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가 일본과 한일고대사 논쟁을 벌일 때는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가정(假定)으로라도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나라와 일본 간의 고대사 논쟁은 끝이 없을 것 같기만 하다. 우리나라는 고대에 일본을 지배했다고 일본은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두었다고 서로 주장한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어느 교수는 자기의 전공을 제쳐놓고 백제가 일본을 지배했으며 일본 천황은 백제인이었다는 논문을 써서 세계 역사학계에 발표했다고 한다. 한일간의 고대사 문제가 양국의 역사 전문가뿐만 아니라 국민의 관심사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양국은 한 치의 양보도 없어 논쟁이 끝이 날 것 같지가 않으니 잠깐 세계 역사학계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기로 하자. 그런데 세계 역사학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우리는 절망감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일본 쪽 주장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놀랍게도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대세계사’ 책에서조차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에 임나일본부를 두었다고 쓰여 있다. 물론 그 책의 역자가 세계 역사학계의 한일 고대사 부분을 그대로 베꼈기에 그렇게 된 것이리라. 언젠가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지금까지 외래세력에 의해서 지배된, 굴종의 역사만 갖고 있는 한국이 처음으로 세계를 향하여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그 기사는 세계 역사학계의 한국사 부문에 의거하여 쓰였음에 틀림없다. 백제가 일본을 지배했으며 일본 천황은 백제인이라는 앞의 서울대학교 교수의 논문이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은 세계 역사학계에서 인정을 한 것이 아니라 흥미를 보여준 것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경제학과 교수까지 나서서, 그토록 분투하였는데 결과는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이십 세기에 들어와 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향하여 발돋움한 것은 결코 아니다. 백제, 신라는 동방의 로마제국이었다. 세계역사학계에 한국 고대사의 진실을 알려주어 수용하게 하는 일이 시급하다. 한국의 역사학계에는 이제라도 발상의 전환을 하고 논쟁 방식을 재검토하는 일이 절실한 것 같다.
한일간 고대사 논쟁에는 현재 우리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한다. 논쟁에는 대폭적인 양보도 때로는 필요한 것이다. 중국과 고구려사 논쟁을 벌일 때는 고구려인의 구십 퍼센트가 중국에 흡수되었다는 전제도 과감하게 수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전제는 어디까지나 가정(假定)이며 중요한 것은 결론이다. 일본과 고대사 논쟁을 할 때는 중국과의 논쟁의 경우처럼 전제를 대폭적으로 양보하여 수용하고 나서야 한다. 칠지도는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바친 것이며 한반도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일본 측 주장도 때로는 과감하게 가정으로 수용하면서 논쟁을 벌여야 한다.
십몇 년 전의 일이다. 필자가 서점에서 이런 저런 책을 뒤척이다가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한국어는 우랄 알타이어가 아니라 남방 인도계 언어(길약어)라고 어느 국문학자가 밝힌 것이다. 필자는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민족은 몽골계 족이며 우리말은 우랄 알타이어 계통이라고 반복적으로 교육을 받아 그것이 이미 피와 살이 되다시피 하였기에, 우리말이 남방 인도어계라는 그 학자의 견해에 대해서 그때 강한 반발감이 일어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관변 국어학계에서 벌써 그 학자의 견해를 수용하였다는 것이었다. 필자보다 백배나 완고한 관변 학자들이 수용했다니 필자로서는 수용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때의 충격은 자신의 조부(祖父)가 친조부가 아니라 의붓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글이 인도 어느 소수 민족의 글하고 거의 같다는 신문보도를 본 적이 있다. 그렇다.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가 아니라 남방 인도계어였으며 한국민족은 몽골계 단군 부여 족이 아니라 남방인도계 족이었던 것이다.’
