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들었던, 혹은 그 이름조차 생소했던, 전설의 코치들이네요. ACC 이야기를 올리면서도 늘 찝찝했던게, 제 자료 수집 능력과 지식으로는, 늘 좀더 예전의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이렇게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올리는 이야기들 가운데에도, 틀린 부분들 있으면 과감히 지적해주시고, 수정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도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마당이거든요.
그럼.
--------------------- [원본 메세지] ---------------------
현존하는 최고의 컨퍼런스를 꼽으라면 아마 십중팔구는 ACC라고 말할 것이다.
노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웨이크 포레스트, 듀크 등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위치한 빅 4를 필두로 지난 시즌 우승팀 매릴랜드, 버지니아, 클렘슨, 조지아 공대, 플로리다 주립까지 9팀 공히 무서운 팀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강호들에 의해 주도되는 다른 컨퍼런스와 ACC의 다른 점이 9팀 모두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ACC가 강한가. 역사가 빅 10 등 다른 컨퍼런스보다 긴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수 많은 명장들이 ACC의 역사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ACC가 최고의 컨퍼런스로 발돋움한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감독은 역대 최다승을 기록하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딘 스미스 때문일 지 모른다. 하지만 ACC라는 컨퍼런스가 농구에 그렇게 투자를 할 수 밖에 없었고 현재의 ACC가 있게 까지 토대를 마련한 에버릿 케이스, 프랭크 맥과이어, 본스 맥키니, 빅 버바스가 없었다면 딘 스미스도 없었을 것이다.
또 스미스를 따라잡으려는 ABC(Anybody But Carolina) 갱들의 우상들인 놈 슬로언, 레프티 드리슬, 테리 홀랜드 등이 없었다면 ACC는 어쩌면 몇몇 강호들만의 컨퍼런스였을 수도 있다. 또 1980년대 ACC를 이끈 젊은 세력. 마이크 슈세프스키, 짐 발바노, 바비 크레먼스와 1990년대 ACC를 이끈 개리 윌리엄스, 데이브 오돔, 팻 케네디, 클리프 엘리스 등이 없었다면 2000년대의 ACC는 듀크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딘 스미스가 ACC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면 ACC가 존재하기도 이전 훗날의 ACC에 영향을 미친 명장이 있었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ACC는 농구가 아닌 미식축구가 강한 컨퍼런스로 기억됐을 지도 모른다.
에버릿 케이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그가 배출한 선수들을 아들이라고 불렀던 ACC 농구의 선구자. 1920년대부터 전국적인 파워 노스 캐롤라이나에 눌렸던 라이벌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을 전국에서 가장 가고 싶은 대학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현재 ACC의 수많은 전통을 만든 인물이다.
케이스가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 지휘봉을 잡았을 땐 ACC는 존재하지 않았다. 케이스는 당시 존재했던 서던 컨퍼런스에서 당장 두각을 나타내며 학교에 발언권을 높인다. 홈 경기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케이스는 당초 계획된 수용인원보다 3,400명이 많은 약 1,2300명이 입장할 수 있는 레이놀즈 콜로세움을 짓도록 유도했다. 미국에서 가장 웅장하고 멋진 홈을 가진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은 케이스의 적절한 스케줄 조절로 약 2/3 경기를 홈에서 치렀다.
케이스는 또 당시 크리스마스 기간에 최고의 흥행 보증수표인 딕시 클래식을 창시해 레이놀즈 콜로세움에서 개최했다. 케이스가 남긴 족적은 노스 캐롤라이자 주립대학에만 머물지 않았다. 당시 같은 주나 인근 선수들을 영입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리쿠르팅의 영역을 자신의 고향인 인디애나 주를 필두로 전국으로 넓혔고 딕시 클래식이나 컨퍼런스 토너먼트 우승 후에 네트를 자르는 의식을 남부에 처음으로 도입한 인물도 케이스다.
