언)
허물이 있기에 선택된 증인
-이영훈 신부-
제자들 중 가장 흠 많은 사람이라면 단연 베드로입니다. 순정파이지만 단순, 무식, 과격 그리고 팔랑귀에, 겁 많은 베드로!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고, 사도들의 사도로 인정하셨으며, 허물 많은 그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 또한 주십니다. 완벽한 지성과 삶을 지녀도 수행하기 어려운 ‘말씀의 증인’ 역할을 ‘허점투성이’에게 맡기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말씀의 증인’이란 단순히 예수님에 관한 것만을 증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살면서 드러났던 자신의 허물도 함께 증언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예수님으로 인해 희망과 행복을 체험했던 자신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복음 선포는 뛰어난 능력과 훌륭한 인성을 지닌 자가 부족한 이에게 ‘훈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복음을 살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 많은 이가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 자신이 경험한 용서와 희망, 그리고 행복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빛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럼 말씀의 증인으로 충분합니다. 이때야말로 마음을 열어 주님께 향해야 할 때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전삼용신부-
세계 도처에 분원이 있는 어떤 한 수녀님께서 세우신 체나꼴로 (Cenacolo: 최후의 만찬을 했던 다락방, 성령강림이 있었던 방)라고 하는 마약 중독자들을 위한 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마약에 중독되어 살던 사람들이 이 공동체에서 어떻게 마약중독을 극복하였는지 증언들을 하였습니다. 이태리 사람인데 매우 어려보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했던 문신이 팔과 온 몸에 있었지만 어린이와 같은 미소를 지니고 있었고 항상 손에 묵주를 쥐고 있었습니다. 함께 같던 신자의 말에 의하면 그가 열두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른세 살이었습니다.
그가 육년 전 그 공동체에 들어올 때는 마약에 찌들어 오십은 되어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약을 극복하고 기도와 노동 속에서 다시 젊은 얼굴을 갖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정말 사람들의 마음 상태까지도 얼굴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의 말보다도 풍기는 외모에서 이미 마약중독을 극복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촛불이 타는 것을 보면 무엇이 있다는 증거입니까? 바로 산소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산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이 타고 있는 것을 보면 산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습에 기쁨과 젊음, 평화가 저절로 흘러나온다면 그 사람 안엔 반드시 좋은 것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 기쁨으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갑자기 나타나자 그들은 유령으로 생각하고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살과 뼈가 있는 인간이라고 하시며 믿지 못하겠거든 직접 만져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일면 기쁘지만 아직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비롭게 먹을 것이 없느냐고 물어보십니다. 그들이 물고기 한 마리를 가져다 드리자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그것을 먹어 보이십니다. 살아계신 뼈와 살이 있는 예수님임을 인내를 가지고 그들에게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설명해 주시며 당신이 죽었다 살아나야 하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그들은 그제야 두려움을 이기고 기쁨에 넘칩니다.
그리고는 당신께서 그들에게 발현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즉, 예수님은 당신 부활이 부활한 당신을 체험한 이들을 통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오~ 아름다워라,,,’라고 시작되는 태양의 찬가는 성 프란치스코가 눈이 멀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세상이 아름답다고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상 어떤 역경도 꺾을 수 없는 성령님의 열매가 그 안에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부활의 증거는 바로 우리 안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기쁨입니다. 우리 삶이 기쁘지 않다면 그 사람에겐 아직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인상만 찡그리는 사람을 보며 어떻게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습이 부활한 그리스도를 체험한 이들의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울증 환자에게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제자들은 기쁘고 무엇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동네방네 부활한 그리스도를 전하러 뛰쳐나갔습니다. 만약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그리스도를 만나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 가득해서 주님을 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뵙게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 있었기에 주님을 뵈었습니다. 토마 사도도 교회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뵙게 되었습니다. 결국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은, 그 분을 사랑하여 교회 안에서 성경 말씀을 더 알아가는 가운데서 가장 빠르게 만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도 빨리 그 분을 만나 우리의 평화와 기쁨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그 분을 증거하는 이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짧은 묵상
김연아 선수가 고 김수환 추기경님의 정신을 잇는 단체의 홍보대사가 되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어떤 골수 개신교 신자는, “윤아 킴, 너 지옥 가고 싶냐?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다.”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종교가 분열 되어 사람들이 그 분열된 종교에서 어떤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는지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사도들이 모인 가운데 그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잘 모르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밥과 빨래를 하던 여인들이 그 분의 부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대표로서 이보다 창피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영성적으로 따지면 교회의 기둥인 사도들은 그들보다 뒤져있을 수 있습니다. 즉, 교황님이나 주교님이 되어야만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만약 특별한 체험이 있는 개개인이 교회의 영성이 자신들보다 뒤진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떠나 부활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전하고 다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는 분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체험한 이들은 먼저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소식을 듣던 중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이들은 부활 체험을 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이 사실은 교회가 거룩한 모습이건 그렇지 않은 모습이건 주님께서 뽑아 세우셨으니 자신이 아무리 위대한 신앙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교회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교회의 분열은 자신들의 영성을 교회 밖에서 실현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잘못 되어간다고 생각하면 프란치스코나 다른 성인들처럼 교회 내에서 개혁을 해야 합니다. 또 다른 분열이 있지 않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모두 하나가 되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 잘 보여주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양승국신부-
<조바심과 설렘>
대희년을 마무리짓는 감사미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마지막으로 이런 권고의 말씀을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세 가지를 눈여겨보시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①그냥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②예수님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입니다.
