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복래의 人香萬里 ➑ 사랑의 초상, 모딜리아니와 에비퇴른
어린 마음에 묘한 흔적 남긴 한 장의 그림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잡지에서 본 그림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표지를 장식한 여인은 크게 왜곡된 얼굴이었다.
텅 빈 눈동자와 비정상적으로 긴 목.
그 낯설고도 생경한 모습에 의문과 놀라움이 뒤섞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름다움과 기이함을 동시에 품은 그 여인의 모습은 시인 노천명의 <사슴>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그렇게 오래전 한 장의 그림이 어린 내 마음 한켠에 묘한 흔적을 남겼다.
당시에는 그 그림이 누구의 작품이고,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이탈리아 출신의 요절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의 작품임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의 그림에 담긴 사연을 알아갈수록 내 가슴은 먹먹해졌다.
모딜리아니와 부인 잔 에비퇴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알게 됐기 때문이다.
모딜리아니의 독특한 예술세계..텅빈 눈동자와 긴 목
모딜리아니의 작품 세계는 독특하다.
그는 주로 파리 뒷골목의 가난한 사람들과 여인들을 모델로 삼아 초상화를 그렸다.
그림 속 인물들은 늘 길고 우아한 목을 가지고 있었고,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그는 ‘파리의 귀공자’로 불릴만큼 꽃미남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작품은 생전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늘 가난에 허덕이며 작품을 팔아 겨우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눈동자를 그리게 한 애절한 사랑, 에비퇴른
모딜리아니의 삶에서 가장 비극적인 아름다움은 그의 부인 잔 에비퇴른과의 사랑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어릴 적부터 병약했던 그는 가난과 질병, 그리고 외로움 속에서도 오직 예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런 그가 에비퇴른과 첫 눈에 사랑에 빠졌지만 그들의 관계는 가난과 사회적 편견, 그리고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그럼에도 에비퇴른은 끝까지 남편 곁을 지키며 헌신적인 사랑을 보였다.
어느 날 그녀가 물었다.
“당신의 그림 속 얼굴에는 왜 눈동자가 없나요?”
모딜리아니는 잠시 침묵한 뒤 대답했다.
“당신의 영혼을 모두 알게 된 후에 그릴 거예요.”
짧게 표현했지만 단순한 설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예술적 변화를 알리는 신호였으며,
사랑을 통해 예술이 더욱 깊어지고 진실된 감정을 표출할 것임을 예고하는 메시지였다.
실제로 모딜리아니의 후반기 작품, 특히 에비퇴른의 초상화에는 눈동자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목적은 단순히 그림을 완성하려는 욕망이 아니었다.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그들의 결합이 얼마나 특별한 지를 알리는 신호였다.
나아가 부인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그녀와의 정신적인 유대가 이뤄졌음을 의미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닌게 아니라 모딜리아니는 그녀의 영혼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사랑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가 에비퇴른을 단순히 아내로서가 아니라,
영혼의 깊은 교감을 나누는 동반자로서 바라보고 있음을 나타낸 증거일지 모른다.
불꽃처럼 타오른 모딜리아니와 에비퇴른의 비극적 사랑
이처럼 모딜리아니 부부는 가난과 질병, 그리고 사회적 편견 속에서도 서로를 떠나지 않았다.
서로에게 헌신하고 사랑했지만, 세상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결국 모딜리아니는 36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과 알코올 중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남편의 죽음을 견디지 못한 에비퇴른도 이틀 후 창문에서 몸을 던졌고, 당시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의 사랑은 짧았지만 불꽃처럼 타오르다 비극적으로 끝을 맺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이야기는 사랑과 예술, 그리고 비극의 상징으로 우리 기억속에 오래 남아 있는 것이다.
"빛을 향해 산 화가“ vs ”사랑에 헌신한 동반자"
모딜리아니는 사후 약 10년이 지나서야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이제 현대 미술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지만, 생전에 겪었던 고난과 비극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모딜리아니와 에비퇴른은 파리의 묘지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비문에는 두 사람의 삶과 사랑이 새겨져 있다. 모딜리아니의 비문에는 "진정한 창조자, 그는 빛을 향해 살았다.",
에비퇴른의 비문에는 “극단적인 희생에 헌신한 동반자”라고 쓰여 있다.
시인 앙드레 살몬은 그녀를 성모 마리아에 비유했다.
한 잔의 콜라 마시듯 쉽게 만나고 이별하는 세태에 경종
모딜리아니 부부의 헌신적이고 아가페적인 사랑과 삶은 시대를 초월해 오늘날까지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애정을 넘어 서로에 대한 존경과 이해, 영혼의 깊은 교감을 나누는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보여준다.
목이 긴 여인의 초상화로 남은 에비퇴른의 모습은 단순한 예술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고통과 고독의 그림자를 딛고 예술과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두 사람의 헌신과 애절한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비록 비극적인 결말로 끝을 맺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작품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특히 비어 있는 눈동자는 단순한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그들이 겪은 내면의 공허함과 아픔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한 잔의 콜라를 마시듯 너무나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오늘날의 세태를 돌아보며,
그들의 헌신적이고 깊은 사랑은 더욱 큰 감동을 선사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특히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삶의 진정성과 헌신의 가치를 다시금 일깨운다.
한 폭의 초상화처럼,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영원히 남아 삶과 사랑의 본질을 묻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맑은뉴스(https://www.ccn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