1953년 빅 4에 매릴랜드, 클렘슨, 사우스 캐롤라이나, 버지니아가 가세한 ACC가 생겼다. ACC가 생긴 가장 큰 원인은 미국축구에서 보울 출전권 때문이었지만 이로 당시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의 감독 케이스 덕택이 ACC의 현재 최강의 농구 컨퍼런스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나 올드 그레이 팍스(Old Grey Fox)로 불렸던 케이스는 아들과 같이 믿었던 선수들에게 승부조작이라는 뒤통수를 맞은 뒤 농구에 대한 열정을 잃고 서서히 저물어 간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 울팩에서 19시즌 동안 통산 성적 377승134승, '어메이징 팩'으로 불린 1950년 NCAA 토너먼트 파이널 4 진출.
20년대부터 잡고 있던 같은 주내 농구 주도권을 가장 큰 라이벌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 빼앗긴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도 커다란 변화를 준비한다. 상대 전적 15연패라는 불명예를 안긴 케이스에 맞설 감독을 찾아 나선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은 당시 세인트 존스 대학을 NCAA 토너먼트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뉴욕 토박이 프랭크 맥과이어를 영입한다. 맥과이어는 2차 대전 당시 해군 프로그램이 열렸던 채플 힐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또 벤 카나베일(과거 UNC 감독, 명예의 전당 헌액자)의 추천에 힘입어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입성한다.
맥과이어가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감독이 되기로 결심하기에는 당시 뉴욕 지역 교사들의 파업과 몸이 안 좋았던 아들에게 노스 캐롤라이나와 듀크라는 최고의 의료시설이 완비된 토바코 로드는 최고의 보금자리였다.
52년에 부임한 맥과이어는 1950년대 중반까지도 케이스를 따라 잡진 못했다. 물론 1953년 기나긴 대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전 연패의 사슬을 끊었지만 맥과이어가 자리 잡기엔 그의 고향 뉴욕에서 뽑아온 선수들이 3, 4학년이 되길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 중 핵심이 되는 인물은 레니 로즌블러스. 6-6의 득점기계인 로즌블러스는 1학년 때 뛸 수 없었던 당시 NCAA 규정에도 불구하고 통산 26.9점을 올리며 1978년 필 포드가 깰 때까지 노스 캐롤라이나 최고 득점 기록을 보유했던 슈퍼스타였다. 물론 평균 26.9점은 아무도 깨지 못하고 있다.
1957년 훌륭한 시즌이 될 것임을 일찌감치 예언했던 맥과이어의 말대로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은 승승장구한다. 물론 웨이크 포레스트 등에게 거의 질뻔한 경기를 뒤집는 등 고비도 있었지만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은 전승으로 NCAA 토너먼트에 오른다. 다행이 지역 본선은 맥과이어의 고향 뉴욕에서 열렸고 노스 캐롤라이나는 예일, 캐니시어스, 시라큐즈를 연파하고 파이널 4에 오른다.
준결승에서의 맞상대는 조니 그린이 이끄는 미시건 주립. 이 경기에서 노스 캐롤라이나는 3차 연장까지 치르는 접전 끝에 74-70으로 승리, 연승의 기록을 31로 늘렸다.
전승 우승을 향한 마지막 관문은 218cm의 괴물 윌트 채임벌린이 버티는 캔사스. 전날 3차 연장으로 지칠 법한 노스 캐롤라이나는 캔사스를 또다시 3차 연장까지 몰며 54-53, 극적인 우승을 차지한다. 훗날 사람들은 56-57 시즌 노스 캐롤라이나를 '맥과이어의 미라클'이라고 불렸다.
57년 기적은 또 하나의 선물을 선사한다. 우승 파티에 평소 맥과이어를 잘 알던 공군 사관학교의 감독 밥 스피어가 나타난 것. 스피어는 당시 20대의 젊은 어시스턴트 코치 딘 스미스를 대동했고 맥과이어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은사인 고령의 어시스턴트 코치 벅 프리먼을 대신할 인물로 딘 스미스를 지목했다.
맥과이어는 이후 또다시 기적을 연출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불거져 나온 리쿠르팅 스캔들로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은 징계(Probation)를 당했다. 결국 맥과이어는 1961년 필라델피아 워리어스의 지휘봉을 잡고 윌트 채임벌린이 한 경기 100점을 올리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물론 맥과이어는 훗날 같은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의 감독으로서 다시 한번 ACC에 얼굴을 내민다.
