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5분 동안
권순자
나는 변화에 더디다. 별 변화 없는 농촌 생활에 어린 시절부터 젖어서 그런지 아니면 살아오는 동안에 다양한 변화를 접하면서 적응하는 게 두려운지 연유는 잘 모른다. 일단 어떤 변화에 적응하면 누구보다도 변화된 환경을 즐기는 면은 있었다.
팔월 뙤약볕이 여전히 강한 어느 날, 친구와 선유도공원에 갔다. 사무소 입구 피아노 앞에 한 남자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중이었다. 피아노를 마주한 채 검정 모자를 쓰고 검정 셔츠를 입고 연주에 몰입한 옆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더위도 잊고 낯선 선율에 귀 기울였다. 조금 서 있으니 다음 곡은 귀에 익은 ‘엘리제를 위하여’가 피아노 선율을 타고 흘렀다. 팔월의 태양은 뜨거웠지만 노래는 강바람에 실려 오는 시원한 기운과 어울려 내 가슴에 아련히 너울거렸다.
화분에서 자라는 초록 조롱박들, 꽃들, 산책로에 늘어선 나무들도 음악을 들으며 한들거렸다. 백일홍과 무궁화꽃이 늘어선 길을 나는 흥얼거리며 걸었다. 다리도 풀 겸 잠시 쉬려고 선유정에 갔더니 코로나 거리두기 때문에 테이프로 접근금지 표시를 해놓았다. 우리는 선유정 바로 옆 큰 나무 그늘 아래 납작한 바위를 쉼터로 삼아 앉았다. 선유정 앞쪽은 탁 트여서 한강이 흐르는 모습이 보이고 멀리 도심과 산이 보였다. 강물이 흐르는 모습만 봐도 가슴이 시원해져 왔다. 오래 수다를 떨며 더위를 식히고 일상의 고달픔도 씻었다. 점심으로 싸간 김밥까지 먹고서야 일어섰다.
선유도는 꽤 넓었다. 한참 걸어 전망대에 올라서니 미루나무가 중간 윗부분부터 보였다. 전망대 난간 아래로 내려다봤더니 나무둥치가 무척 굵었다. 문득 어린 시절 신작로를 따라 일렬로 서서 등하교를 지켜보던 미루나무들이 기억났다. 청소 당번 때문에 친구들을 놓치고 혼자 걸을 때는 그 미루나무들이 길가에 버티고 서서 나를 지켜주는 든든하고 잘생긴 보디가드 같았다.
“우리 출발하자.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먹구름이 몰려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 친구가 말했다. 시커먼 구름이 마구 몰려들고 있었다. 빗방울이 듣기 시작할 무렵, 주변에서 쉬고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서 가기 시작했다.
“얼른 공원을 벗어나야겠다. 서두르자.”
다른 친구가 재촉했다.
“양산 쓰면 괜찮을거야.”
나는 마지못해 일어서며 대답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강 위를 신나게 달리는 보트를 바라보니 날씨 탓만 아니면 곧장 가서 타보고 싶어졌다. 두어 오리배들이 선착장 주변을 헤엄치고 있었다. 하늘에는 먹구름과 흰구름이 뒤섞여 그림 같았다. 해 질 무렵이라 사진가들이 작품을 찍으려고 선유교 난간 근처에 즐비해 있었다.
다리 쪽으로 걷는 동안 빗방울은 굵어졌고 잦아졌다.
선유교 구름다리를 건너오는 동안에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가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지자, 우산 없는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나는 양산을 들고 거센 빗줄기를 헤치며 사선으로 내리치는 바람을 맞으며 긴 다리를 걸어 넘어갔다. 금세 바지와 신발은 물에 빠진 모양이 되고 말았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때리는 빗줄기가 반가워서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동안 너무 비가 내리지 않았다. 메말라 푸석하던 땅이나 나무들도 나처럼 반가웠을 것 같았다.
“순자, 뛰어!”
내가 비를 맞으면서 강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구경하며 걷자 친구가 소리쳤다.
나는 친구를 따라 뛰면서 어린 소녀처럼 여러 번 깔깔거렸다. 우리는 양산을 우산대용으로 쓰고 있었지만 작은 크기의 양산은 머리조차 제대로 가려주지 못했다. 빗물이 다리 쪽부터 흠뻑 적시고 시원한 느낌으로 몸을 훑으며 허리께까지 올라왔다. 5분이 짧고도 길었다. 신발은 물이 차서 걸을 때마다 절버덕거렸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내리는 비라서 비가 반갑고 비 맞는 일이 즐거웠다. 선유교 아래쪽 인도에 내려왔을 때는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긴바지를 입고 온 두 친구는 바지가 온통 젖어서 나보다 더 추울 것 같았다. 비가 여전히 줄기차게 내렸다.
5분 동안의 소나기 체험으로 오늘의 무더위는 확실히 날려버렸다. 셋 다 물에 젖은 생쥐 모습이었으니까. 그 꼴이 우스워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깔깔대며 큰소리로 웃었다.
예기치 않은 여름 날씨에 화들짝 놀란 5분간이 짧고도 길었다. 맵찬 빗줄기는 온몸을 두들기고 느릿한 여유도 흔들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적응해간 한나절이었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가는 데는 5분이 걸렸다. 살면서 우리는 무지개 언덕을 꿈꾼다. 무지개를 좇으며 살아간다.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소나기가 내린 뒤에 뜬다. 살면서 삶의 소나기를 피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인생의 소나기를 피하는데도 5분이면 족하다. 무지개다리는 5분이면 화창한 날씨로 바뀌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