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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묵상글 ( 성주간 월요일. - 사랑으로 받는 사랑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6:44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6:55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6:5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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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05:55>
http://www.ofmkorea.org/ofmhomily/567898
< 06:43>
250414. 성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4.14 05:35
- 사랑으로 받는 사랑
성주간 월요일-2024
오늘 주님께서는 삼백 데라리온 어치의 향유를 발에 바르는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아 그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는 항의와 비판을
받으시는데 제 생각에 이 비판은 날카롭고 정의롭기도 하여 참 뼈아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으신 것은,
유다의 비판이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도 같은 생각이셨을 겁니다.
그 비싼 향유를 당신 발에 바르는 것보다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을 더 원하셨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주님께서 그 행위를 마리아에게 허용하신 것도
당신이 아니라 마리아를 위해서 허용하신 것일 겁니다.
사랑의 허용,
사랑의 수용,
사랑을 귀히 여김.
이것이 주님의 의도입니다.
적당한 비유가 아닐 수 있습니다만
예전의 저는 누가 무엇을 제게 선물하실 때 칼 같이 거절했습니다.
저의 가난을 위해서입니다.
견물생심처럼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
작은 구멍이 봇물 터지듯 하게 할 것이기에
겁먹고 미리 그리고 아예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주시는 분들의 사랑을 고려하고 배려할 사랑의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때 저의 가난은 많이 타락했지만
사랑의 여유는 많이 생겼습니다.
그 선물을 사랑으로 받아 나의 소유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려
사랑이 순환하게 하는 것 곧 돌고 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허용과 사랑의 수용과 사랑을 귀히 여김이
사랑의 순환이 되게 함이 저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주님도 이런 마음이셨을 거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마리아의 발 씻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신 주님은
이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사랑을 모범으로 보여주실 겁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선언하실 것이고,
주님의 발을 씻어드린 마리아도 주님 돌아가신 뒤에는
주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의 발을 주님 발 씻어드렸듯 씻어줬을 겁니다.
이럴 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도 대립이 되지 않고 순환이 되는데
이 사랑의 순환을 오늘 주님과 마리아의 사랑에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너무 늦게 일어나 작년 것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그리고 성주간 잘 보내시고 부활 기쁘게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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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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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숨
2025.04.13. 19:28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 필립 2,6-7
리처드 로어 신부는 내려감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당신을 온전히 내맡기신 예수님에 대해 성찰합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풍요로운 주제가 흘러넘치는 가운데, 저는 필립비서 2장에서 말하는 위대한 포물선 모양의 운동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자 합니다. 신약 성서 학자들 대부분은 이 찬가가 본래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부르던 노래였다고 추정합니다. 이 운동에 대해 단도직입적이고 진솔하게 말하기 위해 저는 인생을 바꿀 만한 칼 융(C. G. Jung: 1875-1961)의 이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인생의 비밀스러운 절정기가 되면 위로 가던 포물선이 아래로 내려가게 되고 죽음이 탄생합니다. 인생의 후반기는 상승이나 펼쳐짐, 증대, 패기와 같은 것이 중요시되지 않고, 죽음이 그 의미를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이 인생 후반기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충만하게 성취하기를 부정하는 것은 그 마지막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살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것이고, 살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죽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차고 기우는 것은 하나의 곡선(포물선)을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1]
필립비서의 이 찬가는 예술적이고 진솔하게, 그러나 담대하게 칼 융이 말하는 "비밀스러운 시간"을 설명해 줍니다. 그러니까 이 찬가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느님이 포물선이 위로 오르다가 내려가게 하시는 때, 즉 완전히 차서 이제 기울어지게 되는 때를 묘사해 줍니다. 이 포물선은 우리가 육화라고 말하는 것, 즉 위대한 자기-비움 혹은 kenosis에서 시작해서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두 개의 신비를 하나의 운동으로 뚜렷하게 연결시켜 줍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또 내려가 피조물과 같이 육화하여, 인간의 깊은 슬픔 속으로 들어가시고 마침내 가장 밑마닥에 있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하게 만드십니다(종신의 신분을 취하시는 하느님" 필립 2,7). 예수님은 마치 "인간적인 것은 아무것도 나에게 절대 혐오스럽지 않아!" 하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의 상황에 전적으로 연대하시고 또 그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 주십니다.
예수님이 옳다면 하느님은 언제나 올라가고자 하고 성취하고자 하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뭔가를 하고자 하는 우리 인류와는 정반대의 방향, 즉 내려감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 찬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방식으로 하느님의 때에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마다하신다고 노래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느님이 "저 위에" 계시니까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을 찾기 위해 이 세상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저 위에" 다다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면서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이 아래로" 훌쩍 뛰어 내려오신 것을 간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유가 얼마나 대단한가요! 그리고 이런 하느님의 자유는 누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필립 2,9). 우리는 이 "들어 높이심"을 부활 혹은 승천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희망을 위한 청사진, 곧 우리가 하느님으로 변모되는 희망으로 가득 찬 본보기로 우리에게 주어지신 분입니다.
내려감을 신뢰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라가도록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인류는 생명의 순환 궤도에 연대하며 우리 서로와도 연대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자신의 성공담을 창출해내거나 다른 사람의 실패담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인간성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되게 "성령"께로 올라가려고 하는 대신 인간이 되는 자유, 즉 충만한 영혼이 되는 자유를 누리게 해줍니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꾸도록 되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60대 초반 어느 때부터 저는 제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제 삶과 경력, 그리고 가족이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제 삶이 실패했다는 느낌으로 인해 제 내면에 위기감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부모로서의 역할은 물론이고 제 삶에서 제가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지나온 모든 것이 저에게 큰 실패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15년간 영적인 추구를 해왔는데, 이 영적인 탐구가 저를 경외감과 고요함으로 가득하게 해주었고, 저 자신을 신앙의 신비에 온전하고 소중하게 내어맡길 수 있는 마음을 가지게 해주었습니다.
—Carol F.
References
[1] C. G. Jung, Psychological Reflections: A New Anthology of His Writings, 1905–1961, ed. Jolande Jacobi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0), 323.