NC St., UNC의 시대가 저물자 이번엔 웨이크 포레스트의 시대가 서막을 올린다.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올아메리칸으로 뽑히기도 했고 보스턴 셀틱스에서 뛰기도 했던 본스 맥키니가 어시스턴트 코치에서 감독으로 부임하며 웨이크 포레스트도 변화를 맡는다.
NCAA규격보다 2피트나 작고 사이드라인이 관중들의 발에 밝히는 홈구장을 가졌던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은 이전부터 NC St., UNC에겐 위협적 존재였다.
달변에 깡마른 외모, 특유의 유머감각을 가진 맥키니는 당시 NC St.로 편중되었던 리쿠르팅에 변화를 일으킨다. 바로 1962년 파이널 4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는 빌리 패커(3월이면 지겹게 듣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와 렌 차펠을 데려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좀 전에 언급했듯이 1962년 파이널 4에 올랐고 당시로는 중간급 컨퍼런스라 컨퍼런스 토너먼트에 우승해야 빅 댄스에 진출할 수 있었던 ACC의 척박한 땅을 3위 결정전에서 승리를 따내며 옥토로 가꿨다.
3위를 차지한 후 총장이 감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연설을 하자. 인간이 돈을 발명한 이후 감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 많다고 받아 친 맥키니. 그러나 절실한 기독교 인이었던 그도 음주, 약물 중독으로 서서히 저물어 갔다.
아들 같은 선수들에게 배신 당한 케이스를 잃은 NC St.는 케이스의 탁월한 선수 감별력으로 무너졌다. 9살이던 피트 마라비치의 놀라운 볼핸들링에 감명한 케이스는 그의 아버지 프레스 마라바치를 어시스턴트 코치에 임명했다. 그러나 정작 프레스는 놀라운 감독 능력을 지녔음에도 아들 피트가 NC st.에 올 성적에 못 미치자 LSU로 아들과 떠났다. 그리고 NC St.는 그렇게 무너져 갔다.
또 멋쟁이 북부 신사에 달변의 맥과이어도 NBA로 떠난 노스 캐롤라이나는 이름도 듣지 못한 시꼴뜨기에 얌전하기 짝이 없는 딘 스미스가 리그 징계로 리쿠르팅 조차 하지 못하며 그나마 맥과이어가 뽑아 놓은 래리 브라운, 빌리 커닝햄 등으로 연명해갔다.
WFU는 앞서 말했듯이 맥키니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기나긴 동면에 빠진다.
NC St., UNC, WFU, 다음은 누구나 짐작하듯이 듀크의 시대였다.
듀크 대학을 전국적 강호로 이끈 인물은 31살의 신예. 빅 버바스였다. 버바스는 젊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무기로 과감한 리쿠르팅에 나선다. 현대 리쿠르팅의 귀감이며 ACC 리쿠르팅 방법에 새로운 공식을 제시한 버바스는 오늘날은 보편화된 편지, 학교 소개서와 지속적인 유대로 선수들을 끌어 모은다.
그렇게 끌어 모은 선수는 제프 멀린스와 아트 헤이먼, 제이 버클리 등이다. 이들이 3, 4학년이 된 듀크는 27승3패를 기록하며 전미 랭킹 2위에 랭크됐고 파이널 4에서 로욜라 대학(시카고)에게 패했지만 3위 결정전에서 오레곤 주립을 꺾고 당당히 3위를 차지, 다시 한번 ACC의 입지를 높였다.
듀크의 성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헤이먼의 졸업에도 듀크는 또다시 전국에 파워를 과시하며 2년 연속 파이널 4에 오른다. 그러나 준결승에서 미시건 대학에게 힘을 다 쏟아 부은 듀크는 비교적 수월한 대진으로 결승에 오른 UCLA에게 무릎을 꿇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어쩌면 64년 결승은 존 우든의 UCLA에게는 왕조를 예고한 한판이었다.