물론 국가 민족에게 생물학적인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문화적인 것이다. 한국의 정신문화는 몽골계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의 정신문화를 이어 받은 것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때까지 한국은 생물학적으로도 몽골 단군조선 부여 계통이라는 것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관계로 그때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한국 고대사에 관해서 밑바탕부터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일 고대사를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에 남방 인도계 사람들이 한반도와 일본 땅에 들어와 나라를 세웠다. 일본이 땅이 더 크고 기름지다고 해도 당시 지정학적으로 열등한 지역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인이 곧 일본지역인을 지배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에 걸친 통일 왕조가 있었다. 왜(倭)는 사실은 일본국이 아니라 한일간에 걸쳐있는 왕국이었던 것이다. 물론 관료체제가 아닌, 원시적인 왕국이었을 것이다. 일본 지역은 여자 제사장이 지배했던 것 같다. 그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외의 많은 역사학자들의 연구논문들이 나와 있다. 어느 일반인이 그에 대해 연구하여 신문에 발표한 것도 필자가 언젠가 본 적이 있다. 단지 그 사람은 그 왕국을 왜라고 안하고 가락국이라고 하였다. 한일간에 걸친 왕국인 왜의 존재에 대한 연구는 일본 학자들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그런데 한일 양국의 주류(主流) 역사학자들은 그것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백제인, 가야인이 일본을 지배하였고 일본 천황은 그들의 자식이라고 하고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에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진실을 짐작하면서도 왜 그렇게 외골수로 고집만 부리고 있는 것일까.
왜왕국의 실체를 인정하게 되면 한반도 일본부 존재의 논거가 된다. 그래서 한국의 학자들은 그 왕국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 같다. 그런데 앞의 왜의 실재를 인정하면 임나일본부 존재의 논거가 되는 데도 일본학자들은 어째서 그것을 인정하려 않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뻔하다. 한반도와 일본에 걸쳐 있는 왜왕국의 실재를 인정하면, 그 실체를 밝혀야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왜왕국은 원래 일본국이 아니라 한반도 국가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일치하여 한반도와 일본 땅에 걸쳐있는 왜왕국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진실은 결국 밝혀지게 되어 있다.
왜왕국의 발전 과정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어느 때인가 북방 민족이 한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수한 문화와 무기를 갖고 있는 그들에게 한반도인들은 순식간에 정복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단군조선이 망한 뒤 왕족이 한반도 남쪽으로 내려가 한(韓)을 세웠다고 한다. 다시 부여(夫餘) 족이 내려와 백제를 세웠다. 신라, 가야(伽倻)도 외래 민족이 세운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그 후 외래인이 또 들어와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위대한 임금인 법흥왕, 진흥왕은 중국의 북방민족인 선비(鮮卑) 족 모용씨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속국에 불과했던 낙후된 국가 신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 통일을 완수한 것은 바로 중국 대륙을 주름잡던 선비족의 한 집단에 의하여 우수한 대륙문화가 신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실제적으로 증명한 연구 내용이 텔레비전에 방영되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고 한다.
재야 사학가들은 우리 선조가 대륙을 주름잡으며 중국인들에게 호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실이 그러하지 않은가. 우리 선조가 대륙을 주름잡았다는 재야 사학가들의 주장이 미친 소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맞는 것이 아닌가. 당시 신라에 들어온 집단은 한반도인에 비해서 아주 적은 수였다고 해도 그들은 왕, 귀족이 되었으며 신라의 정신문화를 지배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한반도인의 선조가 되었다. 선비족이 대륙을 주름잡으며 중국인들에게 호령한 역사적 사실은 신라의 모용씨 집단에 의해서 그들의 후손인 한국인들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단군조선과 부여 종족이 한반도로 들어온 것은 ‘게르만 민족 대이동’ 같은 것이 아니라 그저 일개 집단이 들어온 것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들은 우수한 문화와 무기로 단번에 왜왕국을 점령할 수가 있었다. ― 기마민족의 한반도와 일본 정복설이 있는데, 사실 일단의 기병대라도 당시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낙후된 지역 한반도 왜왕국은 단번에 정복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복민의 수효라는 것은 피정복민의 수효에 비하면 바닷물에 몇 방울 물 같은 것이었다. 소수의 그들이 다수의 한반도인들을 강압으로만 지배할 수는 없었다.