③그저 적당히 세월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부활"이라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기쁨과 은총의 선물들을 선사하십니다. 제자들을 뛸 듯이 기뻤습니다.
복음사가들은 당시 제자들이 "예수 부활"로 인해 받았던 감동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도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볼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선물만 주고 기쁨만 주고 승천하신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 되풀이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너희가 본 것을 만방에 전하여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만방에 전해야할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주님은 죽은 예수님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메시지의 요점입니다.
우리의 사목 현장에서, 삶의 터전에서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요? 죽은 예수님, 미이라처럼 박제된 예수님은 아닌지요?
우리는 진정 살아나신 바로 그 부활 예수님을 전파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복음 선포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복음선포를 전해들은 이웃들은 놀라며 기뻐하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에게로 달려오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우리의 발걸음은 어떻습니까?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발걸음처럼 설렙니까? 사도 요한의 발걸음처럼 조바심이 납니까?
믿음이라는 헤드라이트를 켜고
-양옥자 수녀-
인근의 자연환경이 아름다워 나는 고향에서 휴가 보내기를 좋아한다. 아버지께서 느티나무 아래 지어놓으신 정자에서 바라보면 드넓은 초록 들판과 그 뒤로 맞닿은 뭉게뭉게 다정한 산들, 그사이로 하얀 두루미들이 날아다니는 광경은 한마디로 천국이 따로 없다. 어느 날 읍내 성당에서 저녁미사를 마치고 동생에게 들렀다가 집에 가려고 나서니 밤 10시였다. 칠흑 같은 밤에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산길을 지나는데 근처에 인가도 없었다. 룸미러를 보면 뒷좌석에 누가 앉아 있을 것 같고, 당장이라도 앞에 뭐가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두려움으로 차를 급하게 몰다가 하마터면 논두렁에 빠질 뻔했다. 다음날, 밤이나 낮이나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지난밤 내가 느낀 두려움은 무엇인지 의문이 생겼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없는 것처럼 착각한 데서 기인한 어리석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밤에 그곳을 지나갈 때 두려움이 생기려고 하면 상향등을 켜 어둠에 덮인 산과 들을 보았다. 분명히 그들은 아름답게 그 자리에 있고, 어둠이 잠시 가린 것뿐임을 확인하고 나니 두려움이 사라졌다. 두려움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사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절망이라는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한 것처럼. 잠시의 어둠에 가려 마음이 불안해지고 평화를 잃어버리거나 그 어둠이 전부인 양 착각할 때, 믿음의 전조등을 높이 켜보자. 아직 날이 새지 않아 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는 그 배려의 때, 희망의 때를 확신하며 갈 때 우리는 주님의 평화를 비는 인사 앞에 고개 끄덕이며 삶의 힘든 밤길을 기꺼이 지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새벽을 열며 -조명언신부-
아주 친밀한 관계는 0에서 40 또는 50Cm 거리로 앉아 있을 때 가장 편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거리를 가리켜서 ‘연인의 거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저 친한 정도의 친구는 어떻게 될까요? 이런 관계는 50에서 120Cm로 앉는 것이 편하다고 하네요.
또, 친하지는 않지만 안면이 있는 사이는 2미터에서 4미터의 거리로 앉아야 가장 편하다고 하지요.
그리고 공적인 거리는 4미터 이상 떨어져야 편하다고 합니다. 이 거리는 딴전을 피울 수 있는 거리이지요. 강의실에서 교수와 학생 사이의 거리일 수도 있고, 연설이나 강의에서 강사와 청중 사이의 거리가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과 나의 거리는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를 생각하여 봅니다. 공적인 거리? 아니면 친하지는 않지만 안면이 있는 거리? 또 그저 친한 정도의 거리? 중요한 것은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거리는 0에서 50Cm 정도의 거리를 가리키는 아주 친밀한 연인의 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때 주님과 나의 거리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주님께서 제 곁을 떠나신 것 같고 그래서 그 거리가 4미터 이상 떨어진 공적인 거리처럼 느껴집니다. 이 느낌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대하는 제자들도 간직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도 유령인 줄로 알았으며, 엠마오까지 함께 걸어가면서도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곁에 계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노력을 하실까요? 2천 년 전에도 그러한 노력을 보여주셨습니다. 굳이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줄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 직접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직접 음식을 잡수심으로 인해 성경 말씀대로 직접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해주십니다.
문제는 이렇게 가까이 오시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지려는 우리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간격을 가까이 할 수가 있을까요?
그 예를 공 던지기 놀이에서 찾아봅니다. 한 사람이 공을 던졌는데 다른 사람이 무시를 하고 공을 받지 않으면 어떨까요? 놀이가 되지 않겠지요. 상대방이 공을 던졌을 때 온몸으로 가서 받고, 또 상대방에서 힘껏 던지면서 공 던지기 놀이는 재미있는 놀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이를 통해 더욱 더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랑이라는 공을 던져주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온몸을 던져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사랑을 힘껏 던져야 하겠지요. 그래야 주님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공을 던져주셨는데도 본체만체 한다면 어떨까요? 놀이가 유지될 수 없으며, 가까운 관계로의 진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곁에 다가오시는 주님. 이제는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과 우리의 거리가 연인의 거리가 될 수 있도록 사랑을 실천합시다.