듀크는 이후 1966년에도 밥 버가, 잭 마린을 이끌고 다시 한번 파이널 4에 올랐지만 이후 무섭게 떠오르는 딘 스미스 사단에 의해 암담한 시기를 겪어야 했다.
듀크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이전에 이미 예고됐다. 리쿠르팅의 귀재 버바스가 눈앞에서 역시 갓 30살에 감독이 된 듣도 보도 못한 스미스에게 래리 밀러, 러스티 클락, 밥 루이스를 빼앗긴 것이다.
기나긴 징계를 딛고 리쿠르팅의 자유를 얻은 스미스는 밥 루이스를 시발로 밀러, 클락, 딕 그루바를 뽑아 전국 강호 부활의 씨를 뿌렸다.
성과는 루이스가 4학년이 된 1967년 곧바로 나타났다. ACC 토너먼트에서 당당히 라이벌 듀크를 꺾고 빅 댄스에 참가한 노스 캐롤라이나는 맥과이어의 미라클 이후 10년만에 파이널 4에 오르는 쾌거를 달성한다. 하지만 농구인들, 심지어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재학생들도 스미스의 파이널 4 진출은 우연 혹은 운이라고 말했다.
우연도 두 번 연속이면 실력이라고 했던가. 1968년 노스 캐롤라이나는 당당히 NCAA 토너먼트 결승에 올라 준우승을 차지하며 딘 스미스의 진가를 증명했다.
딘 스미스는 너무나도 유명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얘기는 생략한다. 단 한가지 그가 ACC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인 인종차별의 벽을 허문 것은 언급해야 겠다.
새로운 밀레니엄인 지금도 남부 지역에서는 심심찮게 인종차별이 자행되고 있다. 하물며 1960년대의 ACC는 어땠겠는가. 흑인들이 ACC에 들어 오기에 가장 큰 장벽은 역시 인종에 대한 편견. 그리고 소유 800 rule이라 불리는 SAT(미 수능시험) 성적 규정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흑인 고등학교는 교과서도 백인들이 쓰다 개정된 고물 교과서를 사용했고 선생님들도 흑인 대학을 나온 흑인들이어서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ACC 아니 남부에서 가장 먼저 인종의 벽을 허문 찰리 스캇도 고교를 졸업하고 Prep School에 들어가 성적을 채워야 했다.
또 찰리 스캇 이전에도 ACC에 올뻔한 흑인 선수가 있었지만 800 rule이 넘지 못할 벽이 되고 말았다. 800 rule은 훗날 차별적 제도라고 사라져 갔지만 클렘슨,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 같은 보수적인 학교들은 반대를 했고 결국 사우스 캐롤라이나는 ACC를 떠나게 된다.
스미스는 스캇을 영입하기 이전에도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여왔고 스캇 등 흑인선수들을 데리고 백인전용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 등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스캇은 레프티 드리슬이 감독인 데이빗슨에 입학이 거의 확정적이었지만 스미스의 정성에 고무돼 노스 캐롤리아나 행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레프티 드리슬은 훗날 매릴랜드 대학 감독으로 ACC에 들어와서도 평생 스미스를 원수로 삼는 계기가 됐다.
1세대 감독들인 케이스, 맥과이어, 맥키니, 버바스가 사라진 후 ACC는 딘 스미스의 주도권하에 놓였다. 그리고 스미스를 숙적으로 생각하는 매릴랜드 대학의 레프티 드리슬,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의 놈 슬로언, 버지니아 대학의 테리 홀랜드 등이 스미스를 따라 잡으려 최선을 다하며 ACC는 전미 최고의 컨퍼런스로 성장해 나간다.
ACC 코치들의 모임에서도 스미스를 상대로 으르렁거렸던 이들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감독을 꼽으라면 아마 놈 슬로언이 될 것이다.