한편 왜왕은 북방으로부터 한반도로 무장 집단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부득불 일본 땅으로 피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왜왕국의 수도는 일본 지역에 위치하게 된다. 왕과 상층부가 대거 일본 땅으로 건너가자 한반도에는 그때 공동(空洞)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의 일이었다. 당시 일본 지역이 더 크고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해도 지정학상 열등한 지역으로 경제력이라는 것은 중국의 일 개 군이 아니라 일 개 현, 한반도의 한 부분지역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왜왕이 수도를 일본으로 옮긴 후에도 실상은 왜왕실은 한반도 지역 거주인에 의해서 여전히 지배되었을 것이다. 왜왕국은 한반도의 경제력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가야(伽倻)의 일본지역 지배는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밝혀내고 있는 사람들은 학계뿐만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반인 가운데에도 있다. 그에 대한 유물도 한국과 일본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본고대사에 왜왕이 한반도국가 왕들 위에 군림했다고 나온다. 그런데 그때 일본지역은 후진지역이었다. 일본고대사에 따른다면 창과 칼로 무장한 군대의 왕이 총과 대포로 무장한 군대의 왕들 위에 군림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일본학계에서도 일본왕 군림 내용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자 한국학계에서는 일본고대사 그 내용은 전설일 뿐이라고 일축하여버렸다. 그러나 동서 어느 국가의 고대사에도 전설적인 내용이 있으며 그 속에 진실이 담겨 있는 법이다. 사실, 그때에 왜왕은 한반도 무력에 의존하여 한반도국가 왕들 위에 군림했던 것이다.
한반도로 들어온 부여인은 한반도인을 지배하는 방책으로 형식적이나마 왜왕을 받들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 여왕을 받드는 것과 흡사한 것이었다. 사실, 원시적 형태의 국가였던 왜국은 부여(백제)인에 의해서 국가 같은 형태를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백제왕이 칠지도를 왜왕에게 바쳤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 한국인은 몹시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칠지도와 광개토왕비의 글자가 일본인에 의해서 날조되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는 일단 현재의 칠지도와 광개토왕비의 글자들을 전제(가정)로나마 수용하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으로서의 옳은 태도이다.
물론 당시의 실상은 백제인이 완전히 왜왕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외의 연구논문들이 이미 많이 나와 있으며 일본에도 그것을 증명하는 수많은 역사적 기록, 유물(언어, 관습 등 포함)이 있다. 단지, 한국 학자의 그 연구내용 중 일본 천황들이 백제나 가야 왕족의 자식들이라는 부분만이 필자의 견해와 다를 뿐이다.
백제나 가야가 일본을 지배했으며 그 왕실의 자손이 일본 천황이라는 것을 논증하는 국내의 훌륭한 연구논문들이 많이 있다. 실은 필자의 이 글도 전적으로 그 글들에 의존해 쓰였다. 그런데 그 글들은 구십 퍼센트 옳은데 그 나머지가 그른 것 같다. 물론 어차피 수천 년 전의 일을 다룬 논문들이다. 일본 천황은 가야, 백제의 왕족이라는 가정(假定)을 내릴 수가 있다. 그런데 그 논문들은 가정이 아니라 확실한 결론(結論)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훌륭한 논거들도 일거에 무너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역사학계에서도 그 논문의 본문을 보고 긍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천황은 가야, 백제 왕족이라고 확실히 결론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결국 수용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한반도 국가들이 왜왕에게 조공했다는 무수한 역사적 기록들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전설이거나 날조된 것이라는 한국학자들의 주장을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수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계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측 주장에도 논거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수용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야기를 앞으로 돌리자.
고대 왜 연방국가, 원시적 형태의 연방국가가 일본과 한반도에 걸쳐서 있었다. 그 후 왜의 한반도 지역 영토는 점점 줄어들다가 삼국시대에는 완전히 소멸된다. 그러나 한반도 남쪽 사람들은 여전히 왜인이라고 불렸으며 왜왕의 한반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국내외에 연구논문들이 있으며, 한국과 일본 중국의 역사기록을 살펴보아도 그것을 추정할 수가 있다.