식탁의 빈 의자
-조성풍 신부-
부활하신 주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매우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못 자국이 선명한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그리고 나를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라고 하십니다. 또한 구운 물고기를 직접 잡수시는 것을 통해 당신께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일깨워주십니다. 이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일상의 삶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특히 식탁을 중심으로 함께 먹고 마시는 삶 안에서 당신의 존재를 일깨워주고 싶어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 중에 가끔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식탁의 빈 의자 이야기’입니다. 어느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의 일입니다. 그 가정의 식탁에는 항상 식구 수보다도 한 개 더 빈 의자를 마련해두었습니다. 항상 비워 있는 이 자리는 바로 이 가정에 함께하는 ‘예수님의 자리’였습니다. 가족이 모두 함께 모여 행복을 나누는 그 순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려는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자리를 우리 가정에, 우리의 마음에 마련해드리면 좋겠습니다.
평화
- 이동훈 신부-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님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신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의혹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혹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골방 속에 꼭꼭 숨어서 지냈다. 마음의 평화가 사라졌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곳에서는 마음의 평화가 있을 수 없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삶은 현세에 집착하게 한다. 현실의 물질에서 위안을 얻으려 하지만 마음의 평화는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자신이 죽지 않으려고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빼앗는다. 빼앗은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높은 담을 쳐놓고 경보기며 보안 시스템을 해보지만 마음의 평화가 생기지 않는다. 평화(平和)란 쌀(禾)을 나누어 먹되(口) 공평(平)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적 장애인(정신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배우는 것이 참 많다. 이들에게는 담이 없다. 누구를 보더라도 똑같이 대한다.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돈이 많든 적든, 남녀노소,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고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넨다. 사람들은 불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지능이 떨어져 자기 것도 챙기지 못하고, 상처 받을 줄도 모르고 마냥 마음을 열어주는 그들이 왠지 불안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 장애인들의 마음이 더 평화롭다.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고 그저 주기 때문이다. 누구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으며 모두를 평등하게 대해 주는 데 평화가 있음을 함께 사는 가족이 삶으로 가르쳐 준다.
너무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도다! -오상선신부-
여러분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던 적이 있습니까? 정말로 보고 싶은 사람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보게 되었을 때, 생각지도 않은 행운이 닥쳤을 때, 감동과 감격의 눈물이 핑 돌게 될 정도로 그렇게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던 적이 있습니까?
제자들은 바로 주님을 뵙고 그러하였습니다. 죽었던 주님을 뵙다니요. 나의 온전한 희망이었던 그분을 이제는 영영 못뵈오리라고 생각하고 체념하였던 그분을 뵙게 된 심정은 짐작할 만합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게 되면 하루가 지겹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하루가 싱그럽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 사람 안에서도 어떤 날은 살아있음이 이렇게 해맑고 싱그러울 수가 없어서 내면적인 기쁨에 어쩔 줄을 몰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삶의 무게 때문에 짓눌려 살아갈 의욕조차 느끼지 못할 때는 하루의 눈뜸이 지옥같이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제자들은 지옥체험과 부활체험을 동시에 하였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 여정을 걷는 동안 끊임없이 이러한 지옥체험과 부활체험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상이지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지옥같은 날만이 있지 않고 그 어떤 사람에게도 부활체험만 매일같이 하게 되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부활체험은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그 기쁨을 맛뵈기로 체험할 뿐이지요.
이 지상에서 느끼는 부활체험, 생명체험이 우리를 기쁨에 겨워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만든다면 저 세상에서 영원히 누리게 될 그 행복체험은 어느 정도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가끔씩 다가오는 지옥체험조차도 그 영원한 부활체험을 생각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까요.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 참으로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고 그러면서도 해야할 일은 많이 밀려 있고... 아,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도 했습니다. 이것이 지옥체험이겠지요.
그러나 내일은 맑게 밝게 눈을 뜰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이 기쁨에 겨워 어찌할 수 없었듯이, 나도 주님을 뵙고야 말겠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을 뵙는 길만이 내가 부활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은 창가의 따스한 햇살처럼 나에게 오십니다. 연두빛 나뭇잎들의 싱그러움으로 나에게 오십니다. 살랑대는 수양버들 나무를 통해서도 오십니다. 오늘 해야만 하는 강의 속에서도 그분은 나에게 오실 겁니다. 또 준비해야 하는 회의 자료 마련 시에도 나에게 오실 겁니다. 형제, 자매들과의 만남 속에서도 오실 겁니다. 식사 시간에는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도 오실 겁니다.
오늘 특별히 새록새록 그분을 여기저기서 만나 뵈오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내어줄 수 없는 그 기쁨에 나도 어쩔 줄 몰라하며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보렵니다.
아, 주님!