라이벌 스미스보다도 먼저 NCAA 챔피언으로 등록된 슬로언의 성공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의 동문의 도움으로 시작된다. 슬로언은 1960년대 말 스테이트 동문이라는 한 사내로부터 자신의 조카가 7-0인데 관심이 없냐는 귀가 솔깃한 얘기를 들었다. 이 7-0는 산골에 살기 때문에 고교 3학년 당시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선수였다. 그리고 그가 울팩의 일원이 됐을 때 신장은 7-4였다. 바로 토미 벌리슨. 1년 뒤 가담하는 '스카이 워커' 데이빗 톰슨과 함께 1974년 울팩을 우승으로 이끈 선수다.
벌리슨을 얻은 슬로언은 1년 뒤 전미 최고, 아니 고교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인 데이빗 톰슨을 얻는데 성공한다. 슬로언은 톰슨을 얻고 대학 1학년생도 정규 시즌에 뛸 수 있는 로비를 펼쳤지만 실패한다.
DT로 불렸던 톰슨은 당시의 마이클 조던과 같은 존재였다. 6-4밖에 안 되는 신장이지만 45인치에 달하는 점프력에 내외곽을 겸비한 득점력으로 3년 연속 ACC 최우수 선수. 2년 연속 AP 최우수 선수를 수상한 톰슨은 아마 대학 농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선수 10명을 꼽으라면 카림 압둘자바, 빌 월튼, 크리스찬 레이트너와 함께 손에 꼽힐 뛰어난 선수였다.
톰슨이 가세한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은 73년 27승무패라는 전승을 거두며 ACC 토너먼트 우승을 차지했지만 리그 징계에 걸려 빅 댄스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망의 74년 NCAA 토너먼트 파이널 4. 상대는 이미 7연패를 달성하고 한때 88연승을 거두기도 했으며 시즌 초반 울팩에 유일한 패배를 안긴 빌 월튼이 이끄는 '월튼 갱' UCLA였다. 초반부터 무서운 기세를 탄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은 뒤늦게 추격전을 벌인 UCLA를 꺾고 대망의 결승에 올라 알 맥과이어가 이끄는 마킷을 꺾고 '빅 4' 아니 ACC 소속 학교로는 최초로 NCAA 우승을 차지한다.
벌리슨이 졸업한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은 톰슨이 4학년 때 평균 29.9점을 올리며 22승6패를 올렸지만 ACC 토너먼트 결승에서 노스 캐롤라이나에게 패해 빅 대스 진출이 좌절됐고 NIT에 초청됐지만 톰슨 등 선수들이 'loser’s 토너먼트에는 나가지 않겠다며 시즌을 마감했다.
슬로언이 톰슨을 이끌고 승승장구 할 당시 NC St.의 ACC의 가장 큰 라이벌은 UNC도 듀크도 WFU도 아니었다. 당시 동부의 UCLA라 불렸던 레프티 드리슬이 이끄는 매릴랜드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과 함께 전국 최고의 강호 중 하나였다. 존 루카스에 렌 엘모어, 톰 맥밀런, 짐 오브라이언이 버티는 매릴랜드는 파이널 4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1973년 슈퍼볼이 열리는 당일 낮 2,500만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NC St.와 85-87로 아깝게 패하는 등 무서운 파워를 형성했다.
버바스 사임 이후 오랫동안 침묵을 지킨 듀크도 빌 포스터 감독의 지휘 하에 1978년 NCAA 토너먼트 준우승을 차지한 후 부활을 알린다. 그리고 1980년엔 코치 K가 듀크에 오게 된다.
테리 홀랜드의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항간에는 홀랜드가 기르는 개의 이름이 딘이라 딘 스미스를 싫어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알려졌지만 홀랜도는 이를 부인한 바 있다.
홀랜드가 이끄는 버지니아는 1980년대 초 전국적 파워로 성장한다. 그 중심에는 7-4의 장신 랠프 샘슨이 있었다. 1981, 82, 83 3년 연속 '올해의 선수'를 수상한 샘슨의 활약에도 홀랜드의 버지니아는 1981년 파이널 4에 진출했을 뿐. 더 이상은 나가지 못했다. 샘슨을 대학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는 전문가들이 드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홀랜도가 명장이라는 것은 1984년 샘슨 없이도 또 다시 파이널 4에 오르면서 입증됐다. 릭 칼라일, 올든 폴리니스를 앞세운 버지니아는 샘슨 없이도 다시 한번 파이널 4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1982년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이 결승에서 1학년 마이클 조던의 결승 점프슛으로 우승하며 딘 스미스에게 첫 우승을 안긴 사건은 NBA 팬들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어 언급하지 않겠다.