Adapted from Richard Rohr, Wondrous Encounters: Scripture for Lent (St. Anthony Messenger Press, 2011), 122–12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Unknown, Neom (detail), 2023, photo, Saudi Arab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동굴을 탐험하는 이 사람처럼, 사랑으로 인해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는 것은 때때로 알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용감하게 걸어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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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신뢰심을 끝까지 놓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숨
2025.04.14. 05:59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던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세 차례나 당신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고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기까지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깊이 인식했던 사람들은 예수님과 당시 종교 권위자들 사이의 어떤 심상치 않은 기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이런 심상치 않은 기류를 피부에 더 깊게 느꼈던 이들은 예수님을 측근에서 따르던 사도들이었을 겁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유다인들과의 논쟁 이후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죽이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물러가 계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되살리신 이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믿게 되자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기에 예수님은 더 이상 드러나게 다닐 수 없으셔서 라자로와 마리아, 마르타의 고향인 베타니아에서 떠나 광야에서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에게 가려고 하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여쭙기까지 합니다.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요한 11,8). 그러고는 토마스가 이렇게 말하지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라고요.
심지어는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후 사람들이 그런 분위기를 알아채고 서로 이렇게 말했다고 요한 복음서는 전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요한 11,56).
그러니 임박한 예수님 죽음의 기운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알아채지 못했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죽음에서 되살리시면 당신의 죽음을 전조하셨기에, 특히 마리아와 마르타는 이 상황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예수님의 발에 붇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유다의 불평을 들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 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라고요.
그런데 유다나 다른 제자들은 어찌하여 이런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일까요?! 아닙니다.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셨듯이, 결정적인 상황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특히 유다는 더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께서 그런 권능을 빨리 드러내시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특히 유다의 예상과는 달리 그저 무력하게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제자들은 나중에서야 예수님을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계획을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예수님의 참 제자들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고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이 제자들을 끝까지 기다려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엄청난 계획을 큰 그림으로 보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아직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언젠가는 더 깊이, 더 깊게, 더 넓게 그 사랑과 자비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다려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자 온 집안에 그 향유 냄새가 가득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것이고, 또 예수님의 이 사랑 가득한 십자가상에서의 순종을 통해 부활하시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고, 또 이 진리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그렇게 값비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 믿음의 삶이 우리 주변이 향기처럼 퍼지게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렸던 그 향유보다 훨씬 더 값진 선물입니다!
예수님 측근에서 예수님을 스승이요 주님으로 모셨던 제자들마저 하느님의 이 큰 계획을 차츰차츰 깨달아 갔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어쩌면 위안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 깨달음에 너무도 더디지 않습니까?!!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기다려 주십니다. 언젠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사실을 조금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시고요!
만일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이런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가 함께하는 이들이 부족함과 허물, 몰이해 등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시시각각 상기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진리를 상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만 탈렌트를 탕감받은 사람처럼 자기에 자그만 빚을 진 사람을 심판하고 단죄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부족합니다. 우리는 모두 깨달음에 더딥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뿐 아니라 우리 서로에 대해서도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천지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당신과 일치할 수 있는 가능성과 우리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서로 일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득히 부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하여 말하듯이 말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사제들이 미사 성제 때 바치는 성찬 기도문 제4양식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기도문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현양받으실 때가 되자 세상에서 사랑하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으니, 저녁을 잡수시면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을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제자들에게 그러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가지시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심을 오늘 성주간 월요일에 더 깊이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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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4.14 04:13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꼭 그럴까요? 책임질 수 없는 길이라면, 또 옳지 않은 길이라면 절대로 가서는 안 됩니다.
학창 시절, 늘 컨닝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의 컨닝은 낭만이라면서 말했고, 이렇게라도 좋은 성적을 맞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컨닝만 해서일까요? 커서도 남의 답안지만을 보려 했습니다. 남 따라 하고, 남처럼만 살면 행복하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군사 쿠데타로 민주주의적 고귀한 발전을 빼앗긴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때 인권은 추락했지만 경제적인 발전을 이뤘습니다. 국가 소득이 오르고 고속도로가 생기고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먹고살 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군사 쿠데타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는 민족의 근대화를 이뤘다면서 일제 강점기를 찬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덕이 중요합니다. 즉, 바른길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의도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결과주의로는 올바른 세상을 만들 수 없습니다. 도덕이 행복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보다 더 중요한 마음의 풍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닦아드립니다. 이를 본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4)라고 말합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다는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 버립니다. 더 큰 가치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은돈 서른 닢을 성전에 내던지고 목매달아 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죽음과 향유로 적셔질 당신의 몸을 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이 부활의 기쁨으로 바뀌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물질적인 가치로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바른길이 중요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옳지 않은 길로 가도 된다는 어리석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사랑을 강조하셨던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유다의 말도 사랑에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위한 사랑은 바른길이 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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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용기를 갖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세요. 그 어떤 것도 경험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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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의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메시아의 도유나 집주인의 환대를 나타내지만, 발에 기름을 붓는 것은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행위를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향유를 발라 드린 것은 그의 헌신적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침내, 온 집안에는 그 향기가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이스카리옷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요한 12,5)
그 향유의 금액을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다고 하니, 이는 일 년 치 임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돈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
유다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여겼지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곧 떠나시게 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보다 더 비싼 향유가 있었더라도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랑은 본래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경제적 효율성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며, 죽기까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사랑의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가 으뜸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가치가 사랑과 생명의 가치를 넘어서 버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와 재물이 일종의 신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인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는 듯합니다. 참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사부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지니”(규칙서 4,21)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앞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기에,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생각을 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행동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처신을 할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요한 12,3)
주님!
옥합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내내도록 취하게 하소서.