영원한 Here and Now
-김찬선신부-
어제와 오늘의 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던 제자들이 주님이 깨우쳐주심으로 알아보게 됨을 계속해서 얘기합니다. 이 얘기들을 통해서 우리가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함께 걸으시고 빵을 나누시고 같이 얘기를 나누시는데도 우리는 거기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 대해 주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고 한탄하시듯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볼 때 우리로 하여금 부활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굼뜨고 닫힌 마음이고 어떤 편견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은 거룩한 곳, 성전에만 계시고 주님은 긴 머리를 하고 계시고 주님은 무엇을 잡수지도 않고 주님은 화장실에도 안 가시는 분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더 이상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습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든지 계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영원한 “지금, 여기(Here and Now)"이십니다. 우리가 빵을 나눌 때 거기에 계시고, 우리가 술집에서 술을 마실 때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카바레에서 춤을 출 때 거기에도 계시고, 우리가 바닷가 횟집에서 회를 안주로 술을 마실 때에도 오늘 제자들과 생선 한 토막 같이 잡수듯 거기 계십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님이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셨습니다. 평소 금슬이 좋았던 분이기에 그 슬픔이 얼마나 클지 걱정하는 마음으로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나 자매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살아있을 때보다 더 늘 자기와 함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있을 때는 남편이 회사 가거나, 특히 출장을 가면 혼자 있을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늘 자기와 함께 함께 있는 것을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더 이상 살아계실 때의 모습도 아니십니다. 그래서 생전의 모습을 생각하는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이웃집 아저씨의 모습으로, 땀 흘려 일하는 농부의 모습으로, 이 봄 피어나는 꽃들의 모습으로 심지어 바위의 모습, 구더기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그래서 구더기에서 구더기이신 예수님을 보았고 바위에서 바위이신 주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사 안에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려면 우리도 열린 마음과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다른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듯 우리의 마음과 눈도 열어주시길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양승국신부-
<땡잡은 사람들>
과거 의료수준이 많이 낙후되어있던 시절, 의료사고가 꽤 많았습니다. 오진도 많았습니다.
담당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던 한 형제가 생각납니다.
무엇보다도 두려웠습니다. 아직 때가 아닌데, 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 그렇게 불안했습니다.
현실을 도저히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한없이 슬펐고 또 아쉬웠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정대로라면 슬슬 증상이 나타나야 되는 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생활하는데 별 지장도 없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하던 끝에 당시 제일 큰 병원으로 가서 재검사를 받았습니다.
오진임이 드러났습니다. 지속적인 과로와 소화불량으로 인한 탈진상태였으며, 몇 달간 잘 쉬었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노라고, 앞으로 건강관리 잘 하라는 말을 듣고 병원 문을 나섰습니다.
그 형제, 당시 엄청 화가 났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몇 달 뒤에 죽겠다고 선고를 내렸는데, 그래서 죽음의 강을 건너가기 시작했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살겠다는 말을 들으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스승께서 그리도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시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시는데, 이제 영영 작별이로구나, 곧 우리도 같은 처지가 되겠구나, 이제 우리 인생도 여기서 종 쳤구나 했었는데...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냥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확실하게 살아나셨습니다. 적당히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확증시켜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발과 발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청하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 앞에 제자들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행복했겠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얼마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더 들고, 병들고, 그렇게 끝이려니 생각했었는데, 또 다른 생이 있다니, 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우리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이번 세상이 지나가면 모든 것이 끝나려니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늘 불안하게 살아갔었는데, 예수님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의 바다 저 건너편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죽음 끝에 더 행복한 삶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덕분에 ‘땡’잡은 사람들입니다. 정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운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독서> : 우리를 하느님께 인도하는 별인 기적 - 경규봉 신부-
사도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치유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였지만 그들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했던 고통 받는 종(이사 42,1-9; 49,1-13; 53,1-12)처럼 세상으로부터 배척과 모욕을 당하시며 십자가위에서 죽기까지 수난 당하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하셨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유의 주님으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필립 2,5-11).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죽이는 잘못을 저지른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까지도 구원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라.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실 뿐만 아니라 위로해주실 것이며 복을 내리실 것이다. 땅에서 모든 죄와 불의를 없애시고(1고린 15,24-28),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본래의 목적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상태에 이르며(에페 1,10)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된 상태(묵시 21,1)가 올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이미 시작되었으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될 것이다.
앉은뱅이가 치유된 것은 사도들 자신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거나 경건해서 그를 치유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죽인 그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를 치유하셨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그를 치유한 것이다.
40년이 넘도록 고통당하던 앉은뱅이가 치유된 것은 대단한 기적이다. 그러나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적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다. 이 치유의 기적은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을 행하신 분을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앉은뱅이가 치유된 기적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사도들 앞에 모이게 했고,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도들은 기적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오직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돌렸다. 자신들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이며 도구로서 유다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받도록 하는데 관심을 집중하였다. 기적의 목적은 이처럼 우리의 관심을 하느님께 돌려 회개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도록 하는 데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며, 기적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일상의 지루함이나 따분함, 무의미함이나 무미건조함 등을 기적을 통해서 벗어나고자 한다. 기적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변하여 행복과 만족을 누리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기적을 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구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 하고 말씀하셨다.
때문에 사도 바울로는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1고린 1,23-24) 하고 말했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종교이다. 기적을 통하여 현실의 고통이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종교가 아니라, 현실의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가면서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종교이다.
물론 우리 삶에 기적이 필요하고, 기적은 일어난다. 그러나 기적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별빛이요 종소리일 따름이다. 기적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알려주는 표징일 따름이다. 따라서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지 못하고 기적 자체에 얽매인다면 기적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되어 우리를 병들게 하고 만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처럼 기적을 바라고 살지 말고,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고, 회개하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기적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려 하지 말고, 하느님을 드러내고 전파하는 신앙인이 되자..........◆
열린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던 제자들의 모습 - 신기현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먼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느 날 선생님 댁에 강도가 들어와 칼을 목에 들이대며 돈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이 때 선생님께서는 당당하게 일어나 서랍에서 그 때 당시 돈 390환을 내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강도는 돈을 받아 들고는 바쁘게 자취를 감추려고 하였는데, 선생님이 그를 불러 세워 놓고 "여보시오, 돈을 가져가면서 고맙다고나 하고 가져가야 하지 않소?"라고 말하였습니다. 강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그래! 고맙다."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새벽녘에 경찰이 그 강도를 붙들어 선생님 댁으로 찾아왔습니다. 경찰이 "이 사람이 선생님 돈을 빼앗았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선생님은 오히려 깜짝 놀라는 태도를 보이면서 "아니요, 나는 이 사람에게 돈을 뺏긴 일이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경찰도, 강도도 어리둥절해 있었습니다. 경찰이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아니, 이 사람이 자기가 이 댁에서 돈을 390환이나 빼앗았다고 하는데요?"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강도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아이구 이 사람아! 아니 내가 390환을 주니까 당신이 고맙다고 하지 않았소? 빼앗았다면 고맙다고 했을 리가 있겠소?"
