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82
12월24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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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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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7WFB8bheW8w
[서울대교구 조승현 베드로(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 보도주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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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 안에서 친구처럼 허물없고 연인처럼 섬세한 하느님이 태어나시기를!>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엄청난 고통과 상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니 서민들의 삶도 크게 출렁입니다. 오랜 세월 쌓아 올려온 국가 이미지도 급격히 추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 어려운 상황이 지속될지 기약도 없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시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기 예수님의 성탄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난감하고 곤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성탄의 의미는 오늘 이 시대에 맞춰 계속 재해석되어야 하고 성찰되어야 합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은혜로운 대 사건입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사람이 되시고, 특별히 오늘 성탄절 날 갓 난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십니다.
오늘의 어둠이 아무리 짙다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항상 당신 백성과 동행하시며 아픔과 상실, 고통의 순간에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곧 아기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때로 고통은 우리를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더 진지한 신앙 여정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토록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묵상하며, 그분의 또 다른 모상인 모든 피조물을 좀 더 더 경이롭게 바라보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고통 속에 있는 수많은 이웃들을 기억해야하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해야겠습니다.
성탄절 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입니까? 성탄절의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마음에 드는 성탄 선물, 잘 차려진 성탄 파티, 달콤하고 로맨틱한 성탄 구유와 전례 등등... 성탄과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들입니다.
그러나 2천년 전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베들레헴의 마굿간에는 달콤하고 로맨틱한 분위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분위기는 비참하고 서글펐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사회적 상황 역시 암울했습니다.
하느님의 이 세상 육화강생은 태평성대 때가 아니라, 가장 암울하고 어려운 시대, 로마 식민 통치 시대, 가장 불안한 헤로데 왕정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던 최초의 모습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처럼 강력한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습니다. 지혜로 똘똘 뭉친 현자의 모습으로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탁월한 능력을 지닌 해결사의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힘으로는 머리조차 옆으로 돌릴 수 없는 갓난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 인류 구원의 역사는 바로 오늘 우리 한가운데,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 안에서 시작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 역시 이 어려운 시대,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각자 안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만만치 않은 냄새가 풀풀 나는 구유에 몸을 누이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든 한 가지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강생 사업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좋은 여건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인간 세상의 비정한 현실, 혹독한 조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탄생 과정에서부터 우리 인간의 가난과 비참과 고통과 한계에 전적으로 참여하겠다는 하느님 측의 강력한 의사표현이 마구간 탄생인 것입니다.
찬 바람 숭숭 들어오는 마구간, 말과 소들의 콧김을 맞으며 이 세상에 강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이러한 육화의 방식이 우리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우리 역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가끔 우리에게 다가오는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이나 참혹한 인간 조건도 삶의 일부로 수용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부정적인 체험들을 지속적으로 긍정화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미 없어 보이고 때로 구차스러워 보이는 세상사에 끊임없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태어나실 수 있는 분이다. 그분의 이름은 기쁨이고 자유이며 충만함이다. 숨결처럼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한없이 따뜻한 마음을 지닌 그분은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꿈이시다. 그러나 하느님이 베들레헴에서 수없이 태어나신다 해도, 우리 안에 태어나실 수 없다면 참으로 허무할 것이다. 모쪼록 우리 안에서 친구처럼 허물없고 연인처럼 섬세한 하느님이 태어나시기를!”(마리아는 길을 떠나, 에르메스 콘키, 바오로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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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2)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해 탄생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빅매치 중에 빅매치라고 할 수 있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리버풀대 파리 생제르망의 경기를 현장에서 직관할 수 있는 입장 티켓과 왕복 비행기 표를 보내 초대한다면, 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뛸 듯이 기뻐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 가방을 준비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밤에 주님의 천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탄생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관할 수 있는 초대장을 보냅니다. ‘메시아 탄생 현장 직관!’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그 값진 티켓은 로마 황제나 황비, 유다왕이나 왕비, 수석사제나 율법학교 교장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에게? 놀랍게도 학벌은 전무하고, 가문도 보잘 것 없으며, 하루 온종일 양들과 붙어 다니는 일이 전부인 들판의 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조직 안에서 목자들은 하위 그룹에 속하는 신분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목자, 하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말도 섞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자들 역시 우리 처지가 그렇지 하고, 자포자기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하느님, 가장 존귀하신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에 탄생하시며, 요셉과 마리아 외에 최초로 목격을 허락한 사람들이 가장 낮은 곳에 살아가던 가장 보잘 것 없는 삶의 소유자 목자들이었습니다.