온통 당신의 숨결이 배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사랑의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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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우리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질문 하나를 함께 나눠보려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진실이냐, 질서냐?” 여러분, 진실은 언제나 좋은 걸까요? 네, 좋은 것이죠. 그런데 진실이 드러날 때 항상 평화롭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큰 혼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그동안 유지해 오던 질서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질서가 중요하다.” “조용히 넘어가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렇게 살아도 될까요? 역사를 보면 이 질문이 얼마나 무겁고 깊은지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죄는 단 하나, 진실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질서를 흔드는 말을 했기 때문에, 아테네는 그를 죽였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율법과 전통, 종교적 권위가 유지하고 있던 질서 앞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진리를 말씀하셨지만, 그 진리가 당시의 종교적 질서를 흔들었습니다. 당시 지도자였던 가야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을 가만두면 로마가 오히려 우리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진실은 질서를 흔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을 숨기려 합니다. 현대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반복되었습니다. 20세기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독재 아래에서, 독일의 교회와 시민들은 대부분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그 침묵 속에서 일어난 건 무엇이었습니까? 강제 수용소, 유대인 학살,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한 신학자가 진실을 말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결국 그는 히틀러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질서를 넘어서 진실을 따랐던 사람, 그의 순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또 다른 한 사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재판을 보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악은 거대한 괴물이 아니라, 생각 없이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라난다.” 그녀는 이걸 ‘악의 평범함(Banality of Evil)’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질서라는 이름 아래, 아무 생각 없이 침묵하고 따를 때, 그 속에서 악이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억합니다. 그 진실은 오랜 시간 숨겨졌고 왜곡되었습니다. 그 당시 권력은 말했습니다. “질서를 위해서 진실은 묻어두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실이 드러났고, 우리는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질서’를 위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실’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때로는 그 진리가 우리 삶의 안정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진리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진실을 외면한 질서는 언젠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진실 위에 세워진 질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내 삶 속에서 진실을 따라 살고 있는가? 혹은 눈감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때로는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가족에게, 공동체 안에서,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침묵’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말하는 진실입니다. 그 진실은 아프지만, 그 진실이 우리를 살리고, 그 진실이 하느님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갑니다. 이제 우리 모두, 진실 앞에 서서,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진실은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 모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의 진실로 새 질서를 세우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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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시작은 주님을 위한 잔치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여느 잔치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와 주님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어 바릅니다. 이는 일반적인 잔치의 모습과 다른 무언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향유를 부어 바르는 행위는 주로 장례에 사용되는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잔치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 안에서 주님의 죽음을 담아냅니다.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 역시 이와 같습니다. 미사는 잔치이고 축제입니다. 특히 주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억하며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느끼는 시간입니다. 하늘나라에 우리가 모두 초대받았음을 기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잔치 안에 사람의 욕심이 관여합니다. 이스카리옷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주님과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탐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기뻐하고 진심으로 슬퍼하며 모든 마음을 다해 동참해야 하는 순간을 인간의 욕심이 참여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사는 어떤가요? 온마음을 다해 주님의 수난과 부활에 동참하고 있나요? 하늘나라에 초대받았음을 기뻐하고 있나요? 아니면 우리 안에 있는 욕심만을 근심하고 있나요?
우리들의 미사가 진심을 다한 잔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수난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잔치 말입니다.
⭐휴대폰 참사
아침 햇살에 눈을 떴습니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누워있다가 아직 덜깬 몸과 마음을 서서히 일으켰습니다.
두 다리를 바닥에 내리고 오늘 하루를 힘차게 맞이할 마음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섰습니다.
그때 들리는 맑고 고운 소리~~~ 빠직~~~
왜 휴대폰이 발밑에 있을까요?
순간 좋았던 기분은 사라졌습니다. 이후 밀려오는 감정은.. 휴대폰을 안전한 곳에 두지 않고 잠들어 버린 것에 대한 ‘극심한 후회’와 휴대폰에 대한 ‘걱정과 짜증’이었습니다.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아침기도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회해도 내 손해고 짜증을 내도 내 손해 아닌가….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과거와 미래에 흔들리지 말고….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그 순간 ‘빠직’하며 비명 질렀던 휴대폰이 제 머릿속에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을 현재에 놓으세요. ‘지금’이 마음의 중심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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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환대
“마리아처럼 삽시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예수님께서 마음 편히 찾았던 집이 ‘베타니아의 집’입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가 예수님의 각별한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듯 싶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잔치에서 예수님을 환대하는 마리아의 사랑이 참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환대의 표현에서, 활동가 답게 마르타는 주님께 사랑의 시중을 들고 관상가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음으로 절정의 사랑을 표현합니다. 누구보다 주님의 진면목을 깊이 꿰뚫어 통찰한 마리아임이 분명합니다.
바로 성주간 월요일, 우리는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주님의 종, 예수님을 만납니다. 초대 교회 신도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을 예수님으로 인식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을 온몸에 받았던 주님의 종, 예수님입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이어지는 주님의 종에 대한 묘사가 그대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이 깊이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주님의 섬세하고 자비로운 관상가의 면모입니다. 시끄럽지 않고 요란하지 않은 사랑의 관상가, 주님의 종입니다. 이런 주님의 관상적 면모를 닮은 복음의 마리아임이 분명합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이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얼마나 매력적인 관상가 예수님의 면모인지요! 분명 복음의 마리아는 이런 주님의 면모에 깊이 감화받았기에 아낌없는 사랑을 표현합니다. 주님의 종에 대한 다음 설명이 예수님의 사명 수행을 통해 발휘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여기서 친히 말씀하시는 분은 다음과 같은 하느님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날의 불행은 바로 이런 하느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새삼 창조주 하느님 사랑을 믿고 체험하고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특별 사명을 부여받은 주님의 종은 그대로 예수님입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인간 무지와 무명에 대한 궁극의 답은 이런 예수님뿐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하느님을 떠나 무지로 인해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요, 무지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무지의 감옥에서 수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무지의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 같습니다. 빛이신 주님을 만나, 주님 안에서 살아야 비로소 참 자유인이 됩니다.
역설적으로 문명의 야만시대요 날로 내면의 어둠이 짙어지는 대혼돈의 시대같습니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인간을 구원하는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이 구원하는 희망입니다. 완전히 하느님을 잊은, 잃은 시대 같습니다. 마리아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무지에서 벗어난 빛의 관상가, 사랑의 관상가, 희망의 관상가입니다.