바로 다음 해 1983년 우승팀은 역시 ACC 소속팀인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이었다. 달변의 괴짜 짐 발바노. 지미 V, 코치 V로 불렸던 발바노는 드마사 고교의 전설 모건 우튼이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 감독직을 사양하면서 울팩의 우두머리가 되는 행운을 안았다.
면접에서 왜 NC St. 감독이 되려 하냐는 질문에 '우승하려고'라고 대답한 발바노는 1983년 파이 슬래머 재머라 불리는 아킴 올라주원, 마이클 영,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이끄는 전미 최강의 휴스턴을 54-52로 꺾는 기적을 연출한다.
대학 농구 경기 사상 최고의 경기 중 하나로 꼽히는 이날 승부는 전날 연습장에 슬리퍼를 신고, 마치 우승한 듯한 거만함을 보인 휴스턴에겐 자멸이었고 그 모습에 자극받은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에게는 최고의 승부였다.
당시 울팩에는 시드니 로우라는 뛰어난 포인트가드가 있었고 덜 베일리, 로렌조 찰스라는 골밑의 괴물들이 버티고 있어 휴스턴에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결국 승부는 52-52. 남은 시간 44초. 휴스턴의 가드 앨빈 프랭클린은 결정적인 원앤원 첫 자유투를 놓쳤고 리바운드는 울팩의 몫이었다. 발바노는 재빨리 타임아웃을 불렀다.
작전은 간단했다. 로우가 공을 잡고 시간을 끈다. 7초 정도 남은 상황에서 돌파 그리고 외곽에 퍼져있는 선수를 찾는다. 찰스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외곽에서 슛을 노린다. 슛이 실패하면 찰스는 풋백을 노린다.
작전은 어긋났다. 로우가 10초 이상 남은 상황에서 이미 돌파를 노렸다. 그리고 베이스 라인에 서있던 베일리에게 패스. 베일리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그러나 베일리는 데릭 위튼버그에게 패스했다. 시간이 없다. 위튼버그는 30피트 거리에서 슛을 던졌다. 터무니없이 짧았다. 그러나 골밑에는 찰스가 있었다. 찰스는 자연스럽게 앨리웁 패스가 된 위튼버그의 슛을 덩크로 내리 꽂았다. 그리고 버저는 울렸다.
그것이 기적의 우승의 전부였다.
발바노의 환상의 입담은 TV 해설가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해설가를 하면서도 감독직을 겸했고 선수들의 학업문제를 소홀히 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 발바노는 결국 90년 감독직을 떠났다.
그리고 발바노는 1993년 4월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암으로 펜조차 들 수 없었지만 죽기전까지 발바노는 사랑하는 농구의 해설가로 활약했고 사인을 요구하는 팬들을 위해 자신이 들 수 있는 특별한 펜을 지니고 다니며 싸인을 해주는 자상함을 겸비했었다.
그런 발바노에게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비록 ACC 감독 시절에는 라이벌 학교에 몸을 담아 별로 친할 수 없었지만 1살 터울에 선수 생활 함께 싸웠고 80년 함께 ACC로 오기 전 발바노가 아이오나 감독 일 때 같은 컨퍼런스의 육군 사관학교 감독이었던 마이크 슈세프스키였다.
발바노는 암으로 고생하던 말기에 듀크 암센터에 입원해 있었고 슈세프스키는 거의 매일 발바노를 찾아와 우정을 과시했다. 물론 코치 K는 발바노 사후에는 지미 V 클래식에 듀크를 이끌고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슈세프스키의 얘기는 Mr.everything님께서 자세히 적으셔서 생략합니다. 이후 감독들은 아마 앞으로 ACC 소개에 나올 것이라 생각돼 생략합니다.