탄생 때부터 나자렛의 숨은 생활, 그리고 활기 넘치던 공생활, 마침내 골고타 언덕 위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보여주신 모습은 낮은 자의 모습, 작은 자의 모습, 지극히 겸손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작고 낮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명료합니다. 우리도 당신의 모범을 따라 작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은총은 또한 작은 자들,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은혜로운 성탄의 밤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하는 말씀 또한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복음 2장 10~12절)
“너희를 위하여!” 주님께서 다른 세력가들과 잘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목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오늘 갖은 세상의 고통과 상처로 고생하는 또 다른 작은 자들인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답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이 경이롭고 축복 된 성탄의 신비 앞에 천사들과 한목소리로 감사와 찬미, 영광의 노래를 힘차게 불러야겠습니다. 구세주께서 바로 나를 위해 탄생하셨다니, 내 안에서도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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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vfRwQqt1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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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성야 미사)
<‘선한 의지’가 도대체 무엇일까?>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성야 미사에서는 목동들이 천사들에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말을 듣습니다. 여기에는 그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뵐 자격이 있음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말 안에는 무슨 일을 해서 마음에 들게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가톨릭의 전통적 해석, “pax hominibus bonae voluntatis”, 곧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평화”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직역이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란 의미는 의역이고 현대 신학자들의 합의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된 데에는 “선한 의지”란 단어의 뜻의 중요성을 번역하면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의지’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의지와 욕구를 발휘합니다. 그중에 선한 의지도 있고 악한 의지도 있다는 뜻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을 통해서 새끼 원숭이가 젖이 나오는 철사 어미보다는 젖이 나오지 않아도 따듯함을 주는 인형 어미를 어미로 인정한다는 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이것이 선한 의지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어머니의 냉대 속에서 자랐습니다. 사랑받지 못하면 생기는 것이 열등감이고 우울감입니다. 태어나면 아기들은 다 선한 의지를 가집니다. 젖을 먹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엄마를 찾으려는 의지입니다. 엄마를 찾지 못하면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 먹으면서 엄마보다는 엄마 젖을 더 추구하게 됩니다. 선한 의지가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원숭이 새끼들을 일부러 어미와 격리하며 우울증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며 발견한 것은 새끼 원숭이들은 먹이와 편한 시설이 아닌 ‘내가 누구인가’를 알려줄 어미를 찾고 무리를 찾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 덕분으로 할로우 박사는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치유하는 길은 사랑받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기처럼 사랑만을 요구하는 남자와 사는 것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첫 번째 결혼해서 두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이혼하고 맙니다. 할로우 박사의 우울증은 점점 심해졌고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다시 사랑을 만났습니다. 이때 ‘구원자 원숭이’의 개념을 발견하게 됩니다. 격리 6개월이 안 된 원숭이들은 정기적으로 다른 무리의 원숭이들과 사귀다 보면 우울증이 사라진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두 번째 부인도 두 아이를 낳고는 암으로 사망합니다. 인간으로는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우울증이 심해져서 전기충격으로 우울증을 극복해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첫 번째 아내와 재혼했지만, 상태는 계속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실험실의 원숭이들을 학대했다는 비난 속에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알았습니다. 사랑으로 상처받은 자신은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음을. 그러나 ‘착한 뜻’은 아니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삐딱하게만 보는 주인공은 한 스승의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해주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나를 창조한 엄마처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을 사람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아기들은 착한 뜻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알고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의 목자들은 착한 뜻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면 정체성이 생긴 것입니다. 엄마를 만나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엄마는 나를 창조하여 나에게 생명과 같은 젖을 주는 존재입니다. 이 착한 뜻을 가졌기에 그들에게 메시아의 표징이 구유에 뉜 아기였던 것입니다. 밥은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생명을 양식으로 내어주시면 자신들은 자녀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만을 찾기를 원하는 이들이 목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누구를 구원하실까요? 아기처럼 엄마를 찾지 않으면 죽는 게 낫다는 착한 뜻을 가진 이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어떤 이들은 돈으로 가난에서 구원되려고 하고 먹는 것으로 배고픔에서 구원되려 합니다. 그렇게는 메시아를 만나지 못합니다. 착한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이처럼 세상없어도 내가 누구인지 알려줄 메시아만을 찾는 착한 뜻이 있나요? 