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하게 생활하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여 387년에 세례를 받았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며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면서
참회의 자서전인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 세상을 떠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보며 불행하다고 선언하신다.
이들은 회칠한 무덤처럼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면서 오히려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
(마태 23,27-32)
어제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호되게 나무라십니다.
겉과 속을 달리하며 사는 그들의 모습을 두고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지행일치(知行一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언제나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다’라는 것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과 통합니다.
대체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행동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에는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지만,
정작 자신이 행동으로 옮길 때에는
짐짓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할 때가 많지요.
우리는 그럴 때 참 많은 갈등을 겪습니다.
신행일치(信行一致), 곧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나약한 인간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한결같지 못한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노력하고 애쓰는 모습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었을까?
그들의 위선 때문이다.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한다.
겉으로는 아름다워 보이나 속은 썩은 시신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위선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다.
우리는 어떤가?
겉으로 우아해 보이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가?
그런데 우리의 속은 썩을 대로 썩었다.
거짓과 위선으로 회칠한 무덤처럼 썩었다.
위선이란 생각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생각으로는 의로움을 추구하지만 행동으로는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위선자들은 의인의 묘를 꾸미면서도 예언자를 죽인다고 했다.
우리는 어떤가?
겉으로 훌륭한 신앙인처럼 보이려고 얼마나 애를 쓰는가?
그런데 우리의 행동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고 있다.
거짓과 위선으로 우리의 조상들처럼 예수님을 죽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