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 “나도 네 마음 알아” 들어주고 고개 끄덕이기/이지현기자
‘공감’은 타인이 느끼는 감정에 충분히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다. 타인을 연민이나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나도 그 마음 알아”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마음으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내가 저런 상황에 부닥쳤더라면 어떻게 했을까”가 아니라 “저 사람은 어떤 과정을 거쳤길래 저런 상황에 부닥쳤고 앞으로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공감이다. 그래서 공감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준다.
마음속의 거울
공감이 시작되는 곳은 인간의 뇌이다. 인간의 뇌 속엔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 있다. 거울 뉴런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기만 해도 자신이 그 행위를 직접 할 때와 똑같은 활성을 보이는 신경 세포이다. 이탈리아의 신경심리학자인 지코모 리촐라티가 발견했다.
리촐라티에 의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과의 교감을 갈망한다. 보는 것만으로 타인의 아픈 마음, 행복한 마음이 머릿속에 거울처럼 반영된다. 인간은 그 보상으로 누군가를 이해하는 만큼 공감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바라볼 사람도, 바라봐 줄 사람도 없어 거울 속이 텅 비었다면 심리적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만일 남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내 행동과 말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결국 인간다움(인간성)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메마른 가슴에 악이 깃들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구체화한 그는 “거대한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은 히틀러 같은 악인이지만 그 악과 손잡고 실천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일 수 있으며, 공감 능력을 상실하면 어느새 잠입한 악이 우리의 윤리적인 고민과 성찰을 방해할 수 있다”고 봤다. 공감 능력이 부재한 사람들이 장악한 사회는 삭막하고 비정할 수밖에 없다.
사랑의 DNA 공감
공감은 능력이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무작정 피력하기보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견을 조율하도록 해준다.
타인의 감정과 입장을 잘 이해하면 갈등을 줄이고 협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공감 능력이 결핍된 리더는 상황에 맞지 않는 지시나 공식발표 또는 명령을 통해 구성원들을 힘들게 한다. 이것은 자신이 의도한 목표를 구성원들의 언어나 정서로 풀어내지 못하거나 구성원들의 입장이나 감정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탓일 때가 많다.
공감 능력의 뿌리는 가정이다. 사랑하는 부모로부터 억울했던 감정을 위로받았던 일,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던 부모의 얼굴, 따뜻하게 안아준 부모의 품을 기억하는 사람은 분명 공감 능력이 높을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공감 능력이 높은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서 학습에 집중할 수 있는 침착한 심리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근래 학생들의 공감지수가 낮아진 이유는 가족 간에 정서적 교류가 줄었기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공감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본성이다. 그러나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공감 능력은 부모로부터 인정받고 존중받는 경험을 통해 시작된다.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이해능력이 높기 때문에 자기 존중감이 높다. 공감은 자신이 받아 본 배려나 존중감을 바탕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공감은 연민과 다르다. 미국 작가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며, 되찾아야 할 것은 타인을 향한 공감”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공감과 연민은 다르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감정이 마음속에 흐르는 것이 공감이라면 연민은 남의 딱한 처지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연민이 내 삶을 파괴하지 않을 정도로만 남을 걱정하는 기술이라면,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과 함께하는 삶의 태도이다. 연민은 아픈 사람이나 배고픈 사람의 고통을 안방 TV로 시청하며 ARS 자동응답 시스템으로 소액을 기부하는 것이라면, 공감은 그들의 아픔을 느끼고 그 자리로 달려가는 용기이다.
간혹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은 내가 고통당할 때 어디에 계시는 걸까?’ ‘나의 아픔을 알기는 하신 걸까?’라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에 둔감하지 않으시다. 요한복음 11장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 의문점이 있다. 친구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얼른 달려가지 않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 엄청난 고통을 겪지 않도록 막아 주실 수도 있으련만 그 고통을 고스란히 겪게 놔두신 것은 어떤 이유인가.
지오토 디 본도네의 ‘나사로의 부활’.
이에 대해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친구가 곧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서 걸어 나올 것을 아시면서도 주님은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이들과 함께 애통해하셨다. 그들과 고통을 함께하신 것도 있었지만 주님의 마음도 아팠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3~35)
하나님이 지체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에게도 몇 가지 할 일이 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는 중에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너희 고통을 어디에 두었느냐”고 자상하게 물으실 때 우린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주여 와서 보옵소서”라고 답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의 아픔에 공감해주신다.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때 우린 좌절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공감 능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공감은 내 삶을 던져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려는 삶의 태도다. 우는 자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다. 그동안 힘들고 바쁘다는 핑계로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일상의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되겠다.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서로를 위로할 줄 알며,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