그러면 오늘 밤에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선한 의지는 구원자를 부르는 목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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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노래가 오늘 복음에서 읽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묵상하는 노래입니다. 오늘은 구원의 역사에서 즈카리야의 노래가 지니는 신학적인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즈카리야의 노래는 하느님께서 오래전부터 약속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심에 대한 찬미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셨음을 강조하면서,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도록 격려합니다. 노래는 하느님께서 다윗의 집에서 "권능의 구세주"를 일으키셨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완성을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메시아의 도래가 하느님의 구원 약속의 궁극적 성취임을 설명하고,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대해 감사와 찬미의 마음을 일깨웁니다. 즈카리야는 구원이 단순히 정치적이거나 물리적 해방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한 내적 해방임을 언급합니다. 구원은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사랑의 행위임을 강조하며, 회개와 자비의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이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시는 구원자임을 설명하며, 예수님의 빛을 따라 살도록 독려합니다. 즈카리야는 자기 아들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을 위한 길을 준비할 것임을 노래합니다. 우리들 역시 요한처럼 자기의 삶에서 하느님의 길을 준비하고, 이웃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래는 하느님의 자비와 평화로 끝맺습니다. 이는 구원이 단순한 개인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공동체적,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됨을 암시합니다. 우리들 역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그 자비를 세상에 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문득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몸’을 얻는 것은 아닐까! 몸을 얻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보고, 만지고, 느끼고, 생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몸이 있기에 영혼이 가지는 자유와 순수함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몸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또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을, 늙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아쉬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은 우리에게는 축복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을 얻으시면서 많은 것들을 내려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으로 오시지만 영적인 자유와 순수함을 이야기 하십니다. 몸이 가지고 있는 멍에와 짐을 벗어버릴 수 있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재물, 명예, 권력을 추구함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된 행복은 가진 것을 나누면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옳은 일을 추구하면서, 용서를 하면서 다가온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몸에 속해있지만 이미 영혼의 자유와 순수함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몸의 틀을 벗어버리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예전에 있던 본당에서는 성탄 트리에 카드를 달아 놓았습니다. 카드에는 예수님께 드리는 성탄 선물이 적혀있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돕는 일, 자선을 베푸는 일, 부모님 심부름하기, 성당 청소하기와 같은 선행을 적어 놓았습니다. 교우분들은 기쁜 마음으로 카드를 가져가셨고, 예수님께 마음을 담아 성탄 선물을 드렸습니다.
아직 아기 예수님을 위한 성탄 선물을 마련하지 못하셨다면 오늘 하루 기도를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위해서 먼 길을 떠나왔던 동방박사도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렸던 목동들도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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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탄 밤미사)
복음: 루카 2,1-14: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나셨다
호구조사의 상황은 요셉과 마리아를 왕도 베들레헴으로 가게 한다. 이곳은 다윗의 왕권이 시작된 곳이다(루카 2,1-5; 참조 1사무 16,1-13). 여기서 성령으로 마리아, 시온의 딸인 동정녀에게서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영원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루카 2,6-7)이 사람이 되어 탄생하신다. 들에서는 주님의 천사가 주님의 영광과 함께 깨어있는 목동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복음을 전한다.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11절. 부활의 명칭) 그 표지는 “포대기에 싸여 누워 있는 아기”(12절)가 구유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의 합창이 이어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14절) 여기서 말씀이 전해졌다. 즉, 복음화되었다. 목동들이 알아들었고, 아기에게로 달려갔다. 이것이 “오늘”(11절) 모든 사람에게, 가시적으로 영원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참으로 거룩하고 생명을 주는 십자가 위에 죽으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전하시며,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며, 인간들 사이에서 사셨고, 그러므로 그분은 참으로 탄생하셨다. 성탄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는 깊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해 생각해 볼 것이 있다.
* 무덤에서 옛 시간의 날이 끝나고, 새로운 “날”, “낮”, “오늘”이 시작된다. 탄생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날은 무덤에서 지지 않는 날로 시작되며, 탄생에서도 그렇다.
* 같은 인격(위격)이 “살아 계신 분”으로 무덤에서 나오셨다. 때문에 탄생에서도 “살아 계신 분”으로 태어나셨다.
* 수의로 싸여 무덤에 모셔졌다. 탄생에서도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우셨다.
* 무덤에서 인간으로서 신적 생명으로서 나셨다. 따라서 그분의 탄생은 즉 인간이 되신 것은 무덤을 위한 것이다.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돌아가셨다. 진정 부활로서 아버지는 성령의 복되신 영원 안에서 영원한 아들의 인성을 낳으셨다. 바오로 사도가 시편 2,7을 인용하여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바로 죽음을 위해 태어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탄생을 위한 것이며, 탄생은 십자가를 위한 것이다.
* 마리아와 아리마태아의 요셉은 무덤에 묻기 위해 수의로 싸는데 있었고, 그 마리아는 요셉과 함께 포대기에 쌓아 구유에 모셨다.