왜국가연방이 원시적 형태의 연방일 뿐만이 아니라 이익에 따라 연방국가 상호간 반목과 질시가 성행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다. 백제가 형식으로 받드는 왜왕도 왜인임에는 틀림없으나 사정변화에 따라 한반도 출신, 일본지역 여자제사장 출신 등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방 각 국가의 왕실이 취약함에 따라 왜왕은 각 국가에게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왜왕은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한반도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국가 왕족들이 외래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구려도 남하하여 한반도가 본거지가 됨에 따라 왜왕의 권위를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 고대사에 오 왕이 나오는데 그들의 사치생활이 고대 페르시아나 로마 제왕들 이상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당시 일본국의 경제력이라는 것은 중국의 일 개 현에 불과했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따라서 그 기록에 일본 학자들조차도 냉소적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사의 기록인 이상 그렇게 간단히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시 백제는 동방의 로마제국이었다. 백제의 부는 페르시아, 로마 제국에 버금갔다. 그 백제가 명목상이지만 시종일관 왜왕을 받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혹 왜국의 경제력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고 해도 왜왕실만은 페르시아나 로마 왕실 못지않은 사치생활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왜왕이 수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해가 뜨는 나라의 천자가 해가 지는 나라의 천자에게 보내노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수나라 황제는 다시는 이런 글을 자기 앞에 올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수나라 황제가 그 편지를 보고 분격해(심각해)한다. 만일에 왜국이 일본 땅만의 적은 나라였다면, 그런 글이 중국의 황제에게 올려지고 또 황제가 경제력이 중국의 일 개 현에 불과한 나라의 왕의 미친 소리에 분격해하고 심각해할 것이 과연 있었을까. 따라서, ‘왜는 중국의 일 개 현에 불과한 작은 국력의 나라가 아니라 중국에 버금가는 큰 국력을 갖고 있는 해상왕국 백제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나라였으므로 수나라 황제가 왜왕의 그런 편지에 분노하고 심각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동방의 로마제국인 해상왕국 백제가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이유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것은 중국이 수(隋), 당(唐) 통일 왕조가 되어 운하를 건설하고 해상을 봉쇄하였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중국에 비해 낙후된 지역, 중국의 한 개 군에 불과한 작은 지역 한반도의 국가이다. 그들이 중국에 버금가는 국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해상 무역을 통해 중국 경제를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해상이 봉쇄당하면 해상왕국 백제는 순식간에 몰락 할 수밖에 없었다.
동방의 로마 제국이었던 백제에 관한 기록이 중국역사서에 애매하게만 있게 된 것은 재야 사학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춘추필법에 의해서만 그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 백제와 신라의 해상을 통한 대륙진출은 국가주도적인 것이 아니라 민간 상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대륙 점거나 활약이 애매한 형태로만 역사서에 남게 되고 동방의 로마제국다운 유적을 남기지 못하게 되고 만 결과를 빗은 것이다. (신라는 쇄국정책을 취했다고 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 경우에는 순수민간해양 국가였다.) 중국이 통일 왕조가 되어 해상을 봉쇄하자 절망하고 분격한 사람들은 백제 상인들이었다. 왜왕이 수황제에게 보낸, 조롱하는 언사의 편지는 왜왕실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백제 상인들의 울분의 토로였던 것이다.
동방의 로마제국이었던 백제에 대해서는 머릿속 상상이 아니라 학술적으로 타당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해상왕국 백제가 실재했다는 것이 공인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본 글의 전개상 단순한 사견이라도 더 언급해야만 할 것 같다.