그래서 경찰은 하는 수 없이 그를 묶었던 수갑을 풀어 주고 가버렸습니다. 강도는 너무도 고맙고, 감격하여 그 후 선생님 댁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을 감화시키는 데에는 진정한 사랑이 담긴 용서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당신의 부활을 확인시키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는 발현사화입니다. 복음 전반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본 제자들의 표정과 반응을 살펴보면 "그들은 너무나 놀랍고, 무서워서 유령을 보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왜 그들은 기뻐하지 않고, 무서워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 죽음에 처한 자기들의 스승을 배반하였기에 주님을 만났을 때 죄책감에 너무나도 시달렸던 상황에서 드러난 현상입니다. 너무나도 미안하고 혹시나 벌을 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들의 앞을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벌도, 질책도 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그들에게 평화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유령의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당신께서 부활하시어 살아 계심을 몸소 손과 발을 보여주심으로 증명해 보이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살아 생전에나, 부활하신 뒤에나 똑같이 그들에게 참된 사랑과 평화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어떤 죄도 묻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을 전제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였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들은 그들이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 말씀을 충실히 수행해 나아갑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 솔로몬 행각에서 자신 있게 설교합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던 자가 완전히 변화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변화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주님의 끝없는 용서에서 비롯되었고, 이것을 열린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던 제자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세례성사와 고백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전의 그릇된 삶에 대해 죽었고, 다시 새롭게 변모된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존재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은총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을 깨끗이 용서해 주셨습니다. 진정 용서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라면 우리 또한 또 다른 용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이유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희망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라
-이인주신부-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화와 자유를 주셨어도 방종하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착각하여 오해를 마치 정석인 냥 사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기에 다음과 같은 부활의 참모습을 나누려 한다.
부활의 진수를 알려면 그분과의 만남의 뿌리가 든든하여야 한다. 제자들도 한때 그 뿌리가 흔들렸기에 우왕좌왕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유령으로 보기도 했다. 사실 그럴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게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자유롭게 사람들을 만나고 간 사람이 없었기에 말이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 잠시 산 상태로 누워 있다 가는 경우는 있어도 평소 때와 같이 활동을 했던 그런 모델은 없었기에 사람들이 그 부활이라는 새로운 양식에 쉽게 적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아주 조용하게 가져 오셨고, 놀라 자지러지는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을 더 부드럽게 만드시면서 그들에게 마음의 위로와 평화를 선물로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메시지는 바로 평화가 되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혼란과 공포를 만들고 싶지 않으셨다. 가뜩이나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으로 상처받고 무서움과 죄의식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어려움을 안기기 싫으셨을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더 이상 예루살렘을 공포와 두려움의 도시로 만들기도 싫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아주 더 조용히 제자들에게 다가가셨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확신시키는 그런 방법으로 다가가셨다. 즉 조용한 가운데 말씀으로 다가가셨다.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당신을 사람들에게 전하셨듯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음성으로 다가가셨다. 같이 대화를 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음성을 제대로 들려주시고 듣는 순간에 그분임을 알아채는 제자들이었다. 여기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들을 수 있는 귀와 마음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관상과 묵상을 할 때 오관을 동원해서 하느님과 통교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고 계신다. 우리는 하루 이틀 훈련을 해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착각이다. 끊임없는 노력과 그분과의 대화하려는 강력한 의지 안에서 그분의 은총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를테면 예수님께서 수난 전에 산에 가시어 기도하시는 중에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셨으면 땀샘을 통해 피가 흘러나오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 차원의 기도를 할 때 그분의 음성이나 오관으로 맛 볼 수 있는 그런 차원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적어도 그런 훈련과 영적으로 깨어 있는 나의 청각기능과 마음의 기능이 제대로 있어야만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예를 들어본다.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다 마쳐갈 무렵 참으로 이상한 마음이 생겼다. 더 이상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질 않는 것이었다. 공부를 해야 할 수사가 공부가 싫다니 말이 되는가? 그러나 어쩌겠는가? 싫은 건 싫은 것이지. 그래 한 삼일 고민하며 기도 해 보다가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아 원장신부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적인 변화를 소상히 알리니, 우선 그런 마음까지 나눠주어 고맙다는 것이었고, 그럼 뭘 어쩌면 좋겠느냐고 묻기에, 한 일주일 조용히 지내고 싶다고 했더니, 그냥 그러라는 것이었다. 학교 일주일 안 가는 것이 뭐 대수냐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래서 공식 허가를 받고, 새벽미사 후 조용히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고 물병 하나를 챙겨가지고 동경근처의 높은 산을 일주일 동안 아무 말 없이 홀로 오르고 또 올랐다. 대화란? 그냥 자연과의 대화였다. 나무와 새와 시냇물과 하늘의 맑은 공기와 흐느적거리며 흘러가는 구름들과 대화를 하며 그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숨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 살아온 생을 다 되짚어 보았다. 틀이 없는 그 상태에서의 성찰이자 죄 묵상도 동시에 이뤄진 그런 시간이었다. 만 일주일이 지나갈 무렵, 꿈이 나의 무의식 상태를 찾아들었고, 그 꿈 안에서 나는 부활하신 나의 어머니를 만났다.