* 주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무덤이 없었기에, 짧은 시간이지만(요한 19,41), “3일” 때문에라도 사랑으로 내어드려야 했다. 똑같은 모습으로 그분을 위해서는 탄생할 자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이들의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여관은 모두 예약이 되어 있었다.
*몰약은 무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위해 쓰였다(요한 19,39). 그 몰약은 박사들이 아기에게 바친 예물이었다(한 번만 쓰였다).
* 하늘의 천사들은 부활에도 있었으며, 탄생에도 있었다.
* 초자연적 신적 빛이 부활에도 빛났고, 같은 것이 탄생에도 있었다.
* 부활 사건에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신현) 앞에서 두려움은 탄생에서도 나타난다.
* 제자들 사이의 부활에 대해 놀라움은 탄생에서의 목동들의 놀라움과 같다.
* 두려움에 대해 부활에서 천사들의 안심시키는 “두려워 말라!”는 말이 탄생에서도 같이 나타난다.
* “큰 기쁨”은 무덤에서 여인들에게 힘을 주었고, 같은 기쁨을 목동들도 맛본다.
* “표지”로서 무덤에 있던 얼굴을 싸맸던 수건과 끈이 표지가 되었으며, 같은 표지로서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있다고 하였다.
* 부활 사건에서 제자들이 달려가는 것, 미래의 “하느님 양 떼의 목자들”, 탄생하신 곳으로 달려가는 목동들이 나타난다.
* 제자들에게 여인들을 통해서 전해진 부활, 탄생에서는 목동들의 주님의 찬미와 찬양을 볼 수 있다.
* 위대한 왕의 도시, 예루살렘(시온)에서 부활하셨고, 인간적인 왕의 도시, 메시아적 왕의 도시, 다윗 왕의 도시, 예수께서는 인성으로 그리스도의 선조인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였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부활의 “표지”는 탄생의 “표지”이다. 이것은 기쁜 소식(복음)이며 살아있는 표징이다. 이는 주님 자신이시다. 이분이 바로 “오시는 분”이시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나셨다. 그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분은 평화의 왕자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 아기로 태어나셨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분이 바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시며 모든 이의 구세주이시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거룩하게 살도록 가르치고 계시다.
복음에 나타난 성탄 사화가 바로 부활을 통하여 본 것임을 알 수 있다. 성탄의 신비는 바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성탄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그 안에 십자가와 죽음의 신비, 부활의 신비가 모두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비는 우리 자신이 사랑을 위하여 죽는 것을 말하며, 부활의 신비는 거기에서 오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성탄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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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즈카르야는 구세주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질 구원을 노래합니다.(루카 1,78-79 참조) 예수님께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되실 것입니다. 그들도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1,78)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세례자 요한을 향한 즈카르야의 예언을 눈여겨봅시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1,76-77) 하느님의 구원은 ‘죄를 용서받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뒷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며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3,3)를 선포합니다.
이제 곧 구세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려고 오십니다. 그리고 즈카르야는 이 구원이 죄의 용서로 이루어진다고 선포합니다. 고해성사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 문 뒤에는 크신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을 구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신비를 여러분에게도 이루어 주시려고 오늘 우리에게 오십니다.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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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성탄 대축일 밤미사 강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메시아입니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4-14)
1) 여기서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라는 말은, 방을 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여관에 투숙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베들레헴 주민들 가운데에도 산모를 위해서 방을 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이 없어서’ 외양간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출산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했을 것이고, 여관비도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이 여관방을 모두 차지했고, 아무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아무도 반기지 않는 차가운 세상으로 오신 것이고, 그때부터 이미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요한복음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그 상황에 대해서 혹시라도, “만일에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나는 기꺼이 요셉과 마리아를 위해서 나의 방을, 아니, 나의 집 전체를 내주었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큰소리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다음 말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마태 25,41-4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지금 내 곁에 있는 ‘작은 이’가 바로 예수님이고, 요셉과 마리아의 성가정입니다.
2)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서 배척만 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맞아들여서, 비록 방은 아니고 외양간이었지만, 어떻든 출산을 위한 장소를 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마도 8절에 나오는 ‘목자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에 그 지역의 외양간은 주로 동굴이었는데, 외양간 역할도 하고, 목자들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숙소를 요셉과 마리아에게 기꺼이 내주고, 자기들은 들에서 노숙을 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누워 계셨던 ‘구유’는 우리나라 외양간의 여물통과는 다르고, 양을 먹이는 건초를 담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아기를 눕히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를 몰랐고,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인줄도 몰랐지만, 그들은 메시아를 맞아들인 ‘마음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말에서 ‘손님’은 요셉과 마리아처럼 딱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나그네를 뜻하고, ‘천사들’은 하느님을 뜻합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은 딱한 처지에 놓인 성가정을 접대하다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 하느님’을 접대한 의인들입니다.