백제의 대륙지배 근거를 다른 차원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수, 당은 전국력을 투입시켜 생사를 걸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중국역사에 항상 등장하는 북방민족국가 중의 하나였다. 유독 그 고구려만 멸망시키려고 수, 당이 생사를 걸고 싸움을 벌인 것이 너무 어처구니없게 생각되지 않는가. 수, 당의 목적은 고구려 외에 또 다른 국가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백제는 해상을 통해 중국 경제를 지배하고 있었다. 수, 당 왕조가 해상을 봉쇄시켰지만 그런 일이 중앙 정부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해상을 봉쇄하기 위해서는 백제를 멸망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당시 백제가 중국대륙을 지배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간 상인 중심이었으며 한반도의 백제국은 중국의 일개 군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군사력의 나라였다. 그러나 수, 당은 해상을 통해 해상왕국 백제와 싸움을 벌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백제와 싸움을 벌일 경우 북방의 강국 고구려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수, 당은 먼저 고구려 공략에 나선 것이었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당나라도 고구려와 대결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 기실 고구려는 오히려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국과 정면 대결해 승리한 고구려는 당연히 중원으로 진군(進軍)하여야 하는 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이제 당왕조는 대전(大戰)의 후유증을 치료하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왕조처럼 자칫 멸망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당나라는 수나라가 대전의 후유증을 치료하지 못해 멸망한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다시 존망을 건 모험을 하여 한반도 국가와 싸움을 벌인다. 당나라가 그러한 것은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왕조는 백제를 멸망시켜 해상을 봉쇄하지 않으면 존속하기가 어려웠다. 백제가 중국 왕조의 존립에 위협이 되고 있었다는 것은 당대의 인물인 최치원의 말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고구려는 대륙세력을 피하여 수도를 한반도로 옮겼다. 왕실이 한반도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왜왕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은 필요했다. 그런데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그때 고구려는 왜왕에게 필요 이상으로 예의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 것은 아마 백제의 권고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력한 군사력의 고구려가 맹주국이었지만 실제 주도적인 나라는 중국해를 지배하고 있는 백제였다. 백제왕실이 아니라 백제 상인들이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왕조는 생사를 걸고 백제와 대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은 이번에는 작전을 바꾸어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바로 백제 공략에 나선다. (대륙의 백제 상인 중 다수가 결국에는 당왕조에 협력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윽고 백제 공략에 성공하였다. 동방의 로마였던 백제가 어째서 그처럼 쉽게 무너져버리고 말았는지에 대해서 더 살펴보기로 하자.
백제의 대륙 지배는 어디까지나 민간상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국력은 분산적인, 통합이 어려운 것이었다. 군사력도 강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한반도 내 백제왕조의 군사력은 별 것이 아니었다. 동아시아 지배자는 백제왕실이 아니고 백제상인들이었고 그들의 부는 태반이 중국대륙에 있었다. 또, 그들은 한반도 백제보다는 고구려, 신라 등 강국의 위협이 없는 일본지역에 자신들의 재화를 두기를 선호했을 것이다.
신라는 그 무렵 법흥왕, 진흥왕 등 영명(英名)한 왕들 덕택으로 막강한 국가가 되어 있었다. 중국이 통일 왕조가 되어 해상을 봉쇄하여 백제의 국력이 쇠약해지게 되자 신라는 백제를 압도하여 동해와 남해의 해상권을 장악한다. 당시 백제의 해군(海軍)은 일본, 중국, 한반도국 삼국의 무사 출신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국력이 쇠약해지자 해군력이 급속히 쇠약해지게 되었다.
백제왕실의 군부대도 삼국의 무사출신 용병집단이 주축이었을 것이다. 계백은 오천 명을 이끌고 김유신의 오만 대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네 차례에 걸쳐 승리한다. 용병집단이 뛰어난 무인들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용병집단에게는 애국심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애국심에 가득찬 화랑도의 신라군에게 패하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신라 진흥왕 때는 백제가 국력이 아직 그렇게 쇠약해지지 않았는데도 압도당한 것은 진흥왕의 영도력 외에 양군의 애국심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북위(北魏)가 수십만 기병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다는 중국의 역사 기록이 있다. 해상왕국 백제는 대륙에 기반을 둔 국가이기에 한반도의 백제국은 신라와 고구려에 적시에 적절하게 대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며 중국이 통일왕조로 점차 발전해감에 따라서 국력이 약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변하는 대륙환경으로 인하여 백제 상층부가 동요하여 왕실과 귀족(상인) 간에 또 귀족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귀족 중에는 친중국파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가 그 후 백제 의자왕 군에게 압도당하여 당나라 황제에게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륙에 수당 통일 왕조가 서자 대륙의 백제군이 거점을 잃고 한반도로 철수하여 백제군이 일시적으로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백제군의 전력은 계속 유지될 수가 없었다.