끝으로 위에 소개된 감독들의 짧은 프로필로 마칩니다.
* Everett Case
인디애나주 앤더슨 출신
1923년 위스컨신 대학 졸업
23년간 인디애나주 고교 감독으로 통산 726승75패 기록
USC 어시스턴트 코치
46~65년까지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 울팩 감독
통산 377승134패(승률 .738)
1950년 파이널 4
6차례 서던 컨퍼런스 우승(47,48,49,50,51,53)
4차례 ACC 토너먼트(54,55,56,59)
1981년 명예의 전당 헌액
* Frank McGuire
뉴욕 출신
1936년 세인트 존스 대학 졸업
11시즌 동안 세인트 세이비어 고교 감독으로 통산 126승36패 기록
대학 농구 역사상 3대학에서 100승 이상씩 챙긴 최초의 감독
47~52년까지 세인트 존스 대학 감독(164승58패)
1952년 NCAA 준우승
52~61년까지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감독(164승58패)
1957년 NCAA 우승
61-62시즌 NBA 필라델피아 워리어스 감독(49승31패)
64~80년까지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 감독(283승142패)
NCAA 통산 550승235패(승률.701)
1976년 명예의 전당 헌액
* Horace “Bones” McKinney
노스 캐롤라이나 주 로우랜드 출신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 입학,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졸업(1946년)
46년부터 52년까지 NBA 선수생활(워싱턴 캐피톨스, 보스턴 셀틱스)
57~65년까지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 감독
1962년 파이널 4
통산 122승94패(승률 .565)
69~70년까지 ABA 캐롤라이나 쿠거스 감독(59승67패)
1986년까지 ACC TV 해설자
1996년 명예의 전당 헌액
* Vic Bubbas
인디애나주 개리 출신
1951년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 졸업
51년부녀 59년까지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 어시스턴트 코치
59년부터 69년까지 듀크 대학 감독
3차례 파이널 4(1963, 64, 66)
통산 213승67패(승률 .761)
* Dean Smith
캔사스주 토피카 출신
1953년 캔사스 대학 졸업
61~97년까지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감독
1982, 93년 NCAA 우승
통산 879승254패(승률 .776)
NCAA 역사상 최다승
1982년 명예의 전당 헌액
기타 등등 기록 생략
* Norman Sloan
인디애나주 앤더슨 출신
1951년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 졸업
51~55년까지 프레스바이터리안 대학 감독(69승36패)
56~60년까지 더 시타델 대학감독(57승38패)
60~66년, 80~89년까지 플로리다 대학 감독(235승194패)
66~80년까지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 감독(266승127패)
1974년 NCAA 우승
통산 627승395패(승률 .614)
* Charles “Lefty” Driesell
버지니아주 노포크 출신
1954년 듀크 대학 졸업
60~69년까지 데이비슨 대학 감독(176승65패)
69~86년까지 매릴랜드 대학 감독(348승159패)
89~94년까지 제임스 메디슨 대학 감독(159승111패)
94~현재까지 조지아 주립 대학 감독(99승53패)
1972년 NIT 우승
통산 782승388패(승률 .668)
* Terry Holland
노스 캐롤라이나주 클린튼 출신
1964년 데이비슨 대학 졸업
69~74년까지 데이비슨 대학 감독(92승43패)
74~90년까지 버지니아 대학 감독(326승173패)
1981, 84년 파이널 4
1980년 NIT 우승
통산 418승216패(승률 .659)
* Jim Valvano
뉴욕주 시포드 출신
1967년 룻거스 대학 졸업
68~69년 존스 홉킨스 대학 감독(3승14패)
72~75년까지 버크넬 대학 감독(33승42패)
75~80년까지 아이오나 대학 감독(95승46패)
80~90년까지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 감독(209승114패)
1983년 NCAA 우승
* 요즘 여러분들이 대학 농구에 대해 올려 주시는 것에 고무돼 이틀 동안 느슨하게 썼습니다. 오탈자나 틀린 것들도 있을 테니 이해하시고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