3)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라는 말은,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8-29)
아기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워 계셨다는 것은, 인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음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 즉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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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루카 1,78)
오늘 제 1독서에서 다윗 임금은 하느님의 궤를 모실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먼저 다윗 왕가를 당신의 집으로 삼으시어 안정된 삶의 터를 마련해주시고 지켜주시며(2사무 7,10-11),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하십니다.(7,12) 이는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노래합니다. 그는 아들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구자가 되는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립니다.(루카 1,68) 오실 구세주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며,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1,72-75)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1,78-79) 주님의 성탄은 단순히 우리와 거리가 먼 초월적이고 신비스런 탄생 신화를 전해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 성탄을 참 기쁨 안에서 맞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성탄이 바로 우리 인간을 위하여 세상 안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사랑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겠지요. 죄와 어둠 중에 살아가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구원의 선물, 생명의 호흡으로 내놓는 것은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집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거저 받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게’ 섬길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1,75) 거룩함과 평화를 호흡하는 유일한 길은 현세적 가치와 육의 정신으로부터 떠나 주님을 갈망하고 사랑으로 그분을 섬기는 길 밖에는 없음을 기억해야겠지요.
또한 주님의 성탄은 오직 사랑 때문에 사랑을 위해 오시는 주님의 낮은 곳으로의 발걸음입니다. 낮은 곳이란 일시적으로 그저 나보다 더 안 돼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은 무엇보다도 내 영혼에 주님의 사랑을 채우고, 다른 이들이 언제든 들어와 자리 잡을 수 있는 ‘사랑의 쉼터’가 되도록 자신을 비우는 움직임을 말합니다.
저 낮은 곳 사랑의 쉼터로의 순례는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랑을 품고, 생명의 혼을 지니고 낮은 곳, 후미진 곳,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변두리로 달려가는 그 발걸음에 이미 성탄의 기쁨은 퍼지겠지요. 주님의 탄생을 앞두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찬미를 드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오시는 주님의 그 귀한 선물을 거룩하고 의로운 행실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 그것은 저 낮은 곳의 사람들과 겸손하게 나누는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마음의 움직임과 실천하는 삶으로 사랑의 선택을 함으로써 말구유로 기꺼이 내려오신 주님을 닮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모두 자신을 낮추고 비워 모든 것을 주 하느님께 되돌림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어주실(1,78-79)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아름다운 사랑의 어머니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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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주님 성탄 전날인 12월 24일의 독서와 복음은 대림 시기를 마무리하면서 곧 시작할 새로운 기쁨의 때를 준비하기에 꼭 맞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독서는 하느님께서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 임금에게 전하신 약속입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의 죽음으로 끝맺으며 한 시대가 종결되었음을 보여 주는 사무엘기 상권과 달리 하권에서는 다윗의 왕권에 그 초점을 둡니다. 특별히 오늘 독서인 7장은 다윗에게 영원한 왕권이 약속되고, 이 약속이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기에 사무엘기의 절정이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을 맞이하는 길을 닦으려 앞서 온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아들의 탄생을 지켜보며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즈카르야처럼 하느님의 크신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고픈 마음이 오늘 화답송 시편에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나는 내가 뽑은 이와 계약을 맺고, 나의 종 다윗에게 맹세하였노라. ‘영원토록 네 후손을 굳건히 하고, 대대로 이어 갈 네 왕좌를 세우노라.’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 그와 맺은 내 계약 변함이 없으리라.”
그렇다면 오늘 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별’은 의심의 여지없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심은 물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 확실합니다. 오늘 하루는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날입니다. “주님, 어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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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의 노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앞선 본문, 특별히 1장 59-66절과의 관계에서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자비에 대한 찬미를 표현하며(루카 1,64 참조), 유다 산악 지방 주민들이 아기에 관하여 제기한 질문(1,66 참조)에 답변하고 있습니다.(1,76-77 참조)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향한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즈카르야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백성들을 원수에게서 구하셨기 때문입니다.(시편 106[105] 참조)
하느님의 구원 행위는 그분께서 백성들에게 보여 주신 자비와 아브라함에게서 출발하여 이어 오는 계약에서 기원합니다. 노래의 전반부인 첫 번째 부분(1,68-75)은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강조하고 그 근거를 설명합니다.
