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일), 약간 흐리고 선선하다. 남부지방에는 비가 내린다는데 걷기 좋은 날씨, 이번 코스 중 가장 힘든 산길을 오른다는데 날씨에 희망을 건다. 아침 7시, 숙소 옆의 식당(중앙가든)에서 청국장백반을 들고 8시에 정동진 방향으로 향하였다. 걸으면서 접하는 들판이 꽤 넓고 송림이 울창하여 물산이 풍요로운 고장인 것을 느낀다.
솔향강릉의 소나무답게 품위 있는 옥계의 소나무 숲길을 걷는 대원들
해안으로 접어드니 헌화로, 금진리에서 심곡리에 이르는 아름다운 바닷가에 수로부인에게 소를 모는 촌로가 벼랑의 꽃을 꺾어 바쳤다는 설화의 현장에 붙여진 길 이름이다. 그 사연을 김지수 대원이 꽃을 바친 절벽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설명한다. 절벽 아래로 이어지는 바닷가에는 시루떡 모양이기도 하고 빨래판처럼 보이기도 하는 바위들이 억겁의 세월을 일깨고.
헌화로가 끝나는 심곡 어촌마을에서 산길로 접어든다. 정동진 해변에 이르기까지 한 시간여 이어지는 좁은 오솔길,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 바우길 정비작업에 나선 회원들을 만났다. 더운 날씨에 안내표지를 붙이는 등 노고가 많다. 통행하는 길은 물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길도 이처럼 가꾸고 보살펴야 하리라.
산길에서 내려와 정동진에 도착하니 오전 11시 반, 휴일을 맞아 모래사장과 역 주변이 많은 관광객들로 붐빈다. 역 앞의 식당에서 점심(설렁탕)을 들고 역사로 들어서니 입장료(1,000원)를 내야 기차 길로 들어갈 수 있다. 이미 여럿이 입장하여 좋은 장면을 폰에 담느라 바쁘고 사진 전문가인 정상희 씨가 역 표지가 있는 포토 존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고 있다. 나도 한 컷.
휴일을 맞아 가족단위로 정동진을 찾은 관광객
역사 안 철길에 강릉 출신 사극작가 신봉승 씨가 쓴 시, ‘정동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는 지난 4월에 타계, 임은 가고 그가 쓴 시가 찾는 이를 반긴다. 다음은 시, ‘정동진’ 전문.
‘ 벗이여,
바른 동쪽 정동진으로 떠오르는 저 우람한 아침 해를 보았는가.
큰 발원에서 작은 소망에 이르는 우리들 모든 번뇌를 씻어내는
저 불타는 태초의 햇살과 마주서는 기쁨을 아는가.
벗이여,
밝은 나루 정동진으로 밀려오는 저 푸른 파도가 억겁을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는가.
처연한 몸짓 염원하는 몸부림을 마주서서 바라보는 이 환희가 우리 사는 보람임을 벗이여, 정녕 아는가.‘
12시 40분, 오후 걷기에 나섰다. 날씨가 맑아지고 볕이 뜨겁다. 오전의 산길보다 높고 긴 산우에 바닷길(9.4km)을 종주하는 해파랑길 36코스, 홍순언 코스리더가 이번 걷기 중 가장 힘든 코스라고 설명한다. 강호갑 총대장은 체력이나 건강상 무리가 되는 대원은 해안 길을 걸어 목적지인 안인해변에 도착해도 좋다고 말하는데 대부분 힘든 산길을 선택한다. 등산을 즐기는 이들은 산길이 더 좋다고 하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약간 무리가 가는 산길, 이런 곳은 선택지를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해안 길은 두 시간 반, 산길은 세 시간 반 걸려 오후 4시 전후에 모두 안인 해안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걸은 거리는 22, 5km. 안인(安仁) 마을의 돌 판에 ‘옛부터 편안하고 착한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 적혀 있다. 온 마을이, 온 세상이 그러하면 좋으리라.
해변의 숙소(썬모텔과 해안선모텔)에 여장을 풀고 마을 안쪽의 식당(초가집)에서 드는 저녁(메뉴는 대구지리, 생선구이, 돈가스 등 취향대로 선택) 맛이 좋다. 오늘로 23일째, 600km쯤 걸었다. 힘든 코스 무사히 끝냈으니 남은 길, 편안하고 즐거워라.
* 매일 적는 해파랑길 기행록을 한국체육진흥회 자유게시판과 관계되는 카페에 올리고 국내외 지인들에게 메일로 보내준다. 일본 홋카이도에 사는 미우라 유타카(작년 6월, 홋카이도 걷기 때 알게 된 일본인)씨가 다음과 같은 글을 메일로 보내왔다.
‘김 태호 씨께
안녕하세요.
메일 매번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이번 메일은 번역기능이 있으니까, 그만 일본어로 번역해서 읽고 있어요.
한국어 공부를 하려면 사전을 찾아 한국어로 읽으면 좋겠는데.
편리한 기능은 나의 공부에는 안 좋을지도 몰라요.
한국의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여러 가지 음식이 등장하는 게 너무 큰 즐거움이에요. 제가 먹어 본 것도 있어요. 처음 듣는 음식은 어떤 것이라고 나름대로 상상합니다.
나머지 10일간 힘 내 걸어서 무사히 골인하길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 마당에서는 은방울꽃이 만개예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