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7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5-24 그때에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초대의 공평성
세상에 살면서 고민이나 걱정이 없고, 일도 없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나의 외할아버지께서 아주 시원시원하게 비유를 들어가면서 세상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 말씀들은 어려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는데 내가 외할아버지가 되어보니까 그 말씀 중에 많은 말씀이 공감이 가고, 지금은 혼자 무릎을 치고 감탄할 만한 말씀을 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나의 아버지가 속을 썩인다고 나의 외할아버지께 하소연을 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날 외할아버지는 당신의 막내딸인 나의 어머니를 타이르면서 어린 나를 무릎에 앉히시고 예날 얘기를 하나 해주셨습니다.
[옛날에 아주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한 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부지런히 일해서 부모의 걱정거리를 없애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의 속을 태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단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가 어떤 문제로 고민을 하거나 걱정을 하면 그 즉시 그 문제를 해결해 드렸지. 그래서 그 효자의 아버지는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있다고 사람들이 칭찬을 많이 하였단다.
“그 양반은 도대체 걱정거리가 없는 분이라 나는 언제 그런 팔자를 하루 만이라도 타고 났으면 좋겠네.” 하면서 사람들은 또한 부러워하였단다. 여하튼 그 효자는 아버지가 무슨 말이든 걱정거리를 말씀하시면 그 즉시 그 일을 해결해 주었던 것이지. 그런데 그 효자의 부친이 새로운 걱정거리를 만들어서 걱정을 하시더라는 거야. 즉 대문간을 들어서면 들보가 보이는데 흰개미가 침범해서 나무를 갉아 먹고 있는 것을 본 것이란다. 그러자 그 아버지는 “저 들보는 1년도 못가겠네. 1년도 못가겠네.”하고 걱정을 시작한 게야. 효자의 아버지는 매일 걱정거리가 되지도 않는 그 걱정을 태산과 같이 하더란다. 효자가 보니까 흰개미가 침범하기 시작하였는데 조금도 걱정거리가 아닌데 아버지가 걱정을 하시니 아버지께서 한 2-3일 출타해서 집에 계시지 않으면 어떻게 조치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단다.
그런데 아버지가 시제를(조상들을 위하여 산소에서나 사당에서 드리는 가을 제사)를 참석하려고 다녀오신다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아들이 잽싸게 목수를 고용해서 아주 튼튼하고 좀먹지 않은 나무로 대문간 들보를 완전히 교체해 놓았단다. 시제에 참석하시고 사흘 만에 집에 돌아오시던 아버지는 대문간 대들보를 올려다보니 아들이 싹 고쳐놓은 것을 본 것이지. 이제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어진 것이란다. 그러니까 아들을 시켜 “얘야, 내가 걱정거리가 없으니 살맛이 나지 않는다. 관을 짜 오거라 이제 죽을 때가 됐구나!”하시더란다.}
그러시면서 외할아버지는 “사람들은 적당한 걱정거리가 있어야 긴장하고 건강하고 잘 살 수 있단다.”하시고는 “얘야! 그런 걱정도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모두 참고 살아야 한단다.” 하시는 말씀으로 나의 어머니를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외손자에게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고민들을 견디며 걱정하지 말라고 그 얘기를 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히 인생에서 걱정거리와 재미가 같이 있어야 살맛이 나는 것인가 봅니다. 뉴스에 보니까 나무 기둥이나 서까래를 갉아먹는 흰개미 때문에 ‘흰개미 탐지견이’훈련을 받고 있어 흰개미 소탕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전혀 엄두도 내지 못할 때의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인이 잔치를 벌이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은 데 사람들이 외면하고 잔치를 아주 쓸쓸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일을 보러 가기도 하고, 재물을 확인하러 가기도 하고, 신혼의 재미도 보려고 한답니다. 오늘 양해를 구하는 사람들의 그 사연은 참으로 정당하고 논리가 정연한 사연들입니다. 나는 가끔 그들의 그 핑계가 어찌 그리 기가 막힌 지 생각해볼 때가 많이 있답니다.
첫째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 밭을 확인해 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재산을 불렸습니다. 아주 애써서 돈을 모았고, 그걸로 근사한 밭을 샀습니다. 내가 아주 심한 구박과 무시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집을 샀을 때 부부가 집문서를 받아 들고 크게 소리 내서 울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불리거나 확인하는 것이 잔치 음식을 먹는 것보다도 더 귀중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잔치가 하느님의 초대이고, 생명을 주시는 잔치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밭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충청도는 토질이 아주 좋고, 부드러우며, 모래 찰흙이 좋아서 밭작물에 아주 좋은 토질이었습니다. 그래서 ‘호릿소’가 충분히 일을 잘 할 수 있었으나 땅이 딱딱하고 돌이 많아서 ‘끅쟁이’를 쓸 때는 ‘호릿소’로 쟁기질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일을 해본 경험이 없는 소는 ‘끙개’로 일을 하는 기초 기술을 습득하게 한 다음에 겨릿소에 붙여줍니다. 겨릿소란 소 두 마리가 같이 쟁기를 메고 일하는 것을 말하는데 혼자하기에 힘들 때 겨릿소를 붙입니다.
이때 겨릿소 다섯 쌍이 하는 일은 엄청나게 큰 농사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겨릿소 한 쌍은 적어도 만평은 농사일을 한다면 약 5만평도 넘는 큰 농사터를 갖고 있는 것인데 겨릿소는 서로 팀을 이뤄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농부가 소 끈을 오른 손으로 잡고, 쟁기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 손으로 조종을 하기 때문에 농사일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길들여진 소를 ‘안소’라고 합니다. 농부의 바른 손에 주어지고, ‘마랏소’라고 하는 서툰 소를 왼쪽에 두어 서로 보조를 맞추고 있을 팀을 짜 주어야 합니다. 매를 맞거나 욕을 먹는 소는 안소인데 믿음직스럽고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소의 리드로 마랏소는 농사일을 배울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다섯 쌍의 소를 서로 팀을 맺어주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러 가야한답니다. 세상의 팀은 잘 챙기면서 하느님 나라의 팀을 조직하려는 것은 뒷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 번째 바로 신혼부부입니다. 그들은 달콤한 꿀과 같은 사랑에 빠져 다른 사람들이 초대하는 잔치에 갈 시간이 없답니다. 세상의 재미와 꿀처럼 달고 맛있는 신혼을 즐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음식도 그보다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 잔치 음식이 하느님 나라의 생명이고, 영원한 생명이며, 은총과 축복임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상의 재미에 빠져 있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답니다.
가끔 하느님 나라가 온갖 잡동사니와 싸구려 경매품으로 채워지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초대의 공평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잔치자리가 넘치도록 초대해야 주인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그 잔치 음식을 먹지 못할 것이고, 초대에 응한 사람만이 맛있게 그 음식을 들을 자격이 생길 것입니다. 잔치 음식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몸과 피로 아주 성대하고 귀하며, 값진 잔치입니다. 잔치의 격식은 참여자의 수에 있지 않고, 얼마나 귀중한 사람들의 잔치인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희도 당신께서 초대하신 잔치에 참여하고 싶사오나 세상의 헛된 것을 모두 털어버리고 기쁘고 즐겁게 참여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