빛이신 주님을 환대하는 마리아의 환대의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을 측근에 모시고 있던 유다 이스카리옷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다음 환대의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의 묘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항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그대로 향유 냄새는 마리아의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 영혼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미사를 봉헌하는 성전안 분위기도 우리의 이런 내면의 향기로, 봉헌의 향기로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주님께는 큰 위로와 격려가 됐을 마리아의 전적 사랑의 봉헌입니다. 마리아의 봉헌에 대한 유다의 반응이 그대로 유다의 생각을 반영합니다. 무엇보다 유다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유다는 분명 인색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고 예수님도 어느 정도는 예감하셨을 것입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써야할 때 써야 하는 돈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아오스팅 성인의 말도 생각납니다. 판단의 잣대는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에 감격하신 주님은 마리아를 적극 두둔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내 사랑하는 마리아를 제발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늘 곁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의 사랑과 더불어, 주님의 결정적인 때를 대비하여 늘 비상용 사랑의 향유를 보관해야 함을 배웁니다. 늘 주님을 맞이할 환대의 사랑을 지니고 준비된 삶을 삽시다. 날마다 주님을 환대하는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환대의 사랑, 관상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시편27,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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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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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요한 12,3)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이 몸, 곧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분의 발을 위해 물을 가져오고 그 발에 입 맞춤으로써, 죄의 그물에 걸린 이들을 용서하고 그대의 평안으로 그들이 일치를 이루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펑화롭게 해 주십시오. 그분의 발에 향유를 부어, 그리스도께서 식사하시는 그 집 안이 온통 그대 향유의 향긋한 냄새로 가득하게 하고 그분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이들이 그대의 향유로 기분 좋아지게 하십시오. 한마디로, 가장 작은 이들을 귀하게 대접하십시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8
지성을 버리면 지식의 변모가 일어난다
유대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하느님은 만물 속에 현존하시고, 영향을 미치시며, 힘을 발휘하시지만,낳는 일만큼은 영혼 안에서만 하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발자국에 불과하지만, 영혼 만큼은 그 본성에 따라서 하느님을 쑥 빼닮도록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이 형상은 이 탄생을 통해 꾸며지고 완성되어야 합니다. 영혼만큼 하느님의 이 활동과 이 탄생을 받아들이는 피저물도 없습니다. 실로, 신적인 것이든, 유일한 빛이든, 은총이든, 행복이든, 완전한 것이든 간에 영혼 안으로 들어오려면, 그것은 이 탄생을 통해서만 들어와야 합니다. 달리 들어올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이 탄생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기만을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복과 위로와 기쁨과 존재와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모든 복과 모든 행복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 탄생 속에서 여러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여러분에게 순수한 존재와 안정을 가져다줄 것입니다.(370)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사도 9,19-31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복음을 선포하다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놀라며,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자들을 짓밟은 자가 아닌가? 또 바로 그런 자들을 결박하여 수석 사제들에게 끌어가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더욱 힘차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여,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다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사울이 피신하다
그렇게 꽤 긴 기간이 지나자 유다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기로 공모하였는데,
그들의 음모가 사울에게도 알려졌다.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밤낮으로 성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이 밤에 그를 데려다가 바구니에 실어 성벽에 난 구멍으로 내려 보냈다.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다
사울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과 어울리려고 하였지만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르나바는 사울을 받아들여 사도들에게 데려가서, 어떻게 그가 길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는지, 또 어떻게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하여 사울은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드나들며 주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설교하였다.
그리고 그리스계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을 없애 버리려고 벼르고 있었다.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
이제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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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마리아 /
박윤식 [big-llight] 2025-04-13 ㅣNo.181472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그분께서 살려주신 라자로가 살고 있다. 거기에서 예수님의 방문을 환영하는 잔치가 베풀어졌고 마르타는 시중을 열심히 들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라자로를 맞아들이는 가족들 기쁨은 형용할 수 없다. 그분을 맞이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마음은 사랑이 넘쳐흐른다. 마르타의 사랑은 손님맞이와 시중드는 봉사였다. 라자로는 예수님 곁에 있었고, 그의 동생 마리아도 함께했다. 사람은 관계를 맺으며 산다. 그래서 마음을 서로 헤아리려고 애쓰는 가운데, 조금씩 가까워지며 깊어만 질게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이리라.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는다. 순간 온 집안에 향유 냄새 가득했다. 유다의 핀잔에 예수님은 ‘그냥 둬라. 가난한 이들은 너희 곁에 늘 있지만, 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라며 말리셨다. 그녀의 이 행동은 믿음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봉헌하는 거다.
성주간 월요일 아침이지만, 태풍 전야의 정적감이 인다. 잠시 마음 가다듬고 여느 성주간마냥 차분히 지내자며 묵상에 잠긴다. 예수님 수난과 죽음이라는 그 놀라움에도 동요가 없이. 그 심한 괴로움에도 조용히 마리아에게 당신 발을 맡기시며, 죽음과 장례를 준비하시는 예수님 모습이 부드럽기까지 하다. 그분의 ‘초연함’에서 죽음과 부활, 섬김 주고받는 게 신비 그 자체다.
첫째가 죽음과 부활이요, 그 다음이 섬기는 거와 섬김 받는 것이다. 죽었던 라자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 자리서, 마리아는 예수님 발을 닦아 드린다. 예수님 말씀대로 당신 장례를 위한 것이라나. 지난 최고 의회에서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다. 라자로를 살리신 것이, 정작 그분께서 돌아가실 계기였다. 죽음과 상반되는 부활, 아니 부활과 상반된 죽음이다.
두 번 발 씻김의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 발을 손수 씻어 주시고 또 하나는 마리아가 예수님 발 씻는 거다. 만찬장에서 손수 제자들 발을 씻기시는 섬김 주시는 예수님, 향유 발린 예수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정성스레 닦는 마리아에게서 섬김 받는 예수님이시다. 이처럼 섬기시고 섬김 받는 예수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잔치 자리에서, 마리아는 그 비싼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을 위해서 아깝지 않게 사용했다. 그분과는 진정한 사랑으로 맺어졌기에.