노래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두 번째 부분(1,76-79)은 하느님께서 구원 약속을 성취하시고자 계획하신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 안에 두 인물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예언자로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백성을 준비시키는 선구자입니다. 다른 한 명은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즈카르야는 ‘높은 곳에서 찾아오는 별’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하느님의 구원 약속을 완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드님의 탄생이 자리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응답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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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 성탄 대축일 밤미사)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1,12)
고요한 밤 거룩한 오늘 밤에 태어나시는 그분을 인류는 기다렸습니다. 수 천 년을 모든 인간들이 애타게 그리워하며 기다리던 그분이 오십니다.
집을 잠시 나간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이처럼 기다립니다. 희망의 엄마가 돌아오시면 아이의 마음과 아이의 세상은 달라집니다. 기다리는 동안 겪었던 슬픔과 외로움과 두려움은 기쁨과 행복과 평화로 바뀝니다.
희망을 주러 오시는 그리스도는 궁전이 아니라 초라한 구유에서 만납니다. 유명하고 부유하고 세련된 곳이 아니라 초라하고 가난하고 촌스러운 곳에서 태어나십니다.
번쩍이는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가 아니라 캄캄한 별빛과 희미하게 가물거리는 촛불 아래서 희망의 그리스도는 발견됩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빛이 되어 오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고통과 가난과 억눌림 속에서 사는 이들은 그 희망을 찾습니다. 절망과 고통의 가난하고 억눌림 속에서 그 희망을 찾습니다. 주님은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오시기에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도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국가의 위기와 혼란으로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지도자의 어리석음은 사람들에게 희망보다 절망을 줍니다. 오시는 그리스도처럼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봉사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지도자를 기다립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약자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포대기에 싸여” 오시는 그리스도의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오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해도 슬픔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오신 겸손하고 가난한 그리스도를 잊는다면, 우리는 사람들에게 절망을 줍니다.
우리는 추운 한겨울에 절망으로 떨고 있는 약한 이들에게 따뜻한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절망하는 이들을 위해 봉사하며 희망이 될 때, 오늘은 사람들에게 기쁜 메리 크리스마스가 됩니다.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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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1972년, 철학자 휴버트 드 레이퍼스는 자신의 책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에서 컴퓨터에게 체스를 가르치려고 한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는 인간 초보 플레이어조차 이길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컴퓨터로는 주방 보조를 대체하는 것 정도로 멈출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이 예측이 틀린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컴퓨터가 세계 체스 챔피언을 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주방 보조는 아직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직 아무리 정교한 로봇도 바쁜 레스토랑의 테이블에서 접시를 치우고, 식기 세척기 안에 깨지기 쉬운 접시와 유리컵을 넣고 꺼내는 데 필요한 복잡한 기술을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로지 주님만이 아시며, 우리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길 따름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종종 어떤 일을 행하는데 이렇게 될 것이라면서 수정하거나 멈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다양한 방법으로 이끄시는 그 손길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겸손과 모든 가능성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게 됩니다. 갓 태어난 아들 세례자 요한을 안고서 아버지인 즈카르야가 주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잉태 소식에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판단했다가 벙어리가 되었던 즈카르야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달라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미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관점으로 미래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녀에 대해 세속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돌잔치에서 아기의 미래를 예측해 보는 소소한 행사인 돌잡이가 있습니다. 엽전, 마패, 붓, 복주머니, 오방색지, 명주실, 바늘 쌈지 등이 준비됩니다. 이 중의 하나를 잡으면 아이의 미래가 보인다는 것이지요. 즉, 엽전을 잡으면 인생에 재물 운이 따른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준비된 이 모든 것은 세상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미래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즈카르야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벙어리가 되는 하느님 체험을 통해 완전히 바뀌고 맙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즈카르야의 노래’를 노래합니다.
이제 오늘 밤이면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대림 시기의 마지막 날을 보내며, 우리 역시 세상의 관점보다 하느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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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하느님>
루카 1,67-79 (즈카르야의 노래)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 하느님>
우리 하느님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와 똑같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몸소 오시어 함께하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를 당신과 갈라놓은
우리의 헛된 울타리를 허무시어
우리가 당신과 함께할 수 있게 하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를 위하는 체 오히려 죽음으로 내모는
우리의 이기심과 무관심과 탐욕으로부터
우리를 풀어 구원하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가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우리가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김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하나 되게 하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가 어둠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우리가 빛나는 살림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
우리가 더불어함께 평화를 이루도록 북돋우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 닮게 하시고
우리를 당신보다 앞서 온 누리에 보내시어
우리가 당신의 사람임을 드러내게 하시는
우리 하느님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우리와 똑같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몸소 오시어 함께하시는
우리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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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국민은 각자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 앞으로 지도자가 되겠다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권위는 고사하고 기득권을 지키려는 속 보이는 모습들이 멀미가 날 지경입니다.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 백성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약속을 어길 수도 있고, 때로는 파괴할 수도 있는 변덕스럽고 약한 존재이지만, 하느님은 절대로 파기하시지 않고 요지부동하십니다. 하느님은 약속을 기억하시고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루카 1,75) 이것은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이요, 영적인 구원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1,78) 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 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 40,3)고 외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뵙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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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 삶의 성경>
-렉시오 디비나 하기-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시편 89,1)
믿는 이들의 삶의 역사는 그대로 한 권의 성서요 하느님 자애와 진실의 발자취입니다. 삶의 중심이자 인도자이신 주님께 충실히 협조하여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성경을 하루하루 평생 정성껏 써가야할 거룩한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갔을때 유일하게 바쳐야 할 것이 내 삶의 성경책입니다.