한마디로 당시 백제왕조로서는 두 강국의 양면 공격을 막아낼 길이 없었다. 왜 국가 연방은 민간상인 중심의 어설픈 체제로 통합된 군사력을 갖고 있지 않아 외부의 강한 군사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백제가 당나라의 침입을 받자 왜왕은 당연히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왜군이 당군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당은 이윽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수백 년간 지속된 한반도인의 대륙지배를 그렇게 간단히 종식시킬 수는 없었다.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에 동부 중국에는 당왕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강국인 한반도계 국가(이정기 왕국)가 세워져 한동안 존속된다. 그 후로도 다시 신라방, 장보고의 해상활동 등 민간상인 중심의 한반도인 대륙지배가 계속된다. (중세에 동아시아를 진동시킨 왜구는 백제인의 후예였다는 국내 연구서가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왜를 비류백제로 대치시켜서 가뜩이나 혼미 속에 있는 한국고대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해상왕국 백제에 대해서 사견이나마 살펴보았다. 다시 한일 고대사 문제로 돌아가기로 하자.
백제가 망한 뒤 대륙과 한반도의 백제유민들이 대거 일본 땅으로 들어가게 된다. 백제의 문화와 부(富)가 그대로 들어가게 된 셈이다. 이때부터 일본 땅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한반도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국가다운 경제력을 갖추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외의 학자들에 의해서 폭넓게 연구되어 실제적 논거들이 무수히 많이 있다.
백제가 망한 뒤 통일 신라왕조가 서고 한반도와 일본 땅 간의 유대는 절연된다. 한반도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신라왕실은 부여계 백제왕실처럼 왜왕실을 섬길 필요가 없었다. 그보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왜군을 격파하고 백제를 멸망시켜 왜 국가 연방을 와해시켰다. 신라왕조가 왜왕을 형식으로나마 받들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백제인들이 사실상 왜국을 지배하였고 그 백제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해서 원한이 깊었을 것이다. 당시 신라는 백제를 이은 동방의 로마제국이었다. 일본 지역은 그때서야 발전을 시작한 아직 낙후된 지역이라 신라는 일본에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에 일본 땅과 한반도 간의 유대는 절연되어 양국은 독자적인 국가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오랜 세월 동안 한 몸 같았던 고대 일본국과 한반도국 간의 유대가 그렇게 쉽게 절연될 수는 없었다. 우선 신라는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한반도인을 통합시켜 진정한 통일을 완수시켜야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왕의 협조가 필요했다. 왜국은 그때 비약적인 발전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그간 워낙 문화, 경제적으로 한반도에 의지하여 지탱하여왔는지라 신라에 의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양국의 교류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왜왕국이 신라 공략을 도모하기도 하였을 것이고, 한 때는 신라왕실의 지원을 받는 친신라계가 백제계를 몰아내고 왜왕실을 장악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백제의 멸망 뒤 단절된 한일간의 관계는 세월이 흘러갈수록 심화되어 망각의 시대로 들어서,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왜왕조는 한국고대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한국고대사가 정립하게 된다.
이야기를 맨 앞으로 돌리자. 이제 한국은 한일간의 고대사 논쟁에서 발상의 전환을 하여야 한다. 우리가 지금 불리한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전제가 불리한 것이라고 해도 과감하게 수용하며 논쟁에 나서야 한다.