하얀 소복이지만 너무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꿈에 오셔서 나를 명동 성당의 성모동산으로 데려가셨고, 이미 그 마당엔 큰 아름다운 상이 하나 차려 있었다. ‘아들아 이 상이 너를 위해 준비된 상이란다. 그래 이상을 받고 싶지 않으냐?’ 상도 상이지만 예쁜 어머니를 생시처럼 만나니 얼마나 기뻤던지, ‘어머니 제가 왜 이 상을 안 받겠습니까? 어머니 사랑합니다.’ 하는데 이미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 귓전을 건드리는 것 아닌가. 감사합니다. 성모님! 예수님! 저의 어머니를 당신나라에 받아 주셨군요. 이렇게 저를 초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부활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암울하고 괴로운 시간이 온다 해도 그 안에 반드시 그분의 부활의 신비의 모습이 있음을 믿어야한다. 그러면 그 분 안에서 생경한 부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신이자 인간이신 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홀연히 제자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에 나타나십니다. 이 모습에 모두 놀라 유령을 보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받지 않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부활 사건에 관한 많은 주장들이 나타납니다. 즉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너무 그리워하다보니 헛것을 본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예수님은 본래 인간이 아닌 신이셨다. 인간처럼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다. 신은 죽을 수 없다. 따라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죽은 척한 것뿐이다’라는 등 많은 이설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이설들이 근거 없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24,39). 예수님은 신이자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의 메시아이십니다. 끝으로 메시아로서 우리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24,47-48).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양승국신부-
<우리 기쁨의 원천, 부활>
병자성사를 집전하다보면 저도 모르게 가끔씩 튀어나오는 말입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느님, 너무 하십니다. 이 젊디젊은 사람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으십니까?”
언젠가 한창 인생이 꽃 피어나야할 자매, 아직 시집도 안간 어린 자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가 났지만, 정말 간절히 기도 바치며 병원으로 갔습니다.
“주님, 지금 병환 중에 있는 이 자매가 당신의 은총을 간절히 애원하며 주님의 종을 불렀나이다. 당신은 고통 중에 있는 일들의 청원을 기꺼이 들어주셨으니, 저의 성사집행을 친지 주제하시어 이 교우에게 필요한 은총을 하락하옵소서. 아멘.”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았던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 병자성사에 임하는 자매, 그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성체를 모신 후 그분 얼굴에 얼핏 스치는 희미한 미소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부활이란 것이 이런 것이겠지. 예수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순간이 부활하는 순간이겠구나.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인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바로 그 순간, 죽음조차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겠구나. 그 진리를 깨닫는 순간,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는 것이로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몸소 보여주시는데, 그 절정은 당신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하도 의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방법으로 “봐라, 이렇게 너희들과 똑같이 먹기까지 하지 않느냐? 그래도 안 믿겠느냐?”며 음식까지 드시는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제자들은 그간 지니고 있었던 의혹과 의심, 두려움을 떨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시작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시공의 조건에 구애를 받지 않으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는 언약을 완수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부터 언제나, 어디서나, 어느 순간에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임재(臨在)’가 가능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앉거나 서거나, 집밖으로 나서거나 자리에 들거나 우리와 함께 온전히 현존하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가는 모든 곳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발현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뵌 제자들의 반응은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그들은 너무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동고동락했던 스승님, 이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전에 두고 유령으로 착각하는 제자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제자들은 아직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갖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직도 지난 성금요일의 끔찍한 환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혀 예수님의 부활을 내면화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습니다. 당연히 부활하신
주님을 인지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나무라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이렇게 까지 말씀하시는데도 긴가민가 하는 제자들을 향해 마지막 수단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셨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당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인식에 이르게 하기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단단히 닫힌 우리들의 눈과 귀, 마음을 열기 위해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간절한 염원에 따라 우리 영혼의 눈이 활짝 열리길 바랍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건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그분의 향기에 취해 살아가길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은 두려움의 대상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 역시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우리 기쁨의 원천입니다.
우리 행복의 원천입니다.