그녀는 물론 그녀 가족은 예수님 사랑을 듬뿍 받았으리라. 그래서 언니는 분주했고, 동생은 진정으로 봉헌했다. 지금 우리도 저 가족보다 그분 사랑을 덜 받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비교 못할 만큼 더 받았으리라. 사실 우리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인지? 신앙은 예수님과 만나는 것이다. 변화되고자 완전한 자유의지로 만난다. 이렇게 예수님을 닮으려 할 때에 더욱 성숙해진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저 남매처럼 예수님을 온전히 섬기며 그분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자. 예수님 만난 인연으로 그분에게 주어진 고통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일 게다. 우리는 어느 쪽일까?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냐, 예수님을 몇 푼 동전으로 넘긴 유다냐? 은총을 누릴 성주간이다. 이 주간만이라도 유다의 모습은 아예 접자. 그리고 이 주간에 예수님 수난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을 거룩하게 가지자. 우리는 그분 고통의 수난과 죽음에서 지극한 사랑의 신비를 느끼는지? 아낌없이 내어 준 저 마리아 모습으로 묵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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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그날 이후, 여전히 여기에
서하 [nansimba] 2025-04-13 ㅣNo.181475
“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요한 12,11)
향유를 붓는 마리아도,
계산적인 유다도 아닌,
내 마음이 오래 머문 이는
조용히 식탁에 앉아 있는 라자로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복음의 표징이 된다.
그러자 세상은 불편해한다.
라자로까지 죽이려 했다고 복음은 전한다.
지금 우리 시대의 라자로는 누구일까.
말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시선을 흔들고
체계를 뒤흔드는 이들.
2014년 4월 16일 그날 이후,
살아남은 이들과
사랑하는 이를 잃고도 살아가는 가족들은
여전히 여기에 있다.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고통과 침묵으로 진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세상은 라자로를 지우고 싶어했듯 이들을 지우고 싶어한다.
그들의 존재가 체면을 흔들고, 기억을 흔들고,
우리가 감추고 싶은 책임을 떠올리게 하기에...
그러기에,
나는 이들을 계속 기억하려고 한다.
상처 입은 자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부활의 자리를 향해 그들과 함께 걷고자 한다.
주님의 고통을 함께 짊어진 이들을,
세상이 외면하고 싶어 하는 존재들을,
나는 결코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려 한다.
그리고 함께 기억하자고
세상을 초대하고자 한다.
https://blog.naver.com/penetrating-light/223831695329
서하의 기도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 속에 스며들 때,
주님, 그 마음을 돌이켜 주소서.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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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안동훈 안드레아 신부님.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베타니아에서 마리아와 유다가 보여 주는 태도를 통하여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집을 찾으셨을 때,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 그분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향유의 가치를 모르고 벌인 어리석은 일이 결코 아닙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그분과 함께하는 만남에 더 큰 가치를 두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으로 가장 귀한 것을 내어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께 깊은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는 마리아의 겸손한 헌신은 온 집 안을 향기롭게 가득 채웁니다.
그러나 유다는 가난한 이를 도와야 한다는 구실로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겉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탐욕과 이기심에서 비롯된 비난일 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8)라고 말씀하시며, 지금 이 순간 이 만남을 소중히 여기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유다처럼 세상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주님과 만나기를 미루거나 소홀히 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킬 때 주님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자리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마리아처럼 예수님과의 사랑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며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어 드리는 마음을 지닐 때 우리 삶에도 주님의 향기가 가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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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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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순 나르드 향유를 붓습니다.
조금만 부어도 그 향이 진한데
마리아는 한 리트라를 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장례 날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시는데
과연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에도
엄청난 양의 몰약과 침향을 사용합니다.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 수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족이 대략 1년을 살 수 있는 생활비라고 볼 때
어찌보면 마리아는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있습니다.
오빠를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도 있겠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리아는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를 전하면서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받은 사랑을
이제 예수님께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자신도 들었고
그런 분위기가 점점 커질수록
마리아의 마음도 점점 조급해졌을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기회가 왔고
사랑과 존경의 의미로
마리아는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을
누구는 비웃을지라도
마리아에게 그 사랑은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에게서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기에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마리아가 전재산을 쏟아부으면서
당장 내일 살아갈 걱정을 하지 않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쏟으시면서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대상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사랑을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그 사랑을 받아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으로서
오늘 하루도 기쁨 속에 살아가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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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요한 12, 3)
시간은
참으로
빠릅니다.
거슬러
갈 수 없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기쁨이
애도로
바뀌는 것도
한순간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향하고 진정한
향기는 또한
사랑을
따릅니다.
마리아의 향유는
고백의 기도가
되어 예수님의
발을 닦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에서
맑은 사람의
향기가
흘러나옵니다.
맑은 사람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맑은 사랑에는
언제나
길이 있고
영원히 간직할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성주간의
길입니다.
품고있던 마음이
향유(香油)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마음이
울림이 되고
마음이
향유가 되는
마음의
진심어린 길이
성주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위로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사랑으로
향기로워지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시간과 마음이
만나면 거룩한
시간이 됩니다.
거룩한 시간은
마음을
닦아줍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마음을
보십시오.
마음을
더 이상
돈으로
환산하지
마십시오.
성주간은
우리의 마음을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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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표현되어야겠습니다!
혹시 첫사랑 때의 기억이 떠오르십니까? 그를 만나러 가기 전에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그야말로 난리 났을 것입니다. 옷장을 다 뒤져 이 옷도 입어보고 저 옷도 입어보고, 도무지 방법이 없자, 언니 옷도 몰래 허락도 없이 빌려 입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가 우리 집을 찾아온다면 어떠했을까요? 먼저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겠지요.
평소 잘하지 않던 행동도 할 것입니다.
화사한 꽃을 한 다발 화병에 꽂고 식탁을 장식하겠지요.
뿐만 아닙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18번 요리를 지극 정성으로 준비할 것입니다.
이윽고 그분이 오실 시간이 되면 제일 품위 있거나 예쁜 옷으로 갈아입어야겠지요.
그리고 지을 수 있는 제일 예쁜 미소를 지으며 그분을 맞이할 것입니다.
너무 아까워 진열장에 넣어두고 구경만 해온 최고급 양주나 포도주도 한 병 딸 것입니다.
오늘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는 ‘절친’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셨는데, 그 집에는 예수님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음속 깊이 흠모하고 있던 라자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인 수난 시기로 들어가기 전 각별히 아끼고 사랑했던 가족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끔찍이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였기에 그녀는 이번 예수님의 방문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을 것입니다.
때로 여성들 직감이나 눈치가 남성들보다 빠르지 않습니까?