지금 일본에는 한일간의 고대사 문제를 실제적으로 증명하여 해결할 대량의 유물이 묻혀있다. 일본의 학자들이 천황묘를 발굴하여 고고학적 연구를 하다가 당황하여 다시 묻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일본 학자들은 한국학자들이 백제와 가야가 일본을 세웠으며 일본 천황은 백제, 가야 왕실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여유를 갖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일본 역사학계에도 밝혀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
왜왕이 백제, 신라, 가야 등의 한반도 국가들을 속국으로 인정하여 줄 것을 중국의 황제에게 요청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서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일본 지역의 섬 등에 백제, 고구려, 신라 등 한반도 국가의 분국(分國)이 있었다. 왜왕이 요청한 것은 그 분국을 말하는 것이다.’ 그 논문이 발표되자 일본 역사학계에 충격으로 큰 요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실로 우스운 사건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천년왕국이다. 어찌 왜왕이 중국황제에게 일본 지역 작은 섬이나 동네를 일러 백제국, 신라국이라고 했겠는가.
그런데 일본학계에서는 어째서 북한학계의 ‘한반도 국가의 분국’ 주장에 호들갑을 떨었던 것인가. 혹시, 한국학계에서 올바른 연구를 하여 진실이 밝혀지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른 방향으로 연구해나가게 하려고 일본학계에서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한국의 학계에서 ‘분국설’, ‘백제가야왕족 일본천황설’, ‘날조설’을 연구하여 발표하면 한편 쾌재를 부르면서 말이다.
한일 고대사 연구는 아주 보람 있는 일인 것으로 생각된다. 수천 년 전의 일이니 머릿속 상상으로 하여 연구해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에는 한일 고대사에 관한 실제적 증거물들이 땅 속에나마 대량으로 있다. 언젠가는 그 증거물들이 백일하에 나타나 역사적 진실이 모두 밝혀지게 될 것이다.
실제적 증거들이 나타날 때 앞의 필자의 주장은 머릿속 상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다. 필자의 연구는 보람 있고 값진 일이 아닌가. 물론 실제적 증거들이 나타나 필자의 주장이 전면적으로 부정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머릿속 논거들에 의해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증거들에 의해서 부정되는 것이니 역시 보람 있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 본 글은 순전히 필자의 머릿속 기억을 중심으로 하여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개개의 단어의 선택에 문제가 있을 수가 있다. 그 점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불원간 필요한 주(註)와 참고문헌을 세세히 밝힌 학술적 논문을 작성하여 발표할 예정이다.
★이글은 제가 쓴글이 아니고 네이버에서 출처한 글입니다.....내용이 꽤나 재미있어서
처음글인데도 불구하고 복사 붙여넣기 신공을 쓴점 사죄드립니다.-_-;;;
어찌됐건 이 글에 대한 이 까페 사람들의 생각을 묻고싶습니다.
왜의 한반도설은 저도 다소 긍증적으로 보고있고 관심도 가긴 하지만 위의 내용은 상당히 비약이 심한것 같군요. 백제와 연계되기시작한 6세기(최대로 잡아야 5세기 정도....) 이전의 왜열도는 잘 쳐줘야 기원전 4~5세기이전의 고조선 정도의 수준이거나 고대 켈트족의 수준을 넘은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단단한 정치적 결속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백제, 신라등이 조공을 했다는 주장(이것도 주로 일본 서기의 내용....... )은 (어느나라던 상대와 교류가 있으면 조공으로 치부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근세기 네델란드와의 교역도 일본인들은 조공이라고 주장하죠.)
과거 로마제국 같은 나라도 켈트족이나 게르만족과 돈으로 평화거래를 한적이 있고 중국왕조들도 제력으로 북방 유목민들을 회유한적도 있으니 아주 있을 수 없는 가정이라고 볼수는 없겠지요. 아마 고대 왜인들은 켈트족 처럼 한반도 남단과 열도 주변에 흩어져 살던 종족들을 통칭해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일본 학계는 거의 받아드리지 않고 있으나 오히려 서구쪽에서는 아직도 기술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헌에도 단순히 임나, 임나가라등으로만 표기되어 있고 특히 고고학쪽으로 가버리면 거의 자폭 수준이죠. 결론은 당시의 일본열도의 수준으로 대외에 그런 고도의 행정체계의 구축은 불가능하다로 결론이 났습니다. 물론 가능성을 따진다면 삼국초기에 열도 사람들이 건너와서 마을을 이루고 정착하는 것은 충분히 있었을 수 있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은 현재 일본고대사학계(정통적인우파들) 제외하고는 일본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다만 세계각국의 역사책들이 문제인데.. 영미권계통 교과서들 보면 동양사부분..아주과간입니다.. 우리나라는 애초부터 중국의 속국인양 그 일부인양 만들어놨고 하여튼..할말없게 만듬..한국역사학계의 이론들은 왕따입니다 ㅋㅋ
첫댓글 ........쓰고보니까 너무 기네요;;;;;
중국의 속국까지 모자라 이제 우리가 끼워준 왜놈들이 고대에 우리를 지배했다는 말도안되는 헛소리를 접고 들어가야 한다니............
