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버지는 공군 대위로 전역하고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여 차장으로
고속 승진을 했다. 당시 대졸 초임이 2만 원일 때 자신은 15만 원을
받았다.
좋은 직장을 퇴사하고 아들 둘, 딸 셋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인 큰아들이 교도소에 가게 되었다.
자식을 잘 키우겠다고 이민 왔는데 아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고,
미국 아이들에게 놀림감이 되었다. 그 때마다 아들은 폭력으로 반격을
가했고, 이 때문에 교장에게 여러 차례 불려가 체벌을 받았다.
불만이 쌓인 아들은 어느 휴무일 이틀 동안 다른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학교에 들어가 건물 이곳 저곳을 파괴하여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지역신문 1면에 났고 온 가족은 학교의 좁은 응접실 구석에
모여 앉아 통곡했다.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했다.”는 비난은 기본이었고, 등교나 하교 때 “그 집을
피해 가라.”는 한인들도 있었고, “같은 교육구 학교에 내 아이를 보낼
수 없다.”고 전학을 시키는 부모도 있었다.
나이 젊은 어떤 한국인은 면전에서 “당신 자식 교도소에 갔다며?” 하고
빈정거리며 말했다. 겨우겨우 다니던 교회에서 조차도 신자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아 출석을 끊었다.
교장은 “세상에 이렇게 학교 건물을 때려 부순 사건은 처음입니다.
카운티(County:자치주) 내의 어떤 학교에도 전학이 불가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아들 죄가 바로 내 죄'라 생각하고 속죄를 위해 매주 주말에
온 가족을 동원하여 학교 청소를 하겠다고 했고, 교장은 '별난 아버지'
라는 표정으로 허락했다. 이 별난 행동은 나중에 다시 한 번 플로리다주
주류 사회를, 아니 전 미국을 흔들었다.
교도소에 간 중2 아들의 속죄를 위해 부부가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네 아이와 함께 주말마다 학교에 나와 청소하는 장면을 소개하면서, 운동장을
청소하는 광경을 AP통신 기자가 “가족의 명예와 아들을 위해 부모는 모른 채
하지 않았다.”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에는 “내 아들이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내 아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변상은 물론 어떤 일이든 하겠다.”라는 아버지의 말이 들어 있었다.
美 전역의 신문들이 AP통신 기사를 받아쓰면서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는 며칠
만에 수백 통의 편지가 왔다. 변호사비로 쓰라며 5불, 10불짜리 수표와 현찰을
동봉하기도 했다.
미국의 신문들은 아버지의 '아들 죄가 바로 내 죄'라는 고백을 들어 “미국인
부모들도 본받아야 한다.”라거나 “미국 교육계도 한국의 유교적 가족관계에서
이뤄지는 독특한 교육 철학을 배워야 한다.”라는 논지의 기사와 논평을 내보냈다.
며칠 후에 반가운 소식이 가족에게 전달됐다. 법정에서 아들을 사면한다는 소식
이었다. 교육청에서는 다니던 학교로는 되돌아 갈 수 없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학교에는 갈 수 있다는 서한도 보내왔다.
그 후 말썽꾼 아들은 성품이 변하여 센트럴 플로리다 대학교(UCF) 학사와 플로리다
텍(FIT)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미 우주항공국(NASA) 산하 방산업체에 근무하며 고위
우주선 탑재 전문가가 되었다.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 수십 명이 달라붙어 점검하는데 그 가운데 최고참으로
일하고 있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오는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
들에게 직접 브리핑하는 유일한 한국계라고 한다.
이것은 '기름때 묻은 원숭이의 미국 이민 이야기'라는 책을 쓴 아버지 송 석춘씨
이야기이다.
큰아들 송시영 씨가 사고를 쳤을 때만 해도 “아이고 저놈이 자라서 뭐가 될까?”하고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지금은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를
시도 때도 없이 함께 가 준다고 한다.