이제 더이상 보지 못하게 될 예수님을 향해 무엇을 해드릴까 엄청 골몰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재산 목록을 다 훑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값진 것, 가장 자신이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순 나르드 향유!!!
당시 여성들이 가장 지니고 싶던 소장품 No1 이었습니다.
양을 많게 하려고 물을 탄 다른 향유와는 비교가 안 될 순 나르드 향유 1리트라입니다.
너무나 값비싸고 가치 있는 것이어서 아주 조금씩 꺼내 사용하던 명품 향수였습니다.
평생을 두고 쓸 수 있는 양의 향유였는데, 마리아는 이 향유를 예수님 발에 사정없이 다 부었습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본 유다는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이렇게 외쳤습니다.
“저런! 저런! 저게 대체 얼마짜린데!”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긴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이는 당시 그야말로 ‘내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가장 극진한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 오해 사기 딱 좋을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개의치 않습니다.
이제 곧 떠나가실 예수님, 그리도 흠모했던 주님, 참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쳐주신 예수님의 큰 사랑 앞에 자신이 기울일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합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여준 마리아의 행동을 바라보니 참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떠나가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재산, 마음, 정신, 목숨, 에너지, 삶 전체를 다 바치는 마리아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반드시 표현되겠지요.
정성과 진심이 담긴 행동으로 말입니다.
성주간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죄인들을 향한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시기입니다.
이제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실 예수님을 향해 우리의 정성과 마음을 표현하는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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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1-11: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1절) 베타니아로 가셔서 라자로의 집에서 식사하신다. 마르타는 식사 준비를 하고 시중을 들었다. 라자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식사하는 영예를 갖는다. 마리아는 비싼 나르드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족의 시중드는 것을 흐뭇해하시면서 받아주신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3절) 향유를 부어 그 향기가 가득 차게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하느님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행은 좋은 냄새를 풍기는 향유이다. 자선을 베풀고, 병자를 찾아가고, 낯선 이들을 맞아들이는 일과 겸손, 친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이다. 이 향유가 온 집안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내로 가득 채우는 값진 향유가 될 것이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5절) 믿음이 없고 사악한 유다는 자신이 맡고 있던 돈주머니를 횡령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믿어준 주님을 배반하고 만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7절)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에 당신 신비를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즉, 당신이 곧 돌아가실 것이며 향료와 향유로 당신의 장례가 치러질 것이라고 하신다.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8절)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그분이 살려주신 라자로를 보려고 몰려왔다. 그러니까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려고 결의한다. 다시 살아난 사람을 죽이려 하는 것은 바로 눈먼 자의 눈먼 생각이다.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분이 당신을 죽이더라도 당신은 다시 살아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죽은 이들이 생명으로 돌아오고 죄를 용서받아 되살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시샘하며 그들이 다시 죽기를 바라고 죽이고 싶어 한다.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유다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막으려고 살해에 또 살해를 저지를 생각을 한다. 라자로를 죽이면 그 기적의 힘도 지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는 삶을 살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며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면서 이 성주간을 지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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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기름을 준비한다는 뜻은?
오늘 복음에서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께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발라 드립니다. 2~3천만 원 상당의 상당히 고가인 향유입니다.
이것을 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요한은 이렇게 주석을 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 아끼는 사람이 이웃을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요? 형제를 사랑하려면 부모를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형제 사랑은 반란이나 저항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먼저 봉헌하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예수님은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하는 행위가 당신 장례에 대한 준비라고 하십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운명은 자살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골고타에서 견딜 수 있었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 살아생전에 미리 그분의 죽음을 내다보고 기름을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그 누군가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입니다.
12세기 중반 영국에서, 헨리 2세와 토머스 베킷은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젊은 시절 함께 어울려 다니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이들은 마치 형제와 같았습니다.
헨리 2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뢰하던 친구 베킷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베킷이 자신을 위해 교회를 통제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베킷은 주교가 된 후 변했습니다.
왕의 친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종으로서 교회를
보호하는 임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왕은 이에 분노했습니다.
"누가 저 말썽쟁이 사제를 내 앞에서 없애주지 않겠느냐?"
헨리 2세가 이 말을 화난 상태로 내뱉자, 충성스러운 기사 네 명이 그것을 왕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170년 12월 29일, 이 기사들은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찾아가 베킷을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고, 교회는 베킷을 순교자로 인정하여 성인으로 추대했습니다.
문제는 그 후였습니다.
베킷의 죽음을 사실상 묵인한 헨리 2세는 마음의 평화를 잃고 양심의 고통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영국과 교회, 그리고 온 유럽의 비난 속에서 결국 헨리 2세는 참회의 표시로 맨발로 걸으며 베킷의 무덤이 있는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으로 들어설 때조차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가 묵인한 베킷의 죽음이 그를 교회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대성당 밖에서 무릎을 꿇고, 수도사들을 시켜 매질과 회초리를 맞으며 통곡하며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교회와 영국 시민들도 그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장례를 위해 기름을 준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죽음을 긍정한다는 뜻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을 긍정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분께 영광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그분이 부활하심을 견뎌낼 수 없는 양심의 가책으로 남았습니다.
베드로도 생각해봅시다.
베드로는 어땠나요?
베드로와 유다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실 때
다 외면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돌아왔고 유다는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기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예수님 살아생전에 그분을 위해 분명히 기름을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분과 함께 죽겠다고 다짐하였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긍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성당에서 십자가가 사라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위해 왜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시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기억합시다.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묵인했는데, 그 누군가를 높여주는 세상에서는 함께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전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마리아가 아닌 유다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을 공경하는 찬미의 기름을 준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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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고 계시니......>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석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2,1-11).”
1)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요한 11,57).” 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회가 재판 절차도 없이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했고, 지명수배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기정사실이었는데, 신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마리아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는, 죽음을 앞둔 예수님을 위한 송별 식사였습니다.