왜의 한반도설은 저도 다소 긍증적으로 보고있고 관심도 가긴 하지만 위의 내용은 상당히 비약이 심한것 같군요. 백제와 연계되기시작한 6세기(최대로 잡아야 5세기 정도....) 이전의 왜열도는 잘 쳐줘야 기원전 4~5세기이전의 고조선 정도의 수준이거나 고대 켈트족의 수준을 넘은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단단한 정치적 결속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백제, 신라등이 조공을 했다는 주장(이것도 주로 일본 서기의 내용....... )은 (어느나라던 상대와 교류가 있으면 조공으로 치부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심지어 근세기 네델란드와의 교역도 일본인들은 조공이라고 주장하죠.)
개념은 저 하늘 위로 사라져 가는구나......... 임나일본부도 모자라서 모용씨까지 끌어들이는 어처구니 없는 센스~!! ㅋㅋ....천랑열전 너무 본거 아니야? ㅋㅋ
과거 로마제국 같은 나라도 켈트족이나 게르만족과 돈으로 평화거래를 한적이 있고 중국왕조들도 제력으로 북방 유목민들을 회유한적도 있으니 아주 있을 수 없는 가정이라고 볼수는 없겠지요. 아마 고대 왜인들은 켈트족 처럼 한반도 남단과 열도 주변에 흩어져 살던 종족들을 통칭해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존 코벨의 부여기마족과 왜란 책을 권해주고 싶네요.
근데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사학계내에서도 믿지않는다고 들은것 같은데요 물론 세계사학계에서도 임나일본부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학설로 치부한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 학계는 거의 받아드리지 않고 있으나 오히려 서구쪽에서는 아직도 기술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헌에도 단순히 임나, 임나가라등으로만 표기되어 있고 특히 고고학쪽으로 가버리면 거의 자폭 수준이죠. 결론은 당시의 일본열도의 수준으로 대외에 그런 고도의 행정체계의 구축은 불가능하다로 결론이 났습니다. 물론 가능성을 따진다면 삼국초기에 열도 사람들이 건너와서 마을을 이루고 정착하는 것은 충분히 있었을 수 있습니다.
임나일본부설도 여느 고대사 학설같이 복잡하더군요. 임나가 제주도를 뜻한다는 설도 있고 왜의 한반도 남부 경영은 한반도 남부 제 한민족의 역사를 일본이 자기 것으로 차용한 것이란 주장도 있고
임나일본부설은 현재 일본고대사학계(정통적인우파들) 제외하고는 일본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다만 세계각국의 역사책들이 문제인데.. 영미권계통 교과서들 보면 동양사부분..아주과간입니다.. 우리나라는 애초부터 중국의 속국인양 그 일부인양 만들어놨고 하여튼..할말없게 만듬..한국역사학계의 이론들은 왕따입니다 ㅋㅋ
어느 소설 작가가 쓴 건 지좀...
어차피 저 내용은 문헌적 근거에 의한거라기 보단 학자 개인의 추론에 가깝습니다. 단순한 가설이상의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끼워맞추는덴 천부적인 글이네여 꽤나 머리 싸매고 조합하셨을듯
일본서기보다 더 오래 전에 나온 사서인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한 씨 족보에는 일케 나와 있습니다.. 기자조선이 망한 후... 한씨들은 삼한을 세웠다.. 마한진한 변한 그들은 왜 삼신사상에 입각해 나라를 세개로 나누었다.. 족보가 맞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