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날새📢.하나님은 날마다 새 일을 하신다.아멘)
늦은 새벽에 눈이 내렸습니다. 운전도 걸음마 배우는 아기 처럼 하셔야 하고 또한 걸어야 할 것 같은 2월 7일, 금요일입니다. 하날새의 말씀은 시편, 칠십 사편, 1절, 2절 말씀입니다.
1절 :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2절 :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아멘
'버림받은 자의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붙들겠습니다.
유기견이라는 말은 버려진 개라는 말입니다. 반려견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유기견이라는 말도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도, 떠돌이 개, 들개, 주인 없는 개라는 말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버린 개는 없었습니다.
개를 반려견이라는 부르는 것은, 개를 자신의 인생 동반자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개를 반려견이라 부르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반려견이라 부를 정도로 애지중지했던 그 반려견을 버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이해를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길을 잃어 미아가 되는 아이는 더러 있지만, 멍청한 댕댕이가 아닌 다음에야 집 근처에서는 자기 집을 찾아오지 못할 댕댕이는 없습니다. 아파트 같은 경우에는 댕댕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살던 집을 찾아 올라올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파트 울타리 안까지는 찾아옵니다. 주인이 있음에도 떠돌아다닐 댕댕이는 없습니다. 그런데 떠돌아다니는 댕댕이가 있다는 것은 대부분 유기견인 것입니다. 즉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댕댕이인 것입니다.
지난해 가을이 시작될 즈음의 어느 날, 노란 조끼를 입은 작은 댕댕이가 산 밑에서 배회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라'하고 손짓을 했더니, 경계심도 없이, 아장아장 내 앞에 걸어왔습니다. 등산 가방 안에는 비상용으로 넣고 다니는 건빵이 있었기에 주었더니 스스럼없이 잘 받아먹었습니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은 것을 보니,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던 댕댕이가 틀림 없었습니다. 그리고 새것같은 예쁜 조끼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마지막 작별하기 전에 댕댕이를 버리면서도 추울까봐 댕댕이에게 새 노란 조끼까지 입혀서 버린 것 같아 보였습니다.
버림받은 이 댕댕이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무슨 말을 하였을까요? "주인님!,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더니, 왜 나를 이렇게 버리셨나요?"하고 물을 것 같습니다.
시편의 성도도 "하나님이여, 왜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를 버려 주십니까?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들을 향하여 불같이 화를 쏟으십니까?" 하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으면서 또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옛적부터 주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백성을 사신 것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구원하신 백성을 기억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병으로..., 경제적인 궁핍함으로..., 또는 가족들로부터 상처를 오랫동안 받고 있을 때는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녔는데 생각지도 못한 역경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만 같다는 생각이 사로잡아 나를 끌어내릴때는, 이것이 더 나를 괴롭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선 것입니다.
웅덩이 물은 누가 손대지 않고 가만두면 거울처럼 맑습니다. 그런데 미꾸라지 한 마리가 웅덩이 밑에서 기어 나와 휘젓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뒤이어 두 마리, 세 마리..., 결국 웅덩이는 진흙탕 물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린 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래 맞아, 내가 하나님 앞에 버림받을 것밖에 한 것이 없어"라는 생각이 들게 되면서, 내 안에 숨어있는 미꾸라지가 자꾸만 올라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도 할 용기도 나지 않게됩니다. 마침내는 '나는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아 마땅해' 하면서 믿음까지 포기하게도 됩니다.
이렇게 낙심될 때에는 나를 내려다보면 안됩니다. 나의 억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올려다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쓰고 갈고닦고 씻기고 벗겨서 고칠 수가 있었다면..., 더욱이나 죄를 청산할 수가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에 사람으로 보내어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하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려서 고쳐질 인간이 아닙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고, 광야의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어마 어마하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다하여 고쳐질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십계명을 돌비에 새겨 주시면 그 계명을 잘 지켜서 의로워질 인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지 않고는 죄인의 죄를 해결할 수가 없으신 것을 하나님은 아셨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내가 불이나게 두들겨 맞으면 하나님의 분이 풀리시려나 하는 생각도 잘 못입니다. 하나님의 분이 풀리시려면, 나의 목숨을 천만 개 드려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진노는 그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전부다 풀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십자가뿐입니다. 나를 생각지 말고 십자가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붙들라고..., 그리고 세상의 줄을 놓으라고 고난을 주십니다. 그 고난이 오래간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세상 줄을, 몇 가닥 놓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는 믿음의 기초이며 반석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십자가가 주신 소망이 아니라면 헛된 소망입니다.
십자가는 나의 죄와 허물까지도 다 용서하시고 품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겠다는 더하기 표이기도 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다른 기도는 하지 않으렵니다. 죄문제 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우리 마음까지도 십자가로 붙잡아 주시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