<신자들 쪽에서 준비한, 또 하나의 ‘최후의 만찬’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잔치는 결코 즐거운 잔치는 아니었을 것이고, 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침통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석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어떻게든 표현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마르타의 경우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마리아의 경우에는 향유를 준비하는 것으로 예수님께 존경과 사랑을 드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거행하려고 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운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당신의 장례를 미리 치르는 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7절의 ‘내 장례 날’이라는 말이 그것을 나타냅니다.>
2)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향유가 아니라, 또 향유를 가져온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보지 않고 향유만 본다면 배반자 유다처럼 엉뚱한 곳에 초점을 맞추거나 빗나가게 될 것입니다.>
3) 마리아의 행동은, ‘가장 큰 계명’에 연결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마리아의 행동은 주님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사랑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먼저 그 사랑을
주셨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13,1ㄴ).”
<이 말에서 ‘끝까지’는 ‘극진히’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들과 사도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당신을 배반한 유다도 사랑하셨고, 당신을 박해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당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전부 다 바친 사랑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의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한 일입니다.
4) 마리아를 향해서, “왜 주님만 사랑하고 이웃은 사랑하지 않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런 뜻으로 말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우리는 마리아가 평소에 늘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은 ‘평소에 늘’ 해야 하는 일이고, ‘지금’은 죽음을 앞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라고, 가난한 이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서 마리아에게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이들’을 ‘항상 받기만 하는 사람들’로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도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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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2,1-11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예루살렘 입성을 며칠 앞둔 시기에 예수님은 당신이 친하게 지내며 아끼시던 라자로 남매의 집을 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걸어가셔야 할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것인지, 예수님께서 그 길을 걸으시는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던 라자로 남매는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드리기 위한 잔치를 베풀지요. 이는 오늘날 교구 차원에서 머나 먼 타국으로 떠나 선교의 소명을 다할 사제를 위해 환송미사를 봉헌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배척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의 길, 죽음의 길을 걸으셔야 할 예수님께 힘을 북돋워드리고 싶었기에 특별한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그런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쯤, 갑자기 마리아가 값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지고 와서는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마리아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 오빠에게 해주신 일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죽은 지 한참 지난 사람을 되살리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면, 그런 예수님의 인기와 영향력이 군중들 사이에서 더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시기 질투하는 반대자들은 그분 때문에 자기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잃게될까 두려워 그분을 제거하려고 들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위험까지 모두 감수해가면서 라자로를 되살리시어 마르타 마리아 자매에게 돌려주셨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큰 은혜에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던 겁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마리아의 그런 행동이 당신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공생활 기간 중에 처음으로 누려보시는 ‘호사’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자기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 그분을 찾는 이들은 숱하게 많았어도, 예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거나 그분께서 좋아하실 만한 일을 해드리는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자기 나병이 나은 것을 알고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인사를 드렸던 이방인 병자, 그리고 예수님께서 죄 많은 자신을 제자라는 특별한 소명에 불러주심에 감사하며 기쁨의 잔치를 열었던 레위 정도가 다였지요.
그런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마리아의 그런 행동을 탐탁치 않게 여긴 모양입니다. 어찌하여 그 비싼 향유를 제 값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그렇게 의미 없는 일에 낭비해 버리느냐며 마리아에게 핀잔을 주지요. 물론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의 가격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가 꼬박 삼백일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거금이었습니다. 유다의 주장대로 그 돈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면 많은 이들이 잠시나마 배고픔과 곤궁함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재물의 힘에 의지한 효과는 금새 사라지고 말지요.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봉헌한 그 행동은 예수님의 마음 속에, 그리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우리들 마음 속에 영원토록 남게 되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사랑의 의미이자 가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마리아를 비난한 유다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렸을까요? 슬프게도 없습니다. 부족한 자신을 사도로 뽑아주시고 크나큰 은총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신 그분을 은전 30냥에 반대자들에게 팔아넘겼을 뿐이지요. 은전 30냥은 120 데나리온, 노동자들이 넉 달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입니다. 즉 유다는 예수님을 그 정도 값어치로 밖에 생각 안한 겁니다. 그러면서 뻔뻔스럽게 마리아를 비난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입니다. 부처 눈에는 모두가 부처로 보이고 돼지 눈에는 모두가 돼지로 보이는 법이지요. 마음 속에 감사와 사랑을 지닌 마리아의 눈에는 예수님이 은인으로 보였지만, 마음 속에 돈 욕심만 가득했던 유다에게는 예수님이 ‘돈 주머니’로, 자기 이익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였습니다. 지금 내 눈에는 예수님이 뭘로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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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
예수님에 대한 개인적인 친분에 대해서 복음서는 많은 이야기를 전하지 않은데 베타니아의
마르타와 마리아, 그리고 그의 오라버니 라자로와의 관계는 여러차례 소개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주님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 내용입니다. 마르타는 시중을 들도 라자로는
식탁에서 손님들 틈에 끼여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리는 것입니다
. 순 나르드 향유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희귀해서 금처럼 값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소중한 것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 발에 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립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 부근의 베타니아의 갈릴래아 호수 서쪽 연안에 위치한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와 동일인물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에 대한 논란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7마귀를 쫒아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자신을 구해주신
예수님을 특별히 감사하고 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순 나르드 향유를 바르며 눈물을 흘립니다.
초대 가톨릭에서조차 막달라 출신 마리아와 베타니아에 있는 마리아를 동일인물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세월이 바뀌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베타니아 출신의 마리아와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가
서로 다르거나 아니면 서로 동일 인물일 수 있는데 여전히 논라의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도들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도망 갔지만 그녀와 몇 몇 여인들은 주님의 무덤까지 가는 모습을 복음서는 전해 주고
있습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막달레나인지는 밝히기가 어렵지만 주님께 대한 그녀의 사랑은 값진
향료를 서슴 없이 내어 놓은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녀 자신도 몰랐을 말씀을 주님께서 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 12,7-8)
이 말씀은 유다 이스카리옷이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5절)에 대한 불평에 대한 대답이셨습니다.