선 트러스트 은행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큰딸도 명절 때마다 제법 큰 용돈을
보내주고 있다고 한다.
한 아버지의 아들을 대신한 속죄(贖罪)로 사고뭉치 아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자녀들 모두 스스로 제자리를 찾아 우뚝 일어선 아름다운 가정사 이다.
이 이야기의 요지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의 죄에 대한 대신 속죄가 달성한 좋은
결과이다. 또 하나는 죄는 속죄해야 하고 그 속죄는 올바름을 회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의 죄에 대한 의식은 어떠한가? 거짓말, 사기, 도둑질,
폭력, 살인, 강간, 혼외 간음, 모든 법을 어기는 일에 대해 죄의식이 과연 있을까?
여러 경로의 조사 연구에 의하면 사람들은 죄의식에 대하여 대부분 무감각하다고 한다.
중죄를 범하고도 발각되지 않으면 처벌 받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수단을 다하여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며, 오늘날 사법제도 또한 사회 정의를 구현하기는 매우 힘들다.
사법제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도덕적 의식과 양심을 신뢰할만한 근거나 증거를
명확히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법의 적용하는 기준이나 사례는 언제든지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과 모든 생명을 존재케 한 분께서는 “나는 여호와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말라기 3장 6절)고 그분의 표준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인간들에 대하여는 그분은 “너희는 말한다. ‘하느님을 섬겨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만군의 여호와에 대한 의무를 지키고 그분 앞에서 침울하게 걸은
것이 무슨 이득이 있는가? 이제 보니 주제넘은 자들이 행복한 것 같다.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 성공한다. 그들이 감히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무사히 지낸다.’”
(말라기 3:14, 15)고 그분의 예언자 말라기를 통해 기록해 두었다.
사람들의 법과 기준은 여기 저기가 다르고 시대와 세월에 따라 언제나 변한다.
그래서 죄의식이나 죄에 대한 개념이나 양심, 정의도 변하며 도덕적 양심도 명확한
잣대가 없고 개개인의 측도도 매우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 정도는 아무 죄의식이 없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자녀가
누가 전화로 네 아버지를 좀 바꿔 주라고 할 때에 자녀가 수화기를 두고 아버지에게
가서 전화 왔다고 할 때에 아버지가 없다고 하라면 자녀는 아버지의 시키는 대로
거짓말을 해 왔다면, 그는 거짓말에 대해 죄의식은 눈금만금도 없을 수 있다.
그처럼 죄의식의 측도에 따라서 인간의 양심이라는 측도는 대단히 가변적이다. 오늘날
드라마나 모든 문화에 나타나 있는 도덕적 의식은 매우 낮은 수준이고 모든 것이 허용
되는 양심이 대단히 가변적 시대에 모두는 살고 있다.
위의 어느 아버지의 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한 사례가 그 사회의 반향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아들의 성품도 변하여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러므로 죄의식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행동은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고 인간관계와 사회를 평화롭게 해
준다.
그렇지만 죄는 어떠한가? 1세기의 사도 바울은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고 했다. 너무
충격적으로 들리는가? 사실 인류가 결국 죽게 되는 원인이 인류의 창조주에 대한 범죄
임을 사도 바울은 말한 것이다.
바로 이 범죄에서 석방될 수 있는 방법이 앞서 예를 들었던 실화처럼 대속(代贖)이다.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여 아들을 변화시켰고 그 사회로부터
긍정적인 호응을 얻었듯이 하느님의 공의의 표준은 생명은 생명으로 대속해야 한다.
그 공의의 대속을 위해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과 교환하는 대속물(代贖物)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장 45절)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분의 대속마련이 인류에게 적용될 때에 인류는 죄에서
석방될 것이며 죽음에서 해방될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는 성경에서 알려주는 대속의 마련에 대하여 더 알고
싶은 분이 있다면 이 필자가 다음 기회에 올리는 글과 본인이 직접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진지한 추리를 해보고 의문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댓글로 제안한다면
같이 연구해 보기를 원한다.