예전 요셉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썼던 글이 생각납니다. 수차례 나눴지만 늘 새롭습니다. 요셉수도공동체 역시 하나의 성서로 보고 렉시오 디비나해본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과 더불어 공동체 역시 저는 또 하나의 성경으로 간주합니다. 제가 위인들의 자서전, 평전, 회고록을 주로 즐겨 읽는 것도 하나의 성경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참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진실하게 산 이들의 삶은 성경처럼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합니다. 삶은 평생 죽을 때 까지 배워야 하는 배움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수도공동체라는 성서를 나름대로 렉시오디비나를 한 결과 넷으로 요약됨을 발견했습니다.
1.모든 것은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필요했다.
3.모든 것은 지나간다.
4.그러니 현재를 살라(carpe diem).
넷의 요약 결론에 만족했고 많은 이들이 공감했습니다.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모든 것이 감사했다"가 될 것입니다. 제 지론은 성경의 렉시오디비나도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신구약성서의 렉시오디비나가 기본이고, 다음에 자연성서, 다음엔 내 삶은 물론 공동체라는 성서입니다. 내 삶의 성서 렉시오 디비나 역시 얼마나 풍요로운지요! 이렇게 살 때, 결코 하루하루 충실히 살게 됩니다. 결코 함부로, 되는대로 막 살지는 못합니다.
하루하루가 써가는 살아있는 성서의 한쪽으로 아직은 미와의 내 삶의 성서, 내 공동체의 성서라는 것입니다. 결코 무의미한 삶이 아니라 하느님과 우리가 협력하여 써내려 가야 할 의미 충만한 내 삶, 내 공동체의 성서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면담고백성사를 할 때는 성서를 렉시오디비나하는 마음으로 그들 삶의 이야기를 경청합니다. 옛 현자의 고백도 삶이 하나의 성서임을 입증합니다.
“진실한 삶으로 들어가본 사람만이 인생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한다.”<다산>
“죽을 때가 되었을 때, 한 상자의 글도 전할 것이 없다면 헛되게 산 것이다.”<다산의 여유당전서>
생애 마지막 한 권의 내 삶의 성서가 없다면 헛산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평생 오래 살았어도 쓸 이야기가 없는 텅빈 공허와 허무, 무의미한 삶이었다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할까요? 그 허기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하여 삶의 여정을, 삶의 성서를, 일일일생, 일년사계로 압축하여 어느 시점에 있는지 살펴보며 거품이나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짧은 세월, 기도하고 공부할 시간을 생각하면 때로 먹는 시간도,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오늘 12월24일, 주님 오심의 성탄이 임박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가 내 삶의 성서, 내 공동체의 성서, 내 나라 공동체라는 성서를 잘 렉시오디비나하도록 우리를 일깨웁니다. 과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성찰하기에 참 절호의 오늘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나탄의 신탁이요 복음은 즈카르야의 찬가입니다. 두 독서의 특징은 동사들의 주어가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살아 움직이는 동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공동체를 통해 이루신 업적을 노래하는 것이요, 그대로 일종의 렉시오디비나입니다. 내가, 공동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해 주신 것이라는 것이요, 이런 깨달음이 더욱 회개를 촉진하고 겸손과 순종,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도록 마음을 움직입니다. 오늘 제1독서 나탄의 신탁도, 복음의 즈카르야의 찬가도 주어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위업을 나열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었다.”
많이 생략했지만, 모두가 하느님이 주어가 되어 다윗을 위해 해주신 일의 나열임을 깨닫습니다. 다윗의 무지를 일깨우며 회개에로 인도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주님이 하셨다는 자각이 겸손이자 믿음입니다. 일례로 내가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수도원에 보내 주셨다는 자각입니다. 새삼 우리 요셉수도원 수도자들 하나하나가 하느님이 보내주신 하느님의 선물이자 "신의 한수"임을 깨닫게 되니 저절로 회개와 겸손이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됩니다.