복음 선포
-김훈일 신부-
오늘 우리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땅에 내려 오셔서 사랑과 진리와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사신 예수님을 만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합리적 사고로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의 신앙 고백이다, 예수님 정신의 부활이다, 민중의 부활이다 등으로 이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는 꾸며낸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부활하셨는가, 아니면 단지 신앙 고백인가 하는 문제는 아무리 따져도 해결이 나지 않는 문제입니다. 다만 믿는 사람에게는 부활하셨고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활하지 않았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이 자신의 삶에서 목격되고 현실이 되기 전까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그 사실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 뛰어나가 전한 것도 바로 이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고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문호영 신부-
◆부활 팔일 축제 4일째를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부활을 향한, 또 부활의 열매를 맺기 위한 과정인 회개를 또다시 촉구받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유다인들의 무지가 구세주를 죽였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지내면서 그분을 보고 만지고, 수없는 기적을 체험하고, 또 “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수차례 들었음에도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즉시 그 부활을 믿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한 유다인들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즉시 믿지 못한 사도들이나 공통점은 바로 마음의 완고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완고함 때문에 자신의 선입견과 지식에 얽매여 새로운 지식, 새로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회개는 바로 이런 완고한 마음을 버리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자기의 선입견, 지식, 자기가 믿고 있었던 생각과 관념을 옆으로 제쳐놓고 대신 하느님의 생각, 하느님의 말씀, 새롭게 다가오는 진리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고, 남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부자도 없다.’ 이 말은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받아야 할 것이 있고, 또 누구에게나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마음이 완고함과 반대되는 열린 마음입니다. 삼위의 하느님은 서로를 전적으로 주시고, 또 서로를 전적으로 받으십니다. 인간들끼리도 이런 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무지·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활이 동굴의 어둠을 뚫는 것,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의 무지와 완고함을 뚫고 밖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부활의 삶이고 부활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회개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말하여라, 마리아. 무엇을 보았는지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사도 3,11-26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복 음 : 루카 24,35-48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안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더군다나 그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확신이 클수록 부활에 대한 확신은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예수님께서는 빈 무덤을 통해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또 제자들에게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셨고, 스승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실의에 빠져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이 살아 계심을 직접 보여주시고 그 사건의 의미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부활이라는 믿을 수 없는 초유의 사건을 접하면서 이제 사람들은 서서히 예수 그리스도 부활을 믿기 시작합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렇고 베드로가 그렇고 요한이 그렇고 엠마오의 두 제자가 그렇지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감격해서 모여듭니다. 그리고 정말 부활하신 것 같다고 자신들의 체험을 나누기 시작하지요.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증언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렇게 의심하는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시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다시 제자 공동체에 모여서 그 때의 생생했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더더군다나 죽었던 사람이 여기저기 나타난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하고 설왕설래할 뿐 확신에 차지 못하지요.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가24,36)
놀란 제자들은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보여주시며 말씀하시지요.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살아난 그 당사자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던 손과 발의 상처는 분명한 죽음의 표지이지만 동시에 부활의 표지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겁에 질려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음식을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24,41)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시며 그들의 불신을 확신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당신의 부활이 어떤 상상에 의한 부활이 아니라 실제 부활임을 드러내주시지요. 그리고 나서 제자들을 교육시키십니다. 구약성경 모세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며 당신의 생애와 활동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를 하고 믿음의 삶을 살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눈과 마음이 열려 영원한 세상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사명을 내려주시지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8)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확신했던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방으로 나가서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한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증언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온 몸으로 전하는 제자들의 활동과 그 활동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드러낸 기록서입니다. 열심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했던 기록이고, 그들이 죽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믿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전했던 역사가 바로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이지요. 믿을 수 없고 또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예수의 부활을 확신한 제자들이 지금의 그리스도교 역사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 천주교 신자는 11억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믿지 못하고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은 한 사건의 시작이 이천 년 역사를 이끌어 왔음을 알 수 있지요. 그 세계사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천 년 인류의 역사는 부활을 믿는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깨우쳐 줍니다. 바로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24,48)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19-20)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다는 것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그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이끌어내는 미사, 즉 말씀전례와 성찬전례를 통해서 예수님을 모시고 체험한 우리에게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하고 파견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명을 주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첫 번째 사명이 바로 복음 선포임은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의 역사가 이천 년 그리스도교의 역사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지 나흘이 지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강론 때마다 힘주어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을 이웃에게 전하고 계시는지요? 많은 사람들이 입을 봉한 채 닫힌 무덤처럼 지내고 있지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엠마오로 돌아가던 제자들이, 또 다른 여러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도 나하고 상관없는 일인 양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면 과연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퍼져나갈 수 있었겠습니까?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것을 전하는 그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도행전은 아주 명확하게 이를 전하고 있지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고 성령께서 함께 하고 계심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여실히 알아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은총을 입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 은총은 서서히 사그러들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나 놀라고 감동한 나머지 인생 자체가 바뀌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유다교 신자였던 그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며 부활을 증언하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유다인들은 그를 변절자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박해자로 그를 냉대하자 33년경부터 44년경까지 큰 업적 없이 지내게 됩니다. 물론 성경학자들도 그 10여 년 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지 뚜렷이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바오로 사도는 고향 다르소에 은둔하며 지내게 됩니다. 불타오르던 바오로의 신앙은 성숙하기보다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바오로 사도를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바르나바가 불러들여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삶으로 바뀌어가고 예수님을 전하는 그의 행보에 성령께서 함께 하고 계셨음을 우리는 사도행전과 여러 서간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1코린15,10)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과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계속 성장시켜 가려면 한 자리에 머무르면 안 됩니다. 계속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삶으로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성숙될 수 있고 그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게 되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드러내시고 우리의 사명이 바로 당신의 부활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신앙이 성숙된다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교 이천 년 역사의 교훈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의 첫 번째 사명이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하며 더욱 깊은 신앙을 키워갔듯이 복음을 전하며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김태균 신부-
오늘 루가 복음을 보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증인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고, 그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조금씩 알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체험을 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이 증인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셨을 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차례에 걸쳐 말씀하셨건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희망을 두었지만, 예수님의 철저한 실패와 죽음 이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렸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결과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시어 살아 계신 당신의 육체와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시면서 믿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가 바라는 어떤 결과가 빨리 일어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쉽게 실망하고 믿음을 놓아버리지는 않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봅니다.