그러난 복음서 저자는 그가 진정으로 가난한이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서 돈을 가로채곤 하는 도둑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 대한 대접에 대해서 이처럼 허용한 것은 성경저자도 표현 했듯이 장차 당신의
장례 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당신에게 닥칠 죽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가치관이나 자신의 신앙에 치우치다보면 이웃을 상하게 하거나 배타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자유를 주어야 하는데 그 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것인데
수석사제들은 라자로 마저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소문을 듣고 라자로를 보려고 몰려 들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시며 베타니아에서 당신을 위한 잔치에 참여하십니다.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은 기쁨에 차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인의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고뇌하는 삶일 것입니다. 주님께 초대를 받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시는 것처럼 신앙인도 자신의 삶에서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잔치에 참여하며 이미 당신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시는 것처럼 현실에 참여하면서
마음은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현실의 어두움이나 갈등에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 자리에 주저 앉지 않는 용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용기는 삶의 그림자에서 오는 고통과 혼란도 담고 있습니다.
성주간의 첫 날을 맞으며 마리아가 아낌 없이 값진 순 나르드 향을 주님의 발에 부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과 정성을 주님께 바치며 그 수난에 참여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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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절대 가치를 위한 사랑의 기름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아죽이려는 유다인들의 음모가 드러나고 있었지만 주님의 종의 길을 의연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가셨을 때, 그분을 영접하기 위해 만찬이 열립니다. 거기서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노동자의 일년치 보수에 해당하는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립니다.
유다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12,5)라고 하며 못마땅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그냥 두어라.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12,7) 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구원과 신앙을 돈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고 상대적 가치를 좇는 유다의 시각을 지니고 살아가지 않는지, 아니면 절대 가치인 하느님을 갈망하고 추구하는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가치를 매기고 효율성을 알아보고 일을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 선한 사람에게서 이 가치는 매우 중요하며 사람들은 이 보편적 가치에 따라 움직이고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결국 하느님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이런 상대적 가치를 주인으로 섬길 때가 많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가난한 사람들보다 예수님에게 쓰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둔 마리아는 절대적 가치인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삼백 데나리온이라는 큰 돈을 자신을 위해서 쓰려고 함으로써 상대적인 가치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사라져버릴 현세의 것들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느님이요 그분의 말씀과 사랑뿐입니다. 영혼구원과 용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 안에서의 친교와 같은 것은 물질적 가치로 환산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입니다.
참된 가치는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살아움직이실 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영을 우리 안에 모시려면 철저한 자기버림과 사랑의 몰두, 겸손과 인내를 지녀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절대 가치요 삶의 궁극적 목적인 사랑 지극한 분에게 우리의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야겠습니다. 마리아처럼 구원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향유를 발라드려야겠지요.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 받았으니 사랑으로 모든 것을 되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상대적 가치를 좇는 자리에 탐욕과 불평등과 불의, 배척이 드러나기 마련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오늘도 절대 가치인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구원행위, 고귀한 신앙의 선물을 오염시키는 속화된 세상에 사랑의 향기인 향유를 바르는 향기로운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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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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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414. 성주간 월요일.
고난의 때를 준비하는 삶
<2025.4.14> 아침을 여는 묵상 (눅 22:24~38절)
❝고난의 때를 준비하는 삶❞
❚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의 시간에도 흔들림 없이 제자의 사명을 감당해 나아가야 합니다.
✔ 고난의 때에 어떤 삶을 보여야 합니까?
➲ 섬김으로 이루는 화평이어야 합니다(24~30절).
누가 예수님을 넘겨줄 자인가를 서로 묻던 제자들은 이번에는 ‘누가 큰 사람으로 여김을 받을 것인가...’(24절)를 놓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이방인들의 권력자들처럼 백성들 위에 군림하거나 은인으로 행세하지 말고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고,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26절,새번역)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27절,새번역)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식탁에 기대 앉아 시중을 받지만 예수님의 사람들은 그들을 시중들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과 더불어 모든 시험을 감당하고, 통과한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기겠다...’(29절)고 말씀하십니다. 그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입니다.
세상의 욕심과 욕망은 서로를 향한 질투와 다툼을 만들어내지만, 섬김은 화평을 만들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은 우리 자신이 어느 자리에 앉든 그리스도인답게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앉든, 교회에서 직분을 받든 주인의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자리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좁고, 협착한 믿음의 길이 아닌 넓고, 화려한 길로 나아가는 달콤한 유혹이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그런 유혹을 거절하여 때론 막대한 손해와 억울한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의 자리에 앉게 되면, 높은 자리 하나쯤을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천상에서의 보상을 바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욕심과 욕망과 탐욕과 탐심을 내려놓고 무한한 하늘의 영광을 맛보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섬김의 삶을 통해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 참된 화평을 이루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행함으로 표현된 신앙이어야 합니다(31~34절).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시몬아, 시몬아....’ 이름을 두 번 연이어 부르시는 것에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감정이 실려 있습니다.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31절).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위해 예수님은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고,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라고 권면하십니다(32절). 이에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33절)하겠다고 장담합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뜻밖에도 예수님은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34절)것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은 말로서만 다짐하고,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말과 삶이 일치하도록 기도하면서 나타내 보어야 합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겠노라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그의 말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말았습니다. 성급한 말의 헌신과 결단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헌신으로 주님의 제자됨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성급한 말의 결단과 조급함이 오히려 우리 자신을 넘어지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늘 기도하는 제자의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힘과 행함으로 날마다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주님의 참된 일꾼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영적으로 무장된 믿음이어야 합니다(35~38절).
예수님은 다가올 핍박과 고난을 이겨 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힘쓰도록 제자들을 권면합니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36절,새번역). 폭력을 정당화하거나 무장봉기를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엄중한 위험이 닥쳐오고 있음에 대한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검’은 문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철저한 영적 준비 태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53:12의 예언대로 ‘불법자의 동류’로 취급 받으실 것이며, 제자들도 그렇게 될 것(37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오해한 제자들이 ‘검 둘이 있나이다..’ 말하자 ‘...족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실제 검이 아니라 성령의 검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세상은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부정적인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안티 기독교인은 생겨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상황을 바꾸려고 노력하지 말고 세상에서 겪는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다. 예수님도 고난의 길을 굳이 피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결국 인류의 생명을 살렸고, 의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잘 무장된 믿음의 삶을 통해 맡겨진 사역들을 바르게 잘 감당하는 제자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인생에 닥치는 고난 앞에서라도 그리스도인답게 섬김의 정신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에 전심전력할 뿐 아니라 사탄의 공격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삶이 되지 않도록 영적으로 잘 무장되어 믿음으로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22:24~38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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