즈카르야의 찬가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렉시오디비나요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미의 노래가 됩니다. 가톨릭 교회가 수천년간 아침기도때 마다 즈카르야와 함께 이스라엘공동체는 물론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공동체를 렉시오디비나 하는 마음으로 부르는 찬가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하는 즈카르야의 노래가 참 은혜롭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위업을 렉시오디비나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즈카르야와 우리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모두가 바칠 찬가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에게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어지는 모든 내용이 하느님이 주어가 되어 주도권을 잡고 이루신 위업에 대한 감사와 찬미로 가득한 즈카르야의 찬가입니다. 얼마나 역동적인 하느님이요 이스라엘 공동체요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인지요! 마지막 구절에서 구세주 탄생의 예고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하느님의 구원활동이요, 오늘도 그대로 이뤄지는 구원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날마다 대림이요 성탄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어,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고, 오늘 하루도 당신 중심으로 당신께 최선을 다해 협조하며, 우리 삶의 성서 한쪽을 잘 쓰도록 도와주십니다.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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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찬미는 어떻게 나오는가?>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하느님 찬미는 어떻게 나오는가?
오늘 저는 이 주제로 오늘 복음을 묵상했습니다. 즈카르야의 입에서도 마침내 찬미가 쏟아져나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앞두고 모두 성령을 받았음에도 그 홀로 받지 못하였었고, 모두 말을 할 수 있었음에도 그 홀로 입이 닫혀서 말을 하지 못하였지요.
그런 그가 이제 말을 하게 된 것이고, 찬미를 터트리게 된 것인데 말 못하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기에 그 찬미가 더 감격적입니다.
그러므로 즈카르야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찬미는 긴 침묵을 거치고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침묵은 단순히 언어의 중단이 아닐 것입니다.
일체 어떤 표출을 하지 않음이고, 깊은 내적 침묵이요 숙고요 묵상을 말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부덕함과 부족함을 깨닫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진리와 그분의 진실한 뜻을 깨달아 구원되는 체험을 통절하게 한 뒤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찬미는 무엇보다도 내 안의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을 내 안에 모셔 들여야겠지요.
프란치스코는 우리가 성체를 모시는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 안의 성령께서 모시는 것이라고 했지요. 성령으로가 아니면 그것이 참으로 주님의 몸이란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면서.
마찬가지로 진실한 찬미는 인간 혓바닥의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성령을 모셔 하느님을 만난 사람만이 토해낼 수 있는 것이고, 즈카르야처럼 하느님 구원을 체험한 이만 토해낼 수 있는 겁니다.
즈카르야는 이 찬미를 토해내는 데 10개월이 걸렸는데 우리는 얼마가 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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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루카 1,67)
<마라나타!>
오늘 복음(루카 1,67-79)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8-69)
즈카르야는 먼저 다윗 집안에서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노래를 드립니다. 이어서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기리면서 메시아의 선구자인 그의 역할에 대해 예언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고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루카 1,76-77)
성탄이 임박했습니다. 오늘 밤에 우리 구세주께서 탄생하십니다. 그것도 가장 낮고 누추한 곳인 마구간에서 태어나십니다. 마구간은 성탄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그 의미는 우리 주님께서 죄와 허물로 얼룩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고, 낮고 누추한 곳에 있는 이들의 친구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를 판단하고 단죄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모습입니다. 저도 이런 모습을 가장 싫어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위는 나의 권한 밖의 일이고, 나의 구원의 큰 장애가 되는 죄입니다.
끊임없이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예수님의 생각과 말과 행위에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또 하나의 친목 공동체 쯤으로 여기면서 적당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주님 성탄에 앞서 마지막으로 점검해보고 회개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냉담 중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손을 잡고 함께 주님 성탄 대축제를 지내러 갑시다! 그리고 기쁘게 아기 예수님을 맞이합시다!
"마라나타(Maranatha)"
"주님, 어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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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5ㅇ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루카 1, 78)
어디서나
우리의
삶을 비추는
하늘의 빛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비추는
가장 빛나는
하늘의
빛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길을 만드시는
빛이 있습니다.
기다림 끝에
보게되는
한줄기
빛입니다.
빛은
빛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밝은
빛의 길을
보여줍니다.
별빛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별빛같은
사람의 탄생은
그냥 오지
않습니다.
어둠을 뚫고
우리에게
오십니다.
빛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참된 빛이
우리 삶에
오셨습니다.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빛은
나눔입니다.
나눔은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빛을 찾아
걸어가는
우리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빛은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행하는
나눔이
되라고
성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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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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