이렇게 믿음이 가볍고 나약한 제자들에게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하시며 인사하십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을 없애주시려고 무척 애쓰신 듯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도시, 평화의 도시라는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십니다.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느님을 죽인 도시, 하느님의 평화를 깨트려버린 도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예루살렘을 알려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 구약의 예언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고 완성된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 해 주시며, 당신의 이름으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 말씀을 따라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하신 당신자신의 협조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한 증인들은 의심을 하지 말아야 하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르고자하는 우리 모두는 세상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증인들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 몸소 희생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의 복음을, 2천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렇게 했듯이, 이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네 삶 속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우리가 살아간다면 바로 우리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자,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증인들이신 여러분께 저도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를 가득 담아 인사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말씀으로 사는 삶
-강영구신부-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하시고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주시며 말씀하셨다.
그대에게
예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공생활을 준비하시던 때에, 악마가 이렇게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예수님의 응답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마태4,3-4)
빵으로만 사는 사람에게 부활(復活)은 없습니다. 빵은 부활의 바탕이 아니라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요한6,27). 하느님의 말씀이 부활(復活-Pascha-過越)의 바탕입니다. 빵으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죽겠지만(요한6,49),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요한6,68) 죽더라도 부활(復活)합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서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허깨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려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십니다. 하느님께 귀의하여 하늘의 뜻(天命)을 따라 사는 사람이 허깨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고 빵으로만 사는 사람은 손과 발과 뼈가 있어도 사실은 허깨비입니다. 빵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그의 삶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활 팔일 축제기간입니다. 당신은 무엇으로 살고 있습니까?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가시려고 합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 삶의 양식이 된다면 당신은 허깨비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一明)
부활예수와 지상예수의 동일성 -박상대 신부- 오늘 전례에서는 루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부활사화(24장)의 내용 중 세 번째 단락이 봉독된다. 24장 마지막에 기록된 예수승천 부분(50-53절)을 뺀다면, 부활에 관한 기록은 이 단락으로 끝난다. 따라서 루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부활에 관한 기록은 '빈 무덤확인'(1-12), '엠마오 제자들의 부활체험'(13-35), 그리고 오늘 복음이 구체적으로 전하는 '제자들 앞에서의 부활예수 발현'(36-49)이 전부다.
오늘 복음이 루가가 전하는 마지막 부활기록이라면, 이 복음을 통해서 루가가 심중(心中)에 두고 있는 의도(意圖)가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그 의도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확고한 믿음이다. 루가는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부활 당일(當日)에, 즉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채 넘어가기 전에, 예수부활사건과 부활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확고한 믿음을 목적으로 부활사화를 기록하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예수부활에 대한 믿음은 예수께서 죽으셨지만, 더 이상 죽은 이들 가운데 있지 않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다는 믿음을 의미한다. 부활예수에 대한 믿음은 죽음직전 지상에서의 예수와 죽음직후 부활한 예수의 동일성(同一性)에 대한 믿음이다.
하루만에 이 엄청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분명 무리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생각할 거리가 이미 주어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① 새벽녘에 여인들이(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마리아) 들이닥쳐 열 한 제자들과 그 동료들에게 예수님의 무덤은 비었고, 시체가 없어졌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여인들은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갈릴래아에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해 보라.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 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6-7절) 라는 천사의 메시지도 전해 주었다. 물론 사도들은 여인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 ② 베드로는 달랐다. 단숨에 무덤으로 뛰어간 베드로는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돌아와서 다른 동료들에게 "주님께서 확실히 다시 살아나셔서 나에게(시몬) 나타나셨다"(34절) 라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 ③ 엠마오의 제자들이 귀경(歸京)하여 자신들의 부활체험을 들려준다. 예루살렘에 모여있던 제자들은 적어도 이런 세 가지 일로 인해 머리가 복잡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그리고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제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 그들 가운데 서시며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36절) 예수께서 우선 제자들에게 평화를 기원하신다. 그 동안 잘 있었느냐는 안부(安否)이기도 하겠지만, 이 평화는 복잡한 머릿속의 안녕(安寧)을 기원하는 말씀이다.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여 의심을(38절) 버리고 믿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아울러 단편적인 성서의 지식들을 가지고 복잡해 하지 말고 성서의 모든 기록들을 예수님 자신을 향하여 해석함으로써 실마리를 풀라는 것이다.
루가복음사가는 자신의 특유한 문체와 문체의 세심함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예수님의 공생활 기록에서도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문체로 표현하였듯이 여기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심한 문체로 부각시키고 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아직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 모든 세심한 노력을 기울이신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거의 반나절을 함께 걸어가시기도 하셨고, 오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발의 상처를 만져볼 수 있도록 내어 보여주신다. 뼈와 살이 있으니 유령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까지 잡수셨다.
오늘 복음에 대한 성찰(省察)을 통하여 우리는 몇 가지 신학적 지식을 얻는다. 그것은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① 예수님의 부활은 영(靈)적으로만 부활이 아니라 영과 육신의 부활이다. ②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바로 그분이시다. 즉, 지상예수와 부활예수는 동일한 분이시다. ③ 성서의 모든 기록(이미 기록된 구약성서, 앞으로 기록될 신약성서)을 해석하는 기준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다. ④ 예루살렘에서의 구체적인 십자가사건은 세상을 향한 보편적 구원사건이 될 것이다. ⑤ 여기에 증인(證人)인 사도들의 협조가 필